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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축구 경기로 뜨거웠던 2002년 해에 폐암 진단을 받은 주부입니다. 암 진단 받기 전까지는 병상에서 다른 나라와 경기할 때 같이 흥분 하고, 기뻐하며 눈물까지 흘리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암중에서도 생존 확률이 적은 폐암 2기 초를 진단을 받았을 때 누구도 내게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왜 나에게 이런 못 쓸 병이 찾아 왔을까? 하늘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부정해 봤자 나에게 찾아온 이미 내 몸에 자리 잡고 있는 암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3차례 고열과 심한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2002년 1월에 고열과 호흡곤란으로 oo병원 응급실에 내원 했는데 폐렴이라 하여 치료하고 퇴원 했지만 3월 달에 또 다시 열과 호흡곤란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이번 역시 폐렴이라 하여 치료하고 퇴원 했다. 그 이후 6월 달에 또 같은 증상으로 병원에 내원했다. 의사선생님도 같은 증상으로 자꾸 입원하는 저를 보고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당연히 한다고 했다. CT를 찍고 나서 보호자를 불러 “ CT상에 이상소견이 보입니다.
종양일 가능성으로 보입니다. “ 좀 더 검사해 보자고 했다. 남편은 의사 소견을 듣고 환자에게는 아무 말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입원 2주째쯤 됐을 때 담당교수님이 오셔서 기관지 내시경을 해서 조직을 떼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검사결과를 듣기 전 까지는 난 폐렴으로만 알고 있었다. 3주 조금 지나 결과를 가지고 교수님이 오셨는데, “정OO씨 종양으로 나왔어요. 다행히 빨리 발견 되어서 수술하면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수술합시다. 아셨죠 ” “빨리 수술 날짜 잡겠습니다.” 난 이 소리를 듣고도 내가 암이라고 들은 게 아니라 종기로 듣고 아주태연하게 “그럼요 해야죠 당연히 해야죠“ 라고 대답했다.
교수님은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씀하시고 병실을 나섰다.그리고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결과 나왔냐고 묻길래 “어 나왔어” “머라고 나왔어?” “응 종양이래. 걱정 하지마 수술하면 괜찮데”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다음날 수술날짜가 낼모레 첫 밤에 할 거라고 주치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수술전날 아침을 먹고 TV를 보고 있는데 저를 수술할 정형외과 교수님이 오셔서 “낼 수술 하는 거 아시죠?” “예” 내가 너무 태연하고 표정이 밝으니까 “혹시 환자분 병명이 뭔지 알고 계세요?” “예 알아요.” “뭘로 알고 계세요?” “폐렴으로 알고 있는데요.” 교수님은 주치의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환자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묻고 계셨다. 주치의 선생님은 분명 환자분에게 종양이라고 말씀 들였는데요.?
“정OO씨 환자분 종양이라고 말씀 들였잖아요.” 주치의 선생님께서 말씀 하셨다. 듣고 있던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정OO씨 환자분 ‘암’이예요. 암. “낼 첫 밤에 수술할 겁니다. 수술 준비하시고 지금부터 금식하세요. 병실분위기는 나에게 시선 집중이 되었고 난 멍하니 간호사실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간호사실로 가서 주치의 선생님 좀 불러 달라고 울면서 말했다. 조금 있으니 주치의 선생님이 오셨다. 난 엉엉 울면서 “선생님이 언제 저보고 암이라고 했어요. 종양이라고 했죠” 난 종양이 암인지 알면서도 나에게 종양이라고 말하는 선생님 말씀은 암이라고 들리지 않고 종기로만 들렸던 겁니다. 나에게 무슨 암이라니 기가 막혔다 억장이 무너지고 억울했다. 하염없이 울었다.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여보, 나 암이래. 그럼 나 죽는 거야? 어떻게 여보.” 남편이 화를 내면서 의사원망을 했다. 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말했다고 심한 말을 했다. 그리고 바로 병원으로 왔다. 남편은 괜찮다고,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위로 했지만 귀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친정엄마가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오셨다. 오시기전에 민속한의원 사무장님 하고 통화를 했다고 했다. 상황 이야기를 하고 나서 사무장님이 군산 00에 폐암말기 3개월 선고 받았는데 10년째 살고 계시는 어르신을 한번 만나 뵙고 오라고 군산 00에 가보자고 했다. 난 환자복을 입은 채로 차에 탔다. 도착해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건강하시고 정정해 보였다. 