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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성경에 담긴 이미지들
제 1 장 모세 오경의 그림들
제 2 장 역사서의 그림들
제 3 장 시가서의 그림들
제 4 장 예언서의 그림들
제 5 장 예수, 교사 / 설교자
제 6 장 사도행전의 그림들
제 7 장 교회에 대한 그림들
제 8 장 요한계시록의 그림들
부 록1 설교자들의 질문
부 록2 간략한 상상력의 역사
부 록3 상상력과 신화
<저자 소개> 워렌 위어스비는 세계에서 복음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설교자이다. 그는 강연이나 저서, 라디오 사역을 통해 40년 이상이나 전세계에 걸쳐 분명하고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저자는 Youth Christ International의 책임자로 봉사하고 있고, 인디애나, 캔터키, 일리노이 주에 있는 교회에서 가르침과 설교 사역을 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성경 교사와 "Back to the Bible" 방송의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Wierbe's Expositore Outlines on the Old and New Testaments 외에도 100권 이상의 책을 썼으며, 지금은 저술과 가르치는 사역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역자> 이장우는 침례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에 소재한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대학원에서 전도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 과정 이수 후 '영적 성장 및 영적 각성 운동'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으며 싸이프레스 한인침례교회 담임 목사로 재직 중이다.
"나는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다. 자료의 구성 그 자체가 새로운 것이다." 블레스 파스칼
제 1 장 모세 오경의 그림들
창세기
창세기는 문자 그대로 세계 시작에 관한 책이므로 여기서 성경의 주요 이미지들을 대량 발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창세기 1장에서 만나는 이같은 이미지들로는 어둠과 빛, 물, 씨앗, 흙, 호흡에다 하늘의 별들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 전체에서 영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이미지로 거듭거듭 등장한다. 2장에서 우리는 안식일, 정원, 나무, 강, 잠, 결혼, 그리고 인간의 벌거벗음 등을 만난다. 3장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은 뱀, 옷, 가시와 엉겅퀴, 땀, 임신, 그리고 검이다. 창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바벨, 소돔과 고모라, 양, 사다리, 악취며 각종 동물들이 등장한다. 이 모두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등장하는 그림들이다.¹
성경에서 창조(창1:1-2) 이야기는 은유적으로 얘기될 때가 많다. 하늘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바요(시8:3), 땅은 무슨 건물을 세우기라도 하듯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신' 행위를 바탕으로 생겨났다(시102:25; 104:5; 사48:13; 51:13, 16; 렘31:37; 암9:6). 어떤 때는 창조가 기초를 두고 세우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장막'이라는 그림으로 제시되기도 한다(시19:4; 104:2; 욥9:8; 37:18; 사40:22; 44:24; 45:12; 렘10:12; 51:15). 하지만 건물이나 장막 같은 건축물에 관한 그림이 창조에 관한 유일한 그림은 아니다. 창조가 출생에 견주어질 때도 있다. 산들도 출생한 것이고(욥15:7; 시90:2) 계절도 그렇다(욥38:28-29).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실 때 창조는 건축물과 출생 모두에 비유된다.
사도 바울의 경우, 창조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역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사용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하는 것이다(고후5:17). 사도 바울은 이를 빛의 창조라 말하기도 한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사도 바울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첫 번째 아담(롬5:12-21; 고전15:20-22, 45-49)이 가져온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마지막 아담'으로 묘사한다(고전15:45).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지으신 '새사람'이다(엡2:14-15). 신자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은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 한다(엡2;10).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일 이 새창조를 체험하는 삶을 살 수 있다(엡4:20-24; 골3:1-11).
어둠과 빛(창1:2-2)은 성경에서 아주 친숙한 이미지 중 하나이다. 어둠은 대개 죄(요3:19-21; 잠4:19; 행26:18; 엡5:8)나 사탄의 왕국(골1:13),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제도(고후6:14), 그리고 영원한 심판(마8:12)과 연결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빛'이시고(시27:1; 요일1:5)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이다(시19:8; 119:105, 130; 잠6:23).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요8:12)이시며 그리스도인들 또한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한다.
땅, 씨앗, 정원도 성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미지들이다. 사람도 땅의 흙으로 만들어져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다. 물론 흙 자체에는 생명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이 탄생한다. 그런데 '숨' 혹은 '바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루아흐<ruach>와 프뉴마<pneuma>)가 사람의 영이나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시104:29-30).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13:1-23)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땅에 비유하신다. 그리고 이 땅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네 종류로 분류된다. 바울도 이와 비슷하게 어느 한 지역에 있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추수하실 '하나님의 밭'이라고 표현한다(고전3:5-9). 한편 가라지의 비유(마13:24-30, 36-43)에서 밭은 타락한 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즉 '밭은 세상'이라고 예수님께서 풀이하신다. 이 비유에서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한 바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한다.
씨앗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열매는 씨앗을 담고 있어 장차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아울러 '추수'라는 테마도 성경에서 무시할 수 없는 주제로 간단히 한 문단 정도로 다루기 힘들 정도다. 간략히 말하자면, 우선 추수는 영적으로 성숙함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열매'는 인생에서 거두는 결과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그림이다. 사람이 골프공을 만들 수는 있지만 사과 같은 열매는 그저 자라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그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창세기 2장에 나타나는 주요 이미지로는 강(2:10-14)과 결혼(2:21-25)을 들 수 있다. 물은 생명이 있는 곳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동양에서는 물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우물을 팠다는 얘기를 창세기는 각별하게 분량을 할애해서 말한다(창21:25-34; 26:16-33). 우리가 마시는 물은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하는 데 필요한 그림을 내놓는다(요7:37-39).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씻기는 물로 상징된다(요15:3; 엡5:26-27; 시119:9). 또한 하늘에서 내리는 시원한 비와 이슬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는데 적절한 그림으로 쓰인다(신32:2; 사55:10-11; 호14:5). 반면 폭풍우나 '사나운 물결'은 인생의 고난을 가리키는 데 자주 쓰인다(시18:16; 42:7; 46:3; 88:7; 93:3).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해 선지자들이 종종 썼던 이미지는 결혼이다(사43:4; 49:14 이하; 62:4이하; 63:9; 렘2:2, 20-25; 3:6, 13; 30:14; 겔16:23, 33-37; 23:5, 9, 22). 호세아 선지자는 고멜이라는 부정한 여자와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관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숭배(즉 창녀짓)에서 돌이켜 주께로 돌아오라고 권하는 호세아서의 베경을 이룬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그리고 있다(엡5:22-33; 계21:1-4을 보라). 또 아가서가 묘사하는 달콤한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의 백성과 주님 사이에 나누는 체험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꽤 된다.
창세기 3장의 이미지는 뱀, 먹는 행위, 입는 행위 등이다. 여기서 뱀으로 등장하는 사탄(창3:1)은 '속이는자'(고후11:3)라는 그림과 연결된다. 또한 사자로 묘사되는 사탄은 파괴자(벧전5:8-9)의 속성을 갖고 있다. 가라지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하신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고 여겨진다. 먹는 행위 이미지(창2:16-17; 3:1이하)는 성경에서 죄 된 행위나 거룩한 행위 모두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야 한다(마5:6). 그러나 죄인들은 악을 삼키고 싶어한다. 이렇듯 맛보는 것, 먹는 것, 삼키는 것, 그리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것 등이 모두 자기 존재 안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은유적 표현으로 오늘날도 쓰인다. "그 많은 재산을 꿀꺽 삼켰단 말야?"하는 말이나 "내가 그 말 좀 곰곰 씹어보고 대답하지"하는 말, 또는 "그렇게 좋은 일이면 나도 한 번 맛좀 보자"와 같은 표현이 다 그런 것들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된다. 악한 자가 악한 것을 탐내어 먹고 삼키면 더욱 악해질 따름이다. 반면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일을 굶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로운 주림을 채워주신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자기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은유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모세의 율법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고 정죄했다(요6:53 이하).
이제 옷 입는 행위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흠이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아담과 이브는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2:25). 그러나 한 번 죄를 짓고 나자 이들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가릴 것을 찾고 있다(창3:7).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몸을 가렸던 무화과나무 잎 대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창3:21). 이 사실에서 아담과 이브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무언가 피를 흘려야만 된다는 사실을 암시받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옷 입는 행위로 인격이나 행동을 묘사한다. 그는 우리에게 옛생활을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벗으라'고 훈계하며, 은혜의 새생활을 '입으라'고 권한다(롬13:11-14; 엡4:17-5:21; 골3:1-17). 또한 마귀를 대적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갑옷으로 무장하라고 권유한다(엡6:10-18). 그 외에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여러 부분에서 바울이 무덤에 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수의를 염두에 둔 듯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새로운 출발을 사람들이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는 일로 묘사하고 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올 때 야곱의 가족이 한 일도 그렇고(창35:1-3), 요셉이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도 그렇다(창41:14).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여호와를 뵐 때도 옷을 깨끗이함으로써 자신을 준비시켰다(출19:10,14). 사제나 레위인들이 사역을 할 때는 늘 몸을 깨끗이하고 특별한 옷을 입었다(출29장; 민8:5-7, 21). 또한 부정을 탄 유대인이 자신을 정화하는 의식 가운데 하나가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는 것이었다(민19:17-22).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정결의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슥3장). 대제사장이 불결한 옷을 입고는 주님 앞에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성경 역사에서 의복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가지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는 사무엘상 15장에서 주께서 사울 왕을 버리셨을 때의 사건이다.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삼상15:27-28).
다른 하나는 열왕기상 11:26-39의 사건이다. 본문에서 선지자 아히야는 자기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서 그 열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고 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열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을 상징하는 행위다.
창세기 4장에는 주목해야 할 그림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땅이 입을 벌려 아벨의 피를 받았다'는 표현이다(창4:11). 하나님께서는 피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창9:4-6; 레17:11; 신12:23; 시72:14). 그리고 피를 먹거나 피가 있는 채로 고기를 먹지 말라고 명하신다(레3:17; 신12:16). 이같은 명령에는 건강에 관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피가 장차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실 하나님 아들의 보혈을 가리키기 때문이다(벧전1:18-19). 아벨의 피는 땅에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했다(창4:10).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를 호소한다(히12:24).
이제 '냄새'에 관한 이미지를 살펴보자(창34:30).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족속에게 행한 일 때문에 위협을 받게 되자 야곱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창34:30; 춝5:21; 삼상13:4; 삼하10:6: 16:21; 대상19:6).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악취가 난다'(His name stinks. '평판이 좋지 않다'는 뜻의 영어 표현)라든지 '명성에 냄새가 난다'(His reputation smells. 명성에 금이 가게 되었다와 같은 정도의 표현)는 식의 표현을 쓰고 있다. 이렇듯 이름과 냄새는 무슨 상관이 있는 듯하다. 가룟 유다의 이름은 흠잡을 데 없는 이름이다. '유다'란 '찬양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조가 나온 지파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범죄함으로써 그 좋은 이름을 더렵혔고, 오늘날 자기 자식에게 그 이름을 지어주는 부모를 본 적이 없다. 반면 가룟 유다가 시비를 걸었던 베다니의 마리아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기념되는 향기로운 이름이 되었다(막14:1-9; 요12:1-8).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경건한 삶이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향기가 있는 삶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보낸 선물을 받고는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빌4:18).
성경에서 목자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아벨이다(창4:2). 그후 족장들이나 모세, 다윗에 이르기까지 목자의 이미지가 줄곧 사용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요10장; 히13:20; 벧전2:25; 5:4; 계7:17). 지역의 신자들, 즉 양떼를 돌보는 목사들도 역시 목자다(행20:28). 원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관리들도 목자로 여김을 받았다(삼하5:2; 7:7; 대상11:2; 17:6; 시78:71; 렘3:15; 10:21; 23:1이하; 겔34장). 야곱은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평생에 목자가 되어주셨다는 말을 한다(창48:15). 하나님을 목자로 언급하고 있는 곳은 그외에도 많다. 시편23:1; 28:9; 80:1; 이사야40:11; 예레미야31:10; 스가랴13:7; 마태복음2:6; 26:31.
출애굽기
출애굽기의 첫 15장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벗어나는, 즉 구속이라는 주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이 출애굽의 이미지는 누가복음 9:31에서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1:15에서는 신자들의 죽음을 표현하는 이미지로 차용되고 있다.²
출애굽기 전반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른 두 이미지도 짚고 넘어갈 만한데, 바로 '어린 양'(출12:1-13, 21-23)과 '누룩'(출12:14-20)의 이미지다. 어린 양으로 성경 전체의 주제를 삼을 만하다고 말한 주석가도 한 둘이 아니다.³"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라는 이삭의 질문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하는 침례 요한의 말에서 대답을 찾게 된다(요1:29, 36). 어린양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참고한 성경구절을 들자면 이사야 53:7, 베드로전서 1:19 및 요한계시록 5:6-14이다. 요한계시록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호칭한 횟수가 무려 28회나 된다.
