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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 Majjha의 이해와 초기불교 수행체계에서의 Majjha의 구현
-아나빠나 사띠에서의 majjha의 닦음과 알음알이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김근중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2호(2017.9) pp. 199∼229
I. 들어가는 말
II. majjha에 대한 이해
III. majjha의 실천적 이해 majjhima와 majjhena
IV. 아나빠나 사띠에서의 majjha의 구현과 고찰
V. 맺는 말
I. 들어가는 말
흔히 중도(majjhimā paṭipadā)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가지의 극단에게로 치우치지 않으며 두 극단 가운데를 의지함으로써 극단을 여의는 것이며, 이러한 중도는 팔정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연구에서는 Ānāpānassati에서의 majjhe로부터 알음알이를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밝히는 목적으로써 첫째, [초전법륜경]의 중도에 대한 개념적 해석을 위한 majjha에 대한 안목[眼]을 설명하고 둘째, 두 변 가운데와 도구적인 조건에 의해서의 majjhimā와 majjhena에서의 이해를 각각 실천하고 셋째, 초기불교 수행체계에서 들숨과 날숨에서의 숨 쉬는 몸(身)과 닿음 촉(觸)과의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majjha와 알음알이를 사대근본물질 요소[地水火風]들로부터 드러내고 넷째, majjha의 드러남으로부터 밝힌 사대물질 요소들을 알아차리는 감각접촉으로부터 연기한 오온(五蘊)의 앎을 오음성고[五陰聖苦]의 법안(法眼)이라는 최고의 지혜를 갖추며 다섯째, majjha에서의 알음알이로서의 사대물질의 요소들을 몸 느낌 마음 법 등의 염처로부터의 근면하고 분명한 알아차림에게로 마음챙김[正念]을 이루고, 사대물질의 요소들의 알음알이로부터 이들 4가지 염처에서 낱낱이 마음챙김하는 바를 거친 사유에서부터 미세한 사유까지와 떨쳐버림으로 생긴 희열 행복 등의 선지(禪支)를 닦는다. 이처럼 최고의 지혜[四聖帝]에 이르는 길의 배경 요인들로서 고요함의 적정[正定]에게로 인도하는 초기불교 수행체계에서의 majjha를 구현하고 이를 정념과 정정으로서 고찰하는 바가 연구에서의 논거(論據)이다.
majjha에 대한 이해로부터 Dhammadāyādasutta에서의 다양한 종류의 극단들의 버림을 위한 수행 목적으로써의 중도를 기술할 수가 있으며, 중도에서의 majjhimā에 대한 실천적인 의미와 Kaccānagottasutta[가전연경]에서의 majjhena에 대한 실천적인 의미를 논지로써 전개해나간다. Kaccānagottasutta의 “중에 의해서(majjhena) 법을 설하다”에서의 majjhena에 대한 도구격의 안목으로부터, 12연기법은 12가지 종류의 결박 가운데로부터 개별적으로 연기하게 되는 법이며 각각의 연기 조건에 따른 각지(覺支)가 법임을 밝힌다. 숨 쉬는 몸[身]과 닿음의 촉(觸)에서의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알음알이를 사대물질 요소들에서의 분명한 알아차리는 사념처[身受心法]의 마음챙김으로부터 실천한 바른 삼매에서의 선지를 정정(正定)으로서 구현할 수가 있다. 두 변 가운데에서의 가라앉지 않음을 정진하며 드러난 majjha의 닦음과 알음알이에서의 사대물질 요소를 근면히 분명한 알아차림을 마음챙기며 머무는 정념과,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있고 떨쳐버림에 의해서 생겨난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정으로부터의 정정과, 오음성고[五陰聖苦]의 고성제 지혜를 본 연구에서 고찰한다.
II. majjha에 대한 이해
1. majjha에 대한 개념과 도식적 이해
최근에는 우동필1)과 정호영2) 남수영3) 등의 연구에서도 알 수가 있듯이 십이연기와 여래장과 중론 등에서의 중도와 김근중4)과 백도수5) 등의 니까야에서의 중도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우동필(2015)과 정호영(2017), 백도수(2017) 등이 majjhena를 중도(majjhimā paṭipadā) 라고 기술하듯이, 연구자들은 보통 majjhena에 대해서도 중(中)의 개념을 포함한다는 이유 때문에 majjhena를 중도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가운데(middle)의 뜻을 가진 형용사 majjha의 동의어에 해당하는 것이 majjhima이다.6) 중도의 majjhimā paṭipadā 에서의 paṭipadā 는 루(āsava)와 고(dukkha)를 소멸하는 것 등의 목적에 도달하려는 수단[means]의 의미를 지닌다.7) majjhimā 가 ‘두 변의 가운데에서의’ 실천적인 의미를 가진 반면에 majjhena는 majjha의 도구격(道具格)이므로 이전으로부터의 ‘조건(paccayā)에 연(緣)한 가운데에 의해서’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1) 우동필, 「역관(逆觀)의 십이연기-십이연기와 중도의 관계」, 불교학연구 제44호, 불교학연구회, 2015, p.2-p.3
2) 정호영, 「여래장 개념의 성립과 사상의 구조」, 불교학연구 제50호, 불교학연구회, 2017, p.97
3) 남수영, 「인도불교에서 중도 개념의 불연속성과 연속성」, 불교학연구 제50호, 불교학연구회, 2017, p.30-p.34
4) 김근중, 「니까야 위주로 본 초기불교 수행체계에서 괴로움 소멸에 대한 고찰」, 불교학연구회 가을 논문발표회, 불교학연구회, 2016, p. 46-48
5) 백도수, 「중도의 이해 틀에 관한 고찰」, 중도포럼, 고요한소리, 2017, p.140-p.144
6) PTS Pali English Dictionary, “https://suttacentral.net/define/majjha와 majjhima”, Pali Text Society, (2017,4,11), majjha는 형용사이며 대비적인 의미로써의 ‘middle’로 기술하고 있고, majjhima는 첫째-중간-마지막에서의 대비적인 쌍(pair)에서의 middle로 기술된다. majjha와 같은 뜻의 majjhimā는 뒤따라오는 여성명사 paṭipadā와의 결합으로 인하여 majjha에서의 어간조사 ‘a’가 파생접미사 ‘ima’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7) PTS Pali English Dictionary, https://suttacentral.net/define/paṭipadā, (2017,4,11),“대상을 향하여 뜻의 접두사 paṭi와 발자국 뜻의 padā와 함께 구성된 paṭipadā는 majjhimā로부터 연결되며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며 닦는 행도[行道]의 뜻을 가진다.
여섯 가지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에 의지해서 알음알이와 오온 등의 정신 작용이 파생된다.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마노(意)와 법(法) 등의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에서의 장(場)을 입처(入處) 혹은 일체(一切)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AN 6:61 majjhesutta에서는 여섯 명의 장로들이 부처님에게 ‘중간’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데, 중간은 육근과 육경에서의 두 변(邊) 가운데로부터의 알음알이를 말한다.
감각접촉[觸]이 첫 번째 변(邊)이고 감각접촉의 일어남이 두 번째 변이며 감각접촉의 소멸이 중간[majjhe]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이다. 왜냐하면 갈애가 그것을 기워서 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나게 한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 과거가 첫 번째 변이고 미래가 두 번째 변이며 지금 이 순간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이다. ...중략... 즐거운 느낌이 첫 번째 변이고 괴로운 느낌이 두 번째 변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이다. ...중략...
정신[名]이 첫 번째 변이고 물질[色]이 두 번째 변이며 ...중략...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가 첫 번째 변이고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가 두 번째 변이며 ...8)
8) AN 6.61 Majjhesutta, 대림스님 역, 「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 울산:초기불전연구원, 2006, p.239-244 번역을 인용함. 장로들이 제시한 두 변 및 중간, 바느질하는 여인 등에서의 6가지 종류는 1. 감각접촉과 감각접촉이 일어남, 감각접촉의 소멸, 갈애(taṇhā); 2. 과거와 미래, 지금 이 순간, 갈애; 3.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갈애; 4. 정신과 물질, 알음알이, 갈애; 5. 여섯 안의 감각장소와 여섯 밖의 감각장소, 알음알이, 갈애; 6. 자기 존재가 있음과 자기 존재가 있음의 일어남, 자기 존재가 있음의 소멸, 갈애 등이다.
