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의 기수' 록 밴드 자우림 ‘흔들리는 젊은이의 초상을 노래한다’ 홍익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힘겨운 연습과정을 거쳐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록 밴드 자우림. 세상과 음악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데 앞장선 이들의 움직임은 「젊은 문화」의 현주소다. 정현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 자우림(紫雨林). 존재하지 않는 공간. 규정할 수 없는 공간. 사람들은 이 이름에서 저마다 다른 형태의 숲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보컬 김윤아(金倫我·24)가 밴드 이름을 지을 때 의도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자우림 밴드는 모던록 록발라드 펑크록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적 취향을 갖고 있어 규정하기 힘든 음악,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 음악을 지향한다. 자우림 밴드는 97년 여름 영화 『꽃을 든 남자』의 사운드트랙에 삽입된 『헤이 헤이 헤이』로 언더그라운드에서 「오버」 무대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구성원은 노래를 맡은 김윤아, 밴드 리드이자 기타리스트인 이선규(李宣奎·27), 베이스 김진만(金鎭滿·26), 드럼 구태훈(具泰勳·26). 11월말 극심한 불황 속에서 나온 1집 음반 『자줏빛 심장(Purple Heart)』이 2주 만에 10만 장이 팔리는 기록을 세웠고, 3월 중순 현재까지 15만 장이 팔리면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서울 대학로 라이브극장에서 열린 지난 11월27일∼12월1일 공연은 매회 매진의 연속이었다. 올해 들어 1월27일부터 2월1일까지 서울 라이브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이란 제목을 달고 4월까지 지방공연을 포함한 장기공연에 돌입했다. 이미 대전 천안 인천 마산 등의 공연은 마무리한 상태. 1집 음반엔 모두 12곡을 담았다. 테크노와 모던록풍의 『밀랍천사』, 절제된 슬픔이 느껴지는 록발라드 『파애』, 브라스 세션이 인상적인 『마론인형』, 재즈풍의 『욕』 등 장르가 무척 다양하다. 이 가운데 2곡은 이선규가 썼고 나머지는 모두 김윤아가 직접 노랫말과 멜로디를 지었다. 그녀의 노랫말은 여성의 위치에서 본 세상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면에서 여성주의 경향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어, 이것 때문에 진보적 여성음악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차가운 너는 나만의 천사/ 나만의 것 숨쉬지 않아도 좋아…」라는 『밀랍천사』는 현대인의 사랑의 소유욕을 비꼬고 있다. 「사람들은 너를 몰라 안경 너머 진실을 봐」라는 『애인발견』은 자신감 넘치는 여성의 입장이 투영된 경쾌한 곡이다. 『일탈』의 노랫말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뭐 화끈한 일, 신나는 일 없을까/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안에서 스트립쇼를 야이야이야이야이야…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선보기 하루 전에 홀딱 삭발을/ 비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일탈』과 『욕』 등이 몇몇 방송사로부터 표현이 지나치다는 이유로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자우림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했다. 노랫말을 바꿔서 다시 녹음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방송에 못 나간다고 그 곡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신도림 역안에서 스트립쇼를…」 같은 가사를 듣고 아마도 직접 그런 일을 벌이는 이는 없을 거예요. 자신의 사고 판단 체계가 서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르지만요. 혹시 방송심의를 결정하는 이들이 자신들 외에는 가치판단 체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그것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김윤아)