할아버지는 민속한의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젊으니까 우리 늙은이 보단 빨리 낫을 수 있으니까 하루 빨리 가보자고 했다. 사실 민속한의원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 됐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친정아빠. 아빠도 간암말기, 전주 OO병원에서 3개월 선고 받고 집에서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엄마는 아빠를 살려 볼려고 간에 좋은 거 구해다 드리고 이곳저곳 찾아 돌아다니시면서 물어보시고, 얻어 오시고 하시면서 하루하루 보내셨다. 하루는 택시를 탔는데 택시 아저씨한테 간암환자는 무얼 먹어야 좋을까요? 혹시 주위에 먹고 좋아졌다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물었더니 암환자를 잘 고치는 민속한의원으로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 길로 민속한의원을 찾아가 상황 설명하고 바로 치료약을 먹기 시작했고 더불어 마늘, 죽염도 먹기 시작했다. 쑥뜸도 뜨고 식이요법도 한의원에서 알려 준 대로 했다. 아빠의 투정을 받아 주시면서 엄마는 열심히 간호를 했다. 맨 처음 약은 조금씩 여러 번 차츰 차츰 늘려 하루에 2~3봉지씩 드시고 마늘도 죽염도 정말 열심히 정성껏 드셨다. 1년 정도 지나 병원에 가서 초음파, CT 여러 가지 검사결과 누가 암환자라고 하면 믿겠느냐고 의사 선생님도 놀라셨다고 한다. 아주 건강한 간이라고 했다. 그 이후 5년을 사셨다. 건강관리만 잘 하셨어도 지금도 사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빠는 하루하루 게으름을 피우시고 죽염, 마늘은 건강한 사람도 평생 드시면 좋은데 아빠는 약은 물론이고 마늘, 죽염을 드시지 않고 엄마 모르게 술과 담배를 다시 마시고 피우셔서 얼마 못가 간, 위까지 재발하여 두 달 안에 돌아가셨다.
수술전날 수술을 거부하고 밤10시에 가퇴원을 했다. 퇴원해 집에서 딸아이와 자는데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남편은 31살에 늦게 만나 딸아이가 28개월 정도 밖에 안 되는 아이를 두고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뜬눈으로 날을 샜다. 아침을 먹고 입원준비를 해서 민속한의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복사해온 사진과 소견서를 가지고 원장님의 진료를 받고 병실을 안내 받아 짐을 풀었다. 암의 속성을 잘 알면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암을 단시일 내에 분노와 적개심을 가지고 무리하게 승부하려면 안 된다. 암은 공격적으로 하면 할수록 소모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싸워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달래면서 되돌려 보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민속한의원 원장님이 말씀하시는 치료법이 이해가 왔다. 지금부터 나는 내 몸에 찾아온 암을 굳이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받아드리며 일부라 생각하고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암이란 내 생명을 앗아가는 잔인하고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차라리 같이 동고동락 하면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민속한의원에 입원한 첫날 친정 엄마는 민속한의원 약만 잘 먹고 마늘, 죽염만 열심히 먹으면 살 수 있다고 빨리 나아서 집으로 예쁜 딸한테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고 남편도 역시 돌아가신 장인어른을 생각하면서 여기 약만 열심히 먹으면 낫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안하게 마음 먹으 라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 인간이라 삶에 대한 갈망과 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낯선 병실에 혼자 있으려니 외롭고 무서움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밖 나와 공기를 마시는데 이렇게 신선하고 깨끗한 느낌이 처음 이었다. 기분이 정말 상쾌했다. “이제부터 내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깊은 공기를 여러 차례 마시고 내 뿜었다. 그리고 항암약차를 마시고 손에는 휴대용 죽염 통을 들고 산책로 등산코스가 있는 산으로 올랐다. 얼마나 올랐을까? 발밑에 클로버가 있길래 무심코 앉아 네잎클로버를 찾을 려고 한 순간 반짝 반짝 빛나는 네잎클로버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한번도 찾을 려고 애를 써도 찾은 적이 없었다. 한번도.. 혹시 네잎클로버가 많은가 싶어 찾아봤는데 없었다. 네잎클로버는 행운이고 세잎클로버는 행복이라 했는데 사람들은 행운을 잡기 위해 소중한 행복을 짓밟는 다고 했다. 그럼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올까? 다시 행복이 올까? 기적이 올까? 네잎클로버를 하나 찾고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튼 기분이 좋았다.
