제3강의 대속적 고난의 신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바치는 보속기도
사랑하올 예수님,
저는 당신 뜻 안으로 들어가서
지고하신 옥좌 아래 꿇어 엎드리나이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온 인류 가족의 이름으로,
그들이 단일한 일점에 모여 움직이고 있는 듯한
이 하느님 뜻의 무한성 안으로 들어가서,
모든 이를 대신하여 주님을 경배하며,
저희 모두가 창조주께 마땅히 바쳐야 할 모든 흠숭을 드리나이다.
저는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와서
주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승복하며,
모든 조물을 대신하여 주님께
사랑과 찬미와 찬양과 감사를 드리나이다.
또한, 당신 뜻의 거룩함 안으로 들어가서
모든 사람들과 멸망한 영혼들까지 대신하여
보속과 사랑을 드리고자 하나이다.
그리고, 당신의 거룩하신 뜻 안에서
저 자신을 많아지게 하여 각 사람 안에서
그들 모두를 제 안에 빨아들이겠나이다.
그들이 마치 오직 한 사람인 것처럼,
그 모두의 이름으로,
다만 사랑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을, 영광과 보속과 감사를
거룩한 방법으로 당신께 드리기 위함이나이다.
저의 사랑이시여, 이와 같이 당신 뜻 안에서
각 사람의 생각과 각각의 눈길과 말과 일과 발걸음을 향하여 날아가서
그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서 행해진 것처럼
당신 옥좌의 발치에 두겠나이다.
누군가가 이런 저를 거부하면
그 사람 대신 제가 그렇게 하겠나이다.
그리하여 제 입술의 움직임으로 모든 이의 입맞춤을,
제 팔로 모든 이의 포옹을 당신께 가져 가겠나이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중 어떤 것이 빠져 있다면
당신께서 흡족해 하시지 않으리니,
저는 어떤 행위든지 다 보속하고자 하나이다.
오 제 생명이신 예수님,
이 보속에 당신 강복의 도장을 찍어 주시고,
제가 하는 행위마다 거듭거듭 증가하는 끝없는 행위가 되게 하시어
땅에서 하늘로 날아다니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랑과 영광과 보속을 모든 이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당신 대전에 가져 가게 하소서. 아멘.
제3강의 대속적 고난의 신비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이사 53, 5-6)
루이사의 책을 사전 지식이 없이 대하는 이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과 계속적인 고난,
성부의 의노, 징벌, 십자가에 대한 사랑,
루이사가 산 희생 제물로 함께 고난을 나눔,
예수님과의 신비적 결혼, 많은 입맞춤,
하느님의 뜻(의지) 안의 삶에 대한 놀라운 표현 등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대속적 고난의 신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1일 예수님의 대속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로마 4, 25)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콜로 1,2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
(사도 13,38-39)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의 예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희생된 어린양과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바치던 희생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 죽음의 재앙을 면하였습니다(출애굽기 12장).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제물을 바쳤습니다(레위기 4-5장).
세례자 요한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부르신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시기에 하느님 앞에서 온 인류를 대신하여 자신을 속죄의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생애를 통해 우리의 모든 것을 보상하셨고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고난이 거룩하고 감미로운 것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3-20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 더욱 충실하게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언제나 내 마음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4-106 내 수난의 첫째 목적은 영광과 찬미와 영예와 감사와 보속을 하느님의 신성에
바치는 것이다. 둘째 목적은 첫째 목적을 이루기에 필요한 모든 은총과 아울러 영혼들의 구원을 얻는 데 있다.
4-175 내가 이 가시관 고통을 받고자 했던 것은 (사람들이) 생각으로 범하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적 지성과 인간적 지성을 하나로 결합하기 위해서였다.
5-20 (내가 가시관을 쓴) 이유 중의 하나는, 통치와 지배력의 회복으로 은총의 새 하늘과 진리의 새 땅이 인간 정신 안으로 스며들게 하는 일을 내 머리가 해야 했고, 또한 혹독한 고통이 될 정도로 깊어진 죄의 새 지옥도 몰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온 인류 가족에게 영광과 영예와 존귀의 관을 씌워 주고 싶었던 것이다.
4-183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고통과 학대에 처해 있었을 때,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았고 사랑하올 내 아버지에게서마저 버림받았다.
1-68 나의 모든 기쁨과 행복을 벗어던지고 나의 모든 선과 모든 천상적 위로를 포기하고 사람들의 모든 불완전을 입음으로써 그들에게 나의 영원한 행복과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주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 영원한 사랑이 엄청난 배은망덕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오, 인간의 완고함과 사악함이 나를 얼마나 괴롭혀 왔는지!
4-140 매사에 있어서 신성이 인성을 이끌어 간다는 것과 신성은 우리 각자가 평생토록 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을 단 한 순간에 이룰 수 있고 (그보다 더 많이)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신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역사하고 있었으므로, 복되신 예수님께서는 전 생애에 걸쳐 모든 사람을 전체적으로 또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보상하셨고 각자가 하느님을 향해 마땅히 해야 하는 모든 것을 (미리) 보상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각 사람을 대신해서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 감사와 보속과 영광을 드렸으며, 또한 각 사람 대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고난을 받으시며 기도를 바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각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성심에 의하여 이미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1-49
내가 지상에 오기 전에는
고뇌, 치욕, 고통, 가난, 질병 및 갖가지 고난의 십자가가
영락없는 부끄러움과 불명예로 .간주되었지만,
내가 다 겪은 후에는 그 모든 것이 나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 되었으므로,
그 모양을 바꾸어 감미롭고 즐거운 것이 되었다
6-84,2
내 인성 안의 신성은 인간이 끼치는 모든 모욕의
가장 깊은 심연 속까지 내려갔기에, 얼마나 하찮고 사소한 행위이건,
내가 신화․성화하지 않은 인간 행위란 도무지 없다.
6-109,2 “내 딸아, 나는 내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 고통의 목적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내 고통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겪으면서도 바로 그 고통 중에 감미로운 안식을 발견하였다.
6-109,3 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고통을 겪건 활동 중에 있을 때건 그들은 온통 현재 처해 있거나 행하고 있는 것에만 마음을 쓴다.
6-141,2 “딸아, 나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통의 일차적인 목적은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에 대하여 내 사랑하올 아버지를 흐뭇하게 해 드리는 것이었고, 그 다음 목적이 영혼들의 구원이었다.
6-144,2 “딸아,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들어올려지기를 원한 것은, 영혼들이 (원하는 대로의) 나를 만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6-144,3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가르침을 받을 필요를 느끼고 내가 스승이 되어 주기를 원하면, 나는 나 자신을 낮추어 그를 가르친다. 사소한 것들뿐만이 아니라 지극히 높고 고상한 지식도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주 많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6-144,5 또 병약한 사람은 의사인 나를 만나게 된다. 나는 그를 고쳐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질환에 다시 떨어지지 않게 할 확실한 약도 아울러 준다. 또 남들의 모함과 조롱에 시달리는 사람은 내 십자가 아래에서 그 모함과 조롱을 하느님의 영예로 바꾸어 그에게 되돌려 주는 옹호자를 만나게 된다.
6-144,6내 손발이 못박히기를 원한 것은 이 때문이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의 내가 되기 위해서였다.
8-27,2 “이것이 내 수난이 진행되는 동안 내 심장의 상태였다. 모든 인간의 삶이 내 심장 안에서 고동치면서 그들의 죄로 내게 죽음을 안겨 주고 있었지만, 그러한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내 심장은 사랑의 격렬함으로 그들 모두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고 있었다.
8-49,2 딸아, 나는 내 살이 찢겨져 조각조각 흩어지고 내 인성 전체에서 피가 흐르기를 바랐다. 그것은 흩어진 인성 전체를 재결합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내가 부활했을 때에는 내 인성에서 뜯겨져 나갔던 모든 것 곧 살과 피와 모발 중 그 어느 것도 흩어짐 없이 죄다 내 인성에 재결합되었다.
8-49,3. 이와 같이 함으로써 나는 모든 인간을 내 안에 결합시켰다. 그러므로 그런 후에도 인간이 나를 떠나 방황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그 고집스런 의지로 나에게서 스스로를 뜯어내어 결국 내 바깥에서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8-58,3 “딸아, 나의 사업들은 완전하다. 내가 젖먹이 아기로 오기를 원한 것은 유아기의 모든 희생과 작은 행위들을 전부 신성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아이가 죄를 짓기 시작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나의 유아기 안에 흡수된 상태로 있다.