산울림 카피 밴드 CCR이 전신 재머스 블루데빌 등 홍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연주하면서 탄탄한 실력을 쌓아온 자우림은 『박싱 헬레나』 등 30여 곡의 자작곡을 담은 데모테이프를 3집까지 냈다. 자우림의 전신은 95년 가을 꾸려진 CCR(초코 크림 롤즈) 밴드. 퍼스트 기타에 이선규, 베이스 기타에 김진만, 지금은 팀을 떠난 드럼주자 한 명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친구를 통해서 술자리에서 만나 「산울림 음악 같은 음악을 해보자」는 데 서로 동의했다. 이들에게 산울림은 하나의 전설이었다. 산울림 음악만 레퍼토리로 준비해서 클럽이나 행사 등에 참가해 공연을 펼쳤다. 그러다 96년 여름부터 라이브 클럽 블루데빌에서 매주 정기공연을 했다. 클럽문화를 하나로 꿰어온 격월간 「팬진공」 편집장 황옥주(31)씨는 이들이 홍익대 앞 라이브 클럽 중 까다롭기로 유명한 블루데빌 오디션에 참가하던 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음, 3인조 편성이니 혹 펑크밴드가 아닐까? 그렇다면 드럭으로 가야 할 것을, 츳츳. 그런데 웬걸, 「야~. 비온다. 비 맞자~」는 난데없는 외침으로 말문을 연 CCR은 알고 보니 산울림 카피 밴드였다. 기타와 보컬을 맡은 이선규의 육성이 고음에서 갈라져 「삑사리」도 많이 났다. 연주력은 많은 발전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었다. 아직 라이브 경험이 없어 무대 매너도 그저그랬다. 그러나 그런 거 다 괜찮게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밴드였다. 이후 그들은 매주 목요일이면 블루데빌에 나타났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몇 년 후면 진짜 근사한 밴드로 성장할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96년 11월 새 보컬을 찾던 중 김진만은 PC통신 나우누리 음악 발표회(신촌 벗 라이브극장)에서 김윤아를 발견한다. 당시 김윤아는 10여 개의 밴드를 거친 뒤 새 프로젝트 밴드에 보컬로 참가했던 것이다. 공연 뒤풀이에서 CCR에 참가해달라고 권유받은 김윤아는 솔로 준비중이라는 이유로 제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2주 뒤 김윤아는 다시 CCR로부터 『클럽 공연만이라도 같이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김윤아는 밴드에 오랫동안 맛들여 있었던데다 밴드의 일원으로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생각에 밴드 결성에 동의했고, CCR은 「미운오리」란 이름으로 탈바꿈했다. 『10여 개 밴드를 거쳤지만 「미운오리」 구성원들의 면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음악적 견해도 잘 맞았고요. 그래서 과감히 솔로를 포기하고 이 팀과 함께하기로 했죠』(김윤아) 미운 오리라는 이름으로 97년 3월 처음 무대에 선 이들은 그해 여름 블루데빌이 문을 닫을 때까지 1주일에 하루씩 공연을 계속했다. 그러다 우연히 술 한잔하러 클럽에 들른 음반·영화 기획자의 눈에 띄어 「땅위」(오버그라운드)로 등장하면서 자우림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윤아, 시너드 오코너 같은 로커? 밴드란 넓게는 요즘 악단으로 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는 20∼30명 정도로 구성돼 계절과 환경에 따라 이동하면서 수렵이나 채취를 통해 생존했던 원시사회의 조직형태를 가리키는 인류학 개념이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 등은 원시사회의 밴드는 구성원 가운데 한 개인 혹은 소수의 분파에 권력이 집중되고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는 특수한 메커니즘을 지닌 철저한 평등사회였다고 한다. 또 현대적인 의미에서 집단(그룹)이 각자 독립적인 개인들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밴드는 개인으로 분해될 수 없는 그 자체로 하나의 통일적인 단위다. 홍대 주변 악단들이 그룹이라 하지 않고 밴드로 통칭하는 것을 이런 측면에서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밴드로서의 자우림을 알기 위해선 구성원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성신여대 심리학과 휴학생인 김윤아는 1남1녀 중 장녀. 동생 김윤일은 최근 O.K. 스쿨이라는 댄스가수로 데뷔했다. 그녀의 별명은 악당, 마녀, 짱구. 좋아하는 음악인은 시너드 오코너, 마돈나, 펄 잼,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앨리스 인 체인, 핑크 플로이드. 특기는 만화를 포함한 그림 그리기, 요리, 혼자 놀기. 어려서 클래식 외에 다른 음악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사업가인 아버지가 대중음악은 싸구려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클래식 쪽은 바이엘 상하권을 연마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피아노를 좋아해 혼자 악보를 구해서 익히곤 하던 것이 쌓여 밴드의 키보드 담당까지 하게 됐다. 중학교 때 팝가수 빌리 조엘을 알게 돼 팝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스타트가 아주 좋았죠? TV도 뉴스 영화 다큐멘터리 같은 것만 보다가 새로운 세계를 알게 돼 깊이 빠졌어요. 중3 때부터 멋모르고 작곡을 시작했지요. 다른 무엇보다 작곡에 큰 재미를 붙였어요. 고교 때 연극부에서 활동했어요. 2학년 때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면서 뮤지컬 음악도 작곡하게 됐죠. 뮤지컬 가사는 구했는데 악보를 구하지 못하자, 제가 용기를 내어 작곡을 시도했던 겁니다. 