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친일파 중에서도 죄질이 매우 나쁜 한 명의 인물을 소개합니다. 바로, 조중응입니다.
조중응은, 정미칠적 중 한명이자, 경술구적의 한명으로서 대표적 친일파 중 하나로 최고 거두였습니다. 그가 당시 대한제국의 신료로 있으면서 한 일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데 모든 노력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며, 철저한 일본의 충견노릇을 톡톡히 해낸 극악한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한일합방에서 매우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1910년 10월 16일에는, 한일합방된지 두 달도 안되어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에는 경학원 설립에 적극 참여하는 것 등. 평생을 철저한 친일파로 살다 죽은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 참고자료로서 경학원을 소개한다면, 성균관이 1911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73호 경학원 규정에 따라 이름이 바뀌며 설립되게 되는 기관이 바로 경학원이었으며 바로, 일본 천황의 하사금으로 설립되어 총독부의 식민 정책에 부합하는 친일교육 기관으로 기능한 친일 단체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학원을 설립하는데, 적극 노력한 사람이 바로 조중응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고종황제의 1907년 강제 퇴위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한일 신협약과 한일 병합 조약의 체결에 큰 공을 세웁니다.
심지어,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 내각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는데, 같은 친일파 거두인 김윤식, 박제순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시에 찬미성 시를 남긴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만든 다른 대종교 카페 '대종교 황국교우 유신협회'에 김윤식과 관련하여 글을 게재한 후, 김윤식의 후손 김**씨가 올린 글을 보면, 이 이토 히로부미의 찬미성 시는 단순히 관례적으로 상대방을 칭찬하는 시였을 뿐 찬미성 시는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또, 말끝마다 후손 김**씨는 경술국적인 김윤식을 가리켜 운양공이라고 최대한 존칭을 써가며 말을 하시던데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누가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 중 이토 히로부미의 시에 찬미의 시를 쓴 것을 칭찬의 시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결국, 따지고 보면 그 말이 그 말인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 부분만 보더라도, 친일파의 후손답다는 말씀밖에는 달리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중응도 역시 그의 후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후손분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근황이 정말 궁금하고, 나라를 팔고 일본에 아부한 그 끝이 어떤지 한번 알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투쟁했던 분들은 모두 3대가 망했다고 하는데 그 후, 친일파들은 해방이후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혹시, 알고 계신 분 있으십니까?
감사합니다.
대종교 백봉대종사 숭모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