“지혜로운 자는 두 변을 알고서, 중간[majjhe]을 더럽히지 않네. 나는 그를 대인이라 부르노니,
그는 여기서 바느질하는 여인을 넘어섰노라.” 라는 [숫따니빠따] 「도피안 품」의 「학인 띳싸 멧떼이야의 질문」을 담은 Majjhesutta에서는8-1), 6명의 장로 모두가 바느질하는 여인이 갈애라는 의견에 공통적인 일치하지만
‘두 가지의 변’ 및 ‘중간’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바의 질문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모두의 의견이 방편이 된다고 말씀하시며, “양 변을 알고서 중간을 더럽히지 않고, 대인이라 부르며, 바느질하는 여인을 넘어서는 지혜로운 자” 로서 첫 번째 장로의 감각접촉[觸]에 대한 ‘두 변과 중간’을 보이고 “갈애가 그것을 기워서 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나게 한다.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된다.” 라는 인용을 말씀하신다. 이처럼 두 변과 중간을 분명히 알고서 더럽히지 않으며 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난 알음알이를 분명한 알아차림9)하는 것은 사성제등과 같은 최상의 지혜를 최상의 지혜로 알게 하고 또한 이를 철저하게 알게 될 때는 괴로움을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된다고 ‘majjha에 대한 이해’를 말씀하신 것으로 본다. 촉(觸)은 근경식[根境識] 삼사화합[三事化合]으로부터 발생한다. 감각접촉이 첫 번째 변이므로 근.경.식과 감각접촉을 갖추면 두 번째 변으로서의 ‘감각접촉의 일어남’이 있게 되고, 감각접촉에서의 소멸이 중간(majjhe)의 알음알이이며 일어난 모든 법은 반드시 소멸하는 법안(法眼)을 갖춘다.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이 준 쾌락과 자기 학대가 준 고행을 따르지 않으시고,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의 극단을 법(法)으로써 감수(感受)하셨다. 이때 대상에게로 마음이 기운채의 육근과 육경에서의 두 변을 결박(saṃyojana)이라고 한다. 마음의 개입으로부터 결박되는 두 변에서의 majjha가 발생함을 보인 S35:232 Koṭṭhikasutta에서의 시각과 형상과의 조건으로 생긴 욕탐에 묶인 결박을 majjhesutta의 6가지 안과 밖의 감각장소의 두 변으로 배대한다.
시각이 형상을 묶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형상이 시각을 묶고 있는 것입니까? ...중략... 마노가 법을 묶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법이 마노를 묶고 있는 것입니까? 벗 꼿티타여, 시각이 형상을 묶고 있는 것도 형상이 시각을
묶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두변을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이 있는데 그것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10)
8-1) Stn Tissametetayyasutta, "so ubhantamabhiññāya , majjhe mantā na lippati. taṃ brūmi mahāpurisoti, so idha sibbinimaccagā”ti.” (전재성역주, [숫타니파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4) 「피안가는 길의 품」 「학인 띳싸 멧떼이야의 질문에 대한 경」, [잡아함경] 제43권 1164 「바라연경」참조.
9) 분명한 알아차림[sampajāna]함을 복주서에서는 미혹하지 않음인 분명히 알아차림이란 나아감과 물러감 등에 대해서 미혹하지 않는 그 자체가 바로 분명히 알아차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각묵스님,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 대념처경과 그 주석서], 초기불전연구원, 2004, p.136-169) 연구에서는 두 변의 결박돤 가운데로부터의 알음알이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을 sampajāna이라고 본다.
10) SN35:232 Koṭṭhikasutta, “cakkhu rūpānaṃ saṃyojanaṃ, rūpā cakkhussa saṃyojanaṃ … pe … mano dhammānaṃ saṃyojanaṃ, dhammā manassa saṃyojanan”ti? Na kho, āvuso koṭṭhika, cakkhu rūpānaṃ saṃyojanaṃ, na rūpā cakkhussa saṃyojanaṃ. Yañca tattha tadubhayaṃ paṭicca uppajjati chandarāgo taṃ tattha saṃyojanaṃ”
검은 소와 흰 소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 줄에 묶여 있는 Koṭṭhikasutta에서는, “검은 소가 흰 소를 묶고 있는 것도 아니고 흰 소가 검은 소를 묶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밧줄이나 멍에 줄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거기에 묶여 있습니다.”라는 묶인 가운데에서의 ‘안목’은 대상에게로 마음이 기운 욕탐에서의 육근과 육근의 두 변의 결박 가운데(majjha)으로부터 알음알이[識]와 오온 등의 존재를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majjha에 대한 이해를 <그림 1>에서의 도식적인 흐름으로부터 얻게 된다.
<그림 1> majjha에 대한 도식적인 이해
육근[안・이・비・설・신・의]을 가진 마음이 4대 물질[지․수․화․풍]에게로 기울 때로부터 연유된 육경[색・성・향・미・촉・법]과의 결박으로부터 연기하게 되는 알음알이 등과 같이 majjha에 대한 이해로부터 태어나게 되는 이런저런 존재에 대한 앎과, 물질[色]으로부터 연유한 정신 작용으로써의 명(名)의 발생 즉, 오온에 대한 앎11)을 밝힌 것이다.
2. 일체에서의 결박과 원시불교에서의 majjha의 이해
마노[意]로부터의 법(法)의 상속(相續)을 쉽게 알기 위해서 각묵스님이 번역한 「상윳따 니까야」에서의 정신・물질[名色]의 일어남과 법의 일어남을 인용한다.12) 육근의 안・이・비・설・신 5가지의 감각기능은 마노를 의지하며, 마노가 5가지 감각의 대상과 감각 영역을 경험한다고 본다. 마음은 정신‧물질[名色]의 일어남이고, 법은 마음의 작의(作意)으로부터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5가지의 감각의 대상과 감각 영역을 감수한 마노는 마음챙김[sati]을 의지한다고 설명한다. 즉, ‘헤아림’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마노는 육근의 안・이・비・설・신 5가지의 감각적인 접촉으로부터 받아들인 정보를 “좋다, 싫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 등의 느낌을 감수하고, 지각하고, 의도하는 등과 같은 오온의 정신작용을 관장한다. 마노의 이러한 정신적인 작의에 의해서 육근과 육경의 물질로부터의 감각적인 접촉을 법으로써 드러나는 바를 마음챙김으로부터 관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노(mano)와 법,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릴 뿐이다. ...중략...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13)
11) MN9 Sammādiṭṭhisutta, “느낌, 인식, 의도, 감각접촉, 마음에 작의를 정신이라 하고, 4가지 근본물질[四大]과 그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 한다. 이런 정신과 물질을 일러 명색이라 한다. 알음알이가 일어나기 때문에 명색이 일어난다.... 성스러운 팔정도가 명색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니,” 대림스님 역, 「맛지마 니까야」 제1권, [바른 견해 경], 초기불전연구원, 2012, p.289-323.
12) 각묵스님 역주, 「상윳따 니까야」 5권, 초기불전연구원, 2009, pp.522-523, “명색의 일어남이 바로 마음의 일어남이며, 마음에서의 작의의 일어남이 법의 일어남이고 작의가 소멸함이 곧 법의 소멸이다.” 그리고 [초전법륜경]에서는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集法卽滅法)“라고 부처님은 법안(法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13) SN 35.23 Sabbasutta, “sabbaṃ? Cakkhuñceva rūpā ca, sotañca saddā ca, ghānañca gandhā ca, jivhā ca rasā ca, kāyo ca phoṭṭhabbā ca, mano ca dhammā ca—idaṃ vuccati, bhikkhave, sabbaṃ. Yo, bhikkhave, evaṃ vadeyya: ‘ahametaṃ sabbaṃ paccakkhāya aññaṃ sabbaṃ paññāpessāmī’ti, tassa vācāvatthu kamevassa; ...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n”ti.”
