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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잃어버린 우산
安 輝
결국 나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비가 내린다. 새벽 창문을 후둑 후둑 때리며 비가 내리고 있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부질없는 잡념에 시달리며 밤새 잠을 설쳤다. 몹시 피곤했으나, 잠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피곤과 졸음이 따로 노는 해괴한 현상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심해지는 느낌이다. 어쩌다 잠을 놓치면 밤새도록, 몸은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곤한데도 발바닥이 서늘하리만치 의식이 또렷한 상태가 지속된다. 아마도, 살아온 세월의 더께만큼 늘어난 오만가지 근심들이 두뇌와 몸 안에서 일으키는 불협화음 때문이리라.
부슬비로 지짐거리다가, 장대비로 퍼붓다가 그렇게 번갈아 하기를 며칠 째. 긴 가뭄으로 나라가 시끄럽던 게 어제 같은데,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며칠 사이에 이번엔 거꾸로, 물난리 얘기가 떠들썩하다. 게릴라성호우라나 뭐라나, 기상청도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폭우 때문에 여기 저기 집들이 빗물에 떠내려가고 잠겼다는 뉴스가 호들갑스럽다.
사람살이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득한 옛날의 일같이 여겨지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바로 엊그제의 일처럼 손에 잡힐 듯 느껴지기도 하고, 아주 먼 훗날의 일로나 짐작되던 일들이 여지없이 닥쳐오기도 한다. 정기아빠, 아니 김윤식과의 인연도 그랬다. 까마득한 옛일처럼 뇌리의 안 쪽,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 꽁꽁 숨어 있던 그 인연에 대한 기억은 시시각각으로 되살아나 눈앞에 아른거리곤 했다. 고개를 흔들면 흔들수록 그것은 더욱 생생해졌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싱겁게 생을 마감하리라고 상상해본 적 또한 없었다. 그게 오늘 내가, 정작 알 수 없는 불안과 당혹함을 느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일 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한 폭의 도화지에 그려 가는 그림과 같다던가. 한 번 그린 그림은 아무리 덧칠을 해도 없어지지 않고 겉 물감의 안쪽에 오롯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처음 그린 그림에 대한 불만을 견디지 못해 새로운 도화지를 구해보려 하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도화지를 선뜻 내어주는 만만한 섭리는 없다. 어떤 이들은 그림 위에 덧칠을 해가며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덧칠로 그린 그림이 반드시 더 좋은 그림이 되도록, 삶이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아니, 그런 덧칠은, 십중팔구 잘못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다시 그린 그림이 처음의 그림보다 더 엉망이 되기가 일쑤다. 야속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차가운 이치인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는 도화지를 새로 구할 수도, 새 그림을 더 잘 그릴 수도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가슴속의 불만을 한숨으로 추스르며 그냥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한때 나는 어이없게도, 그런 사람들의 인생을 경멸했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던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듯 그렇게 칼을 치켜들고, 거추장스러운 인연들을 단숨에 끊어 버렸다.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감당하지 못한 채 나아갈 길을 찾고 있던 내게, 운 좋게도 기회가 왔던 것이다. 기회? 그게 기회였을까?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미래를 잘 알지 못한 채 계속해 가는 나의 몸부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 아무리 어리석을 지라도, 그것은 내 인생이고, 어디까지나 내가 책임져야할 몫이다.
엄마.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영안실에 안 오실 거예요? 아들 정기가 전화를 한 것은 어제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빈소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그 곳에 또 한 사람의 미망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내가 이미 예감했던 대로 나는 그곳에 갈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내게 신경 쓰지 말거라. 엄마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대신 네가 성심을 다하여 아빠를 잘 보내드리렴.
이틀 전 그가 임종했다는 소식을 들려준 것은 딸 인희였다. 아빠 돌아가셨어. 인희의 말은 그것뿐이었다. 솟아오른 눈물이 감정의 벽을 무너뜨렸던지, 아이는 흐느끼기만 할 뿐 더 이상 아무런 말을 못했고, 나는 마음 여물게 먹어야 한다고 다독여주고 난 뒤 먼저 전화를 끊었다. 예고된 죽음이었으므로 새삼스럽게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순식간에 내 의식은 꽁꽁 얼어붙고, 뭔가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냐. 나는 무엇인가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거부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신의 장례식엔 참석하지 않을 지도 몰라요. 그것은, 등 돌린 지 10년 만에 '간암 말기'라는 슬픈 병명을 달고 중환자실에서, 마치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아프리카의 난민처럼 비참한 몰골로 내 망막에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내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사실 그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다거나, 그의 주검 앞에 고개 숙이는 일 따위를 할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그래. 오지 마. 이렇게, 살았을 때 한 번 더 본 걸로 만족할 게. 피골이 상접한 얼굴, 까맣게 변색되어버린 피부, 산소튜브를 코에 끼운 채, 황달이 들어 누렇게 변해버린 떼꾼한 눈의 흰자위. 이미 죽음의 색깔이 많이 담겨 있는 얼굴을 한 그는 담담한 말투로 천천히 내 말에 동의했다. 10년 전, 법원 앞에서 내 손목을 붙잡고 마음 돌리기를 애원하던, 협의이혼 동의서에 도장을 찍던 날의 그와는 아주 다르게, 그는 쉽게 포기하고 있었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더욱 굵어졌다. 투둑 투둑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어져가고 있었다. 괜찮을까. 장례식은 그가 병들고 난 뒤, 병세가 심해지면서 가족들의 소원에 따라 적(籍)을 올렸다는 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라 했다. 본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터로 향할 것이고, 유해는 납골당에 안장될 것이다. 창 밖 연립주택과 맞닿아 있는 놀이터에는 금세 빗물이 그득하게 고이고 있었다.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가 창밖을 향해 뻗어간 내 상념의 촉수들을 후루룩 거둬들였다.