9-25,2 내 고뇌의 시간 동안 인간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 무한한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숨어 있는 사랑이 불타는 못으로 나를 꿰뚫고, 불타는 가시관을 내 머리에 씌우고, 들끓는 쓸개즙을 마시게 하였다. 그리하여 내 인성은 그 숱한 종류의 순교적 고통을 동시에 다 견딜 수 없어졌으므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었고,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이렇게 부르짖을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만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9-25,3 수난 과정 전체에 걸쳐 겪었던 모든 것을 나는 동산의 고뇌 속에서 전부 겪었고, 그것도 더욱 격렬하고 더욱 고통스럽고 더욱 내밀한 방식으로 겪었던 것이다.
9-36,2 “딸아, 나는 특히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의 선종을 도와주려고 ‘동산’의 고뇌를 겪고자 하였다. 나의 고뇌가 그리스도인들의 고뇌와 얼마나 깊이 결부되어 있는지 잘 보아라. 그 노고와 슬픔과 번뇌와 피땀을. 나는 개개인 모두의 죽음을 느꼈다.
9-36,3 ‘동산’의 고뇌가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도움이었다면, 십자가의 고뇌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을 위한 도움이었다. 둘 다 고뇌이지만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동산의 고뇌는 슬픔과 두려움과 근심과 공포가 가득한 것이었지만 십자가의 고뇌는 평화와 차분한 고요가 가득한 고뇌였다.
9-36,4. 그런데 내가 ‘목마르다!’ 하고 외친 것은 모든 사람이 내 마지막 숨 안에서 그들의 마지막 숨을 거두게 하려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때문이었다.
10-43,8 나의 손발이 못박힌 그 외적 못박힘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느냐? 다만 세 시간이다. 하지만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이 못박힌 것과 아버지의 뜻에 내 뜻이 못박힌 것 - 이 못박힘은 내 온 생애 동안 지속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도 너는 나를 본받고 싶지 않으냐?
제2일 신비체를 통한 예수님의 고통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6-27)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영광을 누리지만 지상에서는 당신 신비체의 머리이시기에 당신의 지체들로 인하여 지금도 모욕과 고통을 당하십니다. 특히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말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성녀에게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 때문에 겪으시는 고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인간의 죄로 모욕과 고통을 당하심
4-63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분 안에 있기에
각 사람이 그분을 거슬러 저지르는 모욕을 전부 느끼셨다.
그리고 모든 이로 말미암아 전반적으로,
각 사람으로 말미암아 개별적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나의 죄를 감지할 수 있었고 그분께서 특히 나 때문에 받으신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1-20 네가 본대로 그들이 내게 한 모든 짓은, 그럼에도 대부분의 인류가 끊임없이 내게 저지르는 모든 모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고말고! 눈이 멀어 분별이 없어진 인류는 세속적인 것의 소용돌이에 빨려들고 말아서 단지 내게만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서로 그렇게 한다. 물질적인 부를 찾는 데만 급급하여 초자연적인 진리를 모조리 내던지고, 이로 인하여 온갖 도덕적인 타락의 진창 속에 빠져들면서도 그들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는 숫제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1-51 오, 영혼의 영원한 멸망이 예수님께 얼마나 큰 고통을 끼치는지를 세상 사람들이 안다면, 적어도 그분께서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드리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온갖 수단을 활용하여 영원한 멸망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1-20 오로지 나를 공경하는 것에만 마음을 쓰고, 나에 대한 끊임없는 모욕들을 보상하여라. 그리고 멸망으로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하여라. 부디, 마음이 미어지는 고통 속에 있는 나를 홀로 버려두지 말아라...!
1-65 네가 나의 열렬한 사랑에서 활동적인 사랑으로 넘어가기를 원한다면, 그렇다면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 끝없이 잠겨 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 안에 잉태된 각 영혼이 얼마나 많은 죄와 나약과 격정이라는 짐을 내게 가져오는지 생각해 보아라. 내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 각자의 짐을 떠안게 하였다. 그러므로 내 안에 그들의 영혼을 잉태한 나는 그들 각자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드려야 하는 고통과 보속도 잉태한 셈이었다.
2.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예수님의 고통
1-66 내 마음의 사랑을 쏟아 붓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에 이 사랑은 눈물로 바뀌고 만다. 그런즉 나의 사랑은 위로를 받지 못한 채 홀로 버러져 있을 뿐만 아니라 비웃음과 업신여김과 모욕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3-78 예수님께서 징벌을 내리시지 않을 수 없을 때에 겪으시는 고통과 그 극심한 폭행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폭행을 당하시는 상태가 되는 것은 그분께서 징벌을 내리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내게 폭행을 가하는 것은 정의이다. 그리고 더 큰 폭행을 가하는 것은 내가 인간에 대해 품고 있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내가 인간을 책벌할 때면 그것이 내 마음을 죽음의 골짜기로 데려가는 것이다.”
3-79 정의가 벌을 내리는 것도 질서에 속한 일이어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속성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 징벌 자체도 사람들에 대한 극히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3-86 이 통탄할 시대가 나로 하여금 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사람들이 교만으로 너무 부풀어올라서 각자가 마음 속으로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만일 그들 위에 징벌을 쏟아 붓지 않는다면 그들의 영혼을 해치는 셈이 될 것이다. 겸손의 유일한 양식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4-48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순교를 방불케 하는) 사랑의 고통이다.
1-69 내 사랑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시람의 마음을 정복하고자 한다.
6-36,9 내 딸아, 이 시대에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은총을 거부하고 있으니 이를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지 생각해 보아라. 하지만 나의 모든 위로는 사람을 도와주는 데에 있고 사람의 삶 전체는 하느님의 떠받침을 받는 데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의 떠받침과 도움을 배척하고 있다. 너는 내 고통에 참여하면서 이 쓰디씀을 맛보아라.
6-37,7 내 생명은 말과 업적과 고통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고통이다.”
3.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고통이
알려져야 한다.
1) 우리가 구원을 원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고통이 알려져야 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도 예수님과 루이사의 고통이 알려져야 한다(14.22,10,3; 19.26,7,11; 20.27,1,30; 22.27,7,1).
2)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고통은 예수님께서 수난 중에 사람들에게서 받으신 고통보다 월등 더 큰 것이었다. 그분은 이 고통을 인간의 내적 죄들에 대한 보속으로 겪으셨고, 그것도 증오가 아니라 더할 수 없이 큰 사랑으로 받으셨다 (12.19,2,4; 12.19,5,8; 12.19,6,4; 14.22,8,19).
3)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첫째 목적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데에 있었고, 그 다음 목적은 영혼들의 구원에 있었다(6.05,11,6).
4) 예수님께서「수난의 시간들」묵상에서 얻을 수 있는 크나큰 이익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다(7.06,11,9; 11.13,4,10; 11.13,7,6; 11.14,10월; 11.14,11,4; 11.14,11,6; 11.16,10,13; 11.16,12,9; 12.17,5,16; 12.18,7,12; 13.21,10,21; 22.27,6,17; 28.30,3,9).
5) (영적) 순례를 하면서 예수님의 고난 받는 사랑을 묵상하다보면 그분의 사랑과 선물로 충만해진다(11.16,4,23).
예수님은 영원으로부터 언제나 어디에서나 모든 피조물에게 똑같이 현존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고통을 받으셨다. 영원으로부터, 우리 주님은 우리 각자가 범한 모든 죄의 죄책감, 수치심, 벌을 우리 대신 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짐의 고통과 무게를 골고타의 십자가 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사신 당신 일생의 모든 순간에 견디신 것이다.