SN 35.23 Sabbasutta에서는 육근과 육경의 쌍(雙)을 일체라고 보는데, 두 변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의 majjha는 독립적인 실체로써의 감각적인 접촉의 알음알이이므로 일체는 곧 현실적인 경험이 된다. majjha에 의지한 모든 일체는 반드시 알음알이를 발생한다. 그래서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세운다고 주장한다면 현재를 인지(認知)하는 감수 영역을 벗어나게 되므로 “일체를 단지 말로써만 희론을 한다.” 라고 [일체 경]에서 말씀한 것이다. 이처럼 지금 여기에서 보거나 듣는 majjha로부터의 감수(感受)와 이 감수를 관장하는 마노에 의지하여 법이 상속(相續)됨을 보인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비구는 육내외입처(六內外入處)에서 법을 따라서 법을 관찰하는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비구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분명히 알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触․法)을 분명히 알며,
그 두 변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결박을 분명히 알고, ...14)
박훈천・이순옥의 「원시불교에서의 중(中)에 대한 오해」15)에서는 ‘majjha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본다. “중도(中道)라고 할 때 ‘가운데 길’이라고 하지 않고, ‘나와 대상 가운데에 끼어 있는 알음알이에 대한 닦음’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majjha는 육근과 육경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 발생한 알음알이를 드러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MN 36 Mahāsaccaka sutta16)에서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자 과거의 수행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보신다.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이 바른 지견(知見)의 성취에는 무익함을 경험하셨고 이전의 고행과 다른 길이 있다는 직관이 일어났던 부처님은 유소년 잠부나무에서의 길을 따라가면서17), 육근과 육경의 두 변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결박 가운데로부터 majjha의 안목을 갖추시고 오온(五蘊)과 법(法)에 대한 최상의 지혜와 고요함의 적정을 구족하시었다고 본다.
14) MN. vol.1. p.61, Satipaṭṭhānasutta (박훈천․이순옥, 「원시불교에서의 중에 대한 오해」, [한국불교학]제43집, 한국불교학회, 2005, p72 인용), 육근과 육경을 조건으로 생겨난 욕탐의 결박(saṃyojana)에서의 majjha의 꿰뚫어 알아차림(pajānāti)을 관찰한다.
15) 박훈천․이순옥, 앞의 논문, p.41-42.
16) MN 36 Mahāsaccakasutta, “악기웨사나여,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님이 삭까족의 의식을 거행하실 때 시원한 잠부 나무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을 떨쳐버린 뒤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있고, 떨쳐버림으로부터 생겨난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될까?”라고. 그런 나에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생겨났다.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라고.” 또한 붓다는 출가하시기전 유소년 농경에서의 알음알이로부터 초선을 체득하셨다고 「유연경」에서도 말한다. (구담 승가제바 한역, 「유연경」, [중아함경] 권29)
17) 김홍미, 「사성제와 연기법의 결합에 대하여 –초기불전을 중심으로」,[인도철학], 제35 집, 2012, p.125-p.126.
III. majjha의 실천적 이해 majjhima와 majjhena
1. 극단을 버리기 위한 중도와 법의 상속
majjha에 대한 안목으로부터 오온과 법을 보는 지혜를 전개하기 위하여 중도(majjhimā paṭipadā)에서의 ‘majjhima’와 Kaccānagottasutta에서의 12연기를 이끈 ‘majjhena’에 대한 실천적 이해를 펼쳐 나아간다. MN3 Dhammadāyādasutta에서는 ‘법의 상속자’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의 공부 가운데에서 탐냄과 성냄 등의 다양한 종류의 극단을 나열하고, 이들 극단을 버리기 위한 수행으로써 중도를 기술하고 있는 바를 주목한다.
<그림 2> 육근과 육경의 두 변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결박 해체에서의 극단
선행 연구에서는 쾌락과 고통의 두 가지의 극단을 벗어나거나18) 혹은 가까이 가지 않고서19) 중도를 완전히 깨달았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법의 상속자의 경]의 Dhammadāyādasutta에서는 감각적인 욕망에서의 ‘탐냄’과 같은 극단에 대한 버림과, 일체를 거부하는 ‘성냄’과 같은 극단에 대한 버림을 위한 도 닦음으로써의 중도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벗들이여 탐냄도 악이고 성냄도 악이다. 탐냄을 버리기 위하여 또한 성냄을 버리기 위하여 중도가 있다.
그것은 안목을 만들고 앎을 만들고 적정, 최상의 지혜, 완전한 깨달음, 열반으로 인도한다.20)
18) 우동필, 앞의 논문, p.20-21.
19) 남수영, 앞의 논문, p.30.
20) MN I p.16.(MN 3), Dhammadāyādasutta, 분노를 버리고 원한을 버리기 위한 중도와, 저주를 버리고 횡포를 버리기 위한 중도와, 질투를 버리고 인색을 버리기 위한 중도와, 환상을 버리고 광기를 버리기 위한 중도와, 고집을 버리고 격분을 버리기 위한 중도와, 자만을 버리고 오만을 버리기 위한 중도와, 허영을 버리고 태만을 버리기 위한 중도 등과 같이 탐냄과 성냄, 분노와 원한, 저주와 횡포, 질투와 인색, 환상과 광기, 고집과 격분, 자만과 오만, 허영과 태만 등의 다양한 종류의 극단을 버리는 실천으로써의 중도를 기술한 것으로 본다.
Dhammadāyādasutta에서는 <그림 2>에서 보이고 있는 탐냄과 성냄의 극단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극단을 보이고 있는데, 극단에 대한 도 닦음으로써의 중도를 열거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극단에서는 육근과 육경간의 두 변의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한 쪽 변을 놓친 상태이며 육경의 색(色)에게로만 마음이 기운 채로부터 발생한 불선법(不善法)의 한 예(例)로써도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극단을 버리기 위하여 육근과 육경의 두 변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결박으로부터 majjha에 대한 안목을 만들고 majjha로부터의 오온에 대한 앎과, 법에 대한 지혜를 갖추게 되고 이를 닦게 되면 적정의 선정과 최상의 지혜에게로 나아가고 이들 극단이 소멸하게 된다는 ‘중도’가 곧 ‘법(法)의 상속자’가 주는 의미이라고 본다.
SN 35:23 Sabbasutta에서는 욕탐이 짓는 육근과 육경에서의 결박을 일체라고 보는데, 일체에서의 majjhimā의 안목으로부터 연기한 알음알이를 의지하여 오온에 대한 앎과 일체법의 지혜를 계발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majjhā의 안목에 의해서 연기한 오온으로부터의 앎과 법에 대한 지혜를 중도가 가져다 준 이득으로 본다. [초전법륜경]에서의 중도처럼 SN 42:12 Rāsiyasutta22)에서도 ‘안목과 앎을 만들게 하는 중도’를 기술하고 있다.
두 가지의 극단을 다가가지 않는 중도(majjhimā paṭipadā)를 여래는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majjhā의 닦음은)
안목[眼]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고, 적정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23)
21) 두 변 가운데에서의 majjha에 대한 안목을 강조하기위하여 majjhima로 표기한다.
22) SN 42.12 Rāsiyasutta, [초전법륜경]처럼 [라시야 경]도 ‘두 가지 극단을 다가가지 않는(ubho ante anupagamma) 중도를 깨닫는다.’고 하며 이는 극단을 여위려는 중도가 곧 ‘법(法)의 상속자’이라는 Dhammadāyādasutta에 일치한다고 본다.
23) SN 56.11, Dhammacakkappavattanasutta,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안목(sight)과 지혜(knowledge), 적정(calmness)과 최상의 지혜(understood well)를 PTS Pali English Dictionary, https://suttacentral.net/define/cakkhukaraṇa (ñāṇakaraṇa, upasama, abhiññāya) (2017.5.1) 확인. anupagamma는 ‘not having approached’의 “다가가지 않다”이다.
법은 마노(意)의 대상이며 육근과 육경의 두 변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결박 가운데로부터 연기하는 감각적인 접촉에서의 작의(作意)로부터 일어난다. 앞에서의 Dhammadāyādasutta에서의 탐냄과 성냄 등의 극단처럼, 두 변으로부터의 결박이 상실되어서 감각적인 접촉이 상실된 상태에서의 법을 곧 ‘성스럽지 못하고 유익함이 없는 극단’으로써도 볼 수가 있었다. <그림 3>에서는 육근과 육경의 결박된 가운데의 majjhima로부터 연기하게 되는 알음알이에 대한 안목으로부터, majjha에 대한 실천적 이해를 갖추고 오온의 생성에 대한 도식적인 이해를 설명한다.
<그림 3> majjhima의 도식적 이해
3. majjhena로부터의 실천적 이해
SN 12:15 Kaccānagottasutta에서는 “여래는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말씀하신 후 12연기를 뒤에서 설명하는데24), 이는 majjhena로부터 연기하는 법의 존재를 설명한 것이다. 12가지 종류의 결박 조건에 의지하여 연기하게 되는 법들의 종류를 순차적 열거한 것을 12연기법으로 본다. 마음이 이전의 법을 갈애하거나 기운 가운데의 결박을 조건하여 현재의 법이 뒤따라서 발생하게 되는 인과법이다. 이처럼 연기의 법은 마음이 끼인 조건의 결박된 가운데 의해서 발생함을 ‘majjhena 에 대한 이해’이라고 본다.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극단을 다가가지 않는 ‘중에 의해서(majjhena)’ 여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부터 행이 일어나고, 행을 조건으로부터 알음알이가 일어나고, ...”25)
24) 우동필은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하다”에서, 대립을 넘는 조건을 탐색하고 존재들이 본래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요청된 조건으로 본다. 우동필, 앞의 논문, p.16.