희민 씨, 접니다.
김도훈이었다 .
비가 많이 오는군요. 이따가 저녁 일곱 시쯤 가게로 가겠습니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것은 그의 습성이었다. 처음엔 몹시도 불쾌했었는데, 이젠 별 거부감이 없다. 지난 겨울, 그는 잠시 동안 그런 나의 '이해'를 다른 뜻으로 오해하는 듯 했다. 그와 있었던 그 일 때문에 내가 달라진 것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 일과, 내가 그의 무뚝진 태도를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그도 안다. 그래, 그렇다. 그와의 일은 그 이전의 상상도, 그 이후의 설명도 가능하지 않은 난해한 해프닝이었다. 내가 운영하는 업소에서 손님으로 만났다는 사실 때문만도 아니게, 나는 어느 틈엔가 내 생활 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그의 존재를 마음으로부터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느낌이 나쁜 남자는 아니었다.
이혼 후 꼭 6년 만에 나는 '해바라기'라는 이름의 지금 이 레스토랑을 차렸다.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화가인 도훈은 또래의 예술가들과 함께 '해바라기'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도훈을 레스토랑으로 처음 데리고 온 사람은 소설가 장태원이었다. 태원은 장편소설을 두 번 출간했으나, 별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마흔이 넘은 노총각이었던 그는 소설만을 안고 사는 문학도였다. 알코올을 잘 이기지 못하는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술을 무척 좋아했다. 평소에는 거의 한 마디도 말을 내뱉지 않을 정도로 과묵한 그였으나, 일단 술이 입에 들어갔다 하면 다변가로 변했다. 말이 많기만 할 뿐만 아니라, 평소에 가슴에 있던 말을 다 뱉어낸다 싶을 정도로 마구 말을 쏟아냈다. 처음에 그런 그의 행위는 무척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의 모습에서 무시무시한 외로움을 읽어내고 말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취중에 내뱉는 말속에서 그의 심중에 뿌리박힌 고독을 나는 쉽게 알아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게는 그의 마음이 잘 느껴졌고, 그의 생각이 눈에 보였다. 그는 나를 일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여자'라고 불렀다. 더러는 '일곱 난쟁이를 거느린 마녀'라고도 불렀다. 태원과 함께 드나들던 단골들의 숫자가 대충 일곱 여덟쯤 되었기에 지어낸 별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죽던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태원이 자가용을 산 것은 그의 아버지가 남기고 간 텃밭 4백 평이 국도에 편입되면서 토지보상금이 나온 직후였다. 목돈을 손에 쥐게 된 그는 승용차를 한 대 샀다. 알코올을 이기지 못하는 체질이면서도 술을 너무 좋아하는 그의 스타일로 보아서,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싶었던 나는 그가‘해바라기’에 오는 날이면 빼앗다시피 자동차 열쇠를 건네받아 보관하곤 했다.
해거름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그 날도 나는 늦은 밤 가게를 찾아온 그로부터 승용차 열쇠를 빼앗은 다음 테이블에 앉혔다. 여전히 흔들리는 몸짓으로 그는 숱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고, 나는 그가 그 즈음 부쩍 더 외로움을 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말벗이 되어주었다. 그 날도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더 마시고는 꼬부라진 혀로 안녕, 빠이빠이를 수다스럽게 여러 차례 외치며 그는 레스토랑을 나갔다.