모범인물들의 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영원 속에서 겪으시는 당신의 고통의 신비를 알려 주셨다. 그 고통은 당신의 강생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성체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경자 콘치타 (Conchita)에게 당신의 내적 고통을 영혼들에게 알려주고, 사랑이 많은 관대한 영혼들로 하여금 당신의 성심을 위로하게 해 달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사도직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사도직은 말가리다 마리아(Margaret Mary)에게 계시되었던 내 성심에 관한 일을 계속하고 완성한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나의 외적인 십자가만이 구원의 신성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린 나의 성심에게로 영혼들을 이끌어 오기 위해서 이 십자가를 세상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도직이 해야 할 일의 핵심은 내 성심의 내적 고통을 알리는 것이다. 내 성심의 내적 고통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 나의 내적 고통이 내가 골고타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아픈 수난이다. 이 내적 고통은 더 강렬하고 오래가는 것이기 때문에 성체 안에서 신비적으로 영원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일러주거니와, 지금까지는 이 세상이 말가리다 마리아에게 알려준 내 성심의 사랑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외적으로 단순하게 상징들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내 성심의 고통을 알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전 세계를 통해서 신자들이 내 성심의 고통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 하고, 그 쓰라림의 깊은 바다 속으로 깊이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의 고통을 내 성심의 한없는 고통에 합치시켜야 한다. 신자들의 고통은 그냥 낭비되고 있다. 나는 신자들이 영혼에 유익을 얻고 내 성심을 위로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사도직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를 바란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자신들을 성부의 뜻에 맡겨버린 모범인물들은 성령으로 하여금 자기들을 영원 속으로 들어 올려놓게 해드렸다. 영원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고통 속에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영원이라는 차원에서, 이 모범인물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여 묵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앙으로 예수님이 고통 받으시는 바로 그 행위 자체 안에서 그분을 위로해 드린 것이었다. 복녀 디나 벨랑제 (Dina Belanger)는 기록했다.
그분은 수백만의 영혼들이 자신들의 멸망을 향해서 사탄의 뒤를 쫓아 달려가는 것을 내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그분도 그곳에 계셨는데, 소수의 충실한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고통을 받고 계셨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분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말씀드렸다.
“나의 예수님, 당신께서는 구원의 행위를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많은 영혼들이 멸망하고 있으니, 무엇이 부족한 것입니까?”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것은 열심한 영혼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제대로 나의 고통에 합치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받고, 내 죽음과 같은 고통 중에 나를 위로해 주려고 하는 영혼들에게는 아주 중대한 비밀을 위탁하여 맡긴다.”
예수님의 내적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모범인물들은 영원하신 성부께서 하느님의 정의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이 이처럼 최대의 고통을 받으시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님께서 가경자 콘치타에게 말씀하셨다.
“내 영혼의 수난은 나의 사랑하는 아버님께로 향하는 사랑이었다. 나의 뜻은 그분의 뜻 속으로 철저히 뚫고 들어갔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무서운 고통을 받고 내 생명을 내어놓게 될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복녀 디나(Dina)에게 그분의 고통에 깊이 참여하는 선물을 “내 잔의 선물”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분은 복녀에게 말씀하셨다.
“내 잔의 은총은, 성체 안에서처럼, 내가 너에게 주는 나의 진정한 현존이다.내가 이것을 너에게 이미 말해 주기는 했지만, 네가 다 이해하게 해 주지는 않았었다. 영성체 직후의 몇 분 동안에 네가 나를 실제로 소유하듯이 그렇게 너는 지속적으로 진정으로 나를 소유하고 있다. 나의 능력과 선함은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체 안에 나를 숨기듯이, 그리고 성작 안에 있는 포도주 속에 나를 감추듯이, 아무도 모르게 아주 내적이고 친밀한 은총을 통해서 나 자신을 너에게 주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죄든지 모든 죄를 다 보상하셨고, 그 보속을 거룩한 희생제사의 제단 위에 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수난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그만큼 그분의 성체적 삶에도 더 많이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체의 삶에는 슬픔이외의 다른 면도 있다. 거룩한 성체성사는 그 무엇보다도 첫째로 성부께 드리는 완전한 찬미이며 감사이다.
제3일 수난 묵상의 효과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에페 5, 25-27)
다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에 관한 묵상기도서를 집필한 루이사 피카레타가, 이 기도의 효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약속들을 별도로 옮겨 적은 것을, 그 일부만 발췌한 것입니다.
11-51 딸아, 내 수난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샘을 형성하고 있어서, 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샘도 더욱 확장된다. 그리고 샘솟는 물이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쓰이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의 샘도 그 사람 자신의 선익과 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쓰여진다.
사람들이 이 수난의 시간들을 가지고 기도할 때, 나는 이를 그들의 기도로 여기지 않고 내가 행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마치 내가 수난 중인 것과 같이, 나의 공로와 같은 공로를 그들에게 준다. 이와 같이,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의 지향에 따라 같은 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해 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그들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한 횟수만큼 사랑과 기쁨의 불화살을 쏘면서 내 앞에 자리하게 해 주겠다.
모든 복된 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참으로 달콤한 황홀이 될 것이다!
11-59 교회에는 대사(大赦)가 붙어 있는 기도들이 많은데 이 기도에는 어째서 그것이 없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루이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대사가 붙어 있는 기도를 바침으로서 사람들은 하나의 대사를 얻는다. 그 반면에,수난의 시간들은 나 자신의 기도요 보속이요 온통 사랑이기 때문에 내 성심 깊은 데서 솟아난다.
내가 너와 하나 되어 이 기도를 바치면서 얼마나 여러 번 세상에 내릴 징벌을 은총으로 바꾸곤 했는지, 너 혹시 잊어버린 것 아니냐? 그토록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는 기도인 만큼,나는 이 기도를 바치는 사람에게 하나의 대사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도록 무한한 가치의 부를 지닌 한 움큼의 사랑을 준다.
11-79 루이사는 수난의 시간들의 일부를 쓰면서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복된 수난의 시간들을 종이에 옮겨 적는다는 것이 내게는 기막힌 희생이다. 특히, 예수님과 나 사이에서만 일어난 어떤 내적 행위들은 글로 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니! 이 희생에 대해서 그분께서는 내게 어떤 상급을 주실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감미롭고 다정하신 음성으로,
얘야,수난의 시간들을 쓴 상급으로, 네가 쓴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한 영혼을, 한 번의 입맞춤을 네게 주마.하고 말씀하셨다.
루이사는,제 사랑이시여, 그건 제게 주실 상급이겠지요? 하지만 이 기도를 바치는 다른 이들에게는 무엇을 주시렵니까?하고 여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 이 수난의 시간들의 효과는 사람들이 나와 어느 정도로 긴밀히 일치하여 바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나와 같은 뜻으로 이 기도를 바친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발음하는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한 영혼을 주겠다. 또한, 나의 뜻과 하나 되어 이 기도를 바침으로써 그들은 나의 뜻 안에 숨어들게 되고, 나는 단 하나의 낱말로도 내 뜻을 펼쳐 내가 원하는 모든 선을 할 수 있다. 그것도 그들이 이 기도를 바칠 때마다 그렇게 할 작정이다.
이 시간들은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고귀한 기도이다. 내가 지상생활 동안 행했던 일과 지극히 거룩한 성사 안에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수난의 시간들에 대해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거기서 나 자신의 음성과 기도를 듣게 된다.
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 모든 이의 선익을 갈망하며 모든 이를 위하여 보속하고 있는 나의 뜻을 보게 되고, 그리하여 그 영혼이 행하고 있는 바를 나도 그 안에서 할 수 있기 위하여 그에게로 거처를 옮기는 나 자신을 느낀다.
오, 도시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바친다면 내 마음에 참으로 큰 기쁨이 일 것이다! 도시마다 나 자신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테니 말이다! 그러면 이 시대에 몹시 조롱 당하고 있는 나의 정의가 부분적으로나마 그 노여움을 풀게 될 것이다.
어느 날 루이사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무덤에 안장하시는 시간(=제24시간) 기도를 바치면서 극심한 비탄에 잠기신 어머니를 동정하며 끝까지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할 때마다 늘 그렇게 성모님을 동반하지는 않았으므로, 앞으로도 늘 그렇게 해야 할 지 어떨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딸아, 내 어머니를 기억하여, 나에 대한 사랑으로 언제나 그렇게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할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몸소 세상에 계시면서 당신 삶을 다시 살고 계시는 것처럼 느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머니께서 지상생활 동안 내게 주신 영광과 사랑을 받으시게 된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께서 다시 세상에 계시면서 어머니다우신 자상함과 사랑과 모든 영광을 내게 주시는 것처럼 느낀다. 따라서 나는 너를 어머니로 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루이사를 껴안으시면서, 내 엄마, 엄마. 하고 속삭이시는 것이었다. 이후부터 루이사는 예수님 은총의 도움으로 언제나 성모님과 일치하여 이 기도를 바쳤다
11-81 네가 내 수난의 시간들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내 기쁨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알면 참 좋겠다. 게다가, 늘 이 기도를 반복하다보면 너도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내 성인들은 내 수난을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극심한 고난을 받았는지를 깨달았고, 너무나 측은해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였으며, 내 고통에 대한 사랑으로 온 몸이 불타는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기도처럼 순서에 따라 지속적으로 반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너야말로 시간에 따라 이 기도를 바침으로써 나의 생명과 내가 겪은 고난으로 너 자신이 변화되는, 이 크고 특별한 기쁨을 내게 준 첫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너에게 나는 매우 강하게 끌림을 느끼기에 음식을 주고, 같은 음식을 너와 함께 먹는다. 또한 네가 하는 일을 함께 한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새로운 빛과 새로운 은총으로 풍부하게 보답해 주리라는 점도 알아 두어라.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나는 사람들이 땅에서 내 수난의 기도들을 바칠 때마다, 천국에서 너에게 늘 새로운 빛과 영광으로 옷 입혀 줄 작정이다.