25) SN 12.15 Kaccānagottasutta, “Ettāvatā kho, kaccāna, sammādiṭṭhi hoti. Sabbaṃ atthī’ti kho, kaccāna, ayameko anto. ‘Sabbaṃ natthī’ti ayaṃ dutiyo anto. Ete te, kaccā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법에 대한 앎은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여야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는 Kaccānagottasutta에서는 “중에 의해서(majjhena) 법을 설한다.” 라고, 법의 의미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일어나고 있는 결박된 조건 가운데로부터 의지하여 드러나게 된다는 법안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음이 기울거나 어떤 도구적인 조건 가운데에 의해서 연기한 법에 대한 지혜로부터 ‘majjhena의 이해’가 이루어진다. majjhena의 도구적인 조건을 12연기의 명색(名色)에서부터 살펴본다. 물질[색・성・향・미・촉・법]에게로 기우는 뜻을 가진 명색(nāmarūpa)은 이전의 알음알이[識]에게로 마음이 결박된 조건 가운데에 의해서 연기(緣起)한 법이며, 그리고 12연기에서 4번째 명색에게로 마음이 결박된 조건에 의해서 곧 5번째의 ‘감각 장소[六入]’의 연기를 법으로 설명하며, ‘감각 장소’에 마음이 결박된 조건에 의해서 6번째의 ‘감각의 접촉’의 연기를 법으로 설명하며, 계속 이러한 연기 조건을 반복하면 11번째의 태어남의 연기를 법으로써 설명할 수 있으며 끝내는 늙음과 죽음, 근심과 탄식, 고통 등의 괴로움의 무더기에게로 연기가 이어진다. 마음이 기운 조건의 결박에 의해서 법이 연기한다는 majjhena의 도구적인 이해로부터, 12연기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연기 성품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법에서의 순관(順觀) 및 역관(逆觀)적인 연기 특성을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하다” 로부터 구현되었다. 따라서 12연기법에서의 majjhena를 [초전법륜경]에서의 “두 극단을 따르지 않게 하는” 닦음의 majjha의 이해로써 본다.
<그림 4> majjhena의 도식적 이해
IV. 아나빠나 사띠에서의 majjha의 구현과 고찰
1. Ānāpāna sati에서의 majjhe의 드러남과 알음알이의 고찰
Ānāpāna sati에서의 숨결 닿음을 지속적으로 마음챙겨 나아가면, 육근과 육경의 두 변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결박된 가운데로부터의 입처(入處)를 마음챙김[sati]할 수 있다. 들숨과 날숨에서의 숨 쉬는 몸(身)과 대상인 닿음 촉(觸)과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 연기한 알음알이에 대한 표상26)을 만들고 그 표상의 보호와 지속을 통해서 ‘중간(majjhe)’으로부터 드러난 알음알이에서의 법을 닦는 초기불교 수행체계를 구현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들숨과 날숨에서의 알아차림이 보편적인 수행이므로 이는 Ānāpānasati에서의 majjha가 알음알이라고 직접 설하신 경전이 없었던 바의 이유가 된다. 불타가 멸하신 후 가섭존자의 결집이래로 설일체유부나 부파불교등이 정법의 계승 목적으로서 제각기 일어났고, 근래 번역된 5부 니까야 등으로부터 수행으로서 majjha를 드러내거나, majjha로부터의 알음알이를, 혹은 사대물질로서의 알음알이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 등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27)으로 볼 수가 있다.
26) 표상(nimita)은 들숨과 날숨이 부딪히는 입술 위와 코 구멍과 목구멍에서의 숨결 닿음에서의 地.水.火.風 요소의 알음알이를 알아차리는 마음챙김이다. 표상은 푸른색 보라색 흰색의 밝은 빛이며 코앞 전면에서 심상(心相)으로서 떠오른다.
27) 부처님이 유년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초선정을 성취하셨듯이 majjha 닦음에 대한 구현 가능성과, 정념과 정정에서의 선지로부터 고성제(苦聖帝)가 중도가 지향하는 사성제의 실천으로서 충분함을 majjha 구현에서의 타탕함으로서 고찰한다.
초선정(初禪定)부터 사선정까지의 여러 가지 선지(禪支)들과 함께 차제법관(次第法觀)의 선정(禪定)을 기술한 MN111 Anupadasutta에서는 초선을 이룬 후 선정으로부터 체득하신 바의 선지를 제시하고 있다. Anupadasutta에서와 MN 36 Mahāsaccakasutta에서의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리고 불선법[不善法]을 떨쳐버림”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의 소멸과 법에 대한 상념의 장애에 대한 극복을 위하여 감각적 욕망이 생겨나지 않도록 안팎으로 모든 법에 대해서 장애를 일으킬 소지의 상념을 극복한다28)는 선지이며 이는 과거의 알음알이로부터의 장애가 없이 지금 여기에서의 감각 접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안(法眼)으로써 육근과 육경의 두 변이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majjha를 닦는 것으로 본다. 초선정에서의 선지29)에서‘선정의 문제에 관한 고찰’을 연구한 임승택(2002)30)은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그들 법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린다[pajānāti].” 라고 감지되는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는 선지에 대한 감지에서의 알아차림을 곧 숨 쉬는 몸과 숨 닿음에서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 연기한 사대물질 요소들의 알음알이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sampajañña]으로 배대한 것을 말한다. 사유 등의 선지에서 법들이 일어나고, 드러나고, 사라지는 것 등을 ‘감지하는 것’은 곧바로 사대물질 요소들로부터의 무상(無常)의 법안을 꿰뚫어 알아차림이다.
28) 이필원, 「초기불교의 호흡 명상법에 대한 고찰-호흡명상의 다양한 위상을 중심으로」, 불교학연구 제47호, 불교학연구회, 2016, p.118-p.120
29) MN 111 (MN. vol.3. p.25,), Anupadasutta,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초선에서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 희열, 행복,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 감각접촉, 느낌, 지각, 의도[思], 마음, 열의, 결심, 정진, 마음챙김, 평온, 작의의 법들을 차례대로 결정지었다.” 대림스님 역, 「맛지마 니까야」 제4권, [차례 차례의 경], 초기불전연구원, 2012년, p.77.
30) “그에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그들 법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이 사라진다. 그는 이와 같이 알아차린다.” 분명한 알아차림을 밝힌다. 임승택, 「선정(jhāna)의 문제에 관한 고찰」, 불교학연구 제5호, 2002.
SN 35.241 Paṭhamadārukkhandhopamasutta에 따르면 이 언덕과 저 언덕에서의 중간(majjhe)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곧 환락과 탐욕 등의 극단에 빠지는 것을 말하므로31), 두 언덕에서의 중간의 드러남은 극단에게로의 다가감이 없으며, 몸과 촉과의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majjha’의 분명함과 ‘사대물질 요소들의 알음알이’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을 말하므로 비로소 팔정도에서의 정념(正念)이 갖추어진다. 이때 A.6.61 Majjhesutta의 “육내외입처의 두 변에서의 중간이 알음알이”를 이러한 ‘가라앉음’에게로 배대하면, 육근과 육경의 가운데인 중간(majjhe)이 가라앉게 되면 육근과 육경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의 알음알이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이 불가능하게 되므로 쾌락과 고통의 극단에게로 다가가게 된다는 바로부터 중간(majjhe)의 드러남을 역설적으로 밝히신 것이다. 교리 문답을 통하여 알음알이와의 지혜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 MN 43 Mahāvedallasutta 에서는 koṭṭhiko의 알음알이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알음알이, 알음알이’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알음알이라고 합니까?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합니다. 무엇을 분별해서 알까요? ‘즐거움’이라고 분별해서 알고, ‘괴로움’이라고 분별해서 알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라고 분별해서 압니다.32)”라고 sāriputto가 대답하며, 지혜(paññā)와 알음알이라는 법들이 서로가 결합되고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법들을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지혜는 닦아야 하고 알음알이는 철저히 알아야한다.” 라는 차이를 밝히고 있다. “지혜는 최상의 지혜를 목적으로 하고 버림을 목적으로 한다.” 와 같이 알음알이가 최상의 지혜와 결합되어 있으면 즐김과 탐욕의 극단에게로 다가가지 않는 떨쳐버림을 사대물질 요소의 알아차림으로부터 닦을 수 있다. 이처럼 선정과 열반에 이르는 길의 배경무대[gocara]로써 알음알이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이 곧 ‘majjha의 닦음’임을 밝혔다.