전화를 걸어온 도훈으로부터 비보(悲報)를 들은 것은 다음날 오전, 에어로빅 학원에서 아침운동을 끝내고 막 레스토랑에 출근했을 무렵이었다. 간밤에 태원이 빗속에 차를 몰고 가다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현장에서 절명했다는 거였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도리질 쳤다. 카운터 서랍에 넣어 둔 태원의 차 열쇠를 찾아보았다. 열쇠는 그대로 있었다. 나는 도훈의 전화가 거짓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태원은 그날따라 지갑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비상 열쇠를 꺼내어서 기어이 운전을 했고, 사고를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태원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지난 해 늦여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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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계가 여덟 시를 알리고 있었다.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점심 손님을 받으려면 레스토랑에는 늦어도 열 시까지는 가야한다. 주방보조로 일하는 경숙을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진다. 아무리 타일러도 그 때 뿐, 불과 한 달을 못 넘기고 말썽을 부린다. 레스토랑에서 경숙과 아웅다웅하면서 지낸 세월도 어느덧 3년 세월이다. 잘라야지, 잘라야지 하면서도 끝내 내치지 못하는 내가 영 등신이다 싶은 때도 한 두 번이 아니건만, 나는 기어이 그녀를 내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경숙 역시 또 하나 내 평생 업보이던가. 직업소개소의 반드럽게 생긴 총무 놈이 맨 처음 경숙을 데리고 왔을 때, 나는 대뜸 그녀가 약간은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한 천치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눌한 말투와 무딘 감각이 한 눈에 보였다. 막상 주방에서 일을 시켜보니 막 맡겨놓기가 뭐해서 그렇지 그런 대로 부릴 만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소스를 만들고 돈까스용 고기를 두드리는 일 따위의 중요한 것들이야 남의 손에 맡기기 힘든 일이고, 앉혀놓고 오곤조곤 가르치면 그런 대로 부려먹을 만할 것 같았던 것이다.
내 예상이 처음부터 빗나간 것은 아니었다. 우선 경숙은 착했다. 말귀를 잘 못 알아들을 때는 답답하기도 했으나, 웬만해선 꾀부리는 일없이 시키는 대로 일을 잘했다. 한 해가 지났을 무렵, 나는 그녀에게 적금을 들게 했다. 그녀의 앞날을 어떻게든 설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이태 째인 작년부터였다. 어느 날 그녀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묵고 있는 자취방도 문이 잠겨 있었다. 식당에서 갑자기 없어진 주방보조의 자리는 여간 큰 게 아니다. 서어빙하는 아이가 따로 있어도 종일 나는 주방과 홀을 들락거리며 허둥거려야 했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 걱정스러운 것은 갑자기 없어진 사람의 안위에 대한 문제였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 혹시라도 무슨 변을 당한 것은 아닐까. 판단력이 약간 떨어지는 사람인만큼, 누군가 해코지를 하려 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저런 별별 불길한 상상이 생각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져서, 마음을 어지럽혔다.
행방을 감춘 지 사흘 째,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실종신고를 할 결심을 굳히고 있을 그 즈음에 경숙은 싱글거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게에 나타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무사히 돌아와 준 것만도 고맙다는 생각으로 반갑게 맞아들인 그 날로, 나는 그녀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쉬이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신 목수'라나 누구라나, 내장 목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이혼하고 혼자 사는 홀아비라는 사실까지 그녀는 한번 열린 입으로 술술 다 털어놓았다. 이틀 동안 그와 함께 온천인가 어딘가를 다녀왔다는 그녀에게서 부끄러움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실실 헛웃음이 나왔다. 진작 반편 기운이 있는 그녀였던 지라, 나무라고 어쩌고 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그녀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만이 실소(失笑) 비슷한 웃음을 불러일으킬 뿐, 노여움 같은 것은 없었다. 다음엘랑은 결근을 하더라도 미리 연락은 꼭 해야 한다는 다짐만 놓고, 그 일을 덮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주기가 뚜렷하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두 달에 한 번, 또는 석 달에 한 번 그렇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무단히 하루 이틀 행방을 감췄다가 나타나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출근을 하지 않아 속을 뒤집어 놓을 때면 이번엔 영락없이 내쫓으리라 생각했다가도, 막상 얼굴을 보면 모질게 내치지 못하는 건 나의 어떤 심성 때문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딱 부러지는 구석이 제법 있다싶은 내가 왜 경숙에 대해서만큼은 그렇게 문문해지는지 알 재간이 없다. 그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일까...... .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눈시울에 뻑뻑하게 끼어있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 시원한 느낌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아- 하고 신음을 토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문득 낯설다. 아아, 정기아빠가 떠나는 날이구나. 그의 장례식 생각이 났다. 왜일까.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울컥 솟아오르는 슬픔을 감당키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와의 인연은 단순한 회화(繪畵)가 아닐 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판화의 원판과도 같은,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기록일 지도 모른다. 그 인연의 끝에 끈 달려 있는 두 생명, 정기와 인희 두 자식들 때문에 그와의 인연이 또 다른 의미의 숙명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나는 그의 죽음이 필경 몰고 올 내 생활의 변화에 대해서 이미 짐작을 하고 있다. 우선 아비를 잃은 자식들이 내게 올 것이다. 계모에게는 정기와 인희 저희들 말고도 두 명이나 자식이 더 있었다. 결국 내가 버리고 온 자식들이, 아비의 죽음으로 내 차지가 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정말訣?그건 내가 미처 생각지 못 했던 일이었다.