정상까지 올라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내려왔다. 아침 먹기 전에 치료약 반절을 먹고, 식후에 반절을 먹고 이런 식으로 하루에 6차례 3봉지를 먹었다. 밥보다 마늘로 양을 채우고 죽염도 휴대용 죽염 통으로 하루에 2~3개씩 먹었다. 수술로 인해서 그런지 젊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비교적 소화나 약의 흡수율이 좋았다. 2~3일 후부턴 치료약도 하루 5봉지 까지 먹었다. 잘 먹어야 빨리 낫을 수 있을 것 같아 많이씩 열심히 먹었다. 배만 안 부르면 더 먹고 싶었다. 민속한의원에 입원한지도 1주일이 지나고 환자분들도 언니, 오빠, 아빠, 엄마 같고 편안해 졌다. 서로 아픈 사람들 끼리 위로 하고 위안삼고 하면서 지냈다. 입원한 환자들 보호자들은 환자를 먹여 보려고 좋은 것들은 구해다 다리고 삶고 택배 시켜 먹이는데 부러웠다. 나도 먹고 싶은데 치료약 이외약도 먹고 싶었는데 친정엄마와 남편은 뭐라고 하면서 이것저것 먹어봤자 몸에서 소화도 못시키고 돈만 버린다. 그런 돈 있으면 민속한의원 약을 더 먹으라 했다. 섭섭하고 서운하고 미웠다. 나 죽기 바라나.. 내가 먹겠다는데 한번도 좋은 거라고 구해서 먹어 보라는 소리를 안했다. 여기 환자들은 먹기 싫다고 해도 보호자들은 어디서 구해 오는 건지 비유 맞춰 가면서 먹고 있었다. 난 정말 부러웠다.
난 사실 이것저것 먹을 형편도 못된다. 엄마, 남편 말대로 치료약이나 열심히 먹어야지 하고 마음 접었다. 여기 환자분들은 “환자 같지도 않은데 여기 뭐 하러 왔어?” 하시면서 말씀하신다. 밥 잘 먹고 약 잘 먹고 마늘, 죽염 잘 먹고……. 마늘하고 약 먹는 거 보면 환자분들은 저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쑥뜸도 다른 환자들 보다 열심히 했다. 쑥뜸 뜨면서도 사이사이 죽염을 먹어 가면서 했다. 입원한지 3주째 접어드는 날 입원 환자들 중 병이 악화 되어 밤마다 고통과 싸우고 있는 환자도 있었고 치료도중 퇴원해서 병원으로 가겠다는 환자도 있었고 이런걸 보면서 난 더 열심히 치료약과 마늘, 죽염을 먹어야지 생각했다.
이 환자분들은 외부에 약을 가져다 먹으면서 여기 약을 전혀 먹지 않고 먹어도 소홀히 하고 마늘, 죽염을 잘 먹지 않은 환자도 많았다. 난 이렇게 생각했다. 낫을 려고 민속한의원에 들어온 이상 원장님을 믿고 한의원 방침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병원에 있으면 담당 의사선생님을 믿고 신뢰해야 만이 낫을 수 있지 내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의심을 하면 절대 병을 이길 수가 없다.
양방은 최고 치료법은 수술, 항암, 방사선이다. 한방은 최고 치료법은 공격적인 것이 아닌 암을 다스리고 면역력을 키우고 암이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한방약과 보조적 치료법으로는 쑥뜸, 죽염, 마늘, 항암차, 식이요법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은 어느 병원을 선택하든 선택하면 담당 의사 선생님을 믿어라 그리고 자기 암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한 달이 됐다. 민속한의원에 입원을 한 달만 하고 퇴원하려고 했었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여기서 배워 집에서도 쑥뜸 뜨고, 국선도 다니고 단전호흡도 다니고 찜질하고 운동하고……. 퇴원한다고 하니까 환자분들은 내가 다 낳아서 나가는 줄 알고 부러워하면서 울었다. 치료약이랑 열심히 드시고 마늘, 죽염 게을리 하지 마시고 힘내시고 꼭 건강해져서 나가세요.