11-82 루이사가 습관대로 수난의 시간들에 대한 묵상을 계속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아, 세상은 내 수난을 초래한 행위들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다. 나의 무한성이 모든 사람의 내부와 외부를 휩싸고 있고 따라서 그들과 맞닿여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접촉으로 말미암아 수난 때에 겪은 것들, 곧 그 못질과 가시관과 채찍질과 멸시와 침뱉음과 여타 모든 것을 겪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도 그 때보다 한층 더 심하게 겪고 있다. 그런데 누구라도 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하고 있으면, 이 기도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못과 가시들이 뽑혀지고 상처들이 아물고 침이 닦여지는 느낌이 든다.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게 저지르는 악이 선으로 바뀌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 기도와의 접촉이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기에 더욱더 의지하게 된다.“
그 후 복되신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시간들에 대하여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시간들을 기도하는 사람은 나의 생각과 보속과 기도와 열망과 애정을, 심지어 내 가장 내적인 본성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삼게 된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서서, 나의 사명과 같은 사명을 수행하는 공동 구속자로서, 나와 함께, 하느님, 당신 뜻을 이루려고 제가 왔으니, 저를 보내 주십시오(Ecce ego, mitte me).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당신께 보상하며 응답하고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하여 당신께 간구하나이다.하고 말한다.
11-132 루이사가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하고 있을 때, 복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딸아, 내가 지상생활을 하는 동안 수천 수만의 천사들이 나를 호위하면서, 내가 행하는 모든 것, 즉 나의 활동과 말과 심지어 탄식까지 그리고 나의 고통과 피를 방울방울 다 모았다. 그들은 나를 흠숭하며 내 모든 지시에 따르기 위하여 파견된 천사들이었으니, 내가 행한 모든 것을 아버지께 가져가려고 하늘로 오르락내리락 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 천사들은 지금도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나의 생애와 수난과 내 기도를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으면 그 사람 주위를 에워싼다. 그의 말과 기도와 눈물과 예물과 나에 대한 동정심을 모아서 나의 것들과 합하여 내 옥좌 앞으로 가져옴으로써 나 자신이 지상에서 보낸 생애의 영광을 새로이 하려는 것이다. 이 천사들은 매우 큰 기쁨에 싸여 그 사람의 기도소리를 들으려고 공손하게 기다리며, 함께 기도한다. 그러므로, 이 시간들을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을 집중하여 경건하게 기도해야 한다. 천사들이 그를 따라 하려고 주의를 온통 쏟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11-138 ... 나는 네가 나의 고통과 기도와 나 자신 전체를 네 것으로 삼기 바란다. 그러면 내가 네 안에서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크나큰 보상이 요구되는데, 나를 자기 자신으로 삼은 사람만이 그것을 내게 줄 수 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보신 것,
곧 영광과 기쁨과 사랑과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한 전적이고 완전한 보상을
이 영혼들 안에서도 보고 싶다.
같은 수의 예수들처럼 모든 이를 내게 데려오는 영혼들 말이다.
그러므로 너는 수난의 시간들 중 매시간 기도를 바칠 때마다 각각의 행위와 모든 것 속에서 이 지향을 반복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보상을 얻지 못한다면, 아, 이 세상은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징벌에 징벌이 억수 같이 쏟아질 테니 말이다. 그렇다, 얘야, 그렇다마다!
12-10 루이사는 어느 날 연옥 영혼들과 성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분께서는 연옥에 들어오는 모든 영혼이 수난의 시간들의 날인(捺印)을 지니고 있고 이 시간들의 도움과 호위를 받으며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시며 기쁨을 느끼십니다. 천국으로 날아가는 영혼들도 모두 이 수난의 시간 들의 동반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이 시간들은 천국에서부터 땅과 연옥과 하늘에까지 끊임없이 내리는 이슬이랍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이 시간들은 우주적인 질서이기에 하늘과 땅을 조화롭게 하고, 나로 하여금 세상을 멸하지 못하게 한다. 나의 피와 상처와 사랑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두루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할 때에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는 나의 피와 상처와 열망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면, 곧 내 생명이 거듭 재현되고 있음을 내가 느낀다면, 이 시간들에 의하여 무슨 선이든지 다 얻어 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의심을 품고 있느냐? 이 일의 성취는 너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너는 나약하고 유한한 도구일 뿐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2-55 루이사가 임종 중인 한 사람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며 기도하고 있는데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얘야, 너는 어찌하여 걱정하고 있느냐? 내 수난에 대해 기도하는 낱말마다, 생각과 연민과 보속과 내 고통에 대한 기억마다, 그 모든 것이 이 영혼과 나 사이에 전류처럼 흐르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야? 그것이 그만큼 많은 수의 온갖 아름다움으로 그녀를 단장한다는 것을? 이 영혼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한 것이니, 나는 내 피와 상처로 옷 입혀 주고 내 수난의 딸로 받아들인다. 너의 마음 안에서 피어난 이 꽃에 강복하여, 내 사랑하는 꽃으로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루이사의 가슴에서 꽃 한 송이가 나와서 그분께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1-12 마지못하여 한 일이라면 나는 아무 상급도 주지 않는다. 그러니 알아 두어라. 네가 나의 수난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너를 위해서 겪은 모든 것을 고요히 숙고하며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의 가치에 대한 생각이 나의 생각과 똑같이 될 것이다. 참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을 위해서라면 남김없이 모든 일을 하는 것임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격려에 힘입어 그분의수난에 대한 묵상에 전념하였다. 이것이 내 영혼에 많은 도움이 되었기에, 확실히 이 은총과 사랑의 원천에서 모든 선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7-63,2 “딸아, 내 수난에 대하여 끊임없이 묵상하며 가슴 아파하고 나를 측은히 여기는 사람은 내 마음을 무척 기쁘게 하기에 내가 수난의 전 과정을 통해 겪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위로를 받는 느낌이 된다. 5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끊임없이 내 수난에 대하여 묵상하는 일이다.”
제4일 고통에 대한 태도 - 산제물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콜로 1,24)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리 1,29)
하느님의 의지 안에 사는 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예수님과 하나되어 고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와 예수님의 말씀대로 고통을 감수하고 견디며 더 나아가 고통을 좋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특별한 은총을 주시며 원하시는 경우에는 자신을 산제물로 봉헌하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1. 고통을 감수하고 견디는 방법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하여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4-150 “삶은 어떤 때는 괴롭고 어떤 때는 위안을 주는 갖가지 사건들을 통해 지나간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아들으려고 하지않지만, 무릇, 바람이건 눈이건 우박이건 더위이건 군소리 없이 감수하는 초목과 꽃을 본받을 일이다.”
2-49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내 목마름을 풀어 줄 수 있는 것이다.”
4-59 고통을 (잘 견디는) 참된 방법은 그것이 누구에게서 오는지 또 어떤 고통인지를 보는 데 있지 않고 이 고통에서 나오게 될 선을 보는 데 있다. 이것이 내 수난의 방법이었다. 즉, 사형 집행자들이나 고통들을 보지 않고, 이 고통에 의하여 내게 그것을 끼치는 사람들에게 베풀게 될 선과 인류에게 오게 될 선을 보는 것이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면서 수난의 전과정을 온전히 지속시켰던 것이다. 내 딸아, 이것이, 인내심뿐만이 아니라 용감한 불굴의 정신으로 고통받기 위한, 가장 손쉽고 유익한 방법이다.”
2-69 언제나 내 수난의 빛을 마음에 간직하여라. 그렇게 나의 극심한 고통을 보노라면 너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1-20 네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마귀들에 의한 것이건 다른 사람들에 의한 것이건, 너의 더욱 큰 선익을 위하여 나의 안배에 따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1-18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주님의 더욱 큰 영광과 내 이웃의 선익을 위하여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 모든 고통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었다.
6-116,2 어떤 종류의 십자가(를 만나건) 내 수난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되면 그 쓴맛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그 무게도 반감된다.”