유월절의 이야기를 생각해 볼 때 분명 누룩은 악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원래 유월절은 누룩이 안 든 빵의 절기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절기가 진행되는 일 주일 내내 유대인들이 누룩을 전혀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출12:15이하; 13:6-7; 23:15; 34:18; 레23:6; 민28:17; 신16:3도 보라). 그것은 최초의 유월절에서 밀반죽에 누룩을 넣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관행으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누룩 넣은 반죽이 부풀기를 기다릴 겨를이 없었던 상황에서 생긴 풍습이다. 하지만 신약에서 누룩은 온갖 종류의 악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쓰인다. 이를테면 거짓된 가르침(마16:5-12; 갈5:9), 위선(눅12:1), '괴악하고 악독함'(고전5:6-8) 등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누룩이 그러하듯 악도 처음에는 별반 티나지 않게 들어가지만 조용히 자라다가 종내에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원의 이미지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독수리'의 이미지도 같은 용도로 적잖이 등장한다(출19:4). 사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은 적의 공격에서 날개를 펴고 벗어나는 독수리의 활개짓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에 실어 구원해 낸 백성이다. 또한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이기도 한다(출19:5-6).
민수기
애굽의 노예살이란 잃어버린 죄인, 즉 어린 양의 피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의 처지를 상징한다. 그리고 가나안 땅이란 여호수아서에서 그러하듯 믿음으로 받게 되는 유산,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이 받을 상속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막상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을 신뢰하길 거부했다. 히브리서 3:19은 이에 대해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요약한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공연히 38년간을 광야에서 헤매며 애초의 믿음 없는 세대가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민수기 13:32과 14:9의 이미지는 먹는 것에 관한 것이다. 땅이 그 거민을 삼킨다든지 어느 한 백성이 그들의 원수들을 삼킨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모압 왕 발락은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 먹으리로다"(민22:4)하면서 접근해 오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한다.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보되 들소와 암사자처럼 보며(민23:22, 24; 24:9), 이스라엘이 펼친 진지를 보고는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다"고 표현한다(24:6).
신명기
신명기에서 애굽은 '쇠풀무'로서(신4:20)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기 살게끔 허락하셔서 그들을 단련하신 곳으로 묘사된다(창15:13-14; 왕상8:51; 렘11;4). 한편 이 풀무의 이미지는 지옥을 묘사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마13:42, 50; 창19:28을 보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4:24; 히12:29).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는 '불처럼 타오른다'(출15:7; 32:10-11; 신6:15; 7:4; 11:17; 수23:16; 왕하22:17; 욥19:11; 20:23; 시79:5; 89:46; 사5:25; 9:5; 13:13; 42:25; 렘4:4; 21;12; 15:14; 17:4; 21:12; 호8:5; 슥10:3). 그런데 이 '불'의 이미지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이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 즉 '불의 벽'을 둘러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모습을 나타낼 때도 쓰인다(슥2:5). 신명기 32장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와 이슬에 비유함으로써 시작된다. 땅이 비옥하려면 필경은 비와 이슬이 있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만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백성들이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비를 늘 내려주셨다.
지금까지 모세 오경에 등장하는 많은 이미지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더듬어봤다. 그 이유는 그 이미지들이 성경 다른 곳에서도 자주 반복되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상징을 이해함에 기초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인물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기까지 제대로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랄프 왈도 에머슨
제 2 장 역사서의 그림들
여호수아
구약 역사서에 등장하는 은유적 표현들은 기본적으로 대화와 몇몇 시 형태의 운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호수아 2:19에서 정탐꾼들은 '피'라는 말을 '생명'의 동의어로 쓰고 있다. 같은 용법이 레위기 17:11에서도 나온다. 어떤 사람이 머리나 팔에 피를 묻히고 있다는 것은 곧 그가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은 범인이라는 말이다(창42:22; 레20:11-13, 16,27: 삼하1:16; 3:29; 4:11; 왕상2:31,33, 37; 사59:3). 비슷한 이미지로는 에스겔서에서 파수꾼이 그 성읍에 사는 사람들의 목숨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다(겔3:17-20; 23:37, 45; 33:4-8).
사사기
드보라의 노래(삿5장)는 시스라에게 거둔 하나님의 승리를 극적인 방식으로 그리다가 막판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삼손이 자기 아내를 암소에 비유했을 때 그 아내 기분이 어땠을는지 궁금하다.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삿14:18).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가 암소라는 표현을 썼을 때는 정녕 게으르고 탐욕스러운 사마리아의 부유층 여인들을 가리킨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답게 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짐승처럼 다루실 것이라는 말이다.
룻기
룻기 2:12의 보아스의 말은 표현도 아름답거니와 영적인 의미도 풍부하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날개 아래 보호받는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어미닭이 그 날개 아래 병아리를 품는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다(마23:37; 눅13:34; 시17:8; 57:1; 91:4). 이방 여인 룻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룻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엡2:11-22).
사무엘
사무엘상 25:23-31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에게 보장된 안전("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의 안전치 못함("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을 비교하며 말하고 있다(삼상25:29). 이런 표현이 물매 던지는 일에 문외한이 아닌 다윗에게는 잘 와닿았을 것이다(삼상17:50). 어느 땅에서 거민을 물매 던지듯 내친다는 표현은 심판의 상징으로 자주 쓰이는 이미지이다.
사무엘하 14장에서 드고아의 슬기있는 여인은 다윗을 압살롬과 화해시키려고 두 가지 흥미로운 비유를 내놓는다. 그것은 '숯불'(7절)과 '땅에 쏟아진 물'(14절)이다. 마지막 남은 아들이 곧 그 과부에게는 마지막 남은 숯불이거니와 그 아들이 죽는다면 마지막 불씨가 꺼지듯 그 여자를 따뜻하게 해 줄 '가족'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고아의 여자는 다윗이 죽은 다음 압살롬을 '이스라엘의 등불'이 될 유일한 희망으로 보았던 것이다.¹
'땅에 쏟아진 물'(삼하14:14)이란 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 무엇을 가리키는 데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쏟아진 물을 거둘 수 있는 재간이 없는 법. 여자가 의도한 대로 다윗은 마침내 압살롬을 불러들인다. 여자의 말인즉 다윗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물을 땅에 쏟듯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으리라는 것이다.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송가는 시편 18편에서도 반복되는 내용인데, 군인이자 야외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 자연경관을 보면서 발견한 이미지들을 원용하여 부르는 시라 하겠다. 다섯 번에 걸쳐 다윗은 하나님을 '반석'이라 부르며(2-3, 32, 47절), 세 번은 '피난처'라 부른다(3, 31절).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표제가 붙은 시(삼하 23:1-7)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지 요약되어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도자란 폭풍 후에 새날의 여명과도 같은데(4절), 아마 이같은 표현을 쓰면서 다윗은 일찍이 사울의 왕권을 폭풍이었다고 보고 자신의 왕권을 새 아침에 비유한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통치자는 새움이 돋게 하지만(4-5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통치자는 가시만 낼 뿐이라는 것이다(6절).²
열왕기
성경에서 '멍에'의 이미지(왕상 12:4, 9-11, 14, 19, 21)는 창세기 27:40에서 맨 처음 등장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게 된 것은 곧 멍에를 메는 일이었다(출6:6-7). 하나님께서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해 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실 때에도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사 10:24-27; 14:25). 동물이라도 가혹하게 다루지 말라는 것은 자비로운 뜻에서 비롯되었을 법, 즉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묶지 말라는 법(신 22:10)이 바울에 이르러 신자들이 죄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하는 표현으로 변용된다(고후6:14). 이스라엘의 배도는 하나님의 멍에를 벗는 일로 묘사되며(렘2:20), 또한 이방 신들의 멍에를 대신 메는 일이기도 하다(시106:28을 보라).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예레미야는 기본적으로 '멍에의 선지자'였다.
앗수르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왕하 19:20-34; 사 37:21-35) 이사야가 예루살렘을 가리켜 '시온의 처녀 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사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의 특허상표와도 같은 것이다(렘14:17; 18:13; 31:4, 21; 애1:15; 2:13; 암5:2을 보라).
이사야는 침공한 앗수르군을 들의 풀과도 같고 지붕 위에 널어놓은 풀과도 같다고 비유한다(왕하19:26; 시129:5-7). 이 풀들은 뿌리를 내릴 수 없으므로 햇볕에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 또 앗수르군을 코가 꿰여 질질 끌려가는 짐승의 운명에 비유한다(왕하19:28; 35-37참조).
열왕기하 21:13에는 두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건축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접시를 닦아 말리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줄이나 추는 '건축'에 소용되는 것이건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들을 '파괴'의 용도로 쓰신다는 것이다(사34:11; 애2:8; 암7:7-9). 우리가 접시를 닦아 말리는 것은 다시 쓰고자 함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예루살렘에서 악한 통치자들을 깨끗이 제거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은 자들로 다시 새출발을 하게끔 하신다.
역대기
사자의 비유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대상12:8; 삼하17:10을 보라). 수문이 무너져 물이 쏟아지는 이미지(대상14:11)는 사무엘하 5:20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나그네와 우거한 자'(대상29:15)란 표현은 아브라함이 맨 처음 썼던 것이다(창17:8; 23:4; 28:4; 출6:4; 히11:13 참조). 신약에서도 이 표현이 나타난다(벧전2:11). 장막에 거하며 살았던 족장들은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굳이 정착하려는 생각이 없었다(히11:13-16). 롯이 장막생활을 버리고 소돔성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사실상 파멸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었다(창13장).
"가장 바람직한 시는 사람의 생각 속에 그 시의 여운이 남게 하거나
감정의 여운이 여전히 남아 있게 하는 것이다." - 루시 쇼우-
제 3 장 시가서의 그림들
성경의 시가서란 곧 하나님의 진리를 상상의 기법으로 전달하여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정신을 일깨우는 책들이라 할 수 있다.¹하나님께서도 당신의 계시를 시 형식으로 전달하는 것을 적절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성경에 시가서가 들어 있는 것이며, 우리도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만약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복음서의 이야기들이나 바울의 교리적 논증을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욥
의 시가나 다윗의 시편들을 다룬다면 자칫 시에 함축된 의미를 놓칠 우려가 있다.
욥기²
욥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법정 이미지다. 이 책에는 욥이 자신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지 그 증거를 대보라고 여호와께 도전하는 법정의 상황이 깔려 있다(욥9:3, 14-16, 32-35; 10:2; 13:3, 18-19; 23:6; 31:36-37 참조). 여기서 욥은 제3의 중재자가 나타나 자신과 하나님을 중재하고 일을 마무리해 주기를 간청한다(9:33; 16:19; 19:25 참조). 욥의 주장인즉슨 하나님께서 공정한 재판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자신의 범죄가 무엇인지 확정짓고는 형벌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워낙 혹독하게 다루시므로 욥은 스스로를 말라비튼 이파리, 바람에 날리는 겨, 족쇄에 묶인 죄수, 다 낡아 헤진 옷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13:24-28).
또한 19:6-12에서 욥은 함정에 빠진 짐승, 불의하게 옥에 갇힌 죄수, 울타리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사람, 왕좌를 잃은 왕, 무너진 건물, 뿌리 뽑힌 나무, 포위 공격 당하는 도성 등의 이미지로 자신을 그린다.
욥기 18장에서는 죽음을 꺼진 빛(5-6절; 21:17 참조), 사람을 사로잡는 그물(7-10절), 뒤를 추적당하는 범죄자(11-15절), 뿌리 뽑힌 나무(16-21절; 24:20을 보라)등으로 실감나게 비유하고 있다.
29장에서는 욥이 왕과 같이 통치하면서(25절) 다른 사람들에게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하면서(16절) 지냈던 번영의 날들과 그때 주렸던 축복을 말한다. 그때 욥은 용감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짐승같은 자들 손에서 구출하여 부당한 착취를 면하게 해 주었는데(17절), 욥이 하는 말이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곧 단비와도 같았다고 묘사한다(22-23절).
욥기 38장이 창조를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두 개의 두드러진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즉 건물을 세우는 이미지(4절)와 아기를 탄생시키는 이미지(8-9절)이다. 욥기 41장에 나오는 악어에 대한 묘사는 어느 문학작품에서도 보기 드문 시적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이 괴물의 입은 문 같고, 등은 방패를 씌운 것 같으며, 숨을 쉴 때마다 불이 뿜어 나와 연기와 수증기를 만들고, 그 가슴은 단단하기가 바위 같고, 힘은 또 얼마나 센지 쇠를 지푸라기 다루듯 하고 청동을 썩은 나무조각 다루듯 한다는 것이다.
시편
시편 기자들은 그들이 펼치는 상상을 농사라든지 전쟁, 자연, 지리, 성전, 기상 등 갖가지 분야에서 원용해다 쓰기 때문에, 그것을 읽기만 해도 우리 삶의 현장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의 현실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시편 1편이 농경과 관련된 이미지로 시작되므로 한 번 그 흐름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우선 '나무'와 '겨'의 비교는 쓸모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의 비교임과 동시에 산 자와 죽은 자, 훌륭한 사람과 별볼일 없는 사람, 강한 자와 약한 자, 그리고 계속되는 것과 쉽게 변하는 것의 비교로도 쓰인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올리브나무에 비유되기도 하고(시52:8; 슥 4장을 보라), 종려나무에 비유되기도 한다(시92:12-15). 또 그 후손은 올리브나무의 새 순에 비유된다(시128:3; 144:12을 보라). 반면 악한 자는 얼른 봐서는 한껏 물이 올라 보이지만 곧 베임을 당할 나무 신세에 곧잘 비유된다(시37:35-36; 욥5:3; 사40:23-24; 겔17:6-10). 또 하나님께서 날려버리시거나 아니면 태워버릴 겨로 비유되기도 한다(시35:5; 83:13-16).
