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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은유 56.87
-황동규
이제 무얼 더 안다 하랴.
저 맑은 어스름 속으로 막 지워지려 하는
무릎이 안개에 걸려 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저 조그만 간이역.
안개 밖으로 잘못 얼굴 내민 코스모스 몇 송이
들켜서 공중에 떠 있다.
한 줄기 철길이 숨죽이고 있다.
아 이 찰나 이 윤곽, 어떤 추억도 끼어들 수 없는,
새 한 마리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윤곽 모서리가 순간 예민해지고
눈 한번 감았다 뜨자
이 가벼운 지워짐!
이 가벼움을 나는 어떤 은유,
내 삶보다 더 X레이 선명한,
삶의 그릇 맑게 부신, 신선한 물음으로
받아들인다.
【황동규 시인 】
-1938년 서울 출생.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시집 『어떤 개인 날』『풍장』『외계인』『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악어를 조심하라고?』
『물운대行』『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꽃의 고요』등.
*현대문학상.이산문학상.대산문학상.미당문학상 등
[감 상 ]
여행노트: 겨울 여행은 주변 풍경과 동화되는 옷차림으로 떠나는 것이 제격.
한줄기 바람이 되려면 바람의 색깔을 껴입어야 한다.
우중충한 입성에 작은 배낭하나 둘러메고 덜커덩 덜커덩 밤기차의 분절음에 기대어 잠을 횡단해 가는
~ ‘땅콩이 있어요’. ‘맥주가 있어요’ 홍익요원의 수레소리에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다보면
닿던 영주 희방사역이나 봉화 승부 역.
비로소 낯설고 물선 간이역에 내려서면 서늘하게 밀려들 새벽안개 자욱한 풍경이
이방인의 가슴 속으로 짓쳐들 것이다
이미지 과잉이나 아예 감수성을 횡단해가는 자폐적인 시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중진시인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극 서정의, 치사량의 절제된 이미지와 사유의 깊이. 따따부따 해석하지 않아도
일별로도 절로 마음에 새겨지는 시가 아니겠는가.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되고 마는 돌부처의 시간에 비추어
촌각을 살다가는 인생들이 마구잡이로 짓고 허무는 것에 대한 물음표가 담겨 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한 존재감을 무르팍으로 견디며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조그만 간이역의 윤곽을 .
사라짐이 더 안타깝도록 존재와 소멸의 지점을 딱 짚어,
방만하게 보여주지 않고 망사 커튼 드리워진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일단을 슬쩍 보여주는 것만으로
독자들을 감질나게 한다. 속치마를 슬쩍 걷어 올리는 여인이 도발적이듯....
장삼이사들의 소중한 추억까지 패키지로 앗아가는 부재와 소멸에 대한 안타까움을
시인은 암실에서 고스란히 현상이라도 해 두고 싶었을 것.
속도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은 찰나~의 눈부신 날들까지 속속 삭제해 나가고 있다.
그 빈자리에 비정한 쇠붙이들의 거침없는 속도만이 오갈 뿐.
이 겨울, 철길을 탯줄처럼 드리우고 어딘가 남아있을 간이역을
아주 이 땅에서 사라지기전에 망막에 새겨두기 위해 훌쩍 떠나고 싶다.
-류윤모 시인
2018년 경향신문 시 당선작 | 인하대 문학 동아리@문학 의 샘 캡처
77샘터지기 | 조회 82 |추천 0 | 2018.03.07. 03:39
2018년 경향신문 시 당선작
크레바스에서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레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 처 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 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 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내레이션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 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 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려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 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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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농촌이나 구시가지 아파트에서는 아이 우는 소리 듣기가 쉽지 않다. 골목의 왁자지껄이 사라졌다.
이젠 태어나는 아이도 크게 줄었다. 태어나는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양육비 크레바스, 사교육비 크레바스,
등골이 휘는 대학교육을 마친다해도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인 구직 크레바스. 사회 첫 출발 선상의
전세금 마련크레바스, 생존 경쟁 크레바스, 결혼 크레바스, 요원한 꿈일 뿐인 내 집 마련 크레바스,
부모로서 자녀 혼수 전세금 마련 크레바스를 가까스로 해결한다해도 대책없는 빚더미를
끌어안을 수 밖에 없는 우울한 노후 대책 크레바스에, 취직 못한 자녀와 부모 3대 부양 크레바스까지 ...
곳곳에 빙하는 제살 깎아먹기 식의 입을 벌리고 있다. 퍼주기식의 대중추수주의 만연.
석과불식이라 햇거늘,
이 모든 문제들을 심모원려의 고민도 없이 다 세금으로 때우려니 솥단지 거덜내고
우리 세대가 떠나고나면 항차 자라나는 눈이 말똥거리는 미래세대에 과연 면목이 있을지..