정기아빠가 살아있을 적엔 몰랐는데, 막상 이제 아이들이 내게 온다 생각하니 어린아이들을 떼어놓고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빈손으로 허적허적 그 집을 나설 적에 가슴을 후벼 파던 아픔이 되살아나곤 한다. 물론, 아이들이 계모 밑에서 큰 설움을 받고 자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저희들에게는 친 엄마인 내가 안고 키울 때만 같지는 않았으리라.
세상의 모든 엄마가 다 그렇듯,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도 참 극성스러운 어미였다. 좋다는 것은 말만 들어도 다 쫓아다니며 구해 먹이고 입혔다. 반듯하게 키운다고 이리저리 유난을 떨었다. 누구나 다 그런다지만, 우리 아이들이야말로 천재인 줄 알고 법석을 부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게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아득하고 어지럽다.
기억이란 놈은 참 징그럽다.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간 일을 새록새록 되살려주는 기억의 습격....... . 정기아빠, 아니 김윤식을 처음 만난 것은 여고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친구들 세 명과 함께, 물이 차고 맑기로 소문난 송학산 뒷자락 계곡으로 놀러갔을 적이었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덜렁거리며 계곡으로 갔던 우리는, 역시 친구들 여러 명과 함께 놀러온 김윤식 일행과 어울리게 되었다. 막 군 복무를 마친 청년들이었던 그네들은, 비록 사복을 입긴 했지만 어디로 보아도 학생 티가 나는 우리에게 단지 자기들과 어울려 주는 조건만으로도 큰 친절을 베풀었다. 기타반주에 맞춰서 손뼉을 치며 합창을 하고, 키득키득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무에 그리 좋았던지, 그들은 가져온 음식을 뭉텅뭉텅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들의 승합차로 읍내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기까지 하였다.
그 방학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그들을 추억의 뒤편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런데 이듬해 2월 졸업식장에 그 중 한 청년이 꽃을 사들고 나타나서 나를 찾았다. 김윤식이었다. 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도망치고 싶은 충동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학교강당에서 그는 딸의 졸업식을 보러 온 나의 어머니에게 넙죽 절을 올리는 넉살까지 부렸다.
내가 그를 잘 알지 못했음에도, 어머니는 그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사람 좋은 어머니에게 누구였던들 싫다 나쁘다 할 리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 날 이후 그의 접근은 집요했다. 우리 집을 알아낸 그는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와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다.
그 무렵 집안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할 상황이 못 되기도 했고, 공부에 그다지 취미가 있는 편도 아니었던 나는 장래문제로 갈등을 하며 지냈다. 어디 사무실에라도 취직을 할까, 장사를 배울까 그런 저런 궁리를 하고 있던 터였다.
아래로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까지 여섯 식구, 변두리 손바닥만한 농토에 의존해서 살던 옹색한 가세로 말미암아 아마 경황이 그랬던 탓이었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품기계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김윤식을 사윗감으로 생각하는데 나의 부모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 괜찮아 보이는구나. 네 팔자가 아무래도 그렇게 닿아있는 모양이니, 받아들이렴. 무시로 드나들며 쏟아내는 그의 정성에 어머니는 몇 달이 못 가서 그만 마음을 굳혔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그에게 마음 문을 열었다. 원래 말이 없는 편인 아버지였으므로, 눈빛으로나 그랬을 뿐, 내게 별 말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게 정말 운명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저렇게 흘러가면서 양가에서 서두르는 대로 혼사를 만들어 가는 일에 나는 처음부터 마치 손님처럼 굴었다. 딱히 싫지를 않았다 뿐, 그가 정말 좋은지 어떤지 조차 감동으로도 결심으로도 다가오지는 않았다. 왠지 내 일 같지 않은 생경한 혼사의 일을, 그러나 아직 한참 어렸던 나는 얼떨떨 받아들였다. 주변에 아무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 혼인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것을 숙명으로 여기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은 농담인 양 연습인 양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농담처럼 한바탕 웃음으로 넘어갈 일도 아니었고, 연습처럼 없었던 것으로 지워버릴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엄숙한 현실이었다. 단 한 자락도 소홀할 까닭이 없이 치열하게 살아내야 할 내 인생의 본무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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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어서도 비는 도무지 그칠 낌새가 아니다. 빗줄기가 세어졌다가 가늘어졌다가 변덕을 부릴 뿐, 하늘에 종일 끼어있던 검은 기운을 다 쏟아 내려놓기 전에는 그치지 않겠다는 기세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던 것일까, 오전 열한시까지로 되어있는 출근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경숙이 또 감감무소식이다. 홀 바닥을 닦던 나는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부아에 대걸레를 집어던졌다. 내가 외려 경숙에게 길들여져 가고 있구나, 그 생각에 이르자 불끈 솟아오르는 섟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젠 정말 경숙과 인연을 끊어야 할 것인가. 아무리 모질게 마음 다져먹어도, 가여운 인생, 결국 그렇게 하지는 못하리라는 느낌이 자꾸만 생각의 앞자리를 차지한다. 이건 또 무슨 질긴 인연인가. 잠시 후 나는 대걸레를 다시 집어 들었다.
