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리(陳安里) 성지(聖地)는 길 옆에 위치하고 그 뒤에 공장이 있어 조금 어수선하다.
1860년 8월 박해가 끝난 후에 매일 80~100리를 걸으면서 밀린 교구 방문과 사목 활동을 하고서
그 이듬해인 1861년 6월에 서울의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를 하러 올라 가던 중
문경시 진안리(陳安里)의 이 자리에 있던 "오리티 주막"(酒幕)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와
장티푸스의 합병증으로 문경읍내 교우(敎友)의 약국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선종(善終)하였다.
선종(善終)하기 전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神父가 병자성사(病者聖事)를 주었다고 한다.
최 神父의 시신은 "푸르티에" 神父가 주도하여 상여를 꾸며 배론으로 운구하고 "베르뇌" 主敎의 집전으로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선교사들의 서한에도 최양업신부의 선종지로 구체적인 장소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후대의 증언 자료를 가지고 선종 지역을 추정하는데, 현재까지 이곳이라는 주장이 대세다.
일설에는
1, 이곳 "오리티 주막"(酒幕)에서 발병하여 문경 읍내 약국 이씨 집에서 선종했다는 주장.
2, 청주교구 진천군 지역이라는 주장.
최 신부가 문경에서 발병하였으나 말을 타고 배티 또는 진천군의 어느 교우촌까지 버티며 가서
그곳에서 선종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 확실한 선종지가 알려지지않고 있다고 한다.
"최양업신부 행적에대한 재검토"(주호식)를 찾아보면 이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지만 여기에서도 확실한 곳은 알지못한다고 한다.
길 옆에 "주막"(酒幕)이 있던 곳이라 그리 넓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