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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처럼(1655.2015.1.18.주일낮)
삿7:1-8
신앙생활에 있어서 세상과 죄악, 그리고 우리를 더럽히고 병들게 하는 요소에 감염되는 것은 대부분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맞닿을 때 해로운 사상이나 생각, 태도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자연히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영향을 받아 세상적인 것에 물들어 버리고 맙니다. 생각, 사상, 감정, 선택, 충동, 욕망,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만날 때 변화하는데, 대중 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대에는 ‘대중 의식’이 더욱 증대되고 있습니다.
창2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후처로 취하여 낳은 자녀가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처의 소생 미디안의 후손들이 훗날 이스라엘의 괴롭히는 미디안 족속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6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인데 그 후손이 오늘날의 아랍인들입니다. 그 당시 중동지방의 관행은 일부다처가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후처로 취한 여자들에게서 낳은 미디안이나 이스마엘은 훗날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어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아브라함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결과인 것입니다. 미디안은 싸움에 능한 자들로 광야를 주름잡던 부족이었습니다. 본문은 기드온이 300명 용사로 미디안과 싸워 승리했다는 승전기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의 활동에 관한 기사는 사사기 6장부터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사사기 6장에서 8장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처럼’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1. 기드온이 누구입니까?
기드온은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삿6: 3-4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땅에 씨를 뿌리고 난 뒤 미디안과 아말렉, 그리고 동방사람들이 쳐들어와 진을 치고 소산을 짓밟고 식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양와 소와 나귀등 가축도 모조리 약탈해 갔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막지 못하는 이유는 5절에 보면 그들의 수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메뚜기는 황충이를 의미합니다. 수천만 마리가 떼를 지어 날아옵니다. 크기는 우리나라 메뚜기의 1.5배 내지 2배가량이 됩니다. 황충이 떼는 푸른 빛 나는 모든 식물을 모조리 갉아 먹고 지나가기 때문에 한번만 지나가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립니다. 그들을 메뚜기 떼로 비유한 것은 그들의 숫자와 잔혹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는 적군은 숫자적으로 많고, 신체적으로도 크고, 강하며 잔인하여 그들로서는 싸워 이길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정치는 표류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져 있고,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갈리어 지고,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민심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시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농부였습니다. 삿6;11절에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착취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피해 포도밭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업정치인도 아니었고 정규군인도 아니었습니다. 땅에 씨뿌리고 거두어 타작하는 단순한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갑자기 민족을 구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왕은 사람들이 세워 왕이 되었고, 다윗은 하나님이 세워 왕이 됐습니다. 사울은 사람이 뽑았고, 다윗은 하나님이 뽑았습니다. 사울은 인기가 있었고,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통치기간은 똑같이 40년이었지만 사울은 당대로 끝났고 다윗은 대를 이어 그 후손이 왕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드온은 큰 용사였습니다. 삿6:12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전쟁을 경험한 일도 없었고, 군사 훈련을 받아 본 일도 없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큰 용사’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기드온이 가지고 있는 큰 용사, 큰 지도자, 큰 인물로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시고 큰 용사, 큰 지도자, 큰 인물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삿6:34절‘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신’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심은 성령 충만을 의미합니다. 기드온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그들은 밖으로 나가 예수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 충만 받고 담대히 나가 예수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기드온도 성령 충만 했습니다.
2. 삼백용사기 되기위한 마음
오늘은 중요한 마음을 배웁니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기드온이 자기를 따른 백성 가운데 삼백 명의 용사들을 뽑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마음의 역할의 원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기드온의 삼백명의 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말씀드립니다.
지켜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절‘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그랬습니다. 본문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여 특별히 수식하고 있습니다. 여룹바알이란 ‘바알과 논쟁하다, 바알을 대항하다’는 의미로 기드온이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파괴하고 얻은 이름입니다. 이처럼 죄에 대한 마음의 강한 저항자세가 필요합니다. 죄에서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향해 굳게 지켜져야 합니다.