7-38,2 “딸아, 십자가는 보물이다. 그리고 이 귀한 보물을 넣어 둘 가장 안전한 장소는 사람 자신의 영혼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영혼이 인내와 맡김과 다른 덕행들로 이 보물을 받아들이면 안전한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8-26,2 십자가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알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내와 자기 포기로 지는 십자가이다. 인내와 자기 포기가 있는 십자가들에는 하느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을 싫어하므로 인내가 있다면 그것은 본성적인 것일 리가 만무하고 신적인 것이다. 십자가와 인내와 자기 포기는 오로지 은총과 사랑에 의해서만 맺어질 수 있는 열매들이다.”
9-24,2 “딸아, 인간적인 관점에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그것을 흐릿한 것으로, 따라서 더 무겁고 더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반대로, 신적인 관점에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그것을 빛이 충만한 것으로, 따라서 가볍고 감미로운 것으로 여긴다.
사실, 인간적 관점에는 은총과 힘과 빛이 없다.
2. 굴욕과 고통을 좋아하고 감사함
“내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여러분은 그것을 다시 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야고 1,2)
3-22“굴욕은 감수할 뿐만 아니라 좋아하기도 해야 하는 것으로서, 음식물을 씹는 것과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3-28 수모를 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고작 조금밖에 알지 못하게 되고, 결코 겸손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의상을 입고 내 앞에서 빛을 내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1-13 그 모든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을 다하여 내게 감사하여라. 그리고 나를 거슬러 저질러지는 죄들을 보속하기 위하여, 너의 그 모든 괴로움과 피로와 고뇌를 찬미와 보상의 제물로 내게 봉헌하여라.
6-60,6 너는 다만 육체적 고통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네가 겪어야 하는 영적 고통, 의지적 고통도 참된 고통으로 보아야 한다. 영혼이 참으로 고통받기를 원한다면 내게는 그가 이미 고통을 받은 것과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6-91,2,3 십자가도 씨앗이기 때문에 덕행들을 증식시키고 완성하며 놀랍도록 아름답게 단장한다. 그러니 더욱 많은 십자가들이 네 주위를 촘촘히 둘러치고 있을수록 그만큼 더 많은 덕행의 씨앗들이 네 영혼 속에 뿌려진다. 따라서 새로운 십자가가 네게 오면, 너의 월계관을 풍요하게 완성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씨앗을 얻은 것이라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대신 기뻐해야 한다.
8-64,1 그대가 고통을 높이 평가한다면 잘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3. 자신을 산 제물로 봉헌함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루이사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과 하느님 뜻에 보속을 바치기 위하여 고통을 받아야 한다.
하느님 뜻 안에서 행하는 루이사의 산 제물다운 전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신 내적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하느님 뜻 안에 있는 이들은 그들의 일과 기도와 고통들을 예수님께서 마음대로 쓰시게 해 드립니다(11.12,9,29).
1-27 자진해서 너 자신을 산 제물로 바쳐, 내가 인류에게서 끊임없이 받는 온갖 모욕을 보상하여라. 그렇게 하면 나로 하여금 사람들이 받아 마땅한 징벌을 거두게 할 수 있다.
2-45 “딸아, 영광스럽게 된 내 몸은 이제 고통을 받을 수 없기에, 내 수난을 계속하기 위하여 너를 쓰고 있다. 지상 생활 동안 내 몸을 써서 그렇게 했던 것과 같이, 내가 네 안에서 네 몸을 사용하여 수난을 계속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 앞에 보상과 속죄의 산 제물로 너를 바치고 있는 것이다.”
4-153 내가 고난을 받기 위해서 내 인성을 사용했던 것과 같이네 안에서도 나의 고난 과정을 계속하기 위해서 너의 인성을 사용하고 있다.
3-70 “오, 산 제물로 사는 이들의 능력이여! 그들은 우리 천사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그들의 고통으로 해 낼 수 있다! 오,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나오는 선을 안다면 왜냐하면 그들은 공동선과 개인적인 선을 위하여 존재하니까 이런 영혼들이 많아지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190 지금과 같이 교회와 사회에 큰 재난들이 일어나는 이 통탄할 시대에 나는 나의 자비를 드러내 보이고자 너를 지속적인 산 제물의 처지에 있게 한 것이다.
6-35,2 “피조물이 내 정의와 싸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나 산 제물이라는 명칭을 지닌 사람만은 내 정의와 싸울 뿐더러 더불어 경기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싸우거나 경기를 하다보면 타격을 입고 패배하거나 죽기 십상이지만, 산 제물이 된 영혼은 그 타격을 고스란히 받을 태세로 있으며, 자신의 죽음이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에 몸을 맡기며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선익을 위해서만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나(는 의노)를 진정시키고자 여기에 내 산 제물을 소유하고 있다. 이 사람은 내 정의와 싸우면서 자신 위에 떨어질 모든 격노를 받아낼 각오로 있는 것이다.”
6-73,3 이 시대에 인간이 내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와 기쁨은 나를 위하여 자원해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6-118,7 “나는 하늘과 땅 앞에서, 이 사람을 산 제물로 택한 것이 나의 뜻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그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나에게 봉헌함으로써 내가 그녀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내킬 때마다 나의 수난 고통을 나누게 하는 대신, 그녀로 하여금 내 신성에 접근할 허락을 주었음을 밝힌다. 또한, 이 ‘접근’을 통하여 그녀가 날마다 죄인들을 위해서 쉴새없이 내게 기도를 바침으로써 죄인들 자신의 선익을 위한 생명의 물줄기를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있음을 밝힌다.”
6-126,2 네가 내 고난의 짐을 함께 지고 있으니, 곧 내 구원사업에 동참하고 있으니, 구원사업의 보상도 나누어 받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와 너에게 우리 고통의 보수가 분배된 이상, 나는 내가 원하는 누구에게나 일반적이고도 특별한 모양으로 선을 행할 수 있고, 너 역시 당연히 받아야 할 그 보수로 네가 원하는 누구에게나 자유로이 선을 행할 수 있다.
6-130,2 사실 나는 모든 시대에 걸쳐, 내 창조․구원 사업 및 성화사업의 목적을 있는 힘을 다하여 어떻게든 온전히 내게 되돌려주는 영혼들을, 그리하여 내가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하며 성화하는 목적인 모든 선을 받을 수 있게 된 영혼들을 소유해 왔다.
6-130,3 이는 내 섭리와 정의와 사랑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거니와, 어느 시대에나 내가 모든 선을 함께 나눌 사람을 적어도 한 사람은 소유하므로 이 사람이 모든 인간이 마땅히 바쳐야 할 모든 것을 내게 준다는 것이다....나 역시 산 제물들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내 모든 선을 나누는 것이다.
6-133,4 “누구든지 내 어머니의 고통들에서 나온 공로와 선들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 먼저 하느님 섭리의 손안에 자리하면서고통과 불행과 질병과 모함 등 주님께서 안배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겪을 태세로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은 시므온의 예언으로 인한 (내 어머니의) 첫째 고통에 참여하게 된다.
7-81,3 모든 시대에 걸쳐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면해 주기 위해서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은 스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자진하여 그 자신을 바치기 마련인데, 그것도 다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 받기 위해서 바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구함을 받게 한다.
7-81,4 그런즉, 다른 모든 사람의 고통을 합친다고 해도 이런 사람의 고통과 대등할 수 없다. 그 뛰어난 가치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8-18,2 마침 올리브 동산에 계신 예수님과 일치해 있었으므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또 연옥 영혼들에게 그분의 피와 기도와 고통 및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선을 주었다.
8-61,6 너의 경우처럼 계약 은총의 영혼들에게는 내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수 없고 또 내 선물들도 주어야 하는 계약에 매여 있다. 8 네가 나를 믿고 맡김으로써 얼마나 어마어마한 이익을 내게 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8-63,3 나는 산 제물이 됨으로써 인간의 모든 행위들 보속 내지 보상 행위, 흠숭과 감사의 행위들을, 곧 그들이 하기로 되어 있는 모든 행위들을, 그들 각자와 모두를 위하여 대신 행하면서 내 안에 포함시켰다.
8-63,4 내가 너로 하여금 모든 사람을 각각으로 보상하게 해야 하므로 결국 너에게 오직 한 사람에게 주는 은총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는 것과 맞먹는 은총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내가 너에게 주는) 사랑 역시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내 사랑을 능가해야 한다.