'풀'의 이미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는데 자주 쓰인다(시90:5-6; 103:15). 특히 악인의 말로가 어떻다 할 때 적절하게 쓰인다. 또 시편 1:1,6이 말하는 인생의 '두 길'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빈번히 등장하는 테마일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이미지이기도 한다(마7:13-14).
고집부리는 죄인은 말 안 듣는 노새나 말에 비유된다(시32:9).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은 목자를 순순히 따르는 양과 같다(시23; 77:20; 78:52, 71-72; 79:13; 80:1; 95:7; 100;3; 119:176).
시편 기자들은 원수를 으르렁거리며 덤빌 기회를 노리는 개에 곧잘 비유한다(시22:16, 20; 59:6). 또 시끄럽게 윙윙대는 벌(118:12)이나 먹이를 노리는 사자(7:2; 10:9-10; 22:13,21), 사납게 들이받는 들소(22:12, 21)에 비유하기도 한다. 시편 58편에서 다윗은 당시의 불의한 통치자들을 뱀(4절), 사자(6절), 게으른 달팽이(8절) 등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땅에 스며들어 사라질 물이요(7절), 사산아같은 운명이라고 보았다. 또 그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에 홍수가 덮쳐 이들을 쓸어갈 것이라고도 했다(9절).
원래 다윗은 무장(武將)이었고 당시의 이스라엘은 상비군이 늘 있었기 때문에 시편에서 군대와 관련된 이미지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보호하는 방패에 비유한 부분이 적어도 열다섯 군데는 된다(시 3:3; 7:10; 18:2, 30, 35; 28:7; 33:20; 59:11; 84:11; 91:4; 115:9-11; 110:114; 144:2). 시편 5:3에서 '바라리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라크'(arak)에는 흥미로운 두 가지 이미지가 들어 있다. 원래 이 단어는 '순서대로 배열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제사장이 제단에 희생제물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단어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을 늘어놓듯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곧 기도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단어에서 배운다(시141:2). 한편 '아라크'는 '전투 준비를 위해 도열하다', '제 위치에 가서 서다'는 뜻도 갖고 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는 시간은 한 날의 영적 전투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요, 군사들이 명령을 하달받고 제 위치로 가 하루의 의무를 준비하는 시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제사장의 이미지가 예배를 강조한다면 뒤의 군사의 이미지는 전투를 생각하게 한다.
시편에서 새와 관련된 이미지를 보는 일은 흔한 일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를 당해 '새처럼' 날아가 버렸음할 때가 없지 않다(시11:1).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시55:6)³
시편 12편은 사악한 자들이 내뱉는 말(1-4절)을 주님의 말씀과 비교한다(5-6절). 말하자면 악인이 설치는 이 세상은 온갖 감언이설과 거짓말, 뻐김으로 가득차 있지만 주님의 말씀은 흠이 없고 순수하며 맑다.
이스라엘 족속은 땅을 분배할 때 레위 족속만큼은 땅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분깃이 되어주실 것이었기 때문이다(민 26:62; 신10:9; 수13:14.33). 레위 족속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이 땅에서는 영원한 분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린 이 세상에서 어차피 나그네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만이 지금과 영원토록 우리의 분깃이다.
시편과 복합 이미지
시편에서는 짧은 한 장에서도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시편을 마무리짓기 전에 복합적인 이미지가 들어 있는 시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련 38편은 믿는 사람이 생활 가운데 죄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해 여러 가지 그림을 내놓고 있다. 아버지에게 벌을 받는 고통(1-2절), 병을 앓는 고통(3, 5-8, 10절; 32:3-4), 물에 빠지는 고통(4절), 무거운 짐을 지는 고통(4, 6절)등이 그것이다. 한편 인생이 빠르고 짧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이미지를 통해 호소력 있게 말해 준다. 손뼘(5절), 혹은 한숨(5, 11절)처럼 짧고 허깨비처럼 허망하며 이방인같이 살다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시편 49편은 부를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죽음은 우리가 돈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55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폭풍우에 비유한다(6-8절). 또한 사나운 짐승에 쫒기는 것만 같고(10-11절), 악을 이웃하여 사는 것 같으며(15절), 전쟁이요(18, 21절), 정직하지 못한 친구들한테 사기당하는 것 같은(20-21절) 처지라고 말한다. 58편에서는 짐승 같은 인간들이 소개되는데, 어떤 자들은 뱀 같으며(4절), 사자같이 사나운 인간들도 있고(6절) 민달팽이처럼 느려 빠진 자들도 있다(8절). 시편 59편은 다윗의 원수들을 마구 짖어대는 개들로 비유하며(6, 14-15절), 그들의 짖어댐을 또한 예리한 칼날로도 비유한다(7, 12-13절). 시편 68편은 원수들은 죄다 연기처럼 날아가 버리고 초처럼 녹아버리게 해 달라는 다윗의 기도다(2절). 시편 69편에는 다윗이 물에 빠져 허덕이는 이미지가 나오는데(1-2, 14-15), 이같은 그림은 시편 18:4-6, 16-19; 32:6; 42:7; 88:7, 16-18과 130:1에서도 반복된다. 시편83편에서 아삽은 원수들이 똥처럼 취급받기를 원하고(9-10), 검불같이 되고 겨처럼 날아가 버리길 원한다(13절). 또 바람에 번지는 불길로 싹 타버리는 숲처럼 되는 꼴을 보고 싶어한다(14-15)
시편 90편은 모세에게 헌정된 유일한 시편인데, 아마도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신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인 듯하다(민13-14장). 시편 102편을 쓴 저자는 침울한 기분이었음에 틀림없다. 뼈가 마르는 알 수 없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인생은 연기처럼 스러져간다고 노래했으니 말이다(3절). 시편 106:39은 "저희는 그 행위로 더러워지며 그 행동이 음탕하도다"하고 말한다. 즉 여호와와 맺은 신성한 결혼 계약을 위반하고 다른 사람과 놀아나는 행위로 보는 것이다(출34:15; 레17:7;신31:16; 삿2:17; 렘3:2; 호4:12).
시련 119편을 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14, 72, 127, 162절), 음식(103절), 빛(105, 130절; 잠6:23; 벧후1:19 참조) 등에 비유한다. 시편 132편은 옷 입는 행위에 역점을 두고 이미지를 전개하고 있다. 제사장들은 의와 구원의 옷을 입으나, 원수들은 수치의 옷을 입는다. 시편 133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일치를 이루는 것을 향유와 이슬이 내리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다윗은 제사장이 아니므로 장막 안에서 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편 141편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분향으로, 그가 쳐든 두 손을 희생제물로 받아주셨다는 제사장적 표현을 쓰고 있다. 기도가 하나님께서 흠향하실 만한 것이 되려면 기도자가 마땅히 '입술의 문'을 지켜야 한다(3절). 또 다윗은 의인으로부터 듣는 꾸지람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과 같은 축복이라고 했다(5절; 잠9:8; 15:31; 19:25; 25:12; 27:5-6).
잠언⁴
잠언의 주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실용적인 지혜와 이를 따르는 사람들이 받는 축복이다. 잠언 스스로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하는 책이라 선언하고 있다(1:2). 잠언은 이같은 지혜를 여러 가지 이미지로 언급한다.5 지혜는 사람이 달라 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장신구요(1:9; 3:22; 4:9), 품위 있는 귀부인이며(1:20이하; 8:1-11), 보물이요(2:1-6; 3:16-18; 8:10-11), 향연이며(9:1-6), 또한 '도'요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다(2:8-22; 3:1-6, 23; 4:11, 14-15, 18-19; 15:10, 19, 24). 지혜의 또 다른 이미지로는 화환이나 목걸이 같은 것도 있는데, 이는 지혜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면이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또 지혜는 왕관과 같아서 이를 지닌 사람으로 하여금 왕 노릇하게 한다(4:9; 14:18, 24). 지혜를 말하면서 아비나 어미에 자주 결부시키는 까닭은 지혜야말로 부모가 자녀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보라는 뜻에서이다. 지혜,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는 명철함이야말로 자녀가 부모에게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꿀이야말로 잠언의 단골 메뉴 중 하나다. 유쾌한 말은 꿀통과 같다 하는데(16:24) 이는 그런 말들이 꿀같이 단 지혜를 나눠주기 때문이다(24:13-14). 우둔한 자는 어리석음을 양식으로 삼으나(15:14)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는 것과 같다(15:15). 꿀은 또 남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25:27).
잠언이 많이 얘기하는 것 중 하나는 혀, 혹은 사람의 말인데 이에 관해서는 일일이 다 언급하기가 괴로울 정도로 많다. 솔로몬은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다투는 아내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고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게 한다'고 말했다. 반면 어진 아내는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요, 샘이며, 사랑스런 암사슴 같고 암노루 같다고 한다(5:19). 또 고집센 아내는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는 '좁은 우물'에 비유한다. 잠언 31장은 성경에서 이상적인 아내 상을 배울 수 있는 고전이다.
잠언 26장은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여러 이미지를 담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여름에 눈이 오는 것과 같고 추수 때 비가 오는 것과 같이 부적당한 노릇일 뿐만 아니라 도무지 이익이 없는 짓이다(1절). 그것은 마치 자기 이마를 깨라고 투석기에 돌을 달아주는 일과 같다(8절). 도무지 쓸데없는 짓이란 말이다. 어리석은 사람을 통해 말을 전하는 일은 스스로를 불구로 만드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6절). 또 어리석은 사람에게 지혜를 주려 해 봤자 아무 소득이 없고(7절) 도리어 남을 다치게 할 따름이다(9절).
전도서
인생은 무거운 짐으로서(1:13; 3:10) '사람에게 중한 것' 이다(6:1). 그래서 사람은 오로지 고통과 슬픔으로 몰고 간다(2:23). 이렇게 인생이 불만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안목은 한없이 높은 반면 인생이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턱없이 못 미치기 때문이다(2:10; 4:8; 5:11; 6:9).6 전도서 5:3은 단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낮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임을 말해 주는 것이고, 말이 많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전도서 12:1-7은 나이 먹고 죽는 과정에 대해 그 어느 문학서보다도 뛰어난 시적 그림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솔로몬은 사람의 몸을 집에 비유하면서(욥4:19; 고후5:1-2; 벧후1:13) 나이 먹어 노쇠하는 과정을 집어 낡아가는 과정에 비긴다.
전도서 12:11은 전도자의 말을 가축을 모는 막대기에 비유하는데, 이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쿡쿡 찌르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며, 또 못으로도 비유하는데 거기 매달려 연구를 하게 함으로써 결국 현명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아가7
성경의 다른 책에 비해 사람들이 그리 눈여겨보지 않는 이 책에 담긴 동양적 상상의 풍요로움은 치밀한 주석가가 한 번 덤벼볼 만하다. 먹고 마시는 맛, 향료의 향, 자연의 아름다움 등이 아가서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주요 소재들이다. 솔로몬의 사랑은 포도주보다도 낫고(1:2, 4; 4:10), 그가 풍기는 향기는 향유보다 낫다(1:3, 13-14), 그러나 솔로몬 자신보다도 그의 연인에게 향유의 이미지가 적용되는 구절이 더 많다(1:12; 4:10-11, 16; 7:8). 연인이 서로 묘사하는 데 자연에서 끌어 온 온갖 이미지들을 원용하고 있음은 눈여겨 볼 만하다(2:1-3, 9, 14, 17; 4:1-5, 12-15; 5:10-16; 6:4-9; 7:1-9). 4:12-5:1, 6:2, 8:13에서 정원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물론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노래하는 것이다. '잠근 동산'(4:12)이란 표현에서 여인의 순결함, 즉 자기 연인에게만 헌신한 모습을 시사받는다. 고대 동양에서 정원은 쾌락을 누리는 특별한 장소였다. 아가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혼인의 사랑이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즐길 만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문명화되는 길은 상상에서 출발한다.
꿈을 꾸는 것은 실체를 향한 첫걸음이다." 노만 카슨스
제 4 장 예언서의 그림들
예언자들은 보는 자임과 동시에 듣는 자였다. 그들은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고루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들이 본 것을 같이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예언자들이야말로 그림 같은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이며, 메시지를 확실히 전하기 위해 극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사야
이사야란 이름은 '주님의 구원'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이름이 시사하는 바대로 이사야서의 주제는 구원이다. 이사야서에는 구원의 다섯 가지 내용이 들어 있다.
(1) 앗수르 침략에서의 구원
(2) 바벨론 포로생활에서의 구원
(3) 장차 유대인들이 이방 민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구원
(4) 장차 새왕국이 서면서 땅이 묶임에서 벗어나는 구원
(5) 하나님의 수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와 심판에서의 구원
많은 이미지 중에서 이사야가 구원을 말하기 위해 동원하는 그림에는 깨끗이 씻김(1:18; 4:4), 죄의 얼룩이 빠짐(44:22; 43:25), 잔치(25:6-12; 55:5; 12;3), 새로운 출애굽(11:15; 43:14-20; 51:9-11), 병이 나음(1:5; 6:10; 30:26; 33:24; 53:5; 57:18-19; 58:8), 새날의 여명(61:1-3, 눅1:78-79 참조), 멍에를 벗음(9:4)등이 있다. 출애굽의 이미지와 관련있는 '대로'의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11:16; 19:23; 35:8; 40:3; 62:10).