욕먹으면서도 그 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앞장섰던 선각자들은 입이
얼어붙어 얼음벽을 치고 잇을 것이다 . 겨우 막아 두었던 문제들이 작은 방으로도
콸콸콸 쏟아져 들어오고 잇다 . 결코 까마득히 먼 미래의 문제들이 아니다
저 출산과 노령인구 사이...... 대한민국 곳곳에 곳곳에 산적한 과제의 크레바스들,
다가올 미래가 두렵지 않을 수가 없다
다들 남의 일로들 치부하지만 크레바스에 빠져봐야 피부로 체감하게 된다
하지만 크레바스에 빠져도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고 스스로 생환해야 한다.
던지는 구원의 밧줄도 국가의 도움도 바랄 수가 없다. 누구나 감내해야 할 보편적인
숙제가 될 것이므로.
까마득하게 입을 벌리고 있ㄴ는, 외면하고 싶지만 미구에 현실로 닥쳐올
대한민국의 우울한 미래
미래고 뭐고 당장 살아가기 버거운 소시민들은 하루하루를 바쁘게 몰아치며 살아내고 잇다.
이미 곳곳에 입을 벌리고 잇는 크레바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군상들의 아우성.
들리는지 마는지 아예 음소거를 한 정치권은 그들만의 리그에 매몰돼 신물나는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 어떤 답도 내 놓지 못하고 잇다
아직은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은 나.....도 그림자를 드리운 채 다가올 미래를 근심하고 잇다.
혼자서 한조각 희망을 씹으며 , 빠진다해도 살아서 기필코 생환하리라 .
지금 빙하 위에 발을 딛고 화자가 서 있는 위치도 광합성 부족으로
춥고 시리다
이 시는 빙하의 ‘크레바스’에 빗대 우리가 살아내고 잇는 공동체의 위기를
화자의 중첩된 시선으로 조망, 공감을 이끌며
독자들의 상상력을 확장시켜내고 있다. 류윤모 시인
곽재구,, 장석주 류윤모,외 / 박철 시인의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다양한 각도의 해설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에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시집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문학동네,)
**우리를 일상적으로 규율하는 '생활'의 논리와 우리를 그 일상에서 해방시키려는 '시적'
감각이 어긋나고 있는 정황을 이렇게 산뜻하게 표현한 작품을 우리는 만나기 쉽지 않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서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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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돈 4만원을 주며 영진설비에 외상값을 갚고오라 한다. 자전거를 타고가는
꽃핀 고샅길 화사한데….
수퍼 지나는 길에 꽃비 만나고…. 맥주 한잔 생각이 절로 나지 않겠는가.
봄날은 가고, 남은 돈으로 나무시장 앞길에서 홀로 서있는 재스민 꽃나무를 사고…
. 아내여, 어찌하겠는가. 부릅뜬 당신의 눈망울에도 이미 수수꽃다리 자욱이 피어난 것을….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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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류윤모
: 박철 시인의 영진 설비 돈 갖다주기의 해석이 각색인 것을 보면 풍문대로 술을
아내보다 무지몽매 酒冊없이 사랑했을 시인의
늘 취중~~ 과 달리 시인의 비의는 전략적 다의성을 이성적 자락에 깔고 잇는 듯 하다
시적 화자는 심부름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
주목해봐야 할 부분은 도입부의 .. 뚫은 노임.../, 과 ...종결부의 아직 뚫어내지 못한.../
의 유기적 연관성에 주목할 필요가 잇다
현실 속에서는 영진설비 아저씨를 불러 기능적으로는 가볍게 뚫어 낸 듯 보이지만
이 시의 본질이기도 한 시인의 마음 속은 여전히 뚫어내지 못한 채~ 이다
현실인.../ 하수도를 뚫고 - 돈 심부름을 나서고 - 슈퍼 앞에서 비를 만나 피하다가-
에라 하는 심정으로 답답한 현실의 출구인 / - 병 맥주를 주둥이 째 들이키고-
잠시 현실인 돈 심부름 나온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답답한 현실의 출구인/ 자스민 한그루를 사서 마음에 심고는-
다시 현실인 영진 설비 아저씨가 찾아와 거친 언사가 오가고- 아내는 돌아서서 책망하듯 나.../
를 뒤돌아 보았고
나..../는 그냥 할말이 없어 계면쩍게 웃었을 고 - 그나마 미래이기도 한 / 답답한 현실의 출구인
아이의 고운 눈썹을 바라본다
현실은 일견 뚫어낸 듯 보이지만 이상만 턱 없이 드높을 시인에겐 갑갑하기 짝이 없는
막힌 하수구같은 현실인/ 출구를 뚫어내지 못한 채 / 세상은 뚫지못한 하수도 같이 꽉 막힌 ~ 그 무엇./
자신의 내면인 속은 늘 울고 있다. 인간의 숲속에서 / 억장 무너지는 쑥국새는 울고 /
비 풍 초의 비비비 비는 내리고 . 희망의 상징인/.... 꿔다 놓은 보리자루같은 `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고 있는 향기를 잃은 자스민 나무 .
