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 녹두장군을 추모하면서 -
김 남 주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
승리없는 투쟁
어떤 불행 어떤 고통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우리는 그의 이름을
키가 작다 해서
녹두꽃이라 부르기도 하고
농민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동학농민 혁명의 수령이라 해서
동도대장, 녹두장군!
전봉준이라 부르기도 하니
보아다오, 이 사람을!
거만하게 깍아세운
그의 콧날이며 상투머리는
죽어서도 풀지 못할 원한, 원한!
압제의 하늘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죽어서도 감을 수 없는
저 부라린 눈동자, 눈동자는
90년이 지난 오늘에도
불타는 도화선이 되어
아직도 어둠을 되쏘아보며
죽음에 항거하고 있지 않는가!
탄환처럼 틀어박힌
캄캄한 이마의 벌판, 벌판!
저 커다란 혹부리는
한 시대의 아픔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시대의 상처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시대의 절망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보아다오 보아다오
이 사람을 보아다오
이 민중의 지도자는
학정과 가렴주구에 시달린
만백성을 일으켜 세워
눈을 뜨게 하고
손과 손을 맞잡게 하여
싸움의 주먹이 되게 하고
싸움의 팔이 되게 하고
소리와 소리를 합하게 하여
대지의 힘찬 목소리가 되게 하였다
그들 만백성들은
이 위대한 혁명가의 가르침으로
미처 알지 못한 사람들과
형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 세상을 겨냥한 동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자유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적과 동지를 분간하여
농민의 민중의 해방을 위하여
전투에 가담할 줄 알게 되었으니
보아다오 보아다오
강자의 발밑에 무릎 꿇고
자유를 위해 구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부호의 담벼락을 서성거리며
밥을 위해 토지를 위해
걸식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판관의 턱을 쳐다보며
정의를 위해 기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성단의 탁자 앞에 무릎 꿇고
선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돈뭉치로 선을 사지도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이빨 빠진 사자가 되어
허공에 허공에 허공에 대고
허망하게 으르렁 거리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
땅과 밥과 자유의 정복자로서
승리를 위해 노래하고 싸웠다
대나무로 창을 깍아
죽창이라 불렀고 무기라 불렀고
괭이와 죽앙과 돌맹이로 단결하여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악독한 부호의 다리를 꺽어
밥과 땅과 자유를 쟁취했다
보아다오, 보아다오
새로 태어난 이 민중을!
이 민중의 강인한 투지를!
굶주림과 추위와
투쟁 속에서 더욱 튼튼하게 단결된
이 용감한 조직을 보아다오
고통과 고통과의 결합!
인간의 성채(城砦)
죽음으로서만이 끝장이 나는
이 끊임없는 싸움, 싸움을 보아다오!
밥과 땅과 자유!
정의의 신성한 깃발을 치켜들고
유혈의 투쟁에 가담했던
저 동학농민의 횃불을 보아다오!
압제와 수탈의 가면을 쓴
양반과 부호들의 강탈에 항쟁했던
저 1894년 갑오(甲午)!
농민혁명의 함성을 들어다오!
그리고 다시
우리 모두 이 사람을 보아다오!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고
영구히 살아계실 이 사람을!
녹두 전봉준 장군을 보아다오!
- 1977년 11월 21일 한국 가톨릭 농민회 농민대회장 녹두장군 추모제에서 한국 농민을 대표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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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수록된 시집 <농부의 밤>은 ‘기독생활동지회’라는 단체 명의로 간행되었으나 일체의 서지 정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일종의 지하 유인물 형태입니다. 아마도 제5공화국의 폭압통치가 절정에 이르렀던 1985년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85년경 광화문에 있던 ‘논장서적’에서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남주(金南柱, 1946년10월 16일~1994년2월 13일)는 대한민국의 시인, 재야운동가이다.
전라남도해남 태생으로 전남대학교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3선 개헌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1973년 국가보안법 혐의로 복역하고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이후〈진혼가〉등 7편의 시를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활동 이외에도 전남 광주지역에서 활발한 반독재 재야운동을 주도하였다. 1978년 재야활동 동지인 박광숙과 결혼하였다. 1980년 남민전 사건으로 다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84년 첫 시집 《진혼가》를 출판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석방되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활발한 문학 활동과 재야활동을 병행하였다. 창작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파블로 네루다 등의 외국의 진보적인 문학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하였다. 수감후유증과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군이 있다.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위키백과>
첫댓글 김남주,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이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참 귀중한 자료를 구하셨습니다.
오래전 투병중이시던 김남주선생님의 육성 시낭독을 들었습니다.... 그 분의 음성은 병 중에도 칼날 같으셨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김남주님의 전사1,2를 옮겨적어 갖고 다니던 때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