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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째날인 18(목)은 서귀포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돌아 제주시까지 가 보기로 한다.
그중에 경치가 좋다는 "큰엉"을 보고 가기로 해서 "남원읍(南元邑)"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사람들에게 "큰엉"을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조금 주저한다.
아마도 길을 잘 모르거나 설명하기가 어려운듯 했다.
일단은 남원포구(南元浦口)로 가란다.
남원포구(南元浦口)에 가서 다시 물으니 해안도로(海岸道路)를 따라 한참을 가야 한단다.
우리가 온 방향쪽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단다.
어치피 걷는 길이니 그냥 가기로 한다.
한참을 가다 보니 바닷 바람에 오징어를 말리고 있다.
길에 "큰엉"가는 길이라고 된 표시가 없어 마냥 걷기만 한다.
설마 이정도의 해안(海岸)을 경승지(景勝地)라고 하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동네 입구인데 저 돌탑은 무엇일까?
탑위에 꽃아놓은 장식의 뜻은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이 해안도로를 "문화의 거리"란다.
그러고 보니 해안 방파제에 짧은 명언(名言)이나 싯귀(詩句)를 많이 적어 놨다.
방파제아래 바닷가에는 하얀 조개껍질로 예쁜 하트도 만들어 놨다.
설왓개.
제주도 말은 많이 낫설다.
"설왓개"는 비교적 넓고 비옥한 땅을 말한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올레길 5코스"란다.
"노인과 바다" 펜션을 지나니 약간 언덕에 "큰엉 해안 경승지 안내도"가 나온다.
한자로 "南元 巨丘海岸 景勝地"(남원 거구해안 경숭지)다.
그러니까 "큰엉"은 큰 언덕이나 그아래 파인 바위굴을 뜻하는 말인듯하다.
입구에 있는 올레길 안내판.
무엇이 있을지 모를 숲길을 찾아 들어간다.
가다보니 바닷가 반대편에 공룡(恐龍) "부경고사우르스"(Pukyongosaurus)를 만들어 놨다.
지도를 검색해 보니 저곳이 "다이노 대발이 파크"인 모양이다.
중간에 해안가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우리는 그냥 곧장 가기로 한다.
드디어 첫번째 볼거리인 호두암(虎頭岩),유두암(乳頭岩)에 왔다.
바위 위 바다로 향해 나온 부분이 호두암(虎頭岩)이고, 그 아래 흰부분으로 마치 여인의 젖가슴같은 유두암(乳頭岩)이 있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바위가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이다.
그런데 유두암은 멀리서 보면 그럴듯한데 확대를 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나는 항상 모든 사물을 가까이서만 보려고 했는데 때로는 멀리서 봐야할 때도 있는 것을 새삼 느낀다.
다음에 보이는 것이 먼 바다를 쳐다보는 듯한 "인디안 얼굴"이다.
이것 역시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너무 늦게 이런 사실을 알았지만 늦게라도 천천히 멀리보는 마음을 가져야 할것 같다.
"소 떨어지는 우렁굴"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안내판이 없어 미처 못보았다.
아마도 이곳이 "큰엉"일듯 싶다.
암벽 위에 피어 있는 해국(海菊)
마지막으로 한반도 지형인데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좋은 포인트를 찾지 못했다.
두 연인(戀人)의 허락을 받고 최대한 비슷한 모습으로 찍어 보았다.
제대로 찍으려면 수평선(水平線)이 한반도 중간쯤에 있도록 위치를 잡아야 한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니 우리가 타고 온 버스와 다른 버스가 다니는 길이 나온다.
버스를 타고 좌우를 구경하며 만장굴(萬丈窟) 입구까지 왔다.
하지만 입구에서 "만장굴"까지는 조금 멀다.
그리고 "만장굴"을 관람하면 제주시내를 못 볼것같아 포기를 한다.
"만장굴"들어가는 입구에 "용천동굴"(龍泉洞窟)이라는 동굴이 있다.
물론 기대는 안했지만 입구는 철판으로 굳게 막혀있었다.
그냥 지나치기에 아쉬워 인터넷에 있는 동굴 사진을 몇장 빌려온다.
인터넷에서 발췌한 사진.
인터넷에서 발췌한 사진.
만장굴 앞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반공위령비(反共慰靈碑)
버스를 기다리는데 하늘 높이 "말똥가리" 한마리가 빙글 빙글 머리 위를 돌고 있다.
버스를 타고 제주시까지 가서 "제주도 민속 자연사 박물관"이 있는 근처 사거리에서 내렸다.
이길이 "국수 문화 거리"란다.
여기에서 제일 잘한다는 국수집엘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일행은 제주도에만 있다는 "돔베고기국수"를 주문하는데 나만 혼자 "멸치국수"를 주문한다.
나는 돼지고기는 구운것만 먹기 때문에 물에 들어간 것은 비위에 맞지 않는다.