현실은 쉽사리 뚫어낸 듯 아내는 연일 하수도 로 물소리를 흘리며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잇으나 시인의 답답한 속마음 은 마치 뚫어내지 못한 하수도 속 처럼
어둡고 갑갑하고 ....
내겐 멀고 먼 ~이란 돈 갖다주는 멀고먼 ~이 아닌 마음 속 뚫지 못한 하수도같았을
암울한 미래... 를 평면적인 시 속에 비수처럼 감추고 있다.
흔히 볼수 잇는 심부름조차 제대로 못해내는 술주정뱅이 소시민을 화자로 진술하지만
깨어있는 시인의 이성은 날카롭고 돈 심부름....이라는 단순한 시의 외피 속에 암울햇던 시대적 상황을
음울하게 조작하고 잇는 것.
이 시는 가정의 일상을 말하는 듯 하지만 특정 년대를 교묘하게 비틀어 절망하고 있다.
각색일 공감 여부야 독자의 몫이겟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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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술과 나무를 좋아하는 남자가 가장으로 산다는 건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박철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글 :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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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를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꽃이 피워내는 향기 때문이다. 신 살구를 깨물었을
때처럼 사는 일이 시고 떫더라도 삶은 귀하고 숭고하다. 시인은 범속한 삶의 구체성 안에서 그 귀함과 숭고함을
건져 올린다. 서울 근교의 럭키슈퍼가 있고, 영진설비가 있고, 작은 화원이 있는 고만고만한 소도시쯤 되겠다.
이 시의 화자는 소시민 가장이다. 그이를 야무진 살림 솜씨의 아내와 고운 눈썹을 가진 아이를 식구로 거느린
갑이라고 해두자. “머슴살이하듯이 / 바친 청춘은 / 다 무엇인가”(신동문, 〈내 노동으로〉)라는 시구처럼 갑은
머슴살이하듯 제 뜻은 뒷전에 밀쳐두고 세월에 휘둘리며 살다 보니 청춘은 지나가고 나이는 자꾸 먹는데 벌어놓은
것도 없고 번듯한 직장이나 직업은 없으니 벌이도 시원치 않다. 갑은 막막한 제 처지와 속내를 직접 토로하지 않고
슬쩍 빗대어 드러낸다. 그 사정은 이렇다. 갑은 막힌 하수도를 뚫은 노임 4만 원을 영진설비 아저씨에게 갖다
주라는 아내의 명을 받고 집을 나선다. 가다가 비를 만났다. 갑은 럭키슈퍼 앞에서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주저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두 번째로 길을 나섰다. 화원 앞을 지나다가 향에 취해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영진설비에 4만 원 갖다 주는 하찮은 일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갑을 대책 없는 사람이라고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 갑의 무능을 탓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갑이 무능하다 해도 그이가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버지로서 꿋꿋하게 이 세상을 견디고 살아내는 일은 심오한 일이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
삶은 전대미문의 존재론적 사건”(베르트랑 베르줄리,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수도가 막히고, 사람을 불러 막힌 하수도를 뚫는다. 뒤늦게 그 노임을 갖다 주는 일, 맥주 몇 병의 유혹에
지고, ‘자스민’의 향에 취해 노임으로 지불할 4만 원을 써버리는 일 따위는 다 하찮고 범속한 삶에 속한다.
갑은 이 범속한 삶을 구체적 실존 안에서 몸으로 찾아내고 그 실감을 말한다. 이 삶은 범속 할 수는 있겠지만
공허하지는 않다. 삶의 아기자기한 행복들, 불편과 결핍을 넘어서려는 분투, 악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덕성은 시의 문면 밖으로 비켜나 있지만 그것들이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삶의 실팍한 내역이다.
바로 그것들 때문에 조화와 찢김 사이에 걸쳐 있는 이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살다 보면 천둥과 번개가 치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날도 있다. 그럴 때는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신경림, 〈목계장터〉)라는 시구의 지혜를
빌릴 필요가 있다. 살다 보면 무언가 막히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막혀서 생긴 불편과 심란함은 막힌 것을
기어코 뚫어야만 해소가 된다.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어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향기 잃은 나무는 문 밖에 서 있다. 쑥꾹새, 비, 향기 잃은 나무는 갑이다. 갑의 살림은 팍팍하나
거기에 아등바등 매달려 있지 않고, 그 가난을 관조하고 즐기는 한가로움과 존재의 충일이 느껴진다.