청소년극 『방황하는 별들』 『다녀오겠습니다』 등 대여섯 편을 작곡했어요. 그 뮤지컬을 경험한 것은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저에게 큰 도움이 됐어요. 이후에도 4,5년 정도 뮤지컬을 썼어요』 김윤아의 밴드 생활은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고교 때 김윤아의 과외선생이었던 인디레이블 강아지문화예술의 기획자 변영삼(27)씨가 94년 자신의 풀카운트 밴드에 김윤아를 키보드와 코러스 주자로 발탁한 것. 빼어난 외모와 재능 때문에 그는 대학 1,2년 때부터 가수 데뷔나 CF 제의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더 확실하게 자신의 꿈을 펼 곳을 찾고 있었고, 그러던 중 CCR을 만난 것이다. 경원전문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한 기타의 이선규가 좋아하는 음악인은 김창완, 존 레넌, 지미 헨드릭스. 중학교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피아노 실력도 만만찮다. 초등학교 때 이미 록 음악에 빠져 좋은 음악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는 그의 별명은 어린 왕자. 고교 시절 신중현씨의 막내아들 신석철(드러머)과 친해져 밴드를 처음 결성했다.
「열린 마음, 열린 음악」 공무원인 아버지의 반대로 그는 「비밀리에」 음악을 해왔다. 94년 겨울 김진만과 만나면서 CCR 밴드를 꾸렸다. 김윤아를 만나기 전까지 이선규는 고입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강의가 끝나면 김진만과 만나 연습하거나 도서관에 가서 곡을 짓기도 했다. 그러다 신림동의 한 옥탑방을 마련하면서 연습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됐다. 이선규와 김진만의 CCR 밴드가 김창완이 이끄는 록밴드 산울림의 카피 밴드라는 사실은 당시 대부분 외국 밴드를 추종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인연으로 자우림은 김창완과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김창완은 자우림의 공연 마지막날에 예외없이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고, 어떤 날은 뒤풀이 술값까지 계산하고 갈 정도다. 서울대 인류학과를 나온 베이스의 김진만은 잠을 많이 잔다고 해서 잠만이로 불린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인은 김현식, R.E.M.,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에로 스미스. 중학교 때 이선희의 『제이에게』를 좋아했고, 팝 그룹 듀란듀란을 좋아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의 밴드 연주에 반해 고교에 입학하면서 기타를 구입했다. 고교 동창들과 연합동아리 뮤지콤(Musicom)에서 활동했고, 대학가요제에 나갔다가 떨어진 경력이 있다. 인류학 공부한 것과 음악의 연관성에 대해 묻자 『인류학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걸 깨달았다』면서 『음악이나 생활에서 열린 마음으로 사는 법을 배운 셈이니 음악과 인류학이 관련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고 말했다. 『우리 팀의 단점을 구성원 스스로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진만이는 한발짝 물러서서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팀이 어떤 결단을 내릴 때도 그의 통찰이 톡톡히 한몫 하지요. 2,3일 매달려 노래를 반복해서 녹음하다 보면 어떤 것이 더 좋은지 판단하기 어려운데, 그럴 때 진만이는 팬의 입장에서 노래를 들으려고 해요』(이선규) 드럼주자 구태훈은 일명 구부장으로 통한다. 구성원 가운데 그나마 낯을 덜 가리고, 팀의 분위기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계원예전 공간디자인과를 졸업한 그는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다.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에 갔다가 미술 선생이 그만두는 바람에 피아노를 배웠다. 교회에서 발견한 드럼셋이 그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교회 밴드에서 드럼을 맡으면서 가스펠 음악을 깊이 알게 됐다. 그는 가스펠 음악처럼 격정적인 음악을 지향한다. 고3 때 친구들과 헤비메탈에 빠져서 충돌2소극장에서 학생들 대상으로 공연을 한 적이 있고, 93년 방위 시절 김윤아를 만나 잠깐 밴드에서 같이 활동했다. 96년 재머스 라이브 클럽에 처음 들러 문화적 충격을 받은 그는 클럽의 하우스 밴드 드럼주자로 들어갔다. 1주일에 6일 공연했고, 다른 사람들과 잼 세션을 하거나 손님들을 대상으로 「오브리」(반주) 주자로 나서기도 했다. 졸업 뒤 무대 이벤트 기획사인 연하나로기획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밤에는 재머스에서 계속 연주했다. 이선규 김윤아 김진만이 우연히 재머스에 들렀고, 구면인 김윤아의 소개로 구태훈은 다른 두 명과 인사를 하게 됐다. 즉석에서 한데 어우러지는 잼 세션을 하면서 크랜베리스의 『좀비』, 너바나의 『하트 모양의 상자』 등을 연주했다. 이들은 서로의 연주에 만족했다. 자우림의 전신인 미운오리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음악이란 건 좋아서 하다 보면 미련이 자꾸 남아요. 직장생활과 밴드생활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버겁더군요. 「꽃을 든 남자」 녹음하면서, 에이 모르겠다, 하고 싶은 것이나 실컷 하자고 생각하고 사표를 냈어요』(구태훈) 『사실은 그때 저희들이 태훈 오빠에게 사표 내라고 자꾸 부추겼죠. 안정이 보장되지 않은 길이지만 그만큼 우리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으므로 그에게 용기를 주었던 거죠』(김윤아)