9-18,6 나는 너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네가 언제나 나를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쉬기 위해서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찾을 때마다 또 인내하며 내 부재를 견딜 때마다 나에게 위안과 더 평온한 안식을 주는 꽃송이들로 나를 둘러싸는 셈이 된다.
9-23,5 잘 들어라, 딸아. 나는 네가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느끼기에 이를 정도로 네 영혼을 준비시켜야 했다. 그것은 너로 하여금 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9-26,2 딸아, 나는 특별한 방식으로 나 자신을 나누어 준 거의 모든 영혼들에게, 그들이 삶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버림받은 상태를 겪도록 허락해 왔다.
4. 산 제물의 조건
10-51,2 "딸아, 내가 바라는 것은, 첫째, 두 뜻의 결합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나의 뜻에 희생으로 바쳐야 하고, 내 의지의 위안이 되어야 한다.
10-51,3 둘째, 내 뜻과의 결합에다 '사랑의 산 제물'을 보태야 한다. 나는 모든 것을 질투한다. 사랑은 더 이상 그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사랑하는 이의 소유인 것이다.
10-51,4 셋째, '희생의 산 제물'. 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말이다.
10-51,5 여기에 '보속의 산 제물'도 보태야 한다. (사람의) 모든 (잘못)을 통회하고 보속하며 모든 것 속에서 나를 측은히 여길 일이니, 이것이 넷째 사항이다.
10-51,6 그녀가 이 점에서 충실하게 행동한다면, 그때에는 내가 그를 '희생의 산 제물', '고통의 산 제물', '용맹의 산 제물', '완성의 산 제물'로 받아들이겠다. 그녀에게 충실하라고 권고하여라. 충실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들 안에 특히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구속적인 고통 중에 있을 때이다
(11.13,3,24; 11.15,7,25; 11.15,10,25; 11.16,12,30; 11.17,2,2; 12.17,10,8; 15.23,3,23; 21.27,3,22; 23.27,11,6).
기쁨은 예수님과 일치하여 고통 받는 사람의 확실한 표지이다
(3.00,5,1; 5.03,3,19; 6.04,3,16; 6.05,5,20; 7.06,6,20; 11.12,2,14).
관련이 되기는 했지만, 신비적 강생이나 거룩한 대리와 신비스런 결혼 사이의 둘째 차이점은 영혼 안에 예수님의 현존의 충만함에 관한 것이다. 신비스런 강생이나 거룩한 대리에 있어서는 영성체를 했을 때가 아니라도, 영혼 안에 예수님이 “참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빵이라는 부수적인 속성 안에 축성된 성체 안에서 다스리시는 것과 똑같이, 신비스런 강생이나 거룩한 대리라는 선물을 받은 영혼들 안에서도 다스리신다. 물론 이런 때, 영혼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능력을 그대로 다 소유하고 있다. 성체 안에서는,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인간적인 의지가 함께 존재한다.
신비스런 강생의 선물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뜻이 하나의 인간 존재인 영혼의 인간적인 의지와 협력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안에서 하셨던 것과 같은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다, 인간의 뜻이 매 순간 자유롭게 하느님의 뜻에 동의하고 복종한다. 그러나 성령님께 자신을 완전히 승복하여 내어 맡긴 영혼의 경우에는,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거나 죄를 범할 가능성이 죽을 때까지 남아있다.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복녀 디나 벨랑제, 그리고 가경자 콘치타 드 알미다의 글들은 모두 다 자신들 안에 예수님이 “참으로 현존”하셨고, 이 현존은 그들이 예수님의 내적 고통에 참여하는 것과 끊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경자 콘치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갈바리의 십자가 위에는 세 시간 동안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십자가 위에는 내 일생 동안 매달려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 마음의 내적 고통이 영광받기를 원한다. 나의 강생으로부터 갈바리에 이르기까지 당한 고통, 그리고 성체성사로까지 신비스럽게 연장된 고통이 공경받기를 원한다. 이 세상은 아직까지도 이런 고통들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분명히 말하거니와, 내 강생의 첫 순간부터 십자가는 이미 내 마음속에 세워졌고, 그 무게로 내 마음을 짓눌렀고, 그 가시로 내 마음을 꿰뚫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내적인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새롭고도 거룩한’ 영성”의 다만 한 가지 단면이다. 다른 면은 영혼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미리 “살아가도록”(에페 2,10) 준비해주신 길을 따라 완전한 사랑으로 하는 선행에 참여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의하면,
“성찬전례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분 신비체의 지체들의 제사도 된다.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그것들과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봉헌과 결합되며,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68)
그러니까, 성령께서 영혼에게 예수님과 함께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영혼들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라고 영감을 주고 부추기는 완전한 사랑의 행위는 성체성사 안에도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내적인 고통과 속죄의 행위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거룩한 대리 상태에 있는 영혼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설명한 신비스런 결혼 상태에 있는 영혼보다 훨씬 더 많이 예수님이 자신 안에 계시게 해 드리고 또 자신을 통하여 일하시게 해 드린다.
5. 예수님의 삶의 영원한 실재 (Reality)
예수님의 삶의 영원한 실재라는 신비는 “‘새롭고도 거룩한’ 영성”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된다. 예수님께서 가경자 콘치타(Conchita)에게 말씀하셨다.
“내 안의 모든 것은 현재(지금 있는 것, 現在, 現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안의 모든 것은 존재한다. 있었기만 하거나 있을 것만이 아니라, 가장 단순하고도 무한한 일치의 존재를 통해서 있고, 언제나 있다. 하느님께는 지나가는 것으로서의 창조, 강생, 구원, 영광, 그리고 부활도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지나간 것이 아니고 현재하는 것이다. 현재에도 작용을 하고 있고, 언제나, 항상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다.”
이 진리(진실, 사실)는 2000년 전에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 어떻게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인간에게 인격적으로 자신을 일치시켜 주실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이 진실은 또한 왜 거룩한 성체에 “세상 창조이래... 살해된 어린 양”(묵시 13, 8)이신 예수님이 단 하나이요 영원한 희생제물로 언제나 “현존” 하실 수 있는지도 설명해 준다.
예수님은 영원으로부터 언제나 어디에서나 모든 피조물에게 똑같이 현존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고통을 받으셨다. 영원으로부터, 우리 주님은 우리 각자가 범한 모든 죄의 죄책감, 수치심, 벌을 우리 대신 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짐의 고통과 무게를 골고타의 십자가 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사신 당신 일생의 모든 순간에 견디신 것이다.
모범인물들의 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영원 속에서 겪으시는 당신의 고통의 신비를 알려 주셨다. 그 고통은 당신의 강생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성체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경자 콘치타(Conchita)에게 당신의 내적 고통을 영혼들에게 알려주고, 사랑이 많은 관대한 영혼들로 하여금 당신의 성심을 위로하게 해 달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사도직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사도직은 말가리다 마리아(Margaret Mary)에게 계시되었던 내 성심에 관한 일을 계속하고 완성한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나의 외적인 십자가만이 구원의 신성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린 나의 성심에게로 영혼들을 이끌어 오기 위해서 이 십자가를 세상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도직이 해야 할 일의 핵심은 내 성심의 내적 고통을 알리는 것이다. 내 성심의 내적 고통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 나의 내적 고통이 내가 골고타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아픈 수난이다. 이 내적 고통은 더 강렬하고 오래가는 것이기 때문에 성체 안에서 신비적으로 영원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일러주거니와, 지금까지는 이 세상이 말가리다 마리아에게 알려준 내 성심의 사랑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외적으로 단순하게 상징들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내 성심의 고통을 알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전 세계를 통해서 신자들이 내 성심의 고통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 하고, 그 쓰라림의 깊은 바다 속으로 깊이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의 고통을 내 성심의 한없는 고통에 합치시켜야 한다. 신자들의 고통은 그냥 낭비되고 있다. 나는 신자들이 영혼에 유익을 얻고 내 성심을 위로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사도직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를 바란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자신들을 성부의 뜻에 맡겨버린 모범인물들은 성령으로 하여금 자기들을 영원 속으로 들어 올려놓게 해드렸다. 영원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고통 속에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영원이라는 차원에서, 이 모범인물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여묵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앙으로 예수님이 고통 받으시는 바로 그 행위 자체 안에서 그분을 위로해 드린 것이었다.