악은 진부한 외양을 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가난은 몸과 마음을 옥죄고 짓누르지만, 우리는 쉽게
악의 구렁 속으로 굴러떨어지지 않는다. 필경 가난이 여린 마음을 뻣세고 질기게 만들지는 못한다.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눈썹이 고운 아이들은 늠름하게 자라고, 살림솜씨가 매운 아내는 가난이 만든
곤경을 잘 헤쳐 나가고 있는 까닭이다. 가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은 닻이 되어서
이 세계 안에 나의 실존을 안정되게 고정시킨다.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아마도 갑은 영진설비에 밀린 노임을 갖다 주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지는 말자. 그건 사람과
술과 나무를 좋아하는 갑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진부한 악에 기어코 빠지지 않은 갑과 을은 저마다
현실의 토대에 뿌리를 내린 귀한 사람꽃이다. 이 꽃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향기를 풀어낸다.
궁지에 몰리더라도 그 어려움을 꿋꿋하게 감내하며 결코 야수로 변하지 않는 이 꽃들 사이에 사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박철(1960 ~ )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이는 김포에서 오래 살았다. 내 기억에는 박철이 김포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 단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7년에 <창작과비평>에 〈김포〉 외 시편들을 발표하면 문단에 나왔다. 그동안 시집으로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 을》 《새의 전부》 《너무 멀리 걸어왔다》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험준한 사랑》 등을 펴냈다. 시인과 얼굴을 직접 대면한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시인은 아주 선량한 미소를 가졌다. 필경 그 미소는 시인의 내면에 깃든 평화와 다사로운 인격의 반향일 터다. 바람 편으로 시인이 호주에 이민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몸이 안 좋다는 얘기도 들렸다. 술자리에서 기타를 잘 치고 노래를 잘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신산한 삶에 휘둘리면서도 그이는 시 쓰기를 쉬지 않는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속이 꽉 찬 시집 한 권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 방식으로 그이에 대한 우리의 미더움에 넉넉하게 응답한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시인: 1960~1989년.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안개' 등단. 시집 '입속의 검은 잎' 등.
가슴 에이는 시간을 삭여 낸 후 사랑했던 사람을 닮은 실루엣이 어룽거리며 신호가 바뀐 신호등 맞은편에서
마주 걸어 올 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던 기억이 한번쯤이라도 있었던가. 사랑이란 생각의 량. 사량이란
말이 변해서 된 어원이란 설이 있다.
지금은 만나질 수 없는, 기억 속에서 화석이 돼버린 떠나간 사람을 돌아보게 하는 시가
요절 시인 기형도의 이 시다. 기형도는 얼마나 마음에 상념이 많았으면 내 마음에 너무 많은
공장을 세웠다고 토로햇을까… 사랑이 아니라면 그만한 상념이 뭉게뭉게 구름처럼…
사랑을 잃고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질투라니 실로 잔인하다.
이 질투를 앓는 자.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었다가 돌아오곤 한다.
그 사람과 같이 걷던 들길. 추억이 새겨진 장소. 우리에게 그 청춘의 그림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드리워져 있었던가.
결국 시인은 질투 때문에 사랑에 실패 했노라,는 자기 고백의 뒤늦은 참회, 자기애가 없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허구라는 것을 실토한 것.
잃은 사랑을 찾아 헤매다 그가 이미 스스로 예감한 대로 힘없는 책갈피가
종이를 툭 떨어뜨리듯 침침한 심야 극장에서 마지막 숨결을 놓아 버린다.
그의 사후 나온, 상실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입속의 검은 잎' '질투는 나의 힘' 등 시편들이
아직도 절망하며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강력한 자기장을 지닌다.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그의 시들은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등 애소 짙은 비련의 음색을 남기고 요절한 가수 김현식의 노래처럼
돌올한 비장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그로테스크 센티멘털리즘에 대해 사후 그에게 쏟아진, 신드롬에 가까운 무비판적 찬미가 가능했을까
싶은 것이다. 그가 생존해 있었다면….
절제되지 않은 자괴감이 청춘에 영합하기 위한 신파조의 진부한 심리 코드라는 혹독한 비평이 일진 않았을까?
죽어야 신화가 되는 법. 그의 유서나 다름없는 마지막 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빈집)
헌사하듯 촛불을 켜놓고 소리내 읽어야겠다. 젊은 시인의 사랑과 쓸쓸한 죽음을…. 류윤모 시인
▲ 류윤모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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