도식적인 음악은 거부한다 3월1일 오후 자우림은 대학로 라이브 극장에서 클론의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 크랜베리스의 『왈칭백』과 『헤이 헤이 헤이』를 불렀다. 깔끔한 노래와 연주솜씨가 돋보였다. 무대에서 내려온 자우림 구성원들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같은 건물의 난장 커뮤니케이션즈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자우림이 지향하는 음악을 규정한다면. 『그때 그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것이 지향점이에요. 지금은 그 어느 것도 규정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는 가능하리라고 봅니다』(이선규) ―한 인터뷰에서 『록은 자유를 의미하지만 우리는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말했던데요. 『아마 그게, 무엇을 규정짓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그렇게 와전된 듯한데요. 특별히 우리는 음악이 심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개 록이라면 어떤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고정관념을 갖고 있지 않을 뿐이지 때로는 메시지 있는 음악을 할 수도 있는 거죠』(이선규) 『댄스음악도 좋은 음악 많잖아요』(구태훈) 『저희 1집음반에 보면 모던 록, 헤비메탈 컨트리 블루스 로큰롤 등 다양해요. 그것이 자우림의 음악이지요. 록음악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헤드뱅(Head-banging), 남성적인 사운드, 날카로운 리프(반복악절) 등을 상상하기 쉬운데 그게 다는 아니잖아요. 자우림은 다양한 음악을 통해 록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김윤아) ―『헤이 헤이 헤이』 『밀랍천사』 등은 방송에도 많이 나오고 대중들에게 소프트록, 민트록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규정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요. 『듣는 이가 소프트록이라고 하면 그런 것이죠. 다만 우리는 규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2년 전에 록에 대해 신문 잡지 등에서 깊이 있게 다루는 열풍이 몰아쳤던 적이 있어요.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문제는 록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마치 하나의 학문처럼 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실체는 없고 비평만 있었던 상황이었던 거죠. 그래서 금방 그 열풍은 사그라졌던 거죠』(김진만) 『문화에 대해서 왜 마음을 닫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사회는 표 만드는 것을 너무 좋아해요. 모든 것을 그 표 안에 집어넣으려 해요. 자기 중심으로 모든 걸 생각하고. 뭔가 처음부터 상당히 잘못돼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요』(김윤아) 『가게 간판을 봐요. 부동산이라고 단출하게 적힌 간판이나,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한 술집 간판이나 제각기 쓰임이 있는 겁니다.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다양성은 곧 질 높은 음악의 뿌리가 아닌가요? 어쨌든 자우림의 다양한 음악성이 국내 음악의 발전에 보탬이 되면 좋겠어요』(구태훈) ―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록의 무게 중심이 저항에서 개인주의로, 이즘에서 음악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가벼운 록을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이는 자우림의 음악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아닐까요. 『록이 저항정신을 상징하던 때는 시대적 이슈가 있었어요. 지금 당장 세계가 전란에 휩싸여 있거나 정치적 변혁기에 있다면 록뿐만 아니라 어떤 음악이건 시대적 정신을 담겠죠. 그러나 이슈가 없는 시대에 저항을 노래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봐요. 