인체도 병에 대한 면역을 주는 항체가 있어야 건강하듯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늘 섭취하고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은혜를 강하게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피동적으로 방치하면 안됩니다. 마음은 은혜로 굳게 함이 아름답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하여는 열려 있고 악의 세력에게는 닫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신 그 구원을 견고히 잡기만 하면 됩니다. 인생의 타락은 뱀의 미혹임은 틀림없지만 그 꾀임을 받아들인 하와와 아담의 잘못입니다. 우리 마음은 마치 예루살렘 성과 같이 튼튼한 성곽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바로 유지됩니다. 계시록에 성곽 부분에 대한 설명이 많은 것도 그 중요성 때문입니다.
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절‘그를 좇는 모든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든’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기드온을 따르는 삼만 이천의 백성은 한 덩어리가 되어 그를 따랐고 또한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의 군대입니다. 당시 군대는 징병제가 아니라 자원제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나팔을 붑니다.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감동된 청년들이 자원하여 모여듭니다. 그래서 당시의 군인은 전적으로 마음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마음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각오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군인들은 대단히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애국지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성도들도 영적인 군인이 되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아합시대 처럼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려서는 안됩니다.
부지런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1절‘일찍이 일어나서’했습니다. 여기 일찍 일어남은 부지런함의 상징입니다. 성경에 훌륭한 신앙의 위인들은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도 일찍 일어났습니다(창22:3). 모세도 일찍 일어났습니다(출8:20). 여호수아도 일찍 일어났습니다(수3:1). 사무엘도 일찍 일어났습니다(삼상15:12). 기드온도 일찍 일어났습니다(삿7:1). 다윗도 일찍 일어났습니다(삼상29:11). 욥도 그랬습니다(삼상15:12). 우리의 구주시오 사도이신 예수님께서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막1:35). 이와같이 부지런해야 합니다.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절‘하롯 샘에 진쳤고’라 했습니다. 여기 기드온 군대가 진을 쳤는데 진은 마음의 강함을 뜻합니다. 악6:10에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기치를 벌인 군대에 비유했는데 이는 강함의 상징입니다. 성도의 마음은 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거듭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강한 마음이 없이는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진을 하롯 샘에 진쳤다고 했습니다. 하롯 샘은 암벽에 구멍이 나서 그 구멍으로 생수가 폭포 같이 쏟아지는 특이한 샘입니다.
얄루드 강의 수원이 되는데 여기 암반은 비유적으로 그리스도요 생수는 은혜의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 샘에 마음의 진을 쳐야 합니다. 즉 마음을 강하게 하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강하게 해야 합니다. 이 강한 마음이 없이 어떻게 기드온의 군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히13:9에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라고 했고, 딤후2:1절‘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속에서 강하고’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나약함을 미리 아시고 너희 믿음이 떨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은혜로 강한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절‘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했습니다. 위치상으로 미디안의 진은 기드온이 진친 곳의 북편인데 그곳은 길보아산 기슭을 가리킵니다. 길보아산은 사울의 최후가 있었던 격전지입니다. 그곳에서 사울은 크게 패했고 그의 세아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위험한 곳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은 잘 파악하고 조심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들이 진친 곳을 정확히 말하면 ‘모레산 앞 골짜기’였는데 ‘모레’란 ‘교사,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이는 지혜로운 마음의 상징입니다. 즉 죄를 이기려면 우리가 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죄도 알아야 하고 죄의 성질도 알아야 하고 죄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고 죄를 취급하는 법도 알아야 하고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우리의 할 일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겸손히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듣기는 먼저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가르침을 받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죄는 아예 멀리해야 지혜롭습니다(잠5:8). 믿음과 지혜는 서로 상반되는 것 같지만 서로 보완적인 존재입니다. 믿음을 강조하다 지혜를 그르쳐서도 안되고 지혜를 강조한 나머지 믿음을 그르쳐서도 안됩니다.
마음은 삶의 중심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마음은 믿음이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마음이 믿음으로 가득 찰 때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마음이 믿음으로 가득찰 때 영적으로 푸르러 구원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마음으로 믿어 삶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입으로 시인하는 하나님나라의 증인의 삶을 살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300명의 용사들이 누구입니다.