출입구가 정면으로 보이는 6번 테이블을 막 치우고 있는데, 문득 도훈과의 일이 떠올랐다. 그 날 이후 6번 테이블 앞에서 더러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1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눈이 와야 할 계절에 접어든 참이라, ‘겨울비’라고 해야 하나 ‘늦가을 비’라고 해야 하나, 부슬비가 축축이 내리던 날이었다.
이미 전작이 있었던지, 밤 열 시 반쯤에 도훈은 취기가 잔잔히 밴 얼굴로 레스토랑을 찾아왔다. 6번 테이블에 앉은 그는 주로 맥주를 시키던 때와는 달리 양주를 주문했다. 주방 일을 보랴 테이블을 들락거리며, 말상대로 앉아 한두 잔 홀짝거리는 사이에,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새삼스럽게, 죽은 장태원의 얘기를 꺼내어 내 기억의 문을 두드렸다. 그 놈 참 좋은 친구였는데...어쩌구 하며 도훈은 얼굴 가득 그리움을 담았다. 그런 그의 모습 때문에 잠시 나는 서글퍼졌다. 장태원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 싫었다. 아직 그를 차분하게 기억하기에는 그의 죽음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왜 갑자기 장 선생님 얘기는 하는 거예요? 가슴 아프니까, 그만 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도훈에게 눈을 흘겼을 때, 도훈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머쓱해 했다. 비가 와서 그런 건지, 그 녀석 생각이 문득 떠올랐소.
그 날, 다른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이 한 패 씩 다 빠져나가고, 열 두 시가 다 되어서 아르바이트하는 송 군과 주방장 경숙도 퇴근을 시켰다. 남아있던 술잔이나 비우고 문을 닫으려는 심산이었다. 좀은 우울한 기분으로 앉아 있던 도훈이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비우는가 싶더니 갑자기 말했다. 나 아무래도 희민 씨를 사랑하는 것 같소. 나는 뜻밖의 말에 놀랐고, 그가 그런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평소에도 그가 내게 던져오는 따뜻한 눈빛을 아주 못 느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내게 특별한 감흥을 남기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자못 진지한 그의 말을 들으며 소리 내어 키득키득 웃었다. 뭐라구요? 사랑? 그리고 나는 아마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자, 천만 뜻밖으로 그는 벌떡 일어나 나를 끌어안고 빠른 동작으로 입맞춤을 했다. 미쳤어! 나는 그를 세차게 떠밀었다. 그는 테이블 소파에 벌렁 나가 떨어졌다. 미쳤어요? 왜 이래요? 그러면서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지만, 출입문이 잠겨있지 않았고, 간판도 켜져 있어서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할양이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상황이었다. 다시 벌떡 일어난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껴안고 소파에 쓰러뜨렸다.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안 돼! 안 돼! ........ .
그러나, 왜 그랬는지 모른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불 판 위에 던져진 얼음조각처럼 나는 나의 몸이 순식간에 화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안 돼! 문 열려있는데... 누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그렇게 외치는 나를 도훈은 더욱 세차게 파고들었다. 정말 왜 그랬을까? 오랜 시간 남자를 잊고 살았던 내게 그 날의 정사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따라 도훈이 특별하게 느껴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간판 불까지 훤히 켜져 있어서 누군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 그 아슬아슬한 공간에서, 더욱이 출입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소파 위에서 벌어진 정사는 뜻밖으로 내 몸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하였다. 나는 까무러칠 듯한 오르가즘을 느꼈다. 우리는 둘 다 옷을 흠뻑 적신 채 오랜 시간을 거센 파도 속을 허우적댄 다음 정사를 끝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시간에 레스토랑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날 이후에도, 나는 도훈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달라질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내가 그를 특별히 생각한 적도 없었고, 그에게서도 그런 강렬한 감정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 날 이후에 새삼스럽게 그에게 연정 같은 것이 샘솟는다거나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 그건 사고였어. 세상에 설명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 중의 하나야. 그 날 11월의 끝에 일어난 일은 그와 나 사이에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난해한 하나의 의문부호로만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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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이 누나 안 나왔어요?
출입문을 밀고 들어서서 접은 우산을 우산 통에 넣으며 홀 안을 휘둘러보던 누군가가 소리치듯 물어왔다. 아르바이트하는 송 군이었다.
응? 으응. 안 나왔다. 어제 무슨 말없든?
