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영적인 눈을 열어 영의 세계와 그 존재들을 보게 하신 이후로 성경에 대하여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머리가 아닌, 지식으로서의 앎이 아닌 경험으로서의 앎으로 많은 부분 자리 잡아 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모두 한 영으로 기록하고 있는 수많은 천사들의 존재와 활동, 그리고 하늘 문의 실제성, 그리고 너무나도 밝고 아름다운 빛의 나라를 보며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나 거룩하며 의와 정결한 나라인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한편 성령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고 의롭게 되기를 원하시는 지 등입니다. 그리고 또 다르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라고 하면 이론적으로는 삼위일체 중의 한 분으로서 인격을 가진 분이라고 알고들 있지만, 어떤 의미에선 인격적인 존재로 보다는 어떤 능력적인 차원에서 많이들 이해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하얀 비둘기 형상으로 당신의 존재를 영적 이미지로 보여주신 성령님은 언제나 곁에 머무시며, 예수님께서 본질은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한편 성경이 묘사하듯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또 신랑, 곧 우리의 영적인 사랑, 연인도 되어주시는 것처럼, 성령님 또한 때때로 다른 모습으로 그렇게 표정과 모습 등으로 당신의 마음과 느낌과 생각을 전해주는 것을 경험하며 지냅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정말로 하얀 비둘기 한 마리를 키우며, 서로 사귀어 가는 가운데 서로를 이해해 가듯이, 그렇게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닌 또는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영으로 그분을 보며 그분을 이해하고 배워갑니다.
예수님의 모습이나 천사에 관한 영적 이미지에 관하여 글을 쓸 때 말씀 드렸지만, 그 영으로 보여주시는 모습이 실상 본질은 아니지요.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그리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시며 우리의 영적인 삶에 도움을 주시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그렇게 보여주시는, 그렇게 보이시는 성령님을 상징하는 하얀 비둘기의 표정과 행동 등에서 성령님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눈으로 보며 새롭게 성경과 성령님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영의 세계는 한편 생각의 세계, 곧 영으로 보이는 예수님이나 천사들이나 성령님과는 몸의 행동이나 음성으로 교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영의 의식 안에서 생각으로 교감을 나누는 것이기에, 그 와중에 나의 의식과 생각이나 사단의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잖아 있으므로 저의 경험이나 분별이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만 100% 완전하고 정확하게 듣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러므로 영의 모든 일에는 영분별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어떤 힘이나 능력이나 에너지가 아닌 인격체이십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인격이란 우리 사람의 가진 어떤 속성을 말하는 것이니, 성령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신성을 지니신 분이므로 “신격”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 그러한 용어에 대한 정의가 어렵고, 또 한편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므로 우리의 인격을 살펴봄으로써 한편 하나님의 신격의 한 면을 볼 수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인격체라고 말을 할 때 우리는 그 존재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이러한 속성을 다 가지고 계시지요.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여 아시는 지성과 그분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의지, 그리고 때로 근심하시고 탄식하시기까지 하시는 감정을 지닌 분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그분은 한 인격체이신 것입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 지성과 감정과 의지 중에서 제가 오늘의 글에 있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령님의 감정적인 부분에 대해서입니다.
제가 영으로 보고 경험한 성령님은 정말로 섬세하신 분이십니다. 표정 특별히 눈동자의 눈빛과 그리고 행동으로 당신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시는데, 정말로 성령님은 우리의 행동과 모습 여하에 따라 한없이 기뻐하시기도 하시고 한없이 슬퍼하시고 하시고 때로는 거룩한 분노를 전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면 어떤 때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의 거룩한 분노의 눈길로 바라보시기도 하십니다. 그럴 때는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기가 힘이 듭니다.
어떤 때는 눈물어린 눈동자로 쳐다보십니다. 그분은 울고 계십니다. 때로는 부리로 쪼아대며 야단을 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귀를 쪼아대기도 하십니다. 영으로 보이고 영으로 느끼는 것이라 육신의 통증은 느끼지 않지만 마음은 참으로 아픕니다.