제5일 미사 성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루카 22,19)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1코린 10,16)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정하신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미사 성제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신비적으로 재현합니다. 특히 그분의 수난과 부활을 재현합니다. 따라서 미사의 원집전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를 도구로 쓰시어 당신이 미사 성제를 집전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성체성사를 포함해서 모든 성사들을 뛰어넘는 성사이고 하느님의 뜻이 영혼에게는 세례성사보다 더 우월한, 새로운 세례입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된 성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뜻의 성체들을 기르시려고 성체들 안에 실재하십니다.
1. 예수님 삶의 재현인 미사
3-84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기까지 나는 내 지상 생애 전체를 끊임없는 희생제사로 바쳤을 뿐더러, 성체성사를 통하여 나 자신을 영구적인 제물로 남겨 두기도 하였다.
1-36 예수님께서는 미사와 성찬례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항구적인 기념이라는 것과 이는 우리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에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다.
1-36 미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과 죽음 및 이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생각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실제로 지상 생활을 하신 33년 동안 이루어진 일이다. 반면에 미사 중에는 이것이 짧은 시간에 신비적으로 재현된다.
2. 예수님이 몸소 거행하시는 미사
1-35 주님께서는 내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형언할 수 없도록 신령한 감미로움을 맛보게 해 주셨는데, 바로 우리 신앙의 거룩한 신비를 참된 겸손으로 열성껏 거행하는, 착하고 경건한 사제들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한 경건한 사제가, 그리고 그 사제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을 경탄하며 바라보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것은 다만 한 사람뿐이었으니, 사제가 예수님으로 변화된 것이었다. 더욱이, 사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몸소 거룩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 같았다.
사실, 하느님께 온전히 마음을 모아 헌신적인 사랑으로 집전되는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얼마나 고무적인 일이었는지를, 그럴 때에 하느님의 빛과 특은들을 얼마나 많이 깨닫게 되었는지를 어떻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는가?
3. 예수님의 성사적 현존
1-36 성체 안에는 무(無)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는데, 이는 이 성체가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그 후에는 참으로 살아 계신 그분의 성사적인 참된 현존이 우리 마음에서 사라진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와 같이 당신 성부의 품으로 돌아가시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미사 중에 축성되는 모든 제병 안에 다시 내려오셔서 평화와 보상적인 사랑의 산 제물이 되신다. 이와 같이 성사적인 신분을 새로이 취하시는 것은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를 위함이요, 그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 보상과 영광을 드리시기 위함이다.
6-81,2 내가 나 자신을 사람의 음식이 되게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기 내면을 온전히 나를 위한 영양분으로 바꾸면서 그 자신을 내 음식이 되게 할 수 있다. 생각과 애정과 갈망과 기호(嗜好)와 심장 박동과 한숨과 사랑이 이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있게 함으로써 말이다.
9-20,2 “이제 저는 당신과 긴밀히 결합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신과 같아졌습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가 되었으니 저는 제 존재를 당신 안에 두고 당신을 취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정신을 당신께 두고 당신의 정신을 취하며, 저의 눈과 입과 마음을, 손과 발걸음을 당신께 두고 당신의... 오! 그러니 이제부터 저는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제가 당신 정신으로 생각하고, 당신 눈으로 보고, 당신 입으로말하고, 당신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손으로 일하고, 당신 발로 걸을 것이니 말입니다.
모든 미사의 제물
12-40 내가 제물이 될 때 나의 뜻 안에서 사는 영혼도, 다만 한 번의 미사가 아니라 모든 미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제물이 된다. 나의 뜻 안에서 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제병들 안에서 축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나의 뜻을 떠나지 말아라.
제6일 십자가의 신비 - 가치, 선, 효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1코린 1,23)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는 지극히 값진 선이 있고 이를 지는 사람을 아름답게 꾸며 주며 구원해 주고 예수님을 닮게 해 줍니다.
1. 십자가
5-52 십자가 안에 지극히 값진 선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이것이 영혼을 얼마나 고귀하게 만드는지를 안다면, 누구든지 예외 없이 십자가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를 소유하는 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와 아울러 값을 매길 수 없도록 귀한 보석을 얻기 때문이다.
1-53 “내 사랑아, 너는 온전히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십자가를 관상하여라. 십자가는 하늘과 땅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너에게 부여하여, 무한한 아름다움을 모두 지니고 계신 하느님을 매혹할 수도 있다. 너는 잠시 동안이 아니라 영원토록 무한한 부요함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느냐? 네 마음 속에 천국과 천국의 모든 보화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더욱더 십자가에 사로잡혀라. 십자가가 너에게 모든 부요함을 안겨 줄 것이다.
1-55 어떤 사람이 구원된 사람들 속에 끼일지 아니면 영원히 멸망할지, 지금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표지가 있다. 만일 그 사람이 십자가가 만났을 때 이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포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따른다면 '그리고 때때로 그 십자가에 입맞추면서 자기에게 그것을 보내신 분께 감사한다면 ' 구원된 이들 속에 들어간다는 분명하고 확실한 표지이다.
2-8 “보아라, 십자가는 하나이지만, 그것은 몇 개의 널판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는 하늘은 하나이지만 더 영화롭거나 덜 영화로운 여러 처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뜻한다. 오, 모든 이가 고통의 고귀함을 안다면, 누가 고통을 더 많이 받는지를 보려고 서로 경쟁하련마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을 영원히 더욱 풍요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2-23
“십자가는 영혼들로 하여금 인내심을 가지게 해 준다.
십자가는 하늘을 열고 하늘과 땅을, 곧 하느님과 영혼을 결합시킨다.
십자가의 힘은 강력해서 이것이 영혼 안에 들어가면 모든 지상적인 것들로 하여 생긴 녹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에 대한 지겨움과 혐오와 멸시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는 사람이 많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십자가의 힘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2-48 “십자가는 매우 찬란한 빛을 영혼에게 주기 때문에 영혼이 투명해진다. 십자가는 영혼을 준비시켜 하느님께 합당한 거처가 되게 하는 것이다.”
2-49 십자가를 감수하며 그 때문에 내게 감사하면 나는 즐거워하며 그들에게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 때 나는 그들에게서 큰 영예와 영광을 받으며 큰 기쁨을 얻고, 그들에게는 더없이 큰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3-66 성체성사가 다가올 영광의 보증이라면, 십자가는 그 영광을 사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3-82 “십자가는 영혼으로 하여금 나의 신성을 흡수하게 하고 나의 인성과 닮게 하며, 그 안에 나 자신의 업적을 되새겨 준다.”
4-58 나는 두 가지 십자가 위에서 영혼들을 완성시킨다. 하나는 고난의 십자가요, 또 하나는 사랑의 십자가이다.
4-69 십자가와 환난들은 영원한 지복의 빵이다.” 우리가 더 많은 고통을 겪을수록 장차 받게 될 영광의 보증도 더 크다.
4-88 “모든 승리와 영광은 십자가에 귀속될 것이다.
4-127 십자가는 성사이다. 성사마다 각각의 특별한 효력이 있으니, 어떤 성사는 죄를 없애 주고, 다른 성사는 은총을 주고, 또 다른 성사는 영혼을 하느님과 결합시키고, 또 다른 성사는 힘을 주는 등 여러 다른 효력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효력을 한 곳에 모아들여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영혼 안에 낳아 주는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다. 십자가는 따라서 아주 짧은 기간에 본래의 상태와 유사하게 영혼을 회복시켜 준다.”
4-157 내가 한 사람의 성화를 위하여 그에게 어떤 고난의 십자가를 보낼 때면,그 은혜가 한 사람뿐만 아니라 다섯이든 열이든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사람에게 미친다.
4-166 모함과 박해와 반대는 하느님의 섭리가 허락하는 것이니,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기 위함이요, 창조된 순간과 같이 어떤 인간적인 의짓거리도 없이 오직 창조주와 하나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착하고 거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인간적인 심성이 내적으로 항상 남아 있기 마련이고 외적으로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희망하고 신뢰하며 의지하는 것 속에도 언제나 인간적인 무엇이 있으니, 남들에게서 존중과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함과 박해와 반대의 바람이 좀이라도 불기 시작하면, 그 인간적인 심성은 그야말로 파괴적인 우박 폭풍을 맞은 격이 된다. 그런 처지가 된 그는 자신이 혼자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 있을 수가 없다. 애초부터 혼자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가련한 사람은 어떻게 하겠느냐?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고, 그의 중심인 하느님께로 온전히 돌아오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그에게 주시고, 그는 지성을 써서 하느님을 알며 기억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의지로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게 된다.