이사야서 첫 장의 이미지는 서글픈 상태에 있는 유다의 모습이다. 즉 유다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아이같고(1-4절), 얻어 맞고 병들었는데 아무도 돌봐주지 않으며(5-6절), 벌판에 아무렇게나 선 오두막이며(7-9절), 소돔과 고모라며(10절), 창녀요(21절), 싸구려 금속에 물탄 술이며(22절), 시드는 오크나무요 말라붙은 정원 같아 이제 곧 불쏘시개로나 쓰일 처지라는 것이다.1
한편 이사야는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예언을 했다. 그는 앗수르를 사자(5:29), 벌(7:18), 날카로운 칼날(7:20), 불어오른 홍수 물결(8:5-8), 하나님의 무기(10:5, 15, 24) 및 곧 밑둥이 잘려 넘어갈 나무(10:33-34)2 등으로 다양하게 비유한다. 그리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모압은 거름통에 던져져 그 곳을 헤엄쳐야 할 운명이다(25:10-12). 또한 애굽은 유다가 믿고 의지할 만한 그늘이 되지 못한다(30:1-7; 31:1-3; 36:6).
이사야서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이미지 가운데는 죄인을 다 헐어 빠진 옷에 비유하는 것이나(50:9; 51:7-8; 64:6), 가증한 나뭇가지(14:19), 일렁이는 바다 물결(57:20-21), 바람에 날리는 겨(17:13-14), 말라 시드는 풀(15:6; 37:27; 40:6; 51:12)에 비유하는 것도 잊을 수 없다.
이사야 28장은 특별히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장이다. 여기서 백성의 심판은 바람에 날려 꺽이고 발길에 밟히는 시든 꽃으로 그려진다(1-4절, 17-19절). 또 익을 대로 익어 제풀에 벌어져 삼키우고 마는 무화과(4절),
잔치에서 엉망으로 취해 토하며 비틀거리는 취한(7-8절), 제대로 덮을 거리가 갖추어지지 않은 침상(20절), 곧 타작할 추수거리(23-29절) 등으로 묘사된다.
이사야 30:27-33은 하나님의 심판을 생생하게 묘사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연기와 불길같이 임하며 그분이 내뿜는 숨은 급류처럼 거세다. 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열방은 조리채에 담겨 흔들리듯 하고, 짐승처럼 한 조각씩을 물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주님의 분노는 폭풍우처럼 임하고 그분의 숨결은 불붙는 유황 연기와 같다는 것이 이사야가 묘사하는 심판의 이미지다.
이사야 40장은 랍비들이 전통적으로 '위로의 책'이라 명명한 부분이다. 선지자는 바벨론의 패망을 미리 내다보면서 오래지 않아 '복역의 때'가 끝나고 유다가 귀향하게 된다고 선언하는데, 여기서 예정된 기간을 채우고 귀향한다는 군대 용어를 동원하고 있음이 자못 흥미롭다.
이사야 49-53장은 특별히 하나님의 종 메시야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 하나님의 종은 우리가 알고 경배하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49:2에서 이 메시야는 무기에 비유되며 49:6에서는 빛에 비유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어머니처럼 보살피실 것이며, 신부의 단장처럼 귀히 여기실 것이다.
이사야 52장은 47장과 대조적이다. 왜냐하면 47장에서 비참하게 된 유다가 52장에서는 새로운 힘을 얻어 왕좌에 오르기 때문이다(1-2절).
54장에서 선지자는 약속된 미래 왕국과 그 영광을 묘사한다.
56장에서는 사악한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들은 눈먼 파수꾼이요, 귀먼 경비견이며,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삯꾼 목자들이라는 것이다(9-12), 59장에서 이사야는 왜 이 땅에 정의가 사라졌는지를 설명한다. 즉 나라의 지도자들이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61:1-3은 나라가 여호와의 도우므로 회복될 때 크나 큰 변화가 생길 것을 말한다. 62장은 다가올 왕국에 대한 더 많은 그림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의가 새벽 여명같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같이 빛난다는 것도 그 한가지다(1절).
이사야서를 덮기에 앞서 이사야는 말로써 뿐만 아니라 극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선지자임을 기억하자. 그가 두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도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아에서 따온 것이다(사7-8장). 그는 또한 사람들이 애굽에 기대려고 할 때 전쟁 포로 같은 차림을 하고 삼 년이나 보냈다. 애굽을 믿지 말라는 무언의 웅변이었던 것이다.
예레미야
예레미야의 사역을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그는 파괴자이며 건축가요 심는 사람이며(1:10), 한 도성이며 기둥이요 벽이다(1:18). 또한 복잡한 교차로에서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요(6:16; 31:21), 파수꾼이요(6:17), 시금석과 같은 사람이다(6:27). 그리고 또 병을 고쳐주는 의원이며(8:21-22), 희생양이며(11:19), 달리는 사람이요(12:5), 목자다(13:17, 20-21; 17:16, 23을 보라). 분쟁의 사람(15:10) 혹은 나무(17:8)로도 묘사되었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사역했던 대상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2장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즉 바람난 배우자 같고(1-8절), 구멍난 물탱크요(9-13절), 남의 나라 강가에서 술취한 자들이다(14-19절). 또 고약하게 변한 포도나무요(20-22절), 발정한 낙타나 나귀 같고(23-25절; 5:8; 31:18), 들통난 도둑같다(26-28절).
6장에서는 나라 전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전쟁에 속수무책인 섬세한 여인 같고(1-2절), 오염된 우물 같으며(7절), 황무지가 된 포도원이요(9절), 병이 있는데도 병이 없다고 속임당한 환자 같다(13-15절). 또 길을 잃은 순례자요(16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싸구려 금속이다(27-30절).
예레미야 3장에서는 '영적 간음'이란 주제와 아울러 배역함을 일종의 질병으로 앓고 있는 나라의 처지가 소개된다(22절).
한편 '멍에'라는 주제는 예레미야의 메시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당시는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써 멋대로 멍에를 벗어 던진 형편에 비유된다(2:20; 5:5). 예레미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 멍에를 만들어 이고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어쨌든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27장).
예레미야야말로 '마음'의 예언자라 할 수 있다. 이 '마음'이란 말이 예레미야서에 60회도 더 나온다. 예레미야는 신앙의 내면성을 무척이나 강조한 예언자이다. 예레미야에게 가장 고통을 준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짓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턱없는 평화의 메시지로 백성을 속이고 그릇된 길로 이끈 존재들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이들을 그저 바람일 뿐이고(5:13), 엉터리 의사들이며(6:13-15), 제 실속만 차리는 목자요(23:1-8), 길을 잘못 안내해 미끄러운 위험한 길로 가게 만드는 안내자(23:9-12; 6:16; 18:15), 부실해서 갖다 버려야 할 무화과 열매(29:17; 24장) 등등으로 힐난한다.
'눈물의 예언자'로 알려진 예레미야는 머리 속에 '물의 샘'이라도 있어 더 울수 있기를 원했다(9:1, 10, 18; 13:17; 14:17, 애1:16; 2:11, 18; 3:48). 이 점에 있어 그는 '슬픔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방불케 한다. 사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생각하기도 했다(마16:14).
예레미야 10:1-16에서는 우상들을 다루는 것이 나오는데, 그 내용이 이사야 40:18-20과 44:6-20의 내용을 연상케 한다. 예레미야에게 우상이란 무슨 신, 그저 '갈린 기둥이요 사람에게 메인' 것일 따름이다(10:5).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장면은 욥기 23:12과 신명기8:3, 요한복음4:34, 에스겔2:8과 3:3, 요한계시록 10:10 등 성경의 여러 군데를 생각나게 한다.
허리띠(13장), 토기장이(18-19장), 멍에(27-28장), 돌을 애굽에 파묻는 행위(43장) 등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일종의 '행위설교'(action sermons)로서 추상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데 매우 유용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늘 당시에 일어난 어떤 사건들을 메시지를 전하는 '산 도구'로 삼을 줄 알았던 예언자다. 예컨대 노예들을 일시적으로 풀어준 사건이라든지(34장), 땅을 다시 사들일 수 있는 기회(32-33장), 레갑 족속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된 일(35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예레미야는 유다를 양떼에 자주 비유했다(10:21; 13:17, 20; 23:1-3; 25:34-36; 31:10; 49:20; 50:6, 17). 또한 그 어느 예언자보다 갑자기 찾아오는 여성의 산통을 심판에 비유한 예언자가 예레미야다(4:31; 6:24; 13:21; 22:23; 30:6; 48:41; 49:22, 24; 50:43).
예레미야서 후반부는 심판의 예언으로 마감되는데(46-51장) 그야말로 전형적인 은유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마구 베는 칼날(46:10, 14), 베어 넘어가는 나무(46:22-23), 홍수의 물결(47:2; 51:55), 먹이를 순식간에 낚아채는 독수리(48:40), 출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48:41; 49:22-24; 50:43), 추수(49:9; 51:2, 33), 잔(49:12; 51:7;), 먹이를 쫓아 덮치는 사자(49:19; 50:44; 51:38) 등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애가
예루살렘 함락을 슬퍼하는 예레미야애가의 주요 이미지 중 하나는 바로 '삼키움'이다. 즉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은 주께서 야곱의 거처를 삼키신 것으로 묘사된다(2:2, 5, 8). 예루살렘은 여왕과도 같았으나 이제 과부요 여종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1:1). 그리고 한때 자랑스럽던 왕관은 땅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5:16). 백성은 그물에 걸렸으며(1:13), 그들 스스로 저지른 죄의 멍에를 무겁게 메었고(1:14) 술틀에 넣고 꾹꾹 밟히는 신세가 되었다(1:15).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처참하게 전락한 자기 동포들을 향해 마음을 쏟아부으며 고통을 함께한다(2:11).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마음을 쏟아 간청하라고 호소한다(2:19). 예레미야는 자신이 죽어 어둠에 갇혀 벗어날 수 없게 된 영혼과 같다고 느끼며 민족의 처지를 괴로워한다(3:1-9).
죄의 대가가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예레미야애가처럼 생생히 보여주는 책도 드물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생활을 잃고 비틀거릴 때엔 언제나 이 책의 메시지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3
에스겔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에스겔도 원래 제사장이었다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인물이다. 에스겔은 스스로를 밧줄로 묶어(3:24-27) 다가올 전쟁을 표징한다(4:1-17). 또 이발사 노릇을 통해서(5:1-17),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행위(6:11; 21:14)나 여행가는 시늉을 통해(12:1-16), 음식을 먹으며 몸을 떠는가 하면(12:17-20), 슬픔에 찬 사람처럼 신음하는 행동(21:6, 12)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에스겔이 보는 하나님의 환상은 극적이다. 그가 첫 번째로 본 환상은 폭풍우였다(13:13). 다음으로는 바퀴 안에 또 바퀴가 들어 있는 희한한 모양의 비행체에 실려 있는 하나님의 옥좌 환상이다(1:15-28). 이 환상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이 세상 가운데 당신의 섭리를 베푸심으로 종국에는 당신께로 영광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7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사나운 짐승이 덮치듯(3절), 잠들었던 자가 화들짝 놀라 깨어나듯(5절), 뜨거운 액을 들이붓듯(8절) 그렇게 임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그러해야 했듯 에스겔 또한 바벨론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씨름해야 했다(13장). 벽이 무너졌으면 고쳐야 할텐데 이 거짓 예언자들은 '폐허를 맴도는 여우'처럼 어디 죽은 시체라도 안 남아 있는지 살피고 다녔다(4절). 포도나무 이미지는 17장에서도 반복되거니와 이번에는 '독수리'(3절, 느부갓네살을 의미한다), 백향목(다윗 왕가를 의미한다), 연한 가지 끝(3-4절, 여호야긴 왕), 씨앗(5-6절, 시드기야), 두 번째 독수리(7-8절, 애굽), 동풍(10절, 바벨론의 침공), 두 번째 가지 끝(메시야) 등등의 이미지가 부가된다.
한편 바벨론은 번개처럼 번뜩이는(21:9-10) 칼날에 비유된다(21:1-5, 19). 22:1-12에서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죄가 어떤 것인지 조목조목 따지고 있는데, 여기서 유다 나라 전체가 금속에 붙은 녹과 같고(17-22절), 그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물어뜯는 사자와 이리요(23-27절), 자칭 예언자들은 거짓말로 무너져 가는 담을 회칠하는 거짓말쟁이들로 나온다(28-31절).
에스겔 29-32장은 애굽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서 애굽은 하나님께서 그물로 건져 올린 '큰 괴물'로 일컬어지는데(29:3; 32:1-8), 사실은 갈대 지팡이처럼 약해서 유다 백성이 믿고 몸을 의지할 수 없으며(29:6), 사실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주시는 상급이다(29:17-20).