31) SN 35.241 Paṭhamadārukkhandhopamasutta, “비구여, 이 언덕이란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저 언덕이란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들을 두고 한 말이다. 중간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바로 환락과 탐욕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중간의 가라앉음(majjhe saṃsādo’ti )은 이 언덕과 저 언덕에서의 두 변 가운데(majjha)에서의 가라앉음을 말한다.
32) MN 43 Mahāvedallasutta, 대림스님 역, 「맛지마 니까야」 제2권, [교리문답의 긴 경], 초기불전연구원, 2012, p.289-314. 두 변에서의 ‘중간의 가라않음’은 두 변의 결박된 가운데 알음알이로부터의 분명한 알아차림의 불가능을 의미하고 이는 환락과 탐욕의 극단에게로 다가감을 말한다.
2. 바른 마음챙김과 바른 삼매의 배경 무대로서의 majjha의 고찰
아나빠나 사띠에서의 ‘majjha’로부터 연기하게 되는 사대물질 요소들의 ‘알음알이’에서 분명한 알아차림의 마음챙김을 majjhā의 구현으로서 고찰한다. 알음알이의 지・수・화・풍 요소들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으로부터의 마음챙김이 곧 DN 22 mahāsatipaṭṭhānasutta의 사성제에서의 바른 마음챙김[正念]과 바른 삼매[正定]33)에서의 선지(禪支)이다. 중도는 팔정도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도성제는 곧 팔정도라고 말씀34)하시므로, 바른 마음챙김과 바른 삼매로부터 구현되는 majjha의 닦음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성제이다. 몸(身)과 촉(觸)과의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중간(majjhe)의 가라앉음35)’에 대한 공부를 하면, 숨 쉬는 몸과 닿음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 알음알이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에서는 사대물질의 요소를 느끼며 지각하고 그리고 작의(作意)하는 등의 명색(名色)으로부터 연기한 무더기[五蘊]의 일어남에 대한 법안을 갖추게 되고36), 알음알이에서의 사대 물질 요소들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正念]으로부터 거친 사유[尋]에서 미세한 사유[伺]에게로 나아가고 떨쳐버림으로부터 생겨난 희열과 행복 등의 선지를 갖추며 정정(正定)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Dhammacakkappavattanasutta에서의 "두 극단을 다가가지 않는 중도를 깨달았으며, (majjha의 닦음은) 안목을 갖추며, 지혜를 갖추고, 고요함의 적정, 최상의 지혜와 열반” 등의 깨달음에서의 각지[覺支]는 ‘중간의 가라않음’이 없도록 알음알이에서의 분명한 알아차림의 마음챙김으로부터 연기하는 정정에서의 선지를 말한 것이다. A.6.61 majjhesutta에서의 부처님께서는 6명의 장로와의 질의문답을 하시며 두 변의 조건 가운데의 알음알이에서의 분명한 앎을 종류별로 명확히 하셨다. 과거와 미래에서의 지금 이 순간이, ‘명색’ 두 변에서는 알음알이가, 육내외입처의 두 변에서는 알음알이 등이 중간이다. 이처럼 두 변을 알고 그 두변으로부터의 중간을 분명히 아는 것은 ‘중간을 더럽히지 않고’ 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남에서의 꿰뚫어 앎이 된다.
33) DN 22 mahāsatipaṭṭhānasutta,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不滿足)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무엇이 바른 삼매[正定]인가?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거친 사유[vitakka]와 미세한 사유[vicāra]가 있고 떨쳐버림으로부터 생겨난 희열과 행복이 있는 初禪에 들어 머문다.” 각묵스님 역,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 대념처경과 그 주석서」, 초기불전연구원, 2004, pp.20-22. vitakka와 vicāra의 두 사유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목적의 처음과 뒤에서의 조합이다. vitakka는 초기에서의 사고(thought)의 반영이고 vicāra는 거의 스스로 조사(investigation)하는 사유이다. (https://suttacentral. net/define/vitakka와 vicāra 에서 2017.7.31 확인함). “거친 사유란 사유함이며 추론이라 불리며 그것에 의해 마음이 의지하는바 안에서 맴도는 것이 미세한 사유이며, 따라 다니는 것이라는 것이다”. 임승택, 앞의 논문.
34) SN 56.11, Dhammacakkappavattanasutta,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8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이니, ... 이것이 괴로움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이니,” 각묵스님 역, 「상윳따 니까야」 제6권,[초전법륜경], 2009, 초기불전연구원, p.384-392.
35) ‘중간에서의 가라앉음’은 알음알이로부터 지혜의 결합이 불가능하므로 알음알이로부터 사대물질에서의 ① 단단함과 거칠음 부드러움과 매끄러움 등의 땅의 요소, ② 흐름과 응집 등의 물의 요소, ③ 따뜻함과 차가움의 불의 요소. ④ 지탱과 움직임(당김과 밀어냄)의 바람 등의 철저히 앎을 근면히 분명한 알아차림하며 마음챙기며 머문다.
36) MN 109 Mahāpuṇṇamasutta, 물질[色聲香味觸法]은 사대물질이 원인이며 물질을 감각접촉[觸]하는 조건으로부터 느낌과 지각과 의도 등이 일어나고 정신과 물질을 조건하여 알음알이의 무더기가 드러나고 있음을 밝힌다. 대림스님 역, 「맛지마 니까야」 제3권, [보름밤의 긴 경], 초기불전연구원, 2012, p.716.
육근과 육경의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알음알이'를 놓치지 말고 분명한 알아차림에 마음챙기라는 말씀이 바로 MN 43 Mahāvedallasutta에서의 “지혜는 닦아져야 하고 알음알이는 알려져야 한다.”라는 ‘majjha의 닦음’이라고 본다. 이처럼 중간에서의 알음알이를 분명히 알아차림을 한다는 바른 마음챙김은 지금 여기에서의 두 변 가운데의 가라앉음이 없도록 사대물질의 요소를 알음알이로서 드러내어 알려지게 하는 ‘majjha의 닦음’을 밝히신 것이다. majjha의 닦음을 4가지의 념처[身.受.心.法]에서 순차적으로 나아가면 두 변의 중간 가운데의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알음알이로서 낱낱이 드러나게 되고, 지속적으로 이러한 알음알이를 분명한 알아차림하며 마음챙김으로부터 마음이 고요[心一境]하므로 초선에서의 바른 삼매를 구족하게 된다.