음악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작업이므로 록이 개인적이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저항 자체도 자기 의견이니까 개인적인 것 아닌가요?』(김윤아) 『록이 저항을 부르짖을 때도 개인주의적인 록음악을 하던 이들이 있었죠. 그것이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에 묻혀 있었던 거죠』(이선규) ―구성원 각각의 음악적 취향은 일치하나요. 『자우림 구성원 간에 음악적으로 잘 맞는다는 것은 어느 하나의 부분만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대개 록 하는 이들이 음악적으로 편향되기 쉬운데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록이든 펑크록이든 소프트록이든 발라드든 다 소화할 수 있어요』(이선규) 『팀을 꾸려나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연주인들끼리 만나는 것보다 구성원간 결속력이에요. 그동안 저는 말도 안되는 사소한 것 때문에 팀이 해체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거든요. 음악적인 면 못지않게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우리 밴드는 조화롭습니다』(김윤아)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연예인들」 ―라이브 클럽 무대와 기성 무대의 차이점이라면. 『음악적인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어요. 무대 시스템 등 음악 외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어요. 클럽 무대에서는 우리 스스로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직접 기계를 다뤘는데, 방송 무대의 경우 우리가 낸 소리가 편집과정을 통해 한번 걸러지니까 우리가 바라던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봐요.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데뷔한 뒤 크게 달라진 것은 클럽에서 연주할 때는 네 명 모두가 주인공이었는데, TV에는 마치 자우림은 곧 김윤아를 지칭하는 것처럼 나와서 낯설었어요. 그러나 그런 변화에도 이젠 익숙해졌어요』(이선규) ―기존 주류 대중음악과 자우림 음악의 차이점은. 『대부분의 가수들은 가수라기보다 연예인화돼 있어요. 가수들이 그렇게 되지 않으려 해도 기획사가 돈을 벌기 위해 가수를 그렇게 변질시키는 거죠. 어떤 기획사는 가수를 노래솜씨가 아닌 얼굴로 뽑는 경우도 있어요. 얼마 전 어느 기획사의 신인가수 모집공고에 「노래와 춤, 얼굴 중 어느 한 가지만 자신있는 이도 뽑습니다」는 문구를 보고 놀란 적이 있어요. 자의건 타의건 이젠 음악이 공장의 틀에서 「찍혀나오는」 상황이에요. 그러나 자우림은 자우림이 좋아하는 음악을 솔직하게 합니다. 그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또 자우림은 기획사가 급조한 밴드가 아니어서 언더그라운드에서 하던 음악을 그대로 「오버」로 가져왔다는 점도 크게 다른 점이죠. 대개는 데뷔할 때 자기의 곡을 그대로 녹음하기는 어렵거든요』(김윤아) ―홍대 근처 클럽에서 연주하는 라이브 밴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요. 『그곳엔 펑크음악을 지향하는 밴드가 많긴 하지만 전통록 등 다양한 장르 취향의 밴드가 실재해요. 그러나 펑크가 아무리 아마추어리즘을 담고 있다 해도 숙련되지 않으면 제대로 펑크음악을 할 수 없어요. 8년 동안 드럼을 친 저도 어렵게 느끼거든요. 발 페달 하나를 밟아도 듣는 이의 가슴에 가서 팍 박히도록 해야 해요. 그런 맛을 낼 수 있어야 펑크 한다고 할 수 있어요. 실력에 편차는 있지만 정기적으로 무대에 서는 이들은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지요』(구태훈) 『밴드 중에 진짜와 가짜가 있지만 통틀어 얘기하자면 그쪽은 거칠 것 없고 건강한 것이 좋아요』(김윤아) 『지금까지 클럽밴드들은 다양하고 건강했어요. 앞으로도 그 정신이 지속되길 바라요』(이선규) ―팀에 위기는 없었나요? 『영화음악 하기 전에 윤아에게 개인적으로 많은 제의가 왔는데, 윤아가 떠났다면 큰 위기를 맞이했겠죠』(이선규) 『제 심지가 굳거든요. 하하하』(김윤아) 『음악적인 문제로 다투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김진만) 『친형제들도 다투는 경우가 있잖아요. 싸우면 그렇게 싸워요』(구태훈)
대중음악의 새 영역 개척할 터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컴퓨터를 십분 활용, 더 세련된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베이스 김진만은 신반포 중학교 때 애플 컴퓨터로 「운석 돌파」라는 게임기를 개발했을 정도로 「컴도사」다. 기타의 이선규는 군에서 전산병으로 근무하며 컴퓨터를 익혀왔다. 1월7일 김윤아는 작사와 작·편곡 작업을 위해 컴퓨터 음악프로그램인 MIDI가 내장된 펜티엄급 노트북을 구입했다. 이 속에는 그녀가 작곡한 70여 곡이 들어 있다. 2년 전 나우누리 록 동호인 모임 일원이었던 그녀의 타자실력은 1분에 5백타. 『곡을 쓸 때 기타나 피아노로 작업하는 게 원칙이에요. 