사사기 7장에 살펴보면 미디안과 싸우기 위해서 군사를 모집했는데 지원자가 3만 2천명이었습니다. 미디안 군사에 비하면 극히 작은 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무 많다고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준비 안된 사람 그리고 마음속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 2만 2천명을 돌려보냈습니다. 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아직도 많다’고 하셨습니다(7:4). 그래서 또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300명’입니다. 도대체 이 300명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1)300명 용사들은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부지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절‘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치고’라고 하였습니다. 승리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먼저 잡아먹듯이 일찍 일어나는 성도가 신령한 만나를 먼저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실 때에도 새벽에 주셨습니다. 새벽에 깨지 않으면 만나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새벽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도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자가 세상을 깨웁니다. 어떤 청년은 ‘평생 새벽기도회 같이 드릴 수 있는 아내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평생 새벽을 깨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새벽을 깨우는 가문이 되게 하옵소서’ 새벽을 깨우는 자는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도 이런 새벽을 깨우는 부지런한 사람들이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롬12:11절‘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300명 용사가 될 사람들은 새벽을 깨우는 부지런한 자들이어야 합니다.
잠6:10-11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했고 잠10:4절‘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했는데 이것은 영육 간의 모두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게을러서는 바른 신앙생활 못합니다. 게으른 자는 주일성수 못합니다. 게으른 자는 기도생활 못합니다. 게으르면 말씀 보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는 시험이 와도 막지 못합니다. 게으른 자는 가진 것도 다 빼앗깁니다. 게으르면 가정도 엉망이고 도무지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주신 기쁨과 능력도 곧 상실합니다. 기독교사에 나타난 위인들을 보면 모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신 것입니다.
2) 자긍하지 않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삿7:2절‘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다면 ‘자긍’이라는 말입니다. 자긍이라는 말은 자랑이라는 말로 번역해도 그렇게 틀린 말을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더 의미상으로 더 정확한 표현을 한다면 교만에 합당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수다한 이스라엘의 지원병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시기를 원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려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리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반대로 교만한 자에게는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3)300명 용사들은 두려움이 없는 용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3절‘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워 떠는 사람은 용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줄것을 믿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드온도 처음에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담대하여 졌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탐꾼으로 갔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정탐꾼처럼 두려워 떨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가나안 사람들은 우리의 밥입니다’고 담대히 말했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보면서도 두려워 떨지 않고 담대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어린 다윗은 불레셋 사람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담대하게 나가 싸웠습니다. 그리하여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렸습니다. 전쟁에서의 담력과 용기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이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됩니다. 사실 전쟁에 나가서 집 걱정, 가족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해이해지면 전쟁할 수 없습니다. 요16:33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4)300명 용사는 정신을 바싹 차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드온 앞에 나왔던 3만2천명 중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만명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아직도 많다고 하시면서 이들을 데리고 시냇가로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개가 물을 핥아 마시는 것처럼 마시는 자를 따로 세우고 무릎을 꿇고 마시는 사람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무릎을 꿇고 마신 사람들은 9,700명이었으나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은 사람은 300명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을 풀지 않고 주위를 살피면서 물을 핥아 먹은 사람들만이 300명의 용사에 들었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이때에 우리는 근신하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벧전5:8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깨어 있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이 기질이 중요합니다. 얄팍한 감정에 치우치면 안됩니다. 신앙이란 금과 같이 변치 않아야 합니다. 남은 자와 같이 끝까지 남은 소수가 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지켜볼 줄 알아야 하므로 인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참고 기다려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둡니다.
5)300명 용사들은 승리의 확신에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삿7:9절 하나님은 명령하기를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의심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일 네가 내려가리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라’고 하였습니다. 기드온은 부하 부라를 데리고 적진으로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어느 장막 뒤에 숨었습니다. 그 안에서 미디안 병사 둘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을 무너뜨리는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동무가 꿈 해몽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미디안 군대를 다 그의 손에 붙였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드온과 그의 부하 부라가 이말을 들었습니다. 확신이 생겼습니다. 15절‘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고 이스라엘 진중에 돌아와서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라’하고 300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용사의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하고 적진을 포위했습니다.
6) 준비에 힘쓰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본문 5-6절에 보면 그들은 철저히 준비에 힘쓰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은 믿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1만 명 가운데 300명을 선발할 때의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물가로 데려가서 물을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먹고 있을 때 이들의 물먹는 자세를 보고 그들 중에서 선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가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개 같이 물을 핥는 자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마시는 자 300명만을 선발하도록 기드온에게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무릎을 꿇고 개처럼 핥아서 물을 마신 사람들은 언제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적진 앞에서 경계 태세를 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물을 움켜 입에 대고 핥은 자들은 언제 어떤 위험이 닥쳐오더라도 즉시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철저히 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본능을 통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본능에 끌려 다니면 안됩니다. 신앙생활에 긴장이 풀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3.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이겼습니까?