3. Ānāpānassati에서의 majjha의 구현과 고찰
육근과 육경이 결박된 가운데로부터 알음알이의 지・수・화・풍 등 4가지 요소들의 감각접촉에서의 느낌 등을 분명히 알아차리는 Ānāpānasati에서의 사념처를 바른 마음챙김과 바른 삼매의 배경 무대로 삼는 majjha의 닦음을 구현한다. 사대물질의 요소로서 구성된 숨 쉬는 이 몸에서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의 알음알이는 흙의 성분(딱딱함, 거침, 부드러움, 매끄러움)과, 물의 성분(흐름과 응집)과, 불의 성분(차가움과 따뜻함)과, 바람의 성분(밀거나 당김, 지탱) 등의 4가지 종류의 요소들이고, 이들 개별 요소들에서의 알음알이를 4가지의 념처에서 낱낱이 분명하게 알아차리며 마음챙기는 바는 사대물질 요소들의 광대한 인식체계인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으로부터의 지・수・화・풍 요소들을 감각접촉[觸]하면서 느끼고[受] 지각하며 의도하거나 감각접촉의 작의하는 등으로부터 연유한 오음성고[五陰聖苦]를 꿰뚫어 안다는 것이다. Dhammacakkappavattanasutta에서 “팔정도가 중도이다.”고 말씀하였듯이, 길거나 짧은 들숨날숨에서의 ‘몸에서 몸’으로부터 ‘법에서 법’까지의 사념처에서 사대물질 요소들의 분명한 알아차림을 마음챙기며 꿰뚫어 알거나(pajānāti) 혹은 사대물질 요소들을 ‘온 몸’으로서 공부하는(sikkhati) 바의 사유를 지속하거나 또는 숨 쉬는 몸의 행함[身行]의 편안함 등의 ‘majjha’를 닦으면 오개[五蓋]등의 불선법[不善法]을 떨쳐버리게 되고, 사대물질 요소들에 대한 거친 사유로부터 미세한 사유와, 떨쳐버림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과 행복[樂]과, 심일경[cittekaggatā] 등의 선지를 바른 삼매로서 갖추게 된다. ‘majjha의 닦음’으로부터 드러난 알음알이를 SN 35.245 Kiṃsukopamasutta37)에서는 비유를 통해서 올바른 봄[正見]이라고 하였다. 사대물질로 구성된 육근의 몸으로부터의 알음알이를 바로 안다는 것은 4대 물질 요소로 구성된 인식체계의 광장 가운데에서의 있는 그대로를 마음챙기며 살펴보는 지혜를 말씀한 것이다. 육근과 육경의 가운데가 가라앉게 되면 두 변의 결박 가운데 일어난 알음알이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이 불가능하므로 극단의 환락과 탐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대물질의 인식체계에서 있는 그대로를 바로 안다는 것을 첫째로 A.6.61 Majjhesutta의 ‘육내외입처의 중간이 알음알이’와 두 번째로 Paṭhamad-ārukkhandhopama sutta으로부터의 ‘중간에서의 가라않음’ 등으로부터 살펴볼 때, ‘majjha’에서의 알음알이를 사대물질의 요소로부터 낱낱이 마음챙기면서 사념처에서 닦는 Ānāpānasati가 곧 majjha로부터의 알음알이를 얻고 “정념과 정정”을 마음챙기는 초기불교 수행체계이다.
37) 각묵 스님 역, 「상윳따 니까야」 제4권, [낑수까 나무 비유 경], 2009, 초기불전연구원, p.407-409 참조. 석가모니불은 비유를 통해서 사대물질로 구성된 육근의 몸으로부터의 알음알이를 바르게 알아서 4대 근본물질의 인식체계 가운데에 있는 그대로를 마음챙김의 열반을 설하신다. 도시(nagara)이라는 것은 4가지 지.수.화.풍 등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양육되고 무상하고 괴멸하고 소모되고 파괴되고 사라짐을 지닌 이 몸(身)의 가운데 있다. 광장(siṅghāṭako)은 4가지 땅의 세계와 물의 세계와 불의 세계와 바람의 세계를 알음알이하는 광대한 인식체계이며, 도시에서의 성주는 알음알이다. 성주에게 알려주는 전령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이다.
[대념처경]에서의 들숨날숨으로 공부짓는 4가지 종류의 기본 정형구는 숨을 쉬는 풍대(風大)의 몸에 대한 마음챙김38)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육근의 몸[身]의 대상이 ‘촉(觸)’이기에 ‘온 몸’은 숨 닿음의 전체 의미이다. 이처럼 ‘온 몸’은 위 입술의 인중 위와 양코구멍 입구에서의 모공 털을 감지할 수가 있도록 ‘촉’에서의 지각 능력을 키우고 이들 감지에 의지한 집중력 향상으로부터의 모아진 마음 경계 즉 심일경(心一境)의 이익이 있다. 몸(身)과 촉(觸)과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 태어난 사대물질 요소들의 알음알이39)를 분명한 알아차림으로서 마음챙기는 majjha 의 닦음으로부터 들숨 날숨에서의 앎과 적정의 고요함을 갖추게 된다. MN 62 MahaRahulovadasutta40)와 MN 118 Ānāpānasatisutta41)에서는 들숨 날숨으로 공부짓는 4가지 기본 정형구를 16개의 정형구로 배대하고 있다. 숨 쉬는 몸(身)과 숨 닿음(觸)과의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코와 입술위의 전면에서 지금 이 순간의 마음챙김을 지속하는 16개의 정형구로부터, Mahāsatipaṭṭhānasutta의 사념처에서의 분명한 앎42)과 바른 마음챙김을 얻을 수가 있다. [여섯씩 여섯경]43)에서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서 그런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에서처럼 무명을 벗어나는 지혜는 알음알이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두 변에서의 중간(majjhe)이 가라앉으면 MN 3 Dhammadāyādasutta에서 보인 탐냄과 성냄, 분노와 원한 등의 극단을 여의지 못하고 번뇌[憂.悲.苦.惱]를 일으킨다. 느낌의 갈애로부터 취·유·생·노사 등에게로 연결되기 전에 사대물질 요소들의 분명한 알아차림으로부터 바른 마음챙김의 majjha를 닦으면 느낌으로부터의 갈애를 끊는 멸성제가 괴로움의 소멸로서 인도될 수가 있다.
38) [무애해도] 비유에 따르면 톱니 날 모두가 스치듯이 접촉하는 나무처럼 마음챙김에 연결하는 것은 들숨날숨이고 들숨날숨은 톱니와 같다. (대림스님, [들숨 날숨으로 공부짓는 마음챙김],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3, p98-102, 재인용)
39) 온 몸은 정신적인 몸(名身)과 물질적인 몸(色身)을 말한다. “‘몸’이라 할 때, 2가지 몸이 있다. 名身과 色身이다. 受․想․思․觸․作意의 정신작용(名)이며, 마음의 움직임(心行)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 명신이다. 사대물질․물질로 이루어진 色․들숨․날숨․숨이 닿는 곳에 가까이 연루된 것들로, 몸의 작용(身行)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 색신이다.” 임승택의 (「빠띠쌈비다막가(Paṭisaṃbhidā magga)의 연구-‘들숨과 날숨에 관한 말씀(대품 제3, ānāpānakathā)’의 교감역주」, 29차 월례발표회, 보조사상연구원, 2000, p.203). 몸[身]과 촉(觸)의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알음알이는 사대물질 요소들이고 이때의 물질로부터의 정신작용[名色]을 ‘온 몸’으로 본다.
40) MN 62 MahaRahulovadasutta,, 들숨 날숨으로 공부짓는 마음챙김을 16 가지의 정형구로서 설명하고 있다.
41) MN 118 Ānāpānasatisutta,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 주석과 해석은 [들숨 날숨으로 공부짓는 마음챙김] (대림스님, 앞의 책, 2003, p19)을 참조한다.
42) DN 22 Mahāsatipaṭṭhānasutta, “몸 느낌 마음 법 등에서의 알음알이를 사대물질 요소들로부터 근면하게 분명한 알아차림을 마음챙김하며 머문다.” 숨쉬는 몸과 숨 닿음의 두변에 결박된 가운데 알음알이의 닦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소를 도살해서 사거리의 큰길에 부위별로 해체해 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이, 수행자는 바로 자신의 육신을 네 가지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육신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 이처럼,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며 지낸다.” (김재성(정원), 「위빠사나 입문」 강연 자료의 [대념처경], 서울 성북구 길상사, 1998, p.37) 에서도 큰길 사거리의 지.수.화.풍 등의 알음알이를 몸[느낌, 마음, 법]으로부터 닦는 마음챙김의 분명한 확립을 말한다.
43) MN 148 Chachakkasutta, “눈과 형상들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만남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 대림스님역 「맛지마 니까야」 제4권, [여섯씩 여섯경], 초기불전연구원, 2012년, p.578.
<표 1>에서는 majjhesutta에서의 ‘안의 감각장소(六根)와 밖의 감각장소(六境), 알음알이가 중간’ 등의 표기는 majjhima에 대한 이해로부터의 ‘감각접촉, 감각접촉의 일어남, 감각접촉의 소멸’ 혹은 ‘숨 쉬는 몸[身], 숨의 닿음[觸], 알음알이[識]’ 등으로써 대체하였으며, majjha로부터 구현한 앎으로써 오온의 정신작용과 법을 기술하였다.