처음부터 MIDI를 쓰면 덜 자유로운 음악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컴퓨터는 결과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올 것인지 시뮬레이션할 때 이용하면 좋아요』(이윤아) ―앞으로의 음악적 포부는. 『자우림의 평판이 더 나아지길 바라요. 드럼주자에겐 「무데뽀」 정신이 필요한 듯해요. 그런 첫 마음으로 계속 음악을 하는 거죠』(구태훈) 『레코드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링에 관심이 많아요. 제가 만드는 음반 중 좋은 음반이 많이 나오길 바라요』(김진만) 『좀더 좋은 노래를 만들고, 노래를 더 잘 하길 바라요.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요. 언제나 깨어있는 사람, 어떤 종류든 편견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생 최대의 목표는 훌륭한 엄마가 되는 것이에요. 한 마디로 멋진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김윤아) 『부모님 뜻과 달리 음악하겠노라고 해서 부모님 속을 많이 상하게 했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음악을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 때문에 억울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만큼 더 성숙한 음악을 들려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자우림의 다른 멤버들 모두 「잔머리」로 음악하지 않고, 「내공」을 많이 쌓기를 바라요. 음악 역사상 큰 획을 긋겠다는 욕심도 있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이선규) 자우림은 3월 중순 현재 2집을 준비중이다. 1집은 김윤아의 곡 위주로 선곡했지만 2집에선 다른 멤버의 곡들을 포함, 더 다양하게 채울 것이라고 한다. 독립음반 강아지문화예술의 변영삼씨는 『자우림은 이미 상당한 곡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한국 음악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로운 자우림 밴드의 앞날이 기대된다.
▣ 언더문화의 메카,홍익대 주변 라이브클럽 ▣ 3월7일 밤 8시께 한때 자우림이 무대에 섰던 서울 홍익대 근처 재머스(Jammers) 라이브 클럽. 봄 밤의 차가운 기운에도 아랑곳않고 지하에 있는 이곳 클럽은 문을 활짝 열어제쳐 놓았다. 토요일 밤의 열기가 무척 뜨겁다. 내부의 시끌벅적한 음악소리가 도로변까지 흘러나왔다. 언더그라운드 문화권에서는 꽤 알려진 「고스락」 록밴드의 연주실력이 만만찮다. 1백여 명의 관객은 30여 평의 작은 공간 안에서 일제히 머리를 앞뒤로 흔드는 「헤드뱅」과 모싱(Moshing) 동작을 하며 열광적으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이는 병째 맥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기성 극장 무대와 달리 클럽에서는 그것이 용납된다. 5천원의 입장료 속에 맥주 혹은 음료수 한 병이 제공된다. 추가로 술을 더 마실 수는 없다. 관객은 대부분 20대, 개중에는 30대 중반의 회사원, 꽃핀을 꽂고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고교생도 보였다. 나이와 직업, 성의 벽이 무너지는 현장이다. 그렇다고 해도 30, 40대가 찾을 만한 라이브클럽은 프리버드 정도. 평소에도 공연은 월요일을 빼고 대부분 이어지지만 토, 일요일이면 홍익대 근처 드럭 롤링스톤스 스팽글 등 10여 개의 라이브 클럽이 차고 넘친다. 클럽마다 1백여 명씩 잡아도 1천 명 이상이다. 이들이 같은 시각 홍익대 신촌 주변 라이브클럽에서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92년 락월드가 등장하면서 하나둘씩 늘어난 라이브 클럽은 이제 하나의 굳건한 문화 터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 와서 압구정동 건국대 앞, 신림동, 부산 광주 대전 대구 등지에도 라이브 클럽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홍익대 신촌 일대를 거점으로 움직이는 라이브 밴드만 해도 약 2백여 개가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크라잉너트 노브레인 허벅지 고스락 코코어 프리다칼로 「불타는 화양리 쇼바를 올려라」 모레인 정키 등 오버그라운드의 인기 스타 못지않게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밴드들도 상당수 있다. 「땅밑」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들 밴드는 그 쳇바퀴 안에서만 맴도는 게 아니라 「땅위」 기성무대로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수많은 라이브 밴드와 라이브 클럽이 주축이 돼 일궈나가고 있는 새 문화가 그 안에서 단지 소비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바깥의 기성무대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어부밴드 삐삐밴드 도마뱀밴드 황신혜밴드 등은 지난 97년 가을 서울 정동예술문화회관에서 「도시락특공대」란 제목으로 음반발매 기념공연을 가졌다. 