37-48장은 장차 되어질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언하는 대목이다. 이방나라들은 무덤 같고 거기 널려 사는 유대인들이란 무덤에 널린 마른 뼈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마른 뼈들에 생기를 주어 되살아나게 해서는 자기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33:1-14).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나라들은 희생제물과도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39:17-20; 사34;6; 렘46:10; 습1:7; 계19:17-21).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과 예루살렘 도성에서 떠나는 광경을 목도했다(8:4; 9:3; 10:4, 18-19; 11:22-25). 그러나 그 영광이 새 성전과 새 도성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본 예언자 또한 에스겔이다(43:1-5).
다니엘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꿈과 환상들의 내용이 워낙 생생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그 내용이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해가 가는 것이로되, 직유 혹은 은유라 할 만한 것들은 별로 많지 않다. 천으로 된 옷을 입은 사람을 설명할 때 불, 보석, 금속 및 번개가 등장하는 정도다(10:4-6; 계1:12-16). 이 책에서 제국 하나가 뿌리 뽑히듯 멸망하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11:4; 신28:63; 29:28; 왕상14:15; 대하7:20; 시52:5; 잠10:30; 12:3; 암9:15을 보라), 사실 이 표현은 예레미야가 훨씬 더 많이 사용한 것이다(1:10; 12;14-17; 18:7; 24:6; 31:28, 40; 42:10; 45:4). 이와 관련해 마태복음 15:12-13도 볼 만하다. 다니엘서에서 적의 침략은 늘 폭풍과 홍수에 비유되고 있다(단11:40). 그리고 부활은 잠에서 깨어남에(12:2; 마9:24; 요11:11-14; 시76:5; 행7:60; 13:36; 고전11:30; 15:6, 18, 20; 살전4:13-18), 신실한 사람은 빛나는 별에 비유된다(12:3; 마13:43; 요5:35; 빌2:15; 계1:16, 20; 2:28; 8:10-12; 9:1; 12:1-4; 22:16).
호세아
통틀어 200절이 채 안되는 호세아서에서 내가 찾은 직유와 은유는 대략 여덞 가지 정도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혼인 계약을 맺으셨는데 그 백성이 '창녀'처럼 이방 신들을 섬긴다는 것이다(4:10-18; 5:3-4; 6:10; 9:1). '되돌아감' 혹은 '복귀'가 호세아서에서는 퍽이나 큰 주제이다(2:7; 3:5; 5:4; 6:1; 7:10; 12:6; 14:1). 죄에 빠진 북왕국 백성을 그리는 데 호세아가 동원하는 이미지는 꽤 된다. 고분고분한 양이 아니라 뻗대는 송아지(4:16; 10:11), 창녀(4:18; 5:1-7), 달궈진 화덕처럼 음욕에 불타는 간음자들(7:4-7), 설 구운 빵(7:8), 멍청한 비둘기(7:11-12; 11:11), 제대로 맞지 않는 활(7:16), 들나귀(8:9), 뿌리가 말라 과실을 맺지 못하는 나무(9:16), 묵은 땅(10:12), 안개, 이슬, 겨, 연기 등등이다.
호세아서가 강조하는 것은 계약에 충실하지 못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어 그들이 돌아올 때면 언제고 환영하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이다.
호세아 7:9은 이스라엘을 갈수록 늙어가는데 그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는 우둔한 나라로 본다(삿16:20). 불경한 이방인들과 마구 섞인 대가로 이스라엘은 원기를 잃게 된 것이다. 호세아 10:4은 좀 현대적인 분위기로 이렇게 말한다.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한 인진 같으리로다." 아모스6:12을 방불케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이스라엘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햇열매와도 같았다(9: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메고 있던 애굽의 멍에를 벗기셨고 또한 그들을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이끌겠다고 언약하셨다(1:14).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을 향해 돌아섰고 바람을 먹고 살 듯 헛된 것을 따르기 시작했다(12:1). 이제 그들은 입술의 열매, 즉 고백과 회개의 말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치유하실 것이다(14:1-2).
요엘
요엘서에서 두드러진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메뚜기 재앙이다. 이 메뚜기떼는 적이 침공하듯 땅을 덮치며(1:6; 2:2, 11,25) 일몰의 태양빛이 번지듯 땅을 뒤덮고(2:2) 맹렬한 불길처럼 땅의 모든것을 집어삼킨다(2:9). 이러한 재앙은 다름아닌 백성이 회개해야 할 때로서 그저 겉으로만 회개하는 정도여서는 안됨을 말해 주는 것이다(2:13). 요엘은 이 재앙을 다가올 '주님의 날'의 한 전조로 보았는데, 이 날은 하나님께서 추수하시는 날로서 모든 민족을 그들의 죄에 따라 심판하시는 날이다(3:13).
아모스
원래 아모스는 농부였다가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가 전하는 메시지 속에는 유독 농경에 관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아모스는 당시 사회 상류층 여성들을 빚대어 '바산의 암소들' 이라고 마구 비난했다(4:1-3). 이 암소들은 장차 도축되고 말 것이다. 아모스 당대의 실정은 가난한 사람들이 형편없이 취급되고 억울하게 착취받는 현실이었다(5:7-13). 그래서 예언자는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5:24). 그러나 백성이 참으로 회개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기근을 허락하시리라 했다(8:11-12).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곡식을 체질하듯' 하실 것이다(9:9; 눅22:31; 사30:28). 그러나 아모스의 끝부분은 희망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 즉 다윗의 집이 지금은 무너진 장막이지만 언젠가는 회복될 것이며(9:11; 사33:20; 54:2; 렘10:20),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다시 심으실 것이며, 다시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9:15).
오바댜
에돔은 마치 별 사이에 깃들인 양, 그래서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양 뽐내지만(4절) 하나님께서 손을 뻗쳐 이들을 끌어내리실 것이다. 오바댜서의 5-6절은 예레미야 49:9과 평행절이다. 여하튼 언젠가 유다인들이 불길이 되어 에돔을 초래처럼 불살라버릴 것이다(18절).
요나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고기 뱃속에 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온 일을 자신의 죽음과 매장, 부활을 가리키는 징조로 말씀하셨다(마12:38-41). 요나는 깊은 심연을 자신을 가두는 감옥으로 말한다(2:6). 그곳에서 그의 영혼은 곤하기 이를 데 없었다(2:7).
미가
1:3-4에서 심판으로 오시는 주님을 초처럼 녹아내리는 산의 이미지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준다(시18:7 이하; 144:5; 사64:1). 미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치유될 수 없는 상처 때문에 죽어가는 모습으로 현실을 이해했다(1:9; 렘10:19; 14:17; 15:18; 30:12, 15; 애2:13; 나3:19; 사1:5-6). 백성의 지도자라는 치들이 가축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듯 백성을 착취하고(3:1-3), 재판관들이 가시와 찔레 울타리 같은 형편이었던 것이다(7: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법정으로 소집하시고(6:2) 재판을 열겠다는 경고를 내리신다. 이스라엘을 마침내 모든 대적을 굴복시키고 아침 이슬같이 단비같이 될 것이며(5:7), 양떼 가운데 든 사자같이 될 것이다(5:8). 결국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다시 양떼같이 모으시고 축복을 내려주시게 된다(2:12).
나훔
하나님의 진노가 불같이 퍼부어져(1:6) 니느웨는 마른 지푸라기처럼 타버리고 말 것이다(1:10). 그리고 그들을 침공해 들어오는 군대는 빠르기가 번개 같다(2:4). 노예로 끌려간 소녀들은 연약한 비둘기처럼 훌쩍인다(2:7; 사38:14; 겔7:16). 이제 니느웨는 더 이상 사자떼가 아니며(2:11) 물이 빠져 나가는 못처럼 이내 말라 붙게 된다(2:8). 이 표현은 어쩌면 니느웨 도성을 빠져나가 피난가는 광경을 가리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좌우간 이 도성에 밀어닥친 적군은 메뚜기떼처럼 모든 것을 휩쓸고 말 것이다(3:15-16).
하박국
이 예언자는 침공해 오는 바벨론 군대를 묘사하면서 그들의 말은 빠르기가 표범과 같다 하고, 그 군병들은 독수리와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군대는 사막에 불어닥치는 강풍처럼 사방을 휩쓸면서 바람이 모래를 일으키듯 마구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리라 한다(1:8-11). 하박국 2:14의 약속을 볼 것 같으면 이사야 6:3과 11:9, 시편72:19의 내용을 방불케 한다. 그리고 3장에서 하나님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시는 광경을 그리는데, 그분의 위엄을 일출에 비유하고(4절), 그분의 다가오심은 병거를 탄 정복자의 모습에 비견된다(8-9절; 시114편). 주님의 오심에 놀란 산들이 떨고(10절) 열국은 주님의 발에 짓밟히며(12절) 바다도 흔들린다(15절). 이때 바다는 다시 한 번 열국의 상징이다. 하박국 또한 마지막은 긍정적인 이미지로 끝난다. 즉 주께서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신다"는 것이다(19절).
스바냐
하나님의 심판은 땅을 휩쓰는 태풍과 같고(1:2-3; 2:2; 창6:7) 희생을 준비하고 벌이는 잔치와 같다(1:7; 사34:6; 렘46:10; 겔39:17-20). 그런데도 백성은 스바냐가 보기에 장님이나 다를 바가 없어(1:17) 그들의 피와 살이 티끌과 분토처럼 되고 말 것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아끼시고 또한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불에 비유되는 경우가 많다(1:18; 3:8; 신4:24; 6:15; 시79:5; 슥8:2; 출20:5; 34:14).
이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서 열국은 겨와 같이 풀풀 날리고(2:2), 뿌리가 뽑히며(2:4),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이 된다(2:9). 그리고 마침내는 사막처럼 황폐하고 메마르게 된다(2:13). 스바냐 선지자는 탐욕스러운 통치자들을 사자나 늑대에 비유한다(3:3). 이들은 하나님의 불길에 결국 소멸되고 말 운명들이다(3:8). 이같은 이미지는 강렬하기도 하거니와 경악할 만한 내용이라 하겠다.
학개
이 예언자는 레위기의 정결 의식에 기초한 아주 도식적인 교훈을 펼친다(2:10-13; 레6:24-30; 민19:11-13; 겔44:17-19; 46:20).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주 부정하게 되어 부패한 상태이므로 정결하게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예언자의 주요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인'이 되게 하셨다(2:3). 인이란 알다시피 당시의 사람들이 문서에 서명 대신 사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룹바벨 총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마침내 오셔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패퇴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리라는 하나님의 날인이란 뜻이다.
스가랴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달아나려고 하지만 그래봤자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은 다 행하신다는 것이 이 예언자가 선언하는 바다(1:6). 차라리 하나님께 순종했더라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누렸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아주 빠르게 달린다(시147:15; 사55:11; 살후3:11).
스가랴 9:5은 부질없는 헛된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소망을 두는 산 소망과 사뭇 대조되는 것이다(벧전1:3). 스가랴 9장은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거둘 승리를 그려주는 장이다.
한편 스가랴 12장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이 어떻게 보호받을 것인지 예언하는 장이다. 하나님께서 이 도성을 이방 민족이 들이켜야 하는 패배의 쓴 잔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이때에 예루살렘은 단단한 바위가 되어(3절) 섣불리 공격하는 쪽이 도리어 다치게 된다. 유다는 활활 타는 불길이 되어 적들을 땔감 나무처럼 불사르고 말 것이다(6절). 그리하여 마침내 나라가 은과 금처럼 정련되는 것이다(13:9; 욥23:10; 시139:1-3; 말3:2-4; 벧전1:7; 4:12).
말라기
말라기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심판날, 즉 하나님의 불길이 용광로 불길처럼 일어나(4:1) 교만한 죄인들을 재처럼 불사를 그날(4:3)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성도들은 외양간에서 풀려나온 송아지처럼 기뻐 뛸 것이며(4:2; 사35:6), 사악함을 불살라버렸던 태양이 이들 의인들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을 비출 것이라 한다(4:2; 시27:1; 118:27; 사60:1, 19-20).
이리하여 구약의 맨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로 칠지모른다는 경고로 마감한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더 이상 저주가 없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끝나고 있다(계22:3).
"사람들은 어렵고 미묘한 논쟁거리들보다
비교와 보기들을 통해서 더 쉽게 사로 잡힌다.
사람들은 잘 쓰여진 책보다는
잘 그려진 그림을 보고 싶어한다." 마틴 루터
제 5 장 예수, 교사 / 설교자
복음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극렬하게 반대한 무리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 그 자체도 거부하였다. 율법사는 '권위에 근거하여' 말하였고,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차이를 당시 일반 무리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주님의 가르침의 특징 중 하나는 상상력을 놀랍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직유, 은유, 수수께끼, 역설, 비유 등을 사용하셨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이땅의 일상적인 것들을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이용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귀에 말씀하시지 않고 눈에다 말씀하셨고, 그들은 이 말씀의 진리를 보고 응답하였다.