부르짖었습니다. 삿6:6절‘미약함이 심한지라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고 했고, 7절에 역시‘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고 했습니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약할 때 어려울 때 위기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미디안이 쳐들어 왔을 때, 모압이 쳐들어 왔을 때, 블레셋이 쳐들어 왔을 때, 아람이 쳐들어 왔을 때, 그 때마다 그 위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싸움에 이기게 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 응답으로 앗수르 산헤립의 18만 5천 대군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히스기야 왕은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에도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히스기야 왕을 살려 주셨습니다.
기도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왕도, 대신도, 농부도, 선지자도, 과부도, 여자도, 남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둘째, 누구에게나 기도 제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이유가 있고 기도할 내용이 있습니다. 셋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왕의 기도, 신하의 기도, 부자의 기도, 가난한 사람의 기도, 남자의 기도, 여자의 기도를 불문하고 기도하면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힘써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을 자세히 보면 부르짖는다는 구절이 42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시77:1절에 보면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81:7절‘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다’,사58:9절‘네가 부르짖을 때에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위기가 변하여 위대한 기회가 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민족적 위기를 당하였을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금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사 그 위기는 위대한 기회 변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300명의 용사는 최신 핵무기나 첨단 과학 무기로 무장한 것이 아닙니다. 유격 훈련이나 게릴라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007영화의 제임스 본드처럼 기발한 신무기로 무장한 것도 아닙니다. 삿7: 19-20절‘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트리고 횃불을 흔들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친 것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전쟁에 이기겠다는 건지 목숨을 내놓겠다는 건지 이해가 어려운 일을 그들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겼습니다. 나팔을 분 것은 선포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개선가입니다. 싸움에 진 군사는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이긴 쪽만 나팔을 붑니다. 싸우기도 전에 미리 나팔을 분 것은 미리 승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겼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라고 믿고 선포한 것입니다.
항아리를 깨트린 것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나를 깨트려 승리의 제물 삼겠다. 우리가 너희를 항아리 깨트리듯 깨버리겠다.’는 것입니다. 횃불을 들고 흔든 것은 어둠의 세력을 내쫓고 광명천지를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요, 지도자 기드온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백성들에게 그렇게 명령했고, 백성들은 기드온의 말대로, 기드온의 지시에 따라 그렇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기드온을 좇는 자가 나팔을 불자 300명 용사들은 일제히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 손에 나팔을 들고 불었습니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미디안 군사는 자기들 끼리 칼로 치게함으로 적군이 다 도망하였습니다. 항아리와 나팔, 횃불이 무기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미디안 135,000명을 이겼습니다. 십자가의 군병인 우리 성도들에게는 적어도 다음의 몇가지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 거듭남의 확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 용서의 확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확신,영생의 확신 그리고 승리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요일5:4에는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이 우리의 믿음이니라’기드온의 용사처럼 아침을 깨우는 사람들이 됩시다. 두려워 떨지 말고 강하고 담대한 사람들이 됩시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대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다. 반드시 우리도 승리의 기쁨을 맛본 용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삿7: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심으로 자중지란이 일어나 죽고 도망치고 하여 이길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300명이 잘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믿고 순종한 그들을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300명 용사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제 300명만 남았습니다. 기드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마음속에 염려가 생겼을지 모릅니다. ‘300명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300명이면 충분하다’ 아멘! 어떤 300명입니까? 절제된 300명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300명이요, 담대함으로 무장한 300명입니다. 언제나 절제된 모습으로, 훈련된 모습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전도로, 생활로 훈련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때, 즉 카이로스에 쓰임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절제되고 훈련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사랑하는 성도들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선택된 300명의 용사가 되셔서 앞으로 펼쳐질 영적 전투에서 승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누구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십니까? 각각 집으로 돌아간 31,700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승리를 이끌어 낸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날의 싸움은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오늘도 믿음과 지혜로 뭉친 기도의 사람, 순종의 사람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만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며, 순종하여 나팔을 붑시다. 항아리를 깨뜨립시다. 횃불을 높이 들고 흔듭시다. 그리고 여호와의 승리를 외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