네. 어제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요. 어디 아픈가?
이 집에서만 아르바이트 생활 1년을 다 채워 가는 송 군도 경숙이 이따금 씩 벌이는 증발사건의 내막을 슬며시 아는 터였지만, 약간은 감싸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보이는 말투로 그렇게 고개를 갸웃댔다.
제가 누나네 집에 한 번 가볼까요?
송 군은 말만 떨어지면 곧바로 달려가 보겠다는 몸짓이었다.
그럴까?..... . 아냐. 아냐. 그럴 것 없어. 올 때가 되면 오겠지 뭐. 그냥 두고 청소나 마저 하렴.
네. 알았어요.
가본들 별 뾰족한 수가 있을까. 보나마나 그 신 목수인가 뭔가 하는 치하고 함께 어디로 달아났을 텐데. 찾아본 들 뭣할까. 그저 오늘도 주방 일까지 콩 튀듯 뛰어 다녀야할 판이로구나, 속으로 그렇게 구두덜거리며 나는 아예 기대를 접는 게 쉽겠다는 생각을 만들고 있었다.
주방 냉장고 속을 살펴 부족한 것이 없는지 살피고 있는 사이, 창밖의 빗줄기가 또 한 차례 소나기로 변하고 있었다. 웬 비가 이렇게 많이 와?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시침이 여섯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송 군이 전축으로 다가가 음악을 틀었다. 케니 G의 '고잉 홈'. 소프라노색소폰 소리가 홀 안으로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던 송 군이 수화기를 든 채로 소리쳤다.
사장님! 정기한테서 전화 왔는데요.
아, 오늘이 정기아빠 장례일이지. 나는 카운터로 가면서 잠시 잊었던 일 하나를 다시 기억해냈다.
전화 바꿨다.
엄마. 지금 일 다 끝내고 납골당에서 막 돌아왔어요.
많이 울었던지, 녀석의 목이 잠겨있었다.
그래, 잘 치렀니?
네. 잘 치렀어요. 교회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수월했어요.
인희는 어떠니?
너무 힘들었는지 집에 와서는 그냥 쓰러져 버리네요.
뜨거운 기운이 가슴을 타고 올랐다. 유난히 착하고 여린 딸이었다. 아빠의 죽음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
알았어. 너도 우선 푹 좀 쉬려므나.
네, 엄마. 내일 찾아뵐게요.
그래, 그러렴.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눈시울이 파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이제 저 아이들이 내게로 오겠구나. 10년 전 그 어린것들을 두고 나올 적에 쏟았던 피눈물과 아이들이 그리워 몸살을 앓던 숱한 아픔의 강을 건너고 건너 이제 다 자란 모습으로 저 아이들이 내 곁에 오겠구나....그런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르륵 차르륵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우두커니, 그렇게 나는 서 있었다. 정기아빠가 한 줌 재로 돌아갔다. 가슴으로부터 신경을 타고 퍼져나가는 느꺼움이 긴 한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리고 크게 번창하지는 못했어도 비교적 잘 굴러가던 공장. 누구나 부러워해야 할 형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였던지, 내 가슴속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 생겨났고, 날이 갈수록 그 구멍은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그 구멍은 결국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만큼 크게 자라났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린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났고, 그리고 아이들을 낳았고, 그래서 그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고..... . 세상 어디에도 '나'의 존재는 없었다. 나의 뇌리 속에는 자꾸만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하는 소리가 까마귀 떼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갔다. 한때 그렇게도 신기롭고 행복하던 아이들 키우는 일마저도 심드렁해졌다. 모든 게 억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의 한 직원 부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사장님이 좀 수상해요. 아무래도 경리하는 미스 정하고 살림을 차린 것 같은데 잘 좀 알아보세요. 같은 여자로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전화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 사건은 일상의 답답함에 지쳐 폭발직전에 있던 내게 단지 나쁘기만 하지는 않은, 모종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나는 현장을 잡았다. 미스 정, 나중에 정기와 인희의 새엄마가 된 그 아가씨는 더러 우리 집에도 왔었기 때문에 나도 얼굴을 알고 있었다.
남편은 아마도 내가 아이들을 포기하지 못할 줄 알았던가 보았다. 처음엔 아이들을 볼모삼아 나를 으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나는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아이들을 포기하고 그와의 인연을 끊었다. 김윤식은 법원 복도에서 누가 보건 말건 내 앞에 무릎을 꿇어가면서 애원했지만, 나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이제 그는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 열매지어진 자식들로 하여 나는 결국 그와 끊어지지 않게 된 셈이다. 나는 대개의 사람들이, 장난처럼 시작하여 전사(戰士)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인연'의 혹독한 섭리에 몸을 떨고 있었다. 농담처럼, 연습처럼 시작하기 십상인 인생. 그러나 한 번 지나가면 어떻게든 그 흔적이 남아서 결국 살아온 궤적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공포.... . 비는 여전히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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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에 온다던 도훈은 여덟 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왔다. 비교적 밝은 표정인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그에게 정기아빠의 일을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하긴 그에게 정기아빠의 일을 굳이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비프스테이크 하나 해주시죠. 오늘은 왜 그런지 고기 생각이 나네. 아, 음식 나오기 전에 맥주 좀 먼저 주시고....