때로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하여 견디기 힘드시다는 듯, 이리저리 파닥거리시며 거칠게 날아다니십니다.
이런 글을 적으니 제가 무슨 대단한 큰 잘못을 하였기 때문에 그리 행동하신다고 느끼실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물론 연약하고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때로 크게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도 없잖아 있겠지만, 요즘은 많은 부분 성령 안에서 통제를 받으며 나름 말씀 안에서 많이 걷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제가 날마다 더욱 온전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더군요.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주의 영이시니 곧 주님의 뜻이기도 하겠지요. 아주 작고 미미하고 사소한 것들에 그렇게까지 행동하시지는 않지만, 인간의 연약성 가운데 온전하게 살 수는 없는 때로 어쩔 수 없는 한 부족한 모습들에 그렇게 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한 경험 가운데 정말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가 온전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기도와 말씀에 정말 힘쓰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정녕 의와 거룩함과 정결함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시는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아갑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애쓰며 나름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때에는 또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완전한 건강을 찾은 생기로운 새처럼 활기롭게 날아다니기도 하시고, 한없는 사랑과 생명의 눈길로 바라보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얼굴을 비벼대고 장난도 치시곤 하십니다. 그 얼굴엔 평온함과 행복함이 가득해 보입니다. 잠을 자거나 누우면 가능하면 가까운 곁에 있습니다. 기쁨에 겨워 색깔도 그 마음도 눈처럼 하이얀 정말로 하얀 비둘기가 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시간에는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누워도 저만치 떨어져 있습니다. 생각으로 가까이 당겨 놓아도 또 저만치 가버리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올수 있는 한 가까이 와 계신 모습으로 보여 주십니다.
한편 제가 참으로 성령님께 죄송하고 한편 마음이 아팠던 상징적인 모습은, 조금 부족한 모습으로 거닐다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세운 어느 날 밤, 기도를 하다 바라본 모습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눈을 떠 바라보니 밖에 나갔다가 비에 흠뻑 젖어서 들어와서는 비를 털어내며 당신을 추스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의 길을 걸을 때면 성령님은 슬픔의 비에 흠뻑 젖은 색은 푸르나 그 마음은 푸르고 푸른 슬픈 비둘기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신 것이겠지요.
비록 본질이 아닌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모습이지만, 그러한 모습 때문에 점점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조금씩 더 성령 안에서 행하고 살아가려 자의반 타의반 애쓰게 됨을 봅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찌 완전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음은 저도 알지만 하나님도 아시겠지요. 그렇지만 때로 실족하면 힘겨워하시는 성령님의 상징적인 모습 앞에서 즉시로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회개하는 모습을 가슴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엎드려 회개하면 다소 힘겨운 모습을 보여주시던 성령께서 평온함을 되찾고 사랑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입니다. 지금도 글을 쓰는 키보드 옆에 편안히 앉아 쉬고 계신 것이 영으로 보입니다. 저렇게 편안한 모습으로 계시는 것은 지금의 영적 상태가 나름 좋기 때문입니다.