같은해 12월 27,28일에는 정동문화체육관에서 「정축년 독립만세사건」이란 제목으로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은 독립음반사 인디레이블, 개방적인 클럽연대(개클련), 팬진공 등이 공동주최해 1천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크라잉너트 밴드의 경우 96년 10월 낸 『우리 민족(Our Nation)』 1집이 1만 장이나 팔렸고, 최근 노브레인과 위퍼가 펴낸 『우리 민족(Our Nation)』 2집은 큰 호응을 얻으며 Kmtv 가요순위 30위권에 진입했다. 이들 밴드는 모두 독립 음반을 통해 유통의 거품을 빼고, 별다른 홍보활동 없이 이런 성과를 얻은 것이어서 특히 주목된다. 특히 가장 넓게 주목을 받고 있는 밴드가 자우림이다. 자우림은 땅밑 밴드들의 가능성을 실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밴드라고 할 수 있다. 땅밑에 있을 때부터 수많은 기성 기획자들로부터 제의를 받았던 자우림은 단 한 가지 뚜렷한 이유 때문에 그런 제의를 거절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기획자들은 상업적인 타산을 계산한 뒤 밴드 자체의 음악적 취향을 무시하고 돈이 될 수 있을 만한 「무기」를 내세운다. 밴드가 하고 싶어하는 음악은 성공한 뒤에 하도록 도와주겠다는 식이다. 자우림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돈은 필요없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만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다 우연히 클럽에 들른 기획자의 눈에 띄어 땅위로 올라온 것이다. 메이저 기획사가 제작해서 TV 라디오가 들려주는 음악만이 생산된 음악의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수용자는 대부분 이 일방적 배급과 수용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음악세계에 빠져들 여유와 상상력이 부족했던 듯하다. 물론 메이저 기획사가 제작한 음반 가운데서도 빛을 보지 못하는 음반이 90%가 넘는다. 95년 기준으로 1천장의 신보 가운데 손익분기점(약 4만장)을 넘기는 음반은 50장 정도였다. 많은 젊은이들은 잊혀져 가는 음반을 찾아나서는 것보다 라이브 클럽을 거점으로 하는 언더그라운드 음악 쪽으로 몰린 듯하다. 2백여 개의 라이브 밴드는 그 상징적인 결과물인 것이다. 음악적인 면에서는 펑크가 널리 보급되면서 언더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펑크란 영국에서 싹 튼 장르로 엘리트적이고 부유한 의식에 사로잡힌 록에 대한 반기에서 온 것이다. 펑크록 주창자들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멋대로 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정신은 영국 젊은이들을 사로잡았고, 영국 왕실을 조롱한 섹스 피스톨스의 노래 『신은 여왕을 구한다(God Save the Queen)』는 닷새 만에 15만 장이 팔렸다. 영국 사회는 긴장했고, 의회까지 나서서 펑크 죽이기에 골몰했다. 그 결과 80년대 지하로 숨어들었다가 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이란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록이 주류음악이었던 적이 없었고, 항상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펑크의 등장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기성세대에게 억눌려 있었던 10대, 20대는 그에 대한 반감으로 랩 힙합 등 기성세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르들을 펑크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 꼴이 됐다. 라이브 클럽의 상당수 밴드가 펑크 지향적이라는 면은 바로 소외층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통해 기득권층을 저주하고 분노를 폭발시키고 싶어한다는 점을 말한다.
라이브 클럽 활성화의 걸림돌 국내 라이브 클럽의 현주소는 열악하다. 라이브 클럽은 일반 음식점으로 등록돼 있어 두 명 이상이 연주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사실상 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연주하려면 식품위생법상 유흥주점으로 허가받아야 하는데, 룸살롱 나이트클럽 같은 유흥주점은 세금이 만만찮아 현재의 라이브클럽 수익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경찰의 단속에는 아무런 대처방안이 없는 실정이다. 기껏 관객들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 정도다. 클럽주인들은 「개클련」를 만들어 클럽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은 없다. 이들은 법규상 라이브 클럽 개념이 도입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2년간 재머스 클럽을 운영해온 주인 김영도(26)씨. 