메뉴 판을 들고 온 송 군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도훈은 음식을 주문했다. 송 군이 메뉴 판을 되받아들고 막 돌아서려는 찰나, 그는 오른 팔을 들어 손짓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희민 씨. 식사하셔야지. 뭐 하실래요? 스테이크 함께 하시죠?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니에요. 저는 별로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오늘은 주방장이 안 나와서 제가 주방 일 해야 돼요. 좀 기다리세요.
스프가 나가고, 주방에서 고기를 오븐에 넣고, 파슬리, 완두콩, 통감자구이, 양배추, 샐러드, 피클........메인 디쉬를 데코레이션하는 동안 나는 결심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은 꼭 말해야겠어. 마음속에 꼭 꼭 저며 담아 별러온 얘기, 도훈에게 털어놓아야겠어.
미리 가져다 준 맥주를 홀짝거리던 도훈은 송 군이 서어빙한 스테이크를 약간은 게걸스럽게 먹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빗발이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기를 거듭하면서 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도훈 씨.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식사를 끝내고, 맥주 두 병을 더 시킨 그와 마주 앉았을 때 내가 정색을 했다. 내가 따러 준 맥주잔을 들어 마시던 도훈은 눈을 크게 뜨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 괜찮으니까, 하시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약간의 초조로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긴장의 언덕에까지 이르지는 않고 다시 스르르 풀려 내리고 있었다. 이제 비로소 종을 칠 시간이 되었다.
사실, 오늘 제 전 남편 장례식이 있었어요.
네? 뭐라구요?
우리 아이들 아빠 장사 지내는 날이었다구요.
그래요? 왜 진작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 대목에서 나는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그가 내 잔에 맥주를 부었으므로, 나는 잔을 들어 거품을 한 모금 삼켰다.
그 얘기를 하려고요. 굳이 도훈 씨에게 제 전 남편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그게 도훈 씨와 저 사이의 한계죠.
우리 사이의 한계?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거리를 둔 건 그 쪽 아닌가요?
그렇죠. 하지만 전 저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충실했어요.
나는 그쯤에서 그가 지난 11월의 마지막 날 그 일을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으로 그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내가 먼저 그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많이 생각해봤는데요. 적어도, 그 날의 일은 제 쪽의 고의는 아니었어요. 제게 있어서 그 일은 순전히 사고였어요. 제가 도훈 씨를 나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관계가 되어도 될 만큼 마음이 닿아있지는 않았고, 지금도 그래요. 많이 생각해봤는데요. 그 전에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이구요. 사고에는 본의가 없는 법이니까요.
그의 눈에 야릇한 긴장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약간의 당혹감이 서려있는 얼굴빛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젠 도훈 씨를 그만 보았으면 해요. 더 이상 마주 앉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덤덤히 대한 세월 동안 아마도 그는 여러 가지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 중에도 언젠가는 내가 '그만 보았으면 해요'라고 말할 것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당혹감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차분하게 앉아있는 그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내가 그 말을 해주길 기다렸을 수도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변함없이, 혼자 또는 손님들과 함께 레스토랑에 찾아와 식사를 하거나,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 가면서도 그는 늘 별 말이 없었다.
실례합니다. 사장님, 돈까스 3개 주문 있는데요?
그 사이 송 군이 다가와 주방 일을 보라고 하고 있었다.
잠깐 실례할게요.
나는 주방으로 가서 튀김기름 솥이 얹혀있는 가스버너에 불을 지피고, 냉장고 문을 열어 돈까스 재료들을 꺼냈다. 도훈에게 막상, 오랫동안 참아왔던 말을 뱉고 났는데도 가슴이 후련한 것만은 아니었다. 적당히 튀겨진 돈까스를 건져내어 채반에 받쳐놓은 동안, 바깥에서는 안녕히 가세요, 송 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3인분의 돈가스를 다 내보내고 난 다음, 주방 밖 홀로 나왔다. 도훈은 이미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6번 테이블에서 도훈이 남기고 간 빈 맥주병과 술잔을 치우고 있는 송 군을 향해 확인하듯 물었다.
손님 가셨니?
네. 계산하고 나가셨는데요.
도훈은 어떤 마음으로 갔을까. 표정으로 보아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화를 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예정된 일이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보냈던 꽤 여러 번의 암시를 생각했다. 적어도 내 가슴속에는 그를 향한 최소한의 애정도 확인되고 있지 않음을......... .
