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송광사 (松廣寺)
- 한상훈님 글
조계산(曹溪山,해발 887m) 안에 위치한 송광사는 불교의 삼보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 이 승광사 는 불교의 보물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의 불교·전통·역사를 대표할 만한 사찰이다. 신라 말기 창건된 이후, 천년의 불교 및 민족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역사를 거슬러 볼 때, 보조국사 지눌스님을 비롯, 고봉(高峯)스님에 이르기까지 16명의 국사가 송광사에서 배출됐다. 국사, 즉 옛 봉건제도 속에서 국가로부터 승려에게 주어진 최고의 승직(僧職) 이자 그 시대의 국가를 대표할만한 고승을 16명이나 한 사찰에서 배출했다. 이는 송광사의 그 어떤 면모보다는 깊고 큰 명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증거다. 국내의 많은 절들이 각종의 보물이며 설화로 유명함을 표출하고 있는 가운데 송광사는 승보란 칭호에 걸맞듯이 '보물급 스님'들이 특히 많았다.
국사칭호를 받은 보조(普照), 진각(眞覺), 청진(淸眞), 진명(眞明), 원오(圓悟), 자정(慈靜), 자각(慈覺), 기당(淇堂), 혜감(慧鑑), 자원(慈圓), 혜각(慧覺), 각진(覺眞), 정혜(淨慧), 홍진(弘眞)(이분들 15명 스님은 고려시대 국사) 고봉(高峯 조선시대 초 국사)스님 등 16명이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송광사(松廣寺)는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 조계산(曹溪山)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절은 고려 중엽 보조국사 이래로 15분의 국사가 주석 했던 선종사찰이다. 그 전통과 사상은 8차례의 대규모 중창을 이루며 꾸준히 계속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승보종찰 (僧寶宗刹)'이라 부르는 한국의 대표적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60여 동에 이르는 가람은 먼저 그 입지조건으로 볼 때 전형적 산지가람을 이루고 있다. 해발 887m의 조계산 연산봉(連山峯)이 병풍처럼 절을 에워 쌓으며 남쪽의 계곡에서 흐르는 신평천이 사역을 휘둘러 북쪽으로 빠져나가 주암호에 이른다. 절은 이 같은 주위 산천을 배경으로 한 채 동쪽의 완만한 산줄기를 다듬어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잡았다.
절의 본래 이름은 길상사(吉祥寺)였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 말 혜린선사(慧璘禪師) 가 터를 잡고 산 이름을 송광, 절 이름을 길상이라 하여 창건했다. 이 무렵 가람은 100여 칸에 달하고 30∼40의 대중이 거주하였다 하는데, 이런 내용이 <송광사적비>와 <보조국사비명> 등에 보이는 길상사에 관한 창건 내용의 전부이다. 다만 '길상'이라는 절 이름이 화엄 제2회(會)의 설주(說主)인 문수사리(文殊師利)의 한문 옮김 말이므로 절의 성격은 화엄종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후 신라시대의 사정은 알려지지 않는다. 고려 인종 때 석조(釋照)대사가 퇴락한 당우를 중창할 뜻을 세웠으나 갑자기 입적하고 말아 길상사는 점점 기울고 허물어져 갔다고 한다. 길상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智訥,1158∼1210)이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고 그 수행처로 이 곳을 택하면서부터이다. 1182년(명종 12) 보조국사는 뜻을 같이하는 10여 명과 함께 타락한 고려불교를 정법불교로 바로잡기 위해 정혜결사를 서약했다. 그 뒤 8년이 지난 1190년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다시 모여 정례결사문을 반포하고 본격적 결사운동에 들어갔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 위해 보다 넓은 곳을 물색하던 중 제자 수우(守愚)의 말을 따라서 거의 폐허로 변한 이 곳 길상사를 수행처로 정했던 것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또한 울창한 수림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니 심성을 수양하고 대중을 수용할 최적의 자리였다고 본 것일까. 1197년(명종 27) 터를 새롭게 다지고 토목을 일으켜 가람 건립에 착수하였다. 워낙 규모가 컸던 탓에 공사는 시작한지 9년만인 1204(희종 원년)에 완공 되니 불당·승료·재당(齋堂)·창고 등 전각 80여 칸이 갖춰졌다. 그 해 10월 약 120일 동안의 경찬법회(慶讚法會)를 베풀어 성대한 낙성식을 봉행 하였고, 희종으로부터 산 이름을 '조계', 절 이름을 '수선사(修禪社)'라 하는 친필 사액을 받았다. 뒤에 절은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바뀌었지만, 이렇게 해서 절은 고려 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제1차 중창되었다.
제2차 중창은 수선사의 제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에 의해서였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보조국사의 뒤를 이은 스님이 법석을 베풀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절이 비좁을 정도가 되었다. 이에 국왕 강종이 강당을 증축하게 하고 관원을 보내 공역을 도움으로써 2차 중창이 이루어졌다.
조선초인 1395년(태조 4) 송광사의 제16세의 국사로 추존 되었던 고봉 법장(高峯法藏, 1350∼ 1428)이 절에 들렀다가 옛 모습대로 중창·복원할 것을 서원 하였다. 5년이 지난 1399년(정종 1년) 마침내 국왕의 도움을 구하여 절에 수륙사(水陸社)가 설치되었고, 이듬해부터 중창이 시작되었다. 1404년(태종 4)에는 불·법·승의 전당(殿堂)3∼4개소를 준공했다. 이후 고봉의 중창 의지는 중인(中印)선사에게 이어져 1420년(세종 2) 20여 명의 대중들과 함께 당우의 중건이 계속되었다. 안으로는 가람을 수리하고 밖으로는 사격의 신장에 힘쓴 결과 1424년(세종 6) 수륙사를 철폐하고 본연의 선종사찰로 되돌려 놓았다. 1427년(세종 9) 중창이 마무리되어 낙성식이 열리니 이 때의 가람 규모는 전부 90여 칸에 달했다고 한다. 이것이 송광사의 제3차 중창이 된다.
그러나 200여 년이 못되어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전국의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되는 가운데 송광사 도 적지 않게 소실되었다. 더구나 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대중이 피신하면서 절은 폐허와 다름없이 방치되었다. 이 때 복구의 기치를 든 인물이 응선(應禪)화상이었다. 1601년(선조 34) 수각(水閣)을 중수하고 1604년(선조 37)에는 천자암(天子庵)을, 1606년(선조 39)에는 보조암(普照庵)을, 1608년 (선조 41)에는 임경당(臨鏡堂)을 차례로 중건했다.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에는 부휴(浮休,1543∼1615)선사가 머물며 조전(祖殿)·동행랑(東行廊) ·천왕문 등에 각각 책임자를 선발하여 그 보수와 증축을 맡겼다. 이러한 절의 제4차 중창은 그해 겨울에 모두 끝났다.
지금의 절은 1983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8년 동안에 새롭게 중창한 모습이다. 창건이래 보조국사 의 제1차 중창으로부터 약 800년 동안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 제8차 중창의 가람이 들어선 것이다.
1969년에는 조계총림의 방장 구산(九山)스님이 뒤를 이어 본격적 중창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웅전을 해체하여 원형 그대로 중정 북쪽에 옮겨 짓고 승보전(僧寶殿)이라 하였다. 본래의 대웅전 자리에는 규모를 넓혀 108평의 목조 대웅보전을 새로 지었고 그밖에 지장전·성보유물각· 목우헌 등 20여 동의 전각이 새로 들어섰다. 모두 60여 동의 전각과 요사가 가득히 들어찬 송광사는 명실공히 승보종찰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