몸 관리를 잘못하여 몸 상태도 다소 좋지 않고 또 개인적인 일로 며칠 너무도 바빴습니다. 다소 경건하게 그리고 주님 앞에서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다소 부족하였지요. 오늘에야 다소 정리가 되고 모처럼 조용한 시간을 주님 앞에서 가지며 영적으로 다소 회복하였더니 저렇게 편안한 모습으로 곁에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영적 경험 속에서 눈에 띄게, 그리고 가슴 속으로 파고든 말씀이 곧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눈으로 그냥 읽고 지나갈 때는 이 말의 깊은 의미를 잘 알지 못하지요. 그런데 탄식이란 우리들의 삶과 경험에서 비추어 볼 때 마음의 다소 큰 상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작은 힘겨움과 실망과 상심에서는 탄식은 나오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들의 자녀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탄식이 나온다면 그래도 다소 어이없고 기대가 무너지는 일을 경험한 경우이지요.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저는 영의 눈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지는, 그리고 보여주시는 성령님의 이미지 속에서 얼마나 우리의 모습들 안에서 성령께서 슬퍼하시고 근심하시고 탄식하는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바 성령님의 모습과 행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상태입니다. 너무나도 연약하고 부족한 그릇이지만 오직 주님의 강권하심과 오직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나름 말 하나, 생각 하나, 행동 하나 그래도 온종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려고 애쓰는 저의 애쓰는 모습에도 때때로 저토록 힘겨워하시는데, 교회 문을 나서면 아무런 생각 없이 육과 혼의 본성을 쫓아 우리가 살아간다면 성령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며, 또 한편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하루의 허물에도 그 속성의 거룩하심 때문에 가까이 오시지 못하고, 즉시로 회개하고 나름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어야 그 때에야 비로소 가까이 오시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매일 매일을 죄와 허물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분이 어찌 감내하고 견디시겠습니까?
우리를 비록 사랑하지만 그분의 거룩하신 본성적 속성 때문에 구원의 징표적 수준의 임재만을 남겨 두신 채 충만한 임재의 성령님은 훨훨 날아가 버리시고, 소멸되어 버리시겠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망과 곤고함이겠지요.
방언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통변을 통하여 영의 기도소리를 들으니, 다소 경황없이 보낸 시간들에 대하여 제 영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더군요. 그리고 용서함을 주시니 감사와 찬양을 드리더군요. 그리고 사역의 기름부으심에 대하여 기도하고, 나아가 이 글에 대하여 가르치심을 간구하더군요.
성령 안에서 주님의 가르치심을 들으니 그것은 “생명의 연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하나됨의 신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놀라운 영적인 신비, 곧 영적 생명의 연합과 하나됨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지요. 그것은 곧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하나됨의 비결은 오직 “내가 아버지의 계명의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라”(10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 안에 거하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욱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깨끗하게 하시지만, 말씀 밖에 거하며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제해 버리실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바로 성령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곧 하나님의 영이시요, 또한 주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삼위이시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랑의 신비 안에서 또한 온전히 하나이신 성삼위이시지요. 그러므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결 또한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쓸 때 “성령님 안에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시는” 온전하고도 충만한 영적 생명의 합일과 하나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충만한 연합 속에서 포도나무 되시는 그분으로부터 우리는 참 생명의 자양분을 공급받아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닌 그분의 생명의 흐름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우리도 그 분 안에서 참된 복락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가며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으려 애써야 합니다. 애쓰고 애써야 합니다. 제가 경험하고 배워가는 성령님은 전능하신 신이시지만, 한편 신비 너무나도 섬세하고 여리신 분이십니다.
여리고도 순수한 눈망울을 가진 비둘기 같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지만 또한 우리를 의와 진리로 너무도 이끄시길 원하시지만, 우리를 로봇이 아닌 인격체로 만드셨기에 우리의 자유의지를 건드리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와 진리를 좇아 살아가면 너무도 기뻐하시며 함께 하시지만, 불의와 더러움을 좇아 살아가면 상처를 받으시고 받으시다가 조용히 떠나가시고 소멸되십니다.
성경은 사울의 예를 견주어 성령의 소멸되심의 결과가 무엇인지, 왜 그토록 죄를 범한 다윗이 다른 것은 다 거두어 가실지라도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절규하며 기도하였는지, 성경을 통하여 성령의 소멸되심의 무서운 재앙에 관하여 조용히 전해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소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한 인간인지라 온전히 살아갈 순 없지만 늘 회개하고 돌이키며 애쓰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날마다 새롭게 정립하고, 말씀 안에 그리고 성령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 안에서 구속의 그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아멘! 샬롬!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