도훈이 가고 난 다음, 시간이 얼마가 지났던가. 오늘 참 손님이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비 내리는 밤거리에 가로등만 희부옇게 비치고 있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빗물을 쫄딱 뒤집어 쓴 생쥐모양을 하고 누군가가 더듬더듬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경숙이였다.
아니, 경숙이 너 어떻게 된 거니?
......... .
그녀는 이미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었고, 비에 젖은 얼굴이 컁컁했으며, 입술은 파랗게 젖어 있었다. 그런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빗물을 털고 서있는 그녀의 모습엔 왠지 나를 향한 것만도 아니게 진한 충격과 크나큰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너 이게 무슨 꼴이야? 어디에서 오는 거야?
언니. 나 배고파. 우선 밥부터 좀 먹을래.
나는 카운터 한 쪽에 걸려있던 가디건을 경숙의 어깨에 걸쳐준 다음, 먹다가 남은 된장찌개를 데울 양으로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그 사이 경숙은 냉장고에서 김치 통을 꺼내어 열어놓고 밥솥에서 밥을 퍼내어 주방에 선 채로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경숙은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는 그 위에 김치를 얹어서 우걱우걱 먹었다.
밥을 먹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느낌은 두 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정반대다. 행복해 보이거나, 불쌍해 보이거나...... . 그 순간,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밥을 먹는 경숙의 모습은 더없이 불쌍해 보였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
정신없이 밥을 먹던 경숙이 울고 있었다. 홀 쪽으로 한 발짝 나왔던 나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니?
내가 물음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 목수 그 새끼가 내 돈 다 가지고 도망갔어.
뭐? 뭐라구?
나는 두 해 전 그녀를 설득하여 들게 한 24개월짜리 적금 생각이 났다. 처음 1년은 내가 통장을 가지고 있다가, 그래도 돈 늘어가는 재미를 보고 살게 해주는 게 옳겠다 싶어서 그녀에게 넘겼다. 그런데 그게 만기가 되어서 찾을 때가 되었을 텐데. 아뿔싸, 내가 그 생각을 못했구나.
너, 적금 탔었니?
응. 어저께가 타는 날이었어. 그런데, 신 목수가 가지고 어디론가 가버렸어. 은행에서 찾아 가지고 어젯밤에 온다고 했는데, 밤새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 그의 집으로 찾아가 봤는데, 아무도 없어. 짐도 없어. 도망갔나 봐.
그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것인지, 토끼 눈처럼 충혈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정기아빠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일을 포함하여 내 주변의 자잘한 일들에 막혀서, 미처 거기까지 생각해내지 못한 나의 불찰이 떠올라 가슴이 쓰렸다.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어도, 경숙은 아마 그 신 목수인가 하는 치에게 적금을 들켰을 것이고, 결국 통장과 도장을 그에게 맡겨서 찾아오게 했다가 몽땅 털린 게 분명했다. 아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가 좀 더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고 있었더라면....... .
경숙은 데워진 찌개국물에 밥을 말아 다시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아이고 이것아, 지금 그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그렇게 소리를 치고 싶도록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속이 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허허허 기막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먹어야 사는 것인가. 하기야 사람 죽은 초상집에서도 산 사람들은 안 굶을 궁리부터 한다던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인지, 또 다시 세찬 빗줄기가 투둑 투둑 창문을 두드리면서, 벌써 몇 바퀴를 돌았는지 알 수도 없이 스피커를 통해 다시 쏟아져 나오는 케니 G의 소프라노 색소폰소리를 훼방 놓기 시작했다. 빗물이 흐르는 창밖으로 정기 아빠, 아니 김윤식의 얼굴이 달처럼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尾
2007.10.12 <연기문학 13집 제출>
첫댓글 글쟁이에 대한 소문으론 한참이지만, 얼마전 술의 흥겨움으로 왕왕거리던 바로 그 작품이라는 반가움일세, 잘 펼쳐놓은 심심치 않은 먹걸이하며 지루하지않게 읽히는수작이라는 생각일세 사람살이란게 따지고보면 순전한 나와는 다른 영역같지만 살펴보면 바로 누구든 갖는 속내라는 점이지, 어떤 사태든 그 주변을 구성하는 요소라면 전부가 주역이고 누구든 가볍게 놓여날 수 없는 중심일거라는.., 은근한 압박이 즐거움이지 않겠냐는 뭐 이런 느낌으로 서투른 흔적을 남긴다네.. 아~~ 못올라갈 나무가 저리 높아보이고 그만큼 부럽다는 발견이다.
오랜만에 한 권 읽었습니다. 솔직히 소설을 잘 읽지 않습니다. 더구나 서점에 가서 소설 책 사 본 적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합니다.ㅎㅎ 근데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끝나버리네요. 소설을 워낙 읽지 않은 탓인지 몰라도 조금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쨋든 덕분에 소설 읽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