설교 철학
우리 주님의 설교 철학을(이런 용어가 가능하다면) 다음의 말씀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13:13-15, 52)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인간적인 이유를 위의 인용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주님 자신의 사역과 사람들의 조건, 이 두 가지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저주하기 위하여 진리를 감추신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자들이다. 진리를 비유 안에 감추신 이유는 사람들이 이 비유를 듣고 그게 무슨 내용일까 하고 호기심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피조물 가운데 있는 진리와 성경 안에 있는 진리를 결합하셨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고, 귀를 열게 할 수 있었고, 그들의 단단한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듣고, 보고, 이해하고, 돌이켜서, 용서를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에 비유해서 말씀하신다(눅8:11). 씨를 다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씨를 잘 보관해서 두지만 땅에 심지는 않는다. 2. 씨를 큰 돌이나 망치로 눌러서 쪼갠다. 3. 씨를 땅에 심어서 그 씨가 또 다른씨를 낼 수 있도록 씨의 가능성을 성취시켜 준다.
오늘날도 우리는 서기관과 율법사 같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한다. 우리 주님은 세 번째 방법을 취하신다. 그는 씨를 심으시고 추수할 수 있도록 가꾸신다. 여기서 처음에 심는 씨는 옛것을 가리키고, 후에 추수를 통해서 나오는 씨는 새것을 가리킨다. 그는 구약 성경으로 되돌아가서 바람, 발효, 도둑들, 추수, 소금, 양떼, 문, 길 등의 상징을 사용해서 말씀의 씨를 심는다. 이런 것들은 실상 우리의 삶에서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런 말씀의 씨들을 심는다. 우리 주님의 설교방법에 대해 로버트슨(F. W. Robertson)은 다음과 같이 설교의 세 가지 원리로 설명한다.
첫째로, 긍정적인 진리를 세우신다. 부정적인 오류의 파괴 대신에….
둘째로, 그 진리는 대립되는 두 가지 명제로 구성된다. 이것은 유교의 '중용'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셋째로, 이 영적 진리는 영으로 알 수 있다. 지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교리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암시적으로 제시하여' 가르치는 것이다.2
우리가 첫 번째 원리를 따른다고 해서 어떤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변증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긍정적인 진리를 알아야 잘못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진리는 두 가지 대립 명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어떤 절대적인 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설교자가 한쪽으로 치우치는 잘못을 경계하는 말이다.
세 번째 명제는 진리는 암시적으로 가르쳐지고, 직관적으로 파악된다. 이는 명제적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지성의 시적 측면을 인정하는 것이다.
20세기 설교자들은 분석과 설명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종합과 구체적 실례들을 상실하고 말았다.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는 이렇게 말한다. "지성의 기능은 지성만을 의지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지해 낼 수 있다." 예수님은 청중들의 지성을 무시하거나 모욕하지 않으셨다. 또한 그의 메시지를 사람들의 지성을 향해서만 전하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 속까지 파고들었고, 사람들의 직관을 건드렸다. 그는 상징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상상력을 불붙게 하였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의지에 도달하셨다.
비유3
우리는 먼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의 삼분의 일 정도가 비유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유는 삶의 어떤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나는 비유에 대한 논의를 여기서 출발한다. 사람들의 삶에서 인식될 수 있는 어떤 측면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다드 교수의 말로 하자면 '마음을 사로잡는' 다른 시각을 말한다. 우리가 비유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 그림은 거울이 되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준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소작인의 비유를 들을 때(마21:33-46), 그들은 자신들을 거울에서 보는 것처럼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한다. 예수님은 단지 비유를 한 예화로 사용하신 게 아니다. 예화는 설교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설명하기 위한 어떤 이야기를 말한다. 예화는 빛과 같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찔러서 순간 깨닫게하여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비유는 예화의 즐거움과 관계가 없다. 비유는 놀라운 충격을 가진 처방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거울은 또한 창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를 보고 믿음으로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는데 있다. 우리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과 그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그림들
마태복음
2:6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3:3 여기서는 설교자를 도로 건설자로 표현한다.
3:7 '독사의 자식들'은 창세기 3장의 뱀과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하여 마태복음 12:34, 23:33을 보라. 요한복음 8:44도 함께 참고하라.
4:19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은 예수님이 처음 사용하신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철학자들이 '진리의 그물을 던져서 제자들을 잡는다'는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6:22 외적 형상은 그에 따른 결과를 낳는다. 초점을 하나로 모은 눈(마6:23)은 빛을 가져오지만, 두 개의 초점을 가진 눈은 흐릿하게 되어 빛을 정확히 모으지 못한다. 비극은 두 개의 초점을 가진 눈이 어두움 가운데서도 빛을 본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7:7 문을 연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주님을 위한 봉사를 말한다.
9:9-17 예수님은 세 가지 실례를 들어서 그의 비판자들에게 답변하신다. 의사, 신랑 그리고 포도주 장사꾼 등이다.
11:16 사람들은 어린애들처럼 유치하다. 어린이들처럼 순진하지 않다.
12:20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적들을 언급한다. 예수님이 사역의 대상으로 삼던 약한 자들, 궁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적들은 약하고 이제 꺼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15:13-14 '심은 것'들은 바리새인들을 언급하는 것이지, 그들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6:18 이 구절은 '하데스'의 권세를 나타낸다. 그리고 교회는 그 권세를 거역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6:24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분명히 문자적인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수난 주일에 십자가를 문자 그대로 지고 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제자의 삶과 십자가를 지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이는 헌신과 자기 부인을 뜻한다.
23:32 점차로 증가하는 죄의 척도를 말한다.
마가복음
9:49 소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때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레2:13; 민18:19; 고후13:5; 겔43:24).
누가복음
1:78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은 새날의 여명이 밝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7:24 요한은 사람들이나 환경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약한 갈대가 아니다.
10:3 이리 가운데 있는 어린 양이라는 말은 격언 가운데 하나이다.
12:32 이 구절은 매우 복잡하게 얽힌 메타포들의 집합체이다. 무리들, 가족들, 나라 등이다. 고대 동방에서는 족장이 왕, 아버지, 목자의 역할을 한다. 이 말은 이미지가 빛이 난다.
12:50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의 침례는 요단강에서 받으신 침례에서 그 모습이 예견되었다.
요한 복음의 그림들
요한복음은 복음서들 가운데서도 '시인'의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그리고 자료 선택과 사용에서도 매우 창조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상징의 창조적인 계시는 특이하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그의 서신들에서 어두움과 빛, 생명과 죽음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이런 상징들은 영적 출생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포도주, 물, 혼인, 떡, 성전, 어린 양, 양떼, 목자, 가지, 바람, 씨앗 등은 요한복음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들이다. 요한이 사용하는 이미지들이 대부분 아주 보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성전을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이미지(2:19)을 제외하고는 목자(10장), 가지(15장)등은 대부분 문화적 상황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들이다. 요한은 구약성경의 이미지들도 언급하여 사용한다. 야곱의 벧엘 사다리(계단, 1:15; 창28장), 놋뱀(3:14; 민21장), 만나(6장; 출16장), 가지(15:1-8; 사5장). 그러나 이런 상징적 이미지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제시하시는 분을 그려낸다.
예수님은 새로운 성전이고(2:19), 새로운 출생을 주신다(1:12-13; 3:1-16). 두가지 안식일 기적(5,9장)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참된 안식으로 인도하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6장의 설교는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시는 만나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무리들이지만 이제는 새로운 목자가 새로운 무리들을 이끌 것이다(10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반석에서 물을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수를 주신다(4장; 7:37-39). 예수님은 유월절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고, 가지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만드신다. 6장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씀의 이미지는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미지를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어린 양의 희생(1:29), 성전 파괴(2:19), 높이 들린 뱀(3:14), 양떼를 위한 목자의 헌신적인 죽음(10:11-18), 씨앗이 땅에 심겨짐(12:20-25). 이 가운데 두 가지 이미지, 어린양의 이미지와 높이 들린 뱀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부활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교회의 그림들
사복음서에서 주님은 '교회'라는 말을 단지 2회만 사용하신다. 한 번은 보편적 의미의 교회를 말씀하시고(마16:18), 또 한 번은 지역교회를 뜻한다(마18:17).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esia)는 자유도시에 있는 시민들의 법적 모임을 가리킨다. 이 모임에서 시민들의 문제를 처리한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보편적인 의미는 없다. 즉 특정 지역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 교회의 의미가 에클레시아에 담겨 있지 않다는 말이다.에클레시아는 어떤 지역에 있는 자율적인 시민의 모임이었고, 헬라인들은 자신들이 더 큰 다른 에클레시아에 속해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신약성서에서 에클레시아에 대한 많은 언급들은 지역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 편지를 썼다(벧전1:1). 그러나 이때 사용된 용어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하나의 충성된 제사장, 하나의 거룩한 나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의 백성'(벧전2:9). 그들은 지역 에클레시아에 있는 각곳의 성도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더 큰 에클레시아의 일부분이고, 이때 더 '큰 에클레시아'는 모든 곳에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함한다.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씀은 교회를 성전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그리고 '하데스의 문'이라는 표현은 어떤 갈등을 드러낸다.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교회를 어떤 모임, 어떤 빌딩, 어떤 군대 등으로 보여준다. 이 세가지 메타포는 서신들에서 확대되고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그이 제자들을 소금과 빛 그리고 언덕위에 서 있는 도시등과 비교해서 말씀하신다(마5:13-16).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이런 이미지들을 교회를 나타내는데도 사용한다.
교회는 신부라고 표현된다. 요한복음 3:29과 마태복음 9:14-15과 마가복음 2:18-20, 그리고 누가복음 5:33-35을 보라.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포도나무가지라는 이미지로 말씀하신다. 이런 비유적 표현은 에스겔 15장에서 나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포도나무 가지이다(사5장). 그러나 이 포도나무가지는 야생열매를 맺었을 뿐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참된 포도나무가지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그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또다른 가지도 있다. '땅의 가지'(계14:14-20)가 그것이다. 이는 심판을 기다리는 사회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당신은 새의 노래를 명사와 동사를 생각지 말고
단지 들어야 한다." 랄프왈도 에머슨
제 6 장 사도행전의 그림들
의사 누가는 두 개의 여행 기록을 남겼다. 그의 복음서에서 누가는 주님의 여행, 즉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행기록을 남겼고(눅9:51), 사도행전에서 그는 어떻게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의 여행' 기록을 남겼다. 요한복음을 다 읽은 사람들은 로마서로 바로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이제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고, 바울이 누구이며, 교회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진입하게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이런 의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2:1 교회가 오순절날에 탄생하였다. 오순절은 추수의 축제이다. 사도행전은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영적 추수의 진행을 기록하고 있다. 첫열매를 추수하는 절기에는 제사장이 곡물 다발을 흔든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두 개의 떡덩어리를 흔든다. 오순절에 신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몸으로 연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2-13 세가지 이미지가 나타난다. 바람 소리, 불의 혀, 그리고 포도주이다. 포도주는 술취함을 부정적으로 설명하면서 나타난다. 바람, 숨 등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영'이나 '성령'을 뜻한다. 에스겔 37장과 요한복음 3:8과 20:22에서는 성령을 바람과 숨과 동일하게 나타내고 있다. 불 역시 성령의 상징이다. 이때 성령은 '심판의 영', '불의 영'등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촛대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칭한다(계4:5). 심하게 부는 바람과 거친 불이 결합될 때 큰 광풍을 연상하게 된다.1
4:30 '그의 손을 펼치사' 라는 표현은 신인동형동성론적인 표현이라 일컫는다. 이는 하나님의 행동을 사람에 비유해서 표현한다는 말이다.
6:15 우리는 스데반의 얼굴이 어떻게 천사의 얼굴처럼 변했는지 구체적으로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 우리도 볼 수 있는 초자연적인 빛이 환하게 비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마28:1-3; 단10:6; 계10:1). 이 빛은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행7:2)라는 스데반의 시작하는 말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다. 스데반은 여기서 영광을 미리 맛보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7:55-56). 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을 찾아볼 수 있는가? 얼굴이 빛나는 경우가 있는가? 모세의 경우를 찾을 수 있다(출34:29-35; 고후 3장 참조). 변화산에 가신 예수님의 경우도 있다(마17:1-8).
8:4 우리는 이미 씨뿌리는 비유에서 '흩어지다'는 말에 대해서 논의하였다(11:19). 사단이 비록 성도들을 흩어지게 해도 그 결과는 거대한 추수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은 곳에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신다. 복음 사역은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고전9:11; 고후9:10)과 같다. 헌금을 드리는 것도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후9:6: 갈6:7-9).
9:1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다'는 말은 들소가 화가 나서 콧김을 내뿜으면서 이리저리 날뛰는 것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울이 가시채를 뒷발길한다고 말씀하셨다(행26:14). 다윗의 적들은 폭력으로 그를 치려고 하였다(시27:12). 이사야는 '포악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날뛰는 랍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순한 양처럼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았다.
20:17-35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고별 설교는 우리가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지를 잘 알게 해 준다. 24절은 목회를 나타내는 많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을 마치 '회계사'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여기지 않노라'는 말은 자신의 생애를 회계사가 회계를 하듯이 하는 말이다. 그는 또한 자신을 '경주자'라고 이해한다. 바울은 또한 청지기이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역을 성실히 이행하는 청지기와 같다. 그는 또한 증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 말이다.
