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속죄(atonement, 죄를 벗음)
레위기강해 1장에서(부르스목사)
레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atonement)가 될 것이라”
“And he shall put his hand upon the head of the burnt offering;
and it shall be accepted for him to make atonement for him.”
(KJV)
4.
내적인 의미에 있어서
손이란 힘(power)을(878) 뜻하고,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것까지에 이르러
힘이 교통됨을(10023) 뜻하고,
제물이 받아들여져
그를 위한 속죄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됨으로 해서
악이 제거되고
내적인(internal) 것과의 결합이 일어나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며 또 주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것을 뜻한다.
A.C 878, 10023, 10042-II. 3절 참고
추가)
죄에 대한 용서는
인간의 회개와,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예배함과,
그 결과 인간이 선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
즉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상태로 되는 것이다.
이것이 속죄, 실제적인 속죄, 화해다.
로마서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고린도후서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A.C. 9954-7, 6451, 1259, 5913, 6126, 7837, 3400, 10122 참조)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에
손을 얹는다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모든 예배를 뜻한다.
그것은 곧
죄를 짓는 마음의 진정한 시인과 고백이고,
또한 지은 죄의 제거를 통해
죄로부터의 실제적인 정화가 마음에 이루어지고,
거기 선과 진리가 채워지기를 원함으로
주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아울러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제물에 손을 얹어 속죄되는 것은
기독교의 속죄 교리처럼
우리 죄 그 자체가 대신 죄 값을 받게 될 제물에 실제로
옮겨져 처리되는 것이 아니다.
즉, 참된 속죄란
십자가 피흘리심에 의한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그저 죄와 그 형벌이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에 대한 회개와 제거,
그리고 주님과의 교통에 의한 사랑의 선의 채워짐 등
마음의 실제적인 변화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식의 속죄나 대속 개념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기에
구원에 실제적으로 필요한 마음의 정결을 가져다 줄 수 없다.)
“atonement”(속죄, 죄를 덮음, 죄를 벗음)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죄에 대해 덮음이 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통상 세 가지 의미들이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즉,
“죄에 대해 값을 치루는 것(expiate, 보상, 속죄),
죄로 인한 분노를 달래는 것,
죄로 인한 재난을 피하는 것”이다.
이런 뜻이 과연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고 싶어 자신에 물어본다면,
이제 그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대답은 그것이
글자적 의미로는 물론 ‘번제’(태워서 드리는 것)를 뜻하지만
영적 의미로는 자연적인 선한 애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즉, 예배 드리는 자에게 있는 자연적인 선한 애정이
주님에게서 온 선과 진리의 유입에 의해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화되기를 원하는 것과
아울러 그런 삶으로 노력해 가는 것을 뜻한다.)
죄에 대한 덮음(covering)이나 속죄(atonement)의 의미가
다양한 품질의 선과 각기 다른 수준의 선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 외에 더 다른 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진리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참으로 우리가 어떤 특정의 악을 사랑해서 그것을 행한 후
(죄를 지음)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기에 회개하여 버렸다면
(지은 죄에 대해 번제를 드림)
그 죄를 덮거나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그 반대편의 선을 수용하여 승인하는 것 외에
(번제를 드림으로 속죄를 받음)
다른 아무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에 대한 깊은 생각은
‘번제나 제물의 참된 영적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들은 거룩한 삶의 모든 의무에서
주님을 섬기려는 우리의 선한 애정들을 신성하게
성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헌신하려는 노력이
어떻게 죄를 덮으며,
분노를 달래고,
재난을 피하게 하는지를 이제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아주 일반적으로 믿어온 것은
죄의 덮음 또는 속죄가
그리스도의 죽음 또는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에 대해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그분에게 가해진 벌로
간주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엉터리 주장은
새 시대의 빛 앞에서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다.
죄인 자신이든, 그 죄인을 대신한 다른 대체물이든 간에
단지 처벌을 수단으로
죄가 덮어지거나 제거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처벌이라는 것이
악이 뛰쳐나오는 것을 억누르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처벌이 악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직 회개에 관련된 진정한 애씀(work, 수고)만이 악의 제거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인간의 죄에 대해 다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그 처벌대상이) 인간 본성 안에 계신 주님일지라도
위와 같이 결과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사야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는데,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다.”(사 43:4,5)
인간을 구속해주고자
주님께서 고통을 받으셨던 것은 진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고통이나 죽음이
악인이나 악령, 또는 아버지(Father)에 의해
그분에게 가해진 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거듭 말하건대 참으로 그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그분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기”(요한3:16) 때문이었다.