그래도 "멸치국수"도 아주 맛있게 한다.
점심을 먹고 "삼성혈"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걷는다.
제주 통일관 앞에 있는 "백마고지의 영웅 강승우소위상".
제주도에는 일제시대부터 6.25까지 민족 비극의 슬픔을 특히 많이 지니고 있는듯 하다.
탐라국 발상지(眈羅國 發祥地) 삼성혈(三姓穴)에 도착했다.
삼성혈(三姓穴)앞에 비(碑)가 있고 그 앞에 제대(祭臺)가 나란히 셋이 있다.
삼성(三姓)의 시조(始祖)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의 세 신인(神人)의 제대(祭臺)다.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실제의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었다.
지상(地上)에 파인 세 구멍이 있는데 구멍은 품자(品字)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둘레가 6자이고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한다.
나머지 두 구멍은 둘레가 각기 3자인데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흔적만 남아 있다.
위쪽 구멍은 "고을나", 왼쪽 구멍은 "양을나", 오른쪽 구멍은 "부을나"가 솟아난 곳이라 전한다.
삼성혈(三姓穴)은 그 주위의 7,987평이 성역화(聖域化)되어 있는데,
그것은 조선시대인 1526년(중종 21) 이수동(李壽童) 목사(牧使)가 그 주위에 돌 울타리를 쌓아
혈(穴) 북쪽에 홍문(紅門)과 혈비(穴碑)를 세워 삼성(三姓)의 후예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사를 모시게 하고,
매년 11월 상정일(上丁日)에 도민(道民)으로 하여금 혈제(穴祭)를 지내게 한데서 비롯되었다.
세개의 제대(祭臺) 옆에는 또 하나의 비석(碑石)과 그 앞에 작은 제대(祭臺)가 셋이 있다.
"星主, 王子, 徒內 高氏 三昆弟 埋安處"(성주, 왕자, 도내 고씨 삼곤제 매안처)라고 했는데 이 자리는 아마도
"고을나"(髙乙那)의 후손으로 신라에 입조(入朝)했던 세 사람의 신주(神主)를 묻은 곳인듯 하다.
이 이야기를 겨우 찾아 내었다.
"고을나"(髙乙那)의 15대 손(孫)인 "고후"(高厚)와 "고청"(高淸), "곤제"(昆弟) 3인(人)이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의 바닷가 탐진(耽津)에 도착한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쪽 방향에 나타났으므로 태사(太史)가 왕께 아뢰기를,
"이국인(異國人)이 내조(來朝)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신라(新羅)에 들어오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첫째를 성주(星主), 둘째를 왕자(王子), 세째인 곤제(昆弟)를 도내(都內)라 하였고,
읍호(邑號)를 탐라(耽羅)라 하니 그것은 올 때 처음 탐진(耽津)에 상륙하였기에 때문이다.
각각 보개(寶蓋)와 의대(衣帶)를 주어 보냈다고 한다.
또한 후에 "양"(良)을 "양"(梁)으로 바꾸어 칭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良"씨가 처음으로 "梁"씨로 바뀌기는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때인 서기 374년 때라고 한다.
"성주"(星主)라는 명칭이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탐라의 우두머리 곧 탐라국(耽羅國)의 왕을 칭하는 명칭이 되었단다.
이 이야기는 탐라(耽羅)의 선인(先人)들이 수렵(狩獵)시대에서 농목(農牧)시대로 정착함을 뜻하는 것인듯하다.
"고후"(高厚)등 3형제가 신라(新羅)에 입조(入朝)한 것은 탐라(耽羅)가 이제 완전한 국가(國家)로 성장하여
인접국가에 승인(承認)을 얻기 위한 활동을 행하였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비석 뒤.
동치(同治)十年(1871년 : 高宗 8)에 이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1698년(숙종 24) 유한명(柳漢明) 절제사(節制使)가
혈(穴)의 동쪽에 삼을나묘(三乙那廟;지금의 三姓殿)를 세워 세 신인(神人)의 위패를 모시게 하였고,
1702년(숙종 28) 이형상(李衡祥) 절제사(節制使)가 조정(朝廷)에 건의하여
삼성묘(三姓廟)를 가락천(嘉樂泉) 동쪽으로 옮겨 세우고, 고후,고청,고계 3곤제(昆弟)를 배향(配享)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삼성혈을 이야기하려면 제주시 화북동(禾北洞)에 있는 삼사석지(三射石址)와
성산읍의 혼인지(婚姻池)와 연혼포(延婚浦)를 모두 다 봐야만 할것이다.
옛 제주 수령의 공덕비.
삼성혈을 나와 길을 건너 곧장 제주시내로 가는데 옛 성(城)의 일부가 나온다.
옛 제주 성터인데 다 없어지고 이 곳만 남았다고 한다.