25절에서 우리는 앞서서 말씀을 전하는 자, 바울을 본다. 여기서 '전파한다'는 말은 '왕보다 앞서 가서 먼저 왕의 말은 전한다'는 뜻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바울은 또한 자신을 파수꾼으로 본다(26절). 그는 적군의 침입을 미리 경고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바울은 그의 일을 신실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피에 책임이 없다(겔3:17-21; 33:1-9). 무리들과 목자에 대한 언급은 마태복음 7:15과 10:16, 그리고 요한복음 10:12, 에스겔34장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타난다.
"교회는 보다 인기 있는 설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기 없는 설교가 더 필요하다." 월터 레셀 보위
제 7 장 교회에 대한 그림들
군인 이미지
신약성경 저자들의 시대는 한 마디로 말해서 군인들이 주도하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군인 이미지는 매우 친숙한 것이었다. 편지를 쓰는 바울도 군인을 빗대어 설명을 했다. 에베소서 6:10-18은 우리를 적대하는 적들과 우리가 적들을 대항하여 패배시키는 데 사용하는 장비들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로마서 13:11-13과 데살로니가전서 5:5-8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사59:17). 에베소서4:8은 전쟁으로 인하여 사로잡힌 자를 언급한다.
골로새서1:13의 '메디스테미'(methistemi)라는 헬라어는 '포로된 자를 옮긴다'는 뜻을 가진다. 바울은 그의 동료 에바브로디도를 '동료 군사'(빌2:25)라고 칭한다.
고린도후서 2:14-17의 '로마의 승리'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먼저 얻으시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서 승리를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다.1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하나님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의무에서 벗어나지(딤전1:3) 말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1:18), 주어진 명령에 순종하라(딤전6:13-14), 돌보아야 할 사람들을 지키라(딤전6:13-20; 딤후1:14)는 명령이 이어진다. 디모데는 또한 교회를 향하여 바울이 그의 편지에 기록한 것에 순종하라고 명령한다(딤전4:11; 5:7; 6:17). 하나님의 군사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명령에는 순종하고 어떤 명령은 버리거나 할 수 없다.2
운동 선수들
고대 로마에서 운동 경기는 군인들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보편화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체육관, 콜롯세움 등에서 운동을 하거나 운동 경기를 관람하였다. 그들은 공식적인 경기를 즐겼는데, 국가 전체가 참여하는 경기도 있었고, 지방에서 열리는 경기도 있었다. 오늘날의 열광적인 스포츠 팬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보면 된다. 로마인들은 운동 경기를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오락으로 생각했고, 그리스인들은 자신이 속한 도시의 명예를 위하여 운동 경기에 참여하였다. 요즘의 아마추어 경기는 그리스인들의 스포츠 정신과 비슷하고, 로마인들의 운동 경기는 프로들의 운동 경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역을 달리기 경주와 비유해서 설명을 했다. 여기서는 풀 코스를 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행13:25; 20:24; 갈2:2; 빌2:16; 렘12:5).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경주이다(갈5:7; 빌3:12-14; 히12:1). 성공적인 경주는 훈련을 요구하고 규칙에 순종해야 한다(고전9:24-27; 딤후2:5; 히10:32과 12:4-13을 보라). 성공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또한 결단을 요구한다. 바울은 '쉬나델로'(sunathleo)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함께 노력하다'는 뜻이다(빌1:27; 4:3). 훌륭한 선수들은 어떻게 팀 활동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면류관'에 대한 언급은 고린도전서9:25과 빌립보서4:1 데살로니가전서 2:19 디모데후서 4:8 베드로전서 5:4과 골로새서 2:18에서 나타나는데, 이 말씀은 신자들을 향한 경고이다. 거짓 선생들이 신자들에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는 말씀은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을 향한 말이다(벧후1:11).
농업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의 말씀을 심었고(고전2장: 골1:6),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라나게 하셨다(고전3:6-7). 하나님은 그의 밭이 커가기를 원하셨고, 풍부한 추수를 얻기 원하신다.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고 추수에서 풍부한 결실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이다. 경작을 하든(눅9:62), 씨를 심든, 물을 주든, 추수를 하든 우리는 모두 다 한 분 주님을 섬기면서 그를 위하여 일하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고, 그곳에서 많은 추수를 하기 원했다(롬1:13).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의의 열매로 가득차기를 기도하였다(빌1:11; 갈5:22-23). 그리고 골로새 교인들은 각자의 선한 사역에서 열매를 맺을수 있을 것이다(골1:10). 신자들은 하나님의 열매들이다(롬16:5; 약1:18; 고전15:20-23; 롬8:22-23).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열매 없는 어두움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렇게 해야 경건에 이르게 된다(엡5:1-14).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의 열매를 맺기 원하면 성도들은 빛 가운데 걸어야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한다. 로마서 6:21-23은 특별히 이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고통스러운 옛사람의 생활과 새 사람의 거룩한 열매맺는 생활을 대조하여 말한다.
몸
위의 모든 구절들은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고,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12:13). 그러나 다양성이 없는 통일성은 획일적일 뿐이며, 각각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각각의 특성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유지시키는 방법은 성숙성이다. 몸은 성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각각의 지체들은 성령 안에서 제각기 기능을 한다. 그럴 때 몸의 조화를 이루고 성장이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교회 이미지들은 통일성과 다양성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군대도 보병, 통신병, 정보요원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다양한 구성 가운데서도 통일성이 있다. 다양하게 구성된 부대들이 적을 대항해서 전투를 하고 같은 명령에 따라서 일을 한다.
떡
고린도전서 5:6-8과 10:16-17은 성찬식을 염두에 두고서 지역교회를 누룩이 없는 떡으로 설명한다. 바울이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통일성과 정결함이다. 하나의 떡은 많은 곡식의 '머리들'로 만들어졌다. 곡식은 갈아서 가루가 되고 합해지고 불에 굽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곡식을 갈고 불에 굽는 과정을 영적으로 적용해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우리도 이런 영적인 적용에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신부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엡5:22-31; 창2:24). 이 구절의 강조점은 남편의 사랑스러운 보살핌과 아내의 자발적인 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 전체는 하나의 신부이다. 지역 교회 또 한 이런 방식으로 그림이 그려진다(고후11:1-3). 염려하는 아버지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가 하나님께 신실하게 되기를 원한다. 교회는 정결한 신부로서 혼인식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지역 교회를 한 가족으로 보면 이런 이미지는 더 많은 의미를 갖게 된다. 어떤 강해자들은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로 해석하고 적용한다.
건축물
신약성경에서 처음 언급된 교회 이미지는 건축물이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은 교회를 건축물로 보는 말씀이다(마16:18). 바울은 자주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교회를 건물로 보는 이미지를 반영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다(행20:32; 고전14:4, 17). 또한 사랑(고전8:1; 10:23; 롬14:19), 성도들의 교제(살전5:11), 교회 내에서 은사를 활용함(고전14:1-12; 엡4:12, 16), 서로 돌봄(롬15:1-3), 권위에 대한 순종(고후12:19; 13:10), 경건한 대화(엡4:29) 등을 세운다.
가족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영적인 아비'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을 복음으로 '낳았다'(고전4:14-15; 벧전1:23-2:3).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랍비들의 모본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얼마나 직책을 탐하는지를 경고하신다(마23:8-12). 그러나 영적 아비의 기능은 여러 가지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낳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먹이고(고전3:1-2; 히5:11-14), 격려하고(살전2:9-12), 가르치고(고전4:14-17), 훈련도 시킨다(고전4:21). 그는 교회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 딸은 보호하여 잘 혼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과 같다(고후11:1-5).
제사장 직분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높은 지위를 가진 제사장들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을 통해서 사역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왕이며 제사장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제사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 자신이 제사장들이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제사로 드린다(롬12:1-2; 빌2:17). 주님을 향한 우리의 찬양(히13:15)과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히13:16)은 하나님께 희생제사로 드려져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잃어버린 자들을 이끄는 것을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롬15:16). 이런 봉헌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헌금을 드리는 것과 같다(롬15:27; 고후9:12, 빌2:25; 4:18).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제사장 자격으로 행하는 것이고, 제사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삶의 최고 목표이다.
양무리
에베소서 4:11의 '목사'라는 말은 본래 '목자'라는 뜻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이시다(벧전2:25). 위대하신 목자(히13:20)이시다. 베드로전서 5:4은 그분을 '목자장'이라고 칭힌다. 목사로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주님께 응답해야 할 책임을 가진다. 베드로는 교회를 '하나님의 양무리'(벧전5:2-3)라고 부른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는 말 같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훌륭한 목자들을 본다. 아벨,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이다. 신약성경에서 목자는 사회적으로 매우 낮은 계층에 속해있다. 그들은 단지 목자라는 직업 때문에 성전이나 회당에 들어갈 수 없었고, 정결 예법이라는 측면에서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목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경멸하는 무리였다. 목자들이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목자들의 위치를 상승시켜 놓으셨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인, 외인, 나그네, 순례자, 그리고 낯선 자들이다(벧전1:1; 2:11; 히11:9, 13) 거지는 집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나그네는 집을 떠난 사람이고, 순례자는 집을 향해 가는 사람이므로 소망을 잃지 않는다. 이 메타포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이라는 주제로 나아가게 한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혼합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들의 행습을 따라서도 안 된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민족으로 살아야 한다.
할례
갈라디아서 6:12-16과 빌립보서 3:2-3; 골로새서 2:11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중요한 통과의례인 할례 의식을 찾을 수 있다. 할례는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상징이다(신10:16; 30:6; 렘4:4; 6:10; 겔44:7; 롬2:26. 29). 사도 바울을 괴롭혔던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을 낚아채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단지 몸에 나타나는 어떤 흔적을 중요시 할 뿐 참된 할례의 의미를 놓치고 말았다. 참된 할례는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설교자나 전도자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필요한 사역을 십자가에서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이 되었다.
교회가 군대 이미지로 표현된다면, 교회에는 싸워야 할 적이 있다는 말이다. 군대는 싸우기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제사장 무리의 모임이라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렇게 교회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논리학자들은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 사고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위대한 것은 이미지를 갖추는 일이다." 토마스 바빙톤 마쿨레이
제 8 장 요한계시록의 그림들
하나님이 요한에게 보여주신 '계시'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에 의해서 보증이 되었다(또는 '사인을 받았다, 계1:1). 본문은 '세마이노'(Semaino)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동사 하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사인의 책이며, 이미지, 상징 그리고 여러 가지 수수께끼들로 가득차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다.
1:9-16 '나팔과 같은 소리'라는 이 문구는(1:10, 4:1) 민수기 10장의 나팔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깨워서 준비시킨다는 내용이다.
5-6장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보좌의 책만이 아니다. 어린양의 책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24회에 걸쳐서 어린양이라고 칭한다. 어린양이라는 말은 유월절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우리는 어린 양이라는 말을 통해서 고난받는 종(사53:7), 침례 요한이 사역(요1:29), 초대 교회의 증언(행8:32; 벧전1:19) 등을 연상한다.
7:17 어린양은 사자일 뿐 아니라, 보좌 위에 계신 목자이시다.
12장 여인 묘사는 창세기 37:9의 요셉의 꿈과 매우 닮았다. 그 여인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상징이라고 보고 싶다. 용은 요한계시록에서 14회에 걸쳐서 언급된다. 그러나 13:11의 용은 사단을 말한다.
16:15 '도적같이 오리라'는 말씀은 격언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돌발성을 말하며(마24:43; 눅12:39; 살전5:2, 4; 벧후3:10; 계3:3), 준비하는 자세, 경계하는 태도를 말한다.
17-18장 '큰 음녀'는 어린 양의 신부라는 어구와 대조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바벨론은 하늘의 예루살렘과 비교되어 나타난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또한 신부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21:2). 음녀는 종교적인 제도를 가리킨다. 바벨론은 상업적인 제도를 가리킨다. 그들은 힘을 합쳐서 이세상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부한다.
21-22장 하늘 도성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동산, 강, 생명나무, 신부 등이다. 하늘의 도성에서 몇 가지는 사라졌다. 태양, 밤, 저주, 눈물 등이다.
22:16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을 후손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다윗의 후손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다윗의 반열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 때문이다(마1:1; 사11:1; 롬1:1-5). 요한계시록은 예언(1:3; 22:27, 10, 18-19)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신학적인 싯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상징으로 포장되어 있는 영적인 이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요한은 미래의 교회에 대해서 예언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다. 얼마나 그 예언의 말씀이 자세한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동시에 우리는 요한이 상징 언어을 사용하여 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메타포 언어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표현 방법이었다. 그래서 요한의 시대에 고난을 당하는 교회를 격려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에도 이런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지금 이 교회는 이세벨, 바벨론, 용, 음녀 등을 만나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어떤 시대에서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을 굽히지 않고 지켜야 한다. 그래서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 요한의 메시지가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이 메시지로부터 격려를 얻고 또한 경고를 받는다.
부록 1 설교자들의 질문
1. 누구든지 자신의 상상력을 발전시켜서 창조적인 설교를 하고 가르칠 수 있는가?
물론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책을 집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안'에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마음을 통해서 상상력의 창조적인 작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어떤 공식을 대입하거나 기술을 발휘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성령이 우리 정신과 마음을 역사하심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훈련되어 나타나는 결과라는 말이다.