짧은 인사말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니까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민속한의원에 있을 때는 모든 걸 다 알아서 밥 주고 약주고 마늘주고 쑥뜸 뜨고 했는데 그걸 내가 혼자 하려고 하니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남편이 도와준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마음 편히 먹으라고 했다. 민속한의원에 입원할 때는 하루에 많게는 5봉지까지 먹었다. 한달 계산해보니 110봉지 죽염은 휴대용 죽염 통을 가지고 다니면서 혀가 갈라져 음식 맛을 모를 정도로 먹었다. 500g 2통을 먹은 샘이다. 땀이 나면 죽염 냄새가 날 정도였고 마늘은 셀 수 없이 먹었지만 한 끼에 5통씩 15통을 하루에 먹었다. 트림하고 가스가 나오면 마늘 냄새가 구수하게 날 정도였다. 이렇게 4~5개월이 지나 내 몸속에 암이 없어졌을까 그대로일까 커졌을까 그래서
방사선과에 갔다. 원장님이 먼저 엑스레이 찍고 CT를 찍자고 했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깨끗했다. 그리고 CT를 찍었다. 전에 병원에서 CT 찍은 거 복사해서 비교해 보시라고 가지고 갔다. 결과는 전CT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게 암이면 요 몇 개월 사이에 치료를 아무리 잘 했어도 지금 CT를 찍은 것을 보면 암이 보이지 않고 일반 폐처럼 깨끗하다고 원장님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수술도 하지 않고 한방으로만 이렇게 깨끗해질 수 있을까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너무 기뻐 눈물을 흘렸다. 이 기쁨을 엄마 남편이 아닌 민속한의원 원장님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했다. 하지만 원장님은 기뻐하시는 대신 내가 암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듣고 앞으로 소홀히 하고 방심할까봐 그게 염려가 되어 암이 없어진 게 아니라 안 보일뿐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명심해서 치료약, 마늘, 죽염을 더 열심히 먹었다. 1년 5개월 정도 지났을 때 둘째를 임신했다. 포기하려고 했지만 남편이 원해 낳기로 했다. 임신사실을 원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혼을 내셨다. 임신하는 바람에 약을 중단하고 마늘을 조금씩 국선도는 몸이 무거워 질 때까지만 다녔다.
2004년 1월에 순산했고 이후로 치료약은 먹지 않고 마늘, 죽염은 계속해서 먹었다. 이후 배가 또 한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7월에 고열과 호흡곤란으로 옛날 그 증상으로 OO병원 응급실에 갔다. 겁이 났다. 재발했을까? 두려웠다. 사진을 찍었는데 이상이 없었다. 그 전 차트기록을 보시더니 수술하셨냐고 묻기에 안했다고 했더니 죽으려고 그러냐고 말하기에 살려고 안했는데요. 라고 말대답을 했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나왔다. 집에서 짐을 챙겨 좀 더 큰 병원에서 검사 받아 보고 싶어 OO병원으로 갔다. 고열과 호흡곤란으로 가니 역시 폐렴이라 했다. 남편이 사실 전에 폐암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폐렴치료는 뒷전이고 이 검사 저 검사하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했다. 기관지 내시경까지 다 하고 검사 결과는 암세포가 없는 걸로 나왔다. 그래서 보험이라도 들게 완치 했다고 소견서라도 써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한번 해서는 안 되고 내시경 해서 여러 번 조직을 떼야 한다고 하기에 “됐습니다.” 했다. 익산으로 와서 폐렴치료는 계속해서 하고 퇴원했다. 퇴원하자마자 민속한의원으로 가서 약을 지었다.
3개월 정도 먹는다. 어린 딸을 키우려면 난 더 열심히 약 먹고 운동하고 마늘, 죽염을 먹고 쑥뜸을 했다. 암 환자가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암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싸움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마지막으로 환우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남의 말에 현혹되어 불안해하고, 남이 하는 대로 쫓아 갈려는 나약한 자신을 먼저 다독여야 합니다. 이렇게 흔들림 없는 의지로 나를 다시 일켜 세울 때, 희망은 언제나 우리 곁에 올 것입니다. 암 환자에게는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외로움과 절망이 시시때때로 찾아옵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런 나를 지켜보며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시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마시고 힘내세요. 새삼 우리 가족에게 감사하고 특히 엄마, 남편 정말 감사하고 우리 딸들 건강하게 커줘서 고맙고 큰딸이 9살, 아플 때 난 딸이 5살이 됐네요.
행복합니다. 지금도 건강 챙기면서 운동하고 마늘, 죽염 먹으면서 잘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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