<표 1> 두 변과 중도
사념처 | 身 (①~④) | 受 (⑤~⑧) | 心 (⑨~⑫) | 法 (⑬~⑯) |
첫 번째 극단 | 감각접촉 | 숨 쉬는 몸[身] | 정신[名] | - |
두 번째 극단 | 감각접촉의 일어남 | 숨결의 닿음[觸] | 물질[色] | - |
중(中) | 감각접촉의 소멸 | 알음알이[識] | 알음알이[識] | - |
앎 | 결박의 생성과 소멸 | 느낌과 지각, 택법 | 오온, 응심(應心), 해탈, 12연기법 | 무상, 빛바랜 탐냄, 소멸, 내려놓음(捨) |
특징 | 버림, 문지기, 거친 사유 | 미세한 사유, 희열과 행복 | 심일경의 선정 및 평온 | 4선정의 적멸, 삼법인, 평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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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과 날숨에서의 헤아림과 닿음44)을 마음챙기는 정형구 ①과 ②에서는 호흡이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있는 그대로를 “꿰뚫어 안다(pajānāti)” 라고 인용하고 있다. “꿰뚫어 안다.” 와 구별이 되는 문구로써 “공부짓는다(sikkhati).” 가 있는데 첫 번째로, 길거나 짧게 들이쉬거나 내쉬는 결박 가운데로부터의 중간(majjhe)과 알음알이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다. 숨 쉬는 몸[身]과 숨 닿음[觸]의 두 변에서의 중간(majjhe)으로부터의 알음알이를 지·수·화·풍 등의 사대물질 요소들로서 낱낱이 분별하는 분명한 알아차림을 “꿰뚫어 안다.” 라고 말한다. 또한 “공부짓는다.” 에서의 온 몸에서의 몸은 인중 위와 양코구멍과의 삼각형에서 두 변에서의 결박을 만들고 결박된 감각접촉들 가운데에서의 알음알이 즉, 지·수·화·풍의 4 가지 요소들로부터의 오온(五蘊)을 꿰뚫어 알아차리며 마음챙기는 공부를 말한다
44) 헤아림과 닿음(대림스님, 앞의 책, 2003, p93-98)은 입술 위와 코 구멍과 목구멍에서의 차갑거나 따뜻한 들숨과 날숨의 헤아림으로부터의 숨의 처음과 중간과 끝에서 닿음의 사유를 마음챙김하면 얻는 고요함을 majjha가 가져다준 선정이라고 한다. 두 변의 결박된 가운데 드러난 알음알이로부터 일어나는 법(法)이 majjha에서의 안목이다.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계속 수행하면 사념처를 성취하는가? 비구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 몸(身)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①∼④의 들숨과 날숨에서의 호흡은 육근의 몸과 육경의 촉을 결박하는 갈애이라고 볼 수 있다. 일체는 몸과 촉이고, 들숨과 날숨에게로의 호흡 집중은 감각적인 욕망의 떨쳐버림과 싫어하는 마음의 버림을 갖출 수 있게 한다. 거친 사유에서의 길거나 짧은 들숨과 날숨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면서 가진 순일한 호흡의 미세한 사유는 희열과 행복 등의 선지에 대한 앎을 가져다준다. 또한 ③과 ④에서 ‘온 몸(身)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는다(sikkhati). 라고 기술하고 있다. 앞서 “꿰뚫어 안다.”와 마찬가지로 “공부짓는다.” 는 물질과 정신 간의 두 변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결박에서, 숨 쉬는 몸에 연유해서 찰나 발생한 사대물질 요소의 감각접촉[六境]이라는 물질[色]과 물질에서 찰나 지각하고 의도하려는 오온의 정신작용[名]이 공부지어야 할 majjha의 닦음이다. 정형구 ③과 ④단계의 온 몸의 수행에서는 숨과 닿음의 결박에 연기한 알음알이를 알아차림으로서 유지한 채, 동시에 닿음이라는 코 구멍과 인중위에서의 촉감 등 두 가지 결박을 지각하고 의도하는 오온의 발생 또한 마음 챙기며 나아가야 하며 고도의 주의력이 필요하기에 “공부짓는다.” 라고 하는 것이다.45) 스쳐 오가는 숨의 시작점과 중간, 마지막까지의 결박된 도중(途中)에서의 온 몸을 의지한 가운데부터 연기한 오온의 정신작용으로부터 얻는 알음알이가 중(majjha)이 된다. 숨 쉬는 몸의 결박에 연기해서 발생하는 느낌 및 지각작용을 지속적으로 주의하면 한 곳에 집중하게 되므로 들숨날숨에서의 majjha의 닦음으로부터 심일경(心一境)을 성취하게 된다. ③에서의 심념처(心念處)에서는 오온이 앎이고, 숨결 닿음의 결박을 감각접촉으로서 작의하며 고요함의 적정에게로 나아가는 선정이 majjha의 닦음에서의 이득이다.
45) 정형구 ③에서 코 구멍이나 위 입술에서의 숨 닿음의 ‘온 몸’이다. ①과 ②에서의 “꿰뚫어 안다.”는 각각 1시간 이상의 숨 닿음을 알아차림한다. (정명스님.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유일한 길」(서울 : 푸른향기, 2014, p.104-105). 양 코구멍과 입술 사이의 삼각형의 숨결 닿음을 알음알이하는 ‘온 몸’의 결박된 가운데에서는 미세한 영역 변화를 주는 의도로부터 행[行]의 일어남을 경험한다.(김근중, 앞의 논문, p. 56-64)
신행(身行)의 편안을 공부하는 ④에서는 ③의 단계의 온몸의 숨 쉼처럼 위 입술과 양 코구멍의 삼각 접촉 지점 영역에서의 ‘온 몸’에서의 결박이 끊어짐이 없는 미세한 호흡에서의 ‘바람에 대한 얻음’46)을 분명한 알아차림한다. Ānāpānasati의 majjha 닦음에서, 사대물질 요소의 딱딱함[地大]을 싫다고 느끼고 지각하거나 의도하는 등 감각적 접촉의 작의로부터의 고통스런 법[五陰聖苦]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는 오음성고의 법을 고통스런 고성제로서 받아들이는 택법각지를 삼법인에게 의지하여 정진하는 가운데로부터 불편한 몸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희열을 말한다.47) 갈애의 일어남의 조건으로부터 육근과 육경과의 결박마다 마음은 감각접촉의 일어남에서의 ‘좋거나 싫은 느낌’을 알음알이하고 있다. 괴로움의 일어남이란, 이러한 알음알이를 계속 작의하려는 도중에 명색(名色)에서의 결박의 해체 때문에 불쾌한 감수에게로의 전이가 일어나므로 고통스러운 느낌의 감각접촉이 법으로써 연기될 수가 있다는 지혜가 곧 ‘중(中)에 의해서’의 majjhena의 안목으로부터 도출된다.
46) 바람의 얻음은 숨과 닿음의 결박 가운데부터 사대물질 요소의 알음알이를 닦는 것을 말한다. “얻는다는 것은 알음알이하는 것이다. 마시고 내쉬는 공기를 얻을 때, 그와 같은 닦음이 의지하는 바에 대한 알음알이가 분명하게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에 의지하는 바의 닦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임승택, 앞의 논문, p.206.
47) ‘몸의 작용’으로서, 몸을 이쪽으로도 구부리지 않고, 저쪽으로도 구부리지 않고, 어느 방향으로도 구부리지 않고, 앞으로도 구부리지 않고, 흔들거나 떨거나 움직이거나 동요하지도 않는, 고요하고 미세한 ‘몸의 작용을 가라 앉히며...(임승택, 앞의 논문, p.205) ④에서 身行의 편안은 결박된 가운데에서의 사대물질 요소로부터의 염각지와 딱딱함의 촉으로부터의 움직임에서 고통스런 물질적인 몸[色身]을 오음성고의 법으로서 받아들인 택법각지와 정신작용[名色]에서의 정진각지이며, 희열의 희각지와 가벼운 육신의 경안각지로부터 평온한 정각지가 이득이다.
앞서 ②와 ③ 그리고 ④의 3가지 정형구에서의 “majjha의 닦음에 대한 안목”으로부터, 숨 쉬는 몸과 촉과의 두 변의 결박된 가운데 연기한 알음알이와 명색(名色)에서의 얻은 앎과 특징을 8개의 정형구48)인 ⑤번의 수념처(受念處)에서부터 ⑫번까지의 심념처(心念處)까지로 배대한 것이며, 느낌[受]과 지각[想] 의도[行] 등 오온(五蘊)을 구현할 수가 있었다. 두 변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의 ‘majjha의 닦음’이라는 중도는 ⑦에서의 마음의 작용(心行)을 [빠띠쌈비다막가]에서는 “겪어 알아야 할 것을 겪어 알 때. ...중략...가라앉히고, 소멸하고, 진정시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49) ⑬~⑯은 명색(色名)과의 결박에서의 들숨과 날숨을 갈애하는 마음이 알음알이가 될 수가 있고 무상․빛바랜 탐냄․소멸․내려놓음 등이 앎이 된다고 본다. 이처럼 Ānāpānassati의 구현은 majjha로부터의 알음알이를 닦는 안목을 갖고, 이 안목은 두 변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의 알음알이는 곧 지·수·화·풍의 사대물질 요소들에서의 분명한 알아차림임을 지혜로이 갖추고, 이들 사대물질을 갈애하는 조건으로부터의 물질[色]을 느끼고 지각하거나 지속적으로 의도하며 감각적인 접촉을 작의하는 등의 오온이 곧바로 오음성고[五陰聖苦]의 법안(法眼)임을 올바로 알게 된다. 이처럼 majjha의 닦음으로부터 고성제의 최상의 지혜[苦聖帝]와 고요함[寂靜]의 구족함을 고찰하였다.