2.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우선 좋아하는 설교를 2-3편 택하여, 그 설교를 당신의 상상력으로 연구해 보라. 특별히 그 설교가 담고 있는 그림들을 찾아보라. 그림들은 때때로 단어들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러나 그림들이 항상 본문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3. 설교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항상 그림이어야 하는가?
늘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상상력이 그림을 그려 줄 때에도 그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설명해야 한다. 그림에 설명이 없으면 그 뜻하는 바를 놓칠 수 있다. 그림이 메시지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은 단지 청중들이 교리를 더 잘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이다.
4. 긴 본문에서 이미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아주 짧은 한 구절에서도 그림을 찾을 수 있는가?
모든 구절이 다 그림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당신이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조사해 보면 더 많은 그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5. 설교를 듣는 청중 가운데 있는 왼쪽뇌 형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그림 같은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가?
그림을 원치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균형을 잃으면 안된다. 설교자는 양쪽 측면의 자료들을 균형있게 사용해야 한다.
6. 당신은 상상력이 그리스도인의 순종과 개인들의 도덕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시는데,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지성과 마음의 연결고리가 있어야 ㅎ나다. 지성과 마음이 따로 놀면, 균형있게 성장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순종하지 못하게 된다. 감정과 상상력을 목회와 설교사역에서 제외시킨다면, 이것은 비극일 것이다. 내가 호소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를 제시하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서 하자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지성과 상상력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7. 당신은 설교학의 낭만파 운동을 이끄는 선구자입니까?
나는 설교에서 상상력과 인간 감정의 회복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다. 동시에 설교에서 인간 지성이 무시된다면 이는 어이없는 일이 되고 만다. 설명 없는 그림은 가르치는 기능을 상실한 것이고, 그림 없는 설명도 역시 사람들이 잘 들으려 하지 않고, 잘 이해할 수 없고, 그 뜻을 따르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8. 당신은 설교하는 일이 '예배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좀더 자세히 설명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최대 무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일이 최대의 의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안겨다 드려야 한다. 메시지를 준비하는 데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면, 이 메시지는 우선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 메시지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 메시지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내가 가로채는 격이 되고 만다. 그러면 그 메시지조차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교가 예배의 예술이 된다면 우리는 설교준비와 설교전달에서 모두 최선을 다한 셈이다. 나는 설교자들의 마음에 호소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들의 설교가 한층 더 높은 수준을 지니게 될 터이니 말이다.
부록 2 간략한 상상력의 역사
그리스
플라톤은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현실을 절대성 또는 보편적의 복사물이라고 보았다. 어떤 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은 복사된 것을 또다시 복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예술은 현실에서 두 번이나 건너뛴 것이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예술은 거짓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상주의자도 아니고 유명론자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상력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상상력은 현실의 끈이 되어 현실을 연결시켜 준다. 예술은 진리를 모방하고, 우리가 보편성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는 두가지 상상력이 있다고 본다. 이성적인 상상력과 감각적인 상상력, 두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종합을 강조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분석, 분리를 강조한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저지른 최악의 죄는 우상숭배이며, 그후에 그들은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했다. 장막을 세우고 성전을 지을 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청사진을 주셨다. 장막과 성전의 예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실재를 모방한 것이고, 복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모방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 사상(140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그리스도 사상을 고전에 입각해서 해석하였고, 근대 세계와 중세의 다리를 놓았다. 새로운 인본주의, 즉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사상이 나타났다. 또한 개인주의도 나타났는데, 이는 중세 유럽의 '집단사유' 정신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이때 근대 과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삶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접근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 이끌었다. 이때 과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회의 진보 사상과 인간의 완전성의 복음으로 대치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과학은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고, 과학의 성취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청교도들(1550-1660)
르네상스가 인본주의를 한층 부추기는 시대였다면, 청교도들은 하나님만을 높이려는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행동과 교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그 정수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삶에 이런저런 인위적인 장식을 달아 붙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들은 단순한 삶을 간단 명료하게 살았다. 그들은 설교를 하는데도 웅변조나 치장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우리에게 강해설교라는 풍부한 유산을 남기고 있다. 또 우리는 수많은 주석들을 그들의 유산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상상력의 힘을 별로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모든 삶에서 추구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낭만주의 시대(1760-1870)
낭만주의는 감각을 중요시한다. 진리는 과학뿐만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 알려진다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에 불을 붙혔고,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과학에 의한 산업이 아니 자연 그대로의 것을 향한 체험을 중요시하게 하였다. 계몽주의 인간과 낭만주의 인간은 서로 적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실재에 대한 견해를 충돌하는 것으로 보았을 뿐이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이 세계의 실재를 향한 정확한 이해 접근방법일 뿐이며, 상호 보충되어야 할 것들이다.
서구 현대 세계
요즘 상상력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상상력은 우리가 실재를 탐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도구라고 대답을 한다. 과학자들은 이제 그들의 정신 가운데 있는 애매한 상상력, 또는 그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들어낸 '실재의 모델'이 실재를 발견하고, 정의를 내리고, 탐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실재 세계가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그들의 상상력으로 만든 모델이 주요한 도구가 된다는 말이다. 상상력은 단지 모방이 아니다. 상상력은 해석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상상력은 협력하여 창조를 하는 도구이다. 또한 창조력과 혁신적인 정신을 담고 있는 위대한 책을 설명하는 데 상상력은 매우 도움이 된다.
동양 세계
동양에서 상상력은 실재 그 자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물질과 영혼을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사물이 있는 그대로, 실재 그대로 파악할 수 있게한다. 과학이 측정하는 것은 '우연히' 사물이 나타나는 것을볼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으로 사물과 실재를 대하는 것은 너무 주관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인간은 단지 몸과 마음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의 영혼은 단지 어떤 사실과 공식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부록 3 상상력과 신화
영어 미스(myth)는 헬라어 뮈도스(muthos)에서 나온 단어이다. 이 단어는 본래 '대화, 말, 이야기, 설화' 등의 의미를 지닌다. 라틴어 fabula도 역시 '말, 대화' 그리고 '이야기, 우화' 등의 의미를 지닌다. 후기 헬라어에서 뮈도스는 '허구적인 설화'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톰 맥아더에 의하면 뮈도스는 결국 시와 감정을 귀착되는가 하면, 로고스(logos)는 산문, 이성, 분석적 사유라는 영역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1 심지어 고대 그리스인들도 오른쪽뇌, 왼쪽뇌의 개념을 알았고, 사람들의 감정적인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설화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로고스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사람들의 감정적인 욕구가 있다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신화는 남신과 여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신화는 사물이 어디서 나오고, 왜 그런 사물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2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신화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딤전1:4; 4:7; 딤후4:4; 딛1:4). 그리고 베드로 역시 그런 경고를 암시한다(벧후1:16). 초대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위험한 이 로마 그리스 신화들은 알레고리화되어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주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의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다. 고전적인 그리스, 로마 신화를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신화들 가운데서 인간 삶의 기본적인 흐름과 갈등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듯이, 또한 다른 신화들 가운데서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위대한 문학은 인간 삶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는 신화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메시지를 준비할 때, 그 메시지가 사람들 속에 살고 있는 신화를 어떻게 깨뜨리고 공격해야 하는가를 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신화를 가지고 있고, 그 신화에 의해서 그들의 삶을 산다. 그리고 그 신화는 그 사람의 현실을 박탈해 버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는 강력한 능력이다(고후10:4-5). 신화는 과거를 설명하고, 미래를 위한 희망을 준다. 또한 신화는 모든 당혹감과 문제들을 가지고 현재을 부딪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일을 훨씬 더 효과적이고 힘있게 한다.
1962년 6월11일 케네디 대통령은 예일대학교에서 취임식 연설을 했다. "진리의 위험한 적은 계략적이고 조직적이고 부정직한 거짓에 놓여 있지 않다. 오히려 신화, 즉 끊이지 않고 설득력을 가지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신화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려고 했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며, 다음은 이방인들을 위함입니다."(롬1:16)
각 주
제1장
1. 창세기의 내용이 요한계시록에서 완성을 보는, 흥미로운 사실이 열거되는 부분으로 The Companion Bible(London: Lamp Press, n. d), Appendix 3, 5를 보라.
2. 출애굽기에는 온갖 유형과 상징이 가득하다. 이들에 관해서는 비평적 주석이든 경건풍의 주석이든 제대로 많이 다뤄졌다. 주석가들은 본문 내용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적용단계에 이르러 본문의 의미를 상실하는 일이 없다.
3. j. Sidlow Baxter, The Master Theme of the Bible (Wheaton, Ill,: Tyndale,1973)과 International Bible Encyclopedia(Grand Rapids : Eerdmans, 1986 )개정판과 The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Intervarsity, 1992)에서 "Lamb of God" 항목을 보라.
제2장
1.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의 한 그림은 하나님께서 불을 끄셔서 그 사람이 어둠 속에 남게 된 것이다. 욥기 3:1-5; 5:14; 18:5-6, 18; 21:17; 잠언 13:9; 20:20; 24:20을 보라.
2. 성경이 종종 인간을 풀에 비유한다 해서 인간의 귀중함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그렇게 덧없이 변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울 뿐이지. 무가치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풀의 종류가 6천에서 만 가지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곡물 종류도 들어 있다. 이 곡류에 속하는 풀들이 있기 때문에 자연도 조화를 이루고 땅도 유지된다.
제3장
1. C. Hassell Bullock,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Poet Books (Chicago : Moody, 1988)는 좀더 깊이 있게 연구하고픈 학생들한테 좋은 책이다.
2. 욥기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좋은 연구로는 Roy Zuck ed. Sitting With job (Grand Rapids : Baker, 1992)이 있다. 명시 선집이라 할 이 책에는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한 학문적 자료도 들어 있는데, 욥기 같은 매력적이지만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책을 제대로 연구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독수리같은 날개를 달아주어 폭풍을 만나도 거기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그 바람을 타고 솟구쳐 올라가기를 원하신다.
4. 잠언을 주제별로 요약한 책들 가운데 꼽을 만한 것으로 Ronald M. Sailler and David Wyrtzen, The Practice of Wisdom (Chicago : Moody, 1992)이 있다. 이 저자들은 히브리 원문에도 주의하여 영어 역본에만 의지해서 주제를 뽑지 않았다.
5. Sailler and Wyrtzen, The Practice of Wisdom, 151
6. 사도 요한이 말한 바 이 세상적인 안목의 정욕이 들어 있음을 생각나게 한다(요일2:16). 이것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즐기려고 무언인가를 보고 구하고 얻으려고 하는 욕구를 가리킨다.
제4장
1. 이 이미지들을 오늘날 교회에 적용한다 해도 어려울 것 없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과연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지만, 과연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성전이라지만 실상은 싸구려 오두막 같아 보이진 않는가? 그렇다 할 때 주님의 전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된다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벧전4:17).
2. 성경은 나무가 쓰러진다는 것을 한 나라나 제국이 하나님을 거역한 대가로 파멸되는 이미지로 종종 사용한다. 이사야 2:12-18; 10:33-34; 에스겔17:24; 31:1 이하, 다니엘4장 등을 보라.
3. 이 책을 놓고 신학적인 가치뿐만이 아니라 설교학적인 가치도 염두에 두면서 쓴 좋은 입문서요 주석으로는 Walter C. Kaiser, Jr. A Biblical Approach to Personal Suffering (Chicago : Moody, 1982)이 있다.
제5장
1. Charles B. Willams, the New Testament in the Language of the People(Chicago :Moody, 1966), 40.
2. Stopford A. Brooke, Life and Letters of the Rev. Frederick W. Robertson (London: Smith, Elder & Co., 1866), 2: 160-61, Robertson의 설교집은 여러 판이 있지만 시중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고 고서점에 가야 할 것이다.
3. 비유 연구에서 옛날 것들이 설교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오늘날 새롭게 이루어진 연구성과에 비추어 볼 때 학적 연구용으로는 쓸모없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Campbell Morgan, Marcus Dodds, Ada Habershon, William Taylor, Arthur Pink의 책들이 그렇다. Bernard Brandon Scott, Hear Then the Parable (Minneapolis: Fortress, 1990)이 비유 연구에 있어 아주 훌륭한 책일 뿐만 아니라 참고 문헌 목록이 특히 괜찮다.
제6장
1. 사도행전 2장을 경건하면서도 실천적으로 연구한 책으로 G. Campbell Morgam의 The Bieth of the Church (Old Tappan, N. J.: Revell, 1968)를 보라. 특히 그가 상징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제7장
1. Robert Payne, The Roman Triumph (London: Abelard Schuman, 1962)를 보라.
2. 교회를 무단 외출한 군인의 이미지로 흥미롭게 상상력을 발휘해 쓴 부분으로 Halford Luccock의 Like a Mighty Army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54), 3-5를 보라. Luccock은 The Christian Century에 "기둥 위에 수행자 시므온"이란 제목의 칼럼을 썼는데,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고 자극도 주었던 칼럼이다. 위의 책은 바로 이 칼럼 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 엮은 책이다.
부록3
1. Tom McArthur, "MYth" in the Oxford Companion to the English Language, ed. Tom McArthur (Oxford: Oxford Univ. Press, 1992), 675-76.
2.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trans.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