주님은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고통 뿐 아니라
어둠의 모든 권세에 강력히 맞서시는 것까지를 포함한
고통을 견뎌내셨는데
그분은 그것을 당신의 인간 본성으로 감수하셨다.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선과 악 사이에서
인간의 완전한 의지의 자유를 보존시켜 주심으로
악의 절대적 우세함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지옥의 세력을 정복하심)
따라서 가장 광대한 의미로 볼 때
신성한 사랑은
인간으로부터 악을 제거하는 것에 의해
그를 위한 죄의 덮개 또는 속죄이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다.
(그러므로 주님의 속죄는
악의 제거 없는 죄의 덮개나 속죄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를
악이 강취하려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주님의 구속(redemption) 작업에 의해서인 바,
이런 견지에서 죄가 덮어지거나 제거된다든지 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죄는 감추어지거나 비활동 속에 들어가 있는 것뿐이다.
또 하나 각 개인의 측면에서 볼 때
가장 광대한 의미에서 진실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존하셨고
또 악에로 기우는 모든 모계적 생명을 추방하셨으며
또 그분의 인성이 영광을 입으셨음에도
인간의 악은 여전히 인간과 더불어 영원히 남아 있다가
인간이 거듭 나아가면서
각자 속에 있는 선의 세력이 우세해지면
그때 악은 단지
그 선들로 덮여지거나 비활동의 상태에 있게 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악이 나타나거나 인간을 곤란에 빠뜨리려는 것이
중단되어 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거듭나아가는 과정이란
악의 실제적인 제거 곧 옮김의 과정인데
이는 회개에 의해 악을 버림으로 결국 선의 우세 속에
악이 점자 마음의 중앙에서 변방으로 옮겨져
그 영향력이 희미해지는 상태일 뿐이다.)
이상으로부터 4절에서 의미되는 것,
여타 말씀에서 언급되는 덮음 또는 속죄가
보편적으로든 특수 측면에서든 공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았으리라 본다.(고린도후 5:18,19 참조).
둘째로 살펴볼 것은
이 속죄(atonement)가
어떻게 분노를 가라앉히게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주님 안에 분노가 있고
이 분노가 어떻게 인간이 고통당함으로 인해
가라 앉혀질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무한하게 완전한 주님이 분노하실 리 없는 것은
말라기 3장 6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즉 “나는 여호와라, 나는 변하지 않는다.
너희를 여전히 야곱의 후손으로 대접하리라.”
그런데 신명기 32장 35절에서는 “복수는 나의 것, 대갚음하리라.”
라고 반대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가
설령 고통이나 처벌을 포함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성냄, 분노, 복수 등을
주님께 속한 것으로 돌리는(attribute)
진리의 가상(appearance, 외관)까지 이해해두어야 한다.
그때 분노는
주님에게서 비롯된 인간에 대한 거부감(aversion)이나,
또는 외적, 자연적 인간에 대한 내적 인간의 거부감을 뜻하는데
이것이 분노라는 가상(외관)을 띄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노가 속죄로 달래어지는 방법은
인간이 신성한 사랑과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다가서야 하고
외적 인간이 내적 인간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사랑의 원리로 악을 거절함과 동시에
선을 보상으로 받아 선과 교통하는 방법뿐이다.
셋째로 살펴볼 것은
이 구절이나 여타 말씀의 다른 문단에서 언급되는
속죄를 수단으로 어떻게 재난이 피해질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피해를 생산해내는 것이 악의 참 본성이고
그 반대의 혜택을 주는 것이 선이라고 하는 간단한 생각만으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악한 자를 덮칠 재난은
선을 수용함으로 피해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소를 태워 바침이 가리키는 선의 성질에
이 원리를 응용한다면
주님이 주신 자연적 애정과 능력들을
인간이 단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에 바친다면
그들은 그 행위에 반드시 재난이 수반됨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구절들의 내적 의미에 의거하여
자신들의 애정을 주님께 헌신한다면
외적인 것이 내적 인간과 결합되고
이것을 통해 이런 저런 재난들은 한 쪽으로 비켜지고
동시에 주님과 결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예증은
다음 구절에서 그리고 레위기서 다른 장에서도 풍부하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