48)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시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49)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생겨나는 유쾌함으로서 즐거운 느낌이다.”의 마음작용을 경험하므로 행복하게 된다. 「빠띠쌈비다막가의 연구」(임승택, 앞의 논문, p.213-218)에서는 마음의 작용[心行], 마음과 삼매 및 해탈 등의 마음부수를 설명하고 있다. 느낌에서의 떨쳐버림 전율 혹은 유체이탈의 벗어남으로부터 희열 등의 마음 부수는 「쩨따시까 우리마음 지켜보기」(Nina van Gorkom(정명스님 번역), 서울 : 푸른향기, 2011, p.165)에서 참조한다.
V. 맺는 말
연구에서는 육근과 육경의 두 변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결박 가운데로부터의 majjha의 닦음으로부터 초기불교 수행에서의 majjha에 대한 이해를 구하였고, Ānāpānasati에서의 majjha와 알음알이의 분명한 도출로부터 극단을 다가가지 않게 하는 majjha의 닦음을 구현하였다. 육근과 대상간의 결박된 가운데에 태어난 majjha에 대한 이해로부터 극단을 기술할 수가 있었다. ‘majjha의 이해’를 Ānāpānasati로부터 구현하여 숨 쉬는 몸과 닿음 촉과의 두 변의 결박에서의 majjha의 닦음을 실천하여 오온에서의 앎과 법에 대한 지혜를 이루었다. 숨 쉬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 공부를 짓는 사념처에서는 몸과 촉과의 결박된 가운데로부터 일어난 사대물질 요소의 알음알이를 낱낱이 알아차리며 마음챙기는 과정(過程)으로부터 고요함의 선정 이득이 있었다. 숨 쉬는 몸(身)과 닿음 촉(觸)과의 결박된 가운데에 일어난 알음알이에 대한 알아차림으로부터 찰나 생성하는 명색(名色)의 결박에서의 오온을 얻게 되었고, 명색의 결박의 해체에 의해서 고통스런 법의 일어남을 보였다. 또한 명색의 결박으로부터 연기한 법에 대한 앎을 통해서 12연기법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법에서의 각지임을 보여주었다. majjha의 닦음은 정념(正念)으로부터의 오음성고에 대한 최상의 지혜[苦聖帝]와 적정[正定] 등을 구족하게 하였고 괴로움 소멸의 실천에서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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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에서 먼저 두 변에서의 결박 즉, SN 35.23 Sabbasutta(일체경)을 살펴봅니다. 육근과 육경이 갈애에게 결박된 가운데로부터 파생된 '색'의 원리를 살펴봅니다. 첫번째, 마음이 대상에게로 기운(갈애) 가운데로부터 육근은 4대물질로부터의 육경(형색.성.향.미.촉.법)을 파생짓습니다. 두번째, 두 변 육근과 육경의 결박된(마음이 개입된) 가운데로부터 알음알이(육식) 하는 것이 발생합니다. 이 2가지는 찰나적으로 발생하며 (근.경.식)삼사화합입니다. 이 삼사화합은 4대물질의 구성요소를 알아차림하고 있으므로 '색'이라고 하고 이때의 '색'을 감각적 접촉을 지속하므로 (좋다/싫다) 느낌과 지각의 정신작용이라는 오온을 일으킵니다.
AN.6.61majjhesutta에 보면
부처님께서 '중간은 감각접촉의 소멸을 중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방편적으로 잘 말하였다라고는 하셨지만 굳이 덧붙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두변 가운데(majjha)로부터의 알음알이를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튼튼히 닦는 종류를 예시로 들어보이시며,
6가지의 '중간' 닦음 모두가 (번뇌를 여의는 중도) 닦음의 방편이 됨을 설하신거죠.
IV장에서Dhammadāyādasutta는 [초전법륜경]입니다.
MN 111 (MN. vol.3. p.25,), Anupadasutta,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초선에서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 희열, 행복,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 감각접촉, 느낌, 지각, 의도[思], 마음, 열의, 결심, 정진, 마음챙김, 평온, 작의의 법들을 차례대로 결정지었다.” 대림스님 역, 「맛지마 니까야」 제4권, [차례 차례의 경], 초기불전연구원, 2012년, p.77.
차례되로 경험이 됨!
SN35.241 Paṭhamadārukkhandhopamasutta, “비구여, 이 언덕이란 6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을 두고 한 말이다. 비구여, 저 언덕이란 6가지 밖의 감각장소들을 두고 한 말이다. 중간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바로 환락과 탐욕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중간의 가라앉음(majjhe saṃsādo’ti )은 이 언덕과 저 언덕에서의 두 변 가운데(majjha)에서의 가라앉음을 말한다.
32) MN43 Mahāvedallasutta, 대림스님 역, 「맛지마 니까야」 제2권, [교리문답의 긴 경], 초기불전연구원, 2012, p.289-314. 두 변에서의 ‘중간의 가라않음’은 두 변의 결박된 가운데 알음알이로부터의 분명한 알아차림의 불가능을 의미하고 이는 환락
MN43 Mahāvedallasutta 에서는 koṭṭhiko의 알음알이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알음알이, 알음알이’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알음알이라고 합니까?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합니다. 무엇을 분별해서 알까요? ‘즐거움’이라고 분별해서 알고, ‘괴로움’이라고 분별해서 알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라고 분별해서 압니다.32)”라고 sāriputto가 대답하며, 지혜(paññā)와 알음알이라는 법들이 서로가 결합되고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여섯씩 여섯경]43)에서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서 그런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에서처럼 무명을 벗어나는 지혜는 알음알이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두 변에서의 중간(majjhe)이 가라앉으면 MN 3 Dhammadāyādasutta에서 보인 탐냄과 성냄, 분노와 원한 등의 극단을 여의지 못하고 번뇌[憂.悲.苦.惱]를 일으킨다. 느낌의 갈애로부터 취·유·생·노사 등에게로 연결되기 전에 사대물질 요소들의 분명한 알아차림으로부터 바른 마음챙김의 majjha를 닦으면 느낌으로부터의 갈애를 끊는 멸성제가 괴로움의 소멸로서 인도될 수
근경식 감각접촉에 일치하는 마음 작용을 (심일경)경험하면서 들이쉬리며,
마음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며..
감각접촉에 일치하는 마음 작용(심일경)을 편안히 유지 하면서 들이쉬리라’..
마음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며..
(지수화풍의 딱딱한 느낌이 준 허리 통증
일어난 느낌은 소멸한다는 법안으로부터
)마음에서 '평온'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며 마음에서 '평온'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며.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며, (법안 체득의 삼매,1시간 평온)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며.
(평온한)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며,
(3시간 평온 머뭄)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며.
마음을 해탈 숨(성자의 몸 3시간 평온이 3일)
꼬타냐 숫타의 흑백 소가 매듭에 묶임, 내외입처가 결박→
괴로운 느낌(기쁨)과 즐거운 느낌(슬픔) 두변이 근경식 감각접촉의 감수 생멸에 묶임을 알아(두변을 알아 중에 의해 드러남), 두변을 다가가지않고
감각접촉에서 (지수화풍 요소) 일어나는것은 소멸한다는 법안을 마음챙김하며 비고비락을 작의.
괴로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일어남의 가운데 괴로운 느낌의 소멸을 인식하는 비고비락을 중으로 드러냄.
즐거운 느낌도 법안에 따라 비고비락 가능함.
우뻬까upekha란 '동적 균형 상태인 평형(equilibrium)의 마음'이자, 의역한다면 물들지 않는 마음.
마음의 다양한 층위에 존재하기에 마음공부의 수단이자 목적으로 보이는데, 그동안 거론되지 않은 것은 어차피 각 수행단계에 같이하는 우뻬까 상태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재은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