귤림추색(橘林秋色)
영주십경(瀛州十景)중의 하나인 "귤림추색" 이곳이라고 한다.
그 아래에 "오현단"(五賢壇)이 있다.
오현단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했던 옛 터다.
오현(五賢)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流配)된 충암(冲菴) 김정(金淨)선생,
중종29년 (1534)에 목사로 부임했던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流配)된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과
숙종 15년(1689)에 유배(流配)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선생 등 다섯 분이다.
이곳도 둘러봤으면 좋겠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다.
이곳도 찾아 봤으면 좋을곳인데 마음만 먹는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관덕정(觀德亭)에 왔다.
여기에는 일본인이 수리하면서 지붕 일부가 잘려 나갔다고 하는데 다른 문헌에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관덕정 옆의 길을 확장하면서 관덕정 지붕이 걸린다고 잘라냈다고 한다.
기간지주(旗竿支柱)
제주목(濟州牧) 방어사(防禦使)의 황수기(黃帥旗)가 게양되어 있다.
지금은 흰색바탕의 기(旗)가 잇지만 옛날에는 황색바탕의 기(旗)를 올렸다고 한다.
관덕정(觀德亭) 앞에 있는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
문 오른쪽에는 "수령이하개하마"(守令以下皆下馬)라고 쓴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제주시에서는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를 원래의 양식으로 복구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문헌상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홍화각(弘化閣),
연희각(延曦閣), 우연당(友蓮堂),귤림당(橘林堂)등의 건물터와 유구(遺構)가 확인되고 유물(遺物)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濟州牧 官衙址) 일대가 국가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단, 기단석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대(當代)의 문헌(文獻)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관아지(官衙址) 복원 기본설계를 완료, 2002년 12월에 복원(復元)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우련당(友蓮堂)은 1526년(中宗 21)에 이수동(李壽童) 목사(牧使)가 성(城)안에 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 하여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세웠던 정자(亭子)로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후 양대수(楊大樹)목사(牧使)가 연못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버렸으나
1694년에 이익태(李益泰)목사(牧使)가 중건(重建)했던 건물이다.
영주협당(瀛洲協堂)
영주협당(瀛洲協堂)은 군관(軍官)들이 근무하던 관청(官廳)이라고 한다.
귤림당(橘林堂)
귤림당(橘林堂)은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거나 바둑을 두며 술을 마시던 장소라고 한다.
망경루(望京樓)
망경루(望京樓)는 조선시대 지방에 있던 20개의 목(牧) 가운데 제주목(濟州牧)에만 유일하게 있던 2층 누각 건축물이다.
망경(望京)은 말 그대로 임금이 있는 한양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목사(牧使)가 첫 부임하면 필히 이곳에 올라 임금의 은덕을 기리며 한양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지어진 망경루(望京樓)는 멀리서 침입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역할도 했다.
망경루는 1556년(명종 11) 목사(牧使) 김수문(金秀文)이 창건했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을묘왜변(乙卯倭變)(1555년)이 일어나는 등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때였다.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감시하기 위해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어진 누각은 감시초소로 제격이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때인 1913년 제주도청 청사를 짓는다며 유서 깊은 망경루(望京樓)를 헐어버렸다.
연희각(延曦閣)
연희각(延曦閣)은 목사(牧使)가 집무를 보던 곳이라고 한다.
아직도 복원이 안된 공터가 남아있다.
볼 곳이야 많지만 이제 숙소로 향할 시간이다.
이제 다시 버스를 타고 5.16도로를 지나 서귀포로 돌아온다.
도착하여 숙소에 들어오니 이미 날이 어두웠다.
오늘 저녁은 우리를 이끄는 회장님 매제(妹弟)의 안내로 고등어 회를 먹으러 간다.
나는 처음 먹어보는 고등어 회다.
이집은 그날 잡은 생선만 취급하는 어부의 집이란다.
예약손님만 받는데 항상 예약이 넘친다고 한다.
양념장은 그리 특색이 없이 양파와 부추, 그리고 고추가 들어있다.
그러나 이집의 특색은 밥을 준다는 것이다.
미리 밥에 준비된 양념을 넣어 비벼준다.
김위에 비빈 밥을 올려놓고 그 위에 고등어회와 양념장을 올려 먹는단다.
대개 회에다 술을 먹으면 밥을 먹지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그것을 염려한 사장님의 아이디어란다.
이렇게 해서 먹으면 따로 밥을 먹지 않아도 술 때문에 탈이 나지는 않는단다.
처음 먹어보는 고등어회이지만 정말 맛있게 먹었다.
오늘 걸음 수 : 19303步.
첫댓글 세월이 지나도 이것을 보고 읽으면 생생한 당시로 돌아갈 수 있다.
점심에 먹은 국수이름이 없는데,,,,
다음편을 기대하여 봅니다.
고등어 회 맛.....
여행에서도 먹는 재미를 빼면?
서울서도 한번 먹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