딸아, 여기에 인간이 창조된 목적(과 그 성취가) 있다. 그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고 거룩하게 되며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연후에 사람들과 다시 접촉하게 되어 그들에게서 도움과 지지와 존중을 받게 되더라도, 그는 이런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체험을 통해 알고 있기에 (거룩한) 무관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사용하는 것은 다만 그 안에서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을 볼 때뿐이다. 그러니 그는 언제나 홀로 있을 수 있게 된다.”
4-180십자가는 착각을 깨우쳐 주는 일차적인 것이고 인간의 행업에 대한 으뜸가는 심판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굴복하면 십자가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게 해 준다. 사람이 세상살이에서 십자가의 판결에 복종할 때 나는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착각을 깨우쳐 주는 이차적인 것 곧 죽음이라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그 때에는 특히 십자가의 판결을 회피한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로부터 더없이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십자가의 판결은 전적으로 사랑의 판결이기 때문이다.
2. 고통의 효과
6-5.3 그리스도의 고통은 그분의 인성에 인간 본성이 내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특성과 모든 영예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영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바로 모든 것이신 그분의 특성과 영예와 임무에 참여하게 된다.”
6-6,2 오로지 하느님을 위해서 고통받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6-16,2 인류는 모두 한 가족이기에 한 사람이 어떤 선행을 하면서 그것을 내게 봉헌하면 온 인류 가족이 그 봉헌에 참여하며 내 앞에 있게 된다. 마치 모두 함께 그것을 봉헌하는 것처럼 말이다.
6-17,3 영혼이 나를 위하여 고통을 받으면서 기도하고 보속하며 찬미하고 끊임없이 감사를 바치면, 그것이 내 귓전에 끊임없이 울리는 음악이 된다. 이 음악이 나로 하여금 땅에서 자행되는 불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고, 그것이 받아 마땅한 징벌을 내리지 않게 한다. 이 음악은 또한 사람들의 생각 속에도 울리고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한다.
6-27,8 “딸아, 십자가가 지닌 여러 호칭들 가운데 하나는 ‘축제’이다. 선물을 받으면 어떻게들 하느냐? 경축하고 기뻐하며 더욱 행복해하지 않느냐? 십자가는 가장 값지고 그 무엇보다도 고상한 선물인데다 존재하는 사람들 중 유일하고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다른 어느 선물보다도 더 즐거운 축제이고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십자가에 붙일 수 있는 또 다른 호칭들은 무엇이겠는지 네가 말해 보려무나.”
6-27,9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십자가는 축제입니다. 그리고 환호이며, 기쁨이고, 열망입니다.” 하고 내가 말씀드리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6-27,10 “그래, 잘 말했다. 하지만, 내 뜻에 온전히 맡기는 사람,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온 존재를 내게 바치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이 효과를 체험하게 된다. 나는 인간의 사랑이 나를 앞지르지 않도록 나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준다. 그리고 나 자신을 주면서 또한 십자가도 준다. 그러면 영혼이 내 선물을 알아보고 경축하며 즐기게 되는 것이다.”
6-30,2 내 앞에서 너는 세 가지 칭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세 가닥 밧줄처럼 어디서든지 나를 너와 단단히 묶어 두기에 나는 너를 떠날 수 없다.
이 세 밧줄은 바로 끊임없는 고통, 항구한 보속, 끈기 있는 사랑이다.
6-41,2 “딸아, 고통받는 것을 지겨워하지 말고, 매시간 방금 받기 시작한 것처럼 처신하여라. 사실 영혼이 십자가의 지배를 받고자 하면, 십자가가 그 영혼 안에 악한 나라 셋을, 곧 세속과 육신과 악마를 파괴하고, 선한 나라 셋을 대신 세운다. 이는 곧 영적인 나라, 거룩한 나라, 영원한 나라이다.”
6-64,2 십자가의 타격을 많이 받을수록 그만큼 더 많은 빛을 획득하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6-103,2 “딸아, 고통에는 세 종류의 부활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고통은 영혼을 은총에로 다시 일으킨다.
둘째, 고통이 증가됨에 따라 덕행들도 증진되므로
고통은 영혼을 성덕에로 다시 일으킨다.
셋째, 계속적인 고통은 덕행들을 완성하고 찬란한 광채로 그것을 꾸미면서
아름다운 관을 이루기에, 이 관을 쓰게 된 영혼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영광에로 다시 일으켜진다.”
7-30,2 “딸아, 고통이나 괴로움을 끼치는 모든 것이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반면 하느님께는 감동이 된다. 하느님은 감동을 느끼시기에 그때마다 항상 신적인 어떤 것을 사람에게 주신다.”
7-33,3 영혼이 내가 그에게 주는 작은 선물들을, 곧 십자가들을, 나를 자기 배필로 받아들인다는 서약으로 받아들인다면 혼인이 성립되는 것이다.
7-47,2 무슨 고통을 당하든지 그것으로 내 상처를 다스리며 치유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
7-51,4 십자가가 사람에게 하는 역할도 그렇다. 십자가가 사람을 길들이고 제어하며, 삼키려고 드는 불길 같은 정욕을 내적으로 느끼며 그 길로 마구 달려드는 사람을 멈춰 세운다.
7-61,2 “딸아, 영혼이 겪는 고통은 각각 자기 지배의 자치적 영토를 하나씩 더 얻게 한다.
7-65,2 “딸아, 완전한 자기 포기는 (복된) 운명이 예정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확실하고 틀림없는 표지이지만, 십자가는 하늘 나라의 경계를 확장한다.”
7-83,37 십자가 열매 안에는 오직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만 통용되는 작은 주화들이 많이 있어서, 영혼이 이로 인해 부유해지고 영원토록 복을 받기 때문이다.”
8-13,7 “딸아, 십자가는 사람 생명의 일부분이니,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이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오직 십자가로, 길 잃은 인성에 신성을 접붙였기 때문이다.
8-13,8 십자가만이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신성에 결합시키면서 이 세상에서 구원 사업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덕행, 완성, 하느님 사랑 및 참 생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8-18,5 영혼의 활동과 말과 고통이 전부 내 안에 있다는 것, 그러니 그렇게 알고 행동할 때에만 비로소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된다.
9-21,2 “딸아, 십자가는 영혼을 보다 밀접하게 내게 결합시킨다. 네가 겪고 있는 내 부재의 (고통)들은 너 자신을 초월하여 날아오르게 한다.
9-46,8 “딸아, 정의와 자비는 계속적인 싸움 상태에 있고, 자비의 승리가 정의의 승리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 그런데 어떤 영혼이 나의 뜻에 온전히 일치해 있으면 나의 외적 활동에 참여하면서 그의 고통으로 보속을 바치므로, 자비가 빼어나게 훌륭한 승리를 거둔다.
3. 연옥의 고통
6-58,5 다른 모든 고통은 참회와 속죄 및 보상의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부재만은 유독 인간적 생명에 불을 붙이고 태워서 재로 만들며, 이 생명이 파괴되는 것을 볼 때까지는 결코 그만두지 않는 불의 고통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적 생명을 태우면서 그 인간 안에 신적 생명을 생생하게 건설하는 고통이다.
6-54,4 하느님을 앗긴 고통의 불이 연옥 고통의 불을 사라지게 할 정도입니다. 오, 얼마나 괴로운지! 내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부디 기도해 주십시오.
7-8,1 여느 때와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복되신 예수님과 정화 중인 많은 영혼들을 가까스로 잠깐 보았다. 이 영혼들은 여러 민족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있었다.
7-83,14 네가 겪은 불의 고통과 너의 기도가 그녀로 하여금 모든 사람이 받기 마련인 어떤 각고(覺苦)도 겪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내 정의가 너에게서 이미 보속을 받은 관계로, 너희 두 사람 모두에게서 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8-6,2 “딸아, 과연 고해는 죄의 용서를 얻게 한다. 그러나 연옥을 면하게 하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영혼의 주된 열정이 되어야 한다. 사랑에 생각과 말과 행위 등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이 사랑에 휩싸여 있어야 한다. 그러면 창조되지 않은 사랑이 온통 사랑이 된 그 영혼을 보고 이 창조된 사랑을 그 자신 안에 빨아들인다.
8-6,3 사실, 연옥은 오직 영혼 안에 있는 사랑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을 할 따름이다.
이 빈자리를 다 채운 뒤에는 영혼을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에 그런 자리가 없다면 연옥에 속할 것도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 영성 교육 교재
펴낸곳 : 불모임
취급처 : 하느님의 뜻 영성연구회 한국본부
주소 : 서울 중구 명동 2가 1번지 가톨릭 회관 3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