록 마니아인 그는 별반 이익도 남지 않는 클럽을 운영해온 것도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클럽이 많아져 밴드주자들이 원하는 음악을 하면서 클럽 무대에 서고, 그것으로 생계가 유지되는 체계가 잡히길 바랐기 때문이다. 라이브 밴드 구성원 중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당수가 낮에는 학원강사나 주차 아르바이트, 식당 배달원(오봉)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아직까지는 먹고 사는 문제와 연주인의 삶이 이처럼 별개일 수밖에 없다. 인디레이블과 클럽의 활성화를 통해 이런 상황을 개선할 여지는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의 경우 라이브 클럽은 대중음악의 진원지 역할을 해왔다. 한 예로 영국 리버풀 출신의 유명 밴드인 비틀스 역시 클럽에서 자신들의 음악 실력을 닦았다. 1961년 독일 함부르크에 잠시 머물던 비틀스는 손님들의 술병 세례를 맞기도 하고, 생계를 잇기 위해 밤 새워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다 리버풀의 캐번 클럽에서 연주하면서 세계적 음반회사인 EMI에 발탁된 것이다. 미국 뉴욕 다운타운인 맨해튼 소호 지역의 CBGB(Country·Blue Grass·Blues) 클럽의 경우 펑크록의 탄생지이면서 수용자층이 너무나 다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이부터 60대 노인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이 클럽을 찾는다. 겉으로 너저분해 보이는 것과 달리 이런 클럽들은 주류음악에 대한 대안(얼터너티브)음악의 수원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팬진공」 편집장 황옥주씨는 『라이브 클럽 문화는 한국 대중음악의 저변이자 수원지』라면서 『지난한 연습과정을 거친 밴드들의 음악이 다양하고 유행을 타지 않을수록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통 거품 뺀 독립음반의 가능성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는 독립음반사(인디레이블)는 언더문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소다. 대표적인 음반사로 인디레이블, 강아지문화예술 등이 있다. 재머스 드럭 롤링스톤스 등 클럽들도 독자적인 레이블을 갖고 음반을 냈다. 3월 중순에는 이대 앞 하드코어 펑크 클럽 등이 함께 옴니버스 음반작업에 뛰어들었다. 이 가운데 인디레이블과 강아지문화예술은 유통을 외부 음반사에 위탁하는 클럽 레이블과 달리 직접 유통에 손을 대기 시작해 벤처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디레이블 대표 원용호(34)씨는 독일 미국 등에서 유학한 엔지니어와 손잡고 97년 11월 독립음반사를 차리면서 서울 80곳, 지방 50곳의 인디레이블 취급점을 마련해 독자적인 유통망을 뚫고 있다. 그런 유통망을 통해 허벅지 코코어 프리다칼로 등 데뷔음반과 밴드들의 인기곡을 모은 옴니버스 음반을 판매, 호응을 얻고 있다. 기성 음반사가 손익분기점을 4만 장으로 잡고 있는 반면 인디레이블은 유통상의 거품을 제거해 3천장으로 잡는다. 기성기획사는 가수에게 계약금을 지불하고 전속계약을 하게 되면 이후 음반이 손익분기점을 넘길 경우 1장당 5% 정도의 인세를 지불하는 게 상례다. 인디레이블은 밴드들이 이러한 기성 체계 밖에서 독자적 음악활동을 하면서 최소한의 생활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언더문화와 관련, 다양성과 질적인 면에서 크게 앞서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 역시 국내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가수 신중현의 카피 밴드 곱창전골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하세가와 요오헤이(27)는 『90년대 초반 일본에서 록이 대중화되면서 인디레이블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지금은 고무라 데쓰야 같은 주류 기획사에서 댄스 발라드 등으로만 밀고 나가기 때문에 인디레이블이 상당히 위축돼 있다. 한국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록이 설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고, 클럽 시스템도 한국만 못하다』고 말한다. 자우림은 4월 14,15일 유앤미 블루, 99, 신윤철, 임현정, 정경화 밴드, 이한철과 함께 지금은 문을 닫은 블루데빌 라이브 클럽을 돕기 위한 공연(라이브극장 2관)에 참가할 예정이다. 자신들의 오늘이 있게 한 뿌리인 블루데빌을 돕는 것이 곧 언더에서 어깨를 수그리고 비상을 꿈꾸는 라이브 밴드들을 돕는 것임을, 한국 대중음악이 발랄한 상상력과 다양성을 회복하는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4/nd980401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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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솔이의 아침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도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