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7일 로마에서. 로마 스카우트 센터라고 해서 그냥 그럴듯한 이름인 줄 알았더니 진짜 스카우트를 위한 숙박시설인가보다. 여기저기 스카우트 활동들이 그림으로 붙여져 있다. 내가 스카우트 교관 출신인줄 알았나?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나도 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 40분에 간단한 조식을 했다. 다운 증후군의 젊은이가 서빙을 한다. 장애인 일자리 창출측면이 아니라 너무 친절한 젊은이였다. 긍정적이다. 8시 30분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온 가족이 로마 시내로 나섰다. 오늘 바스토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하는 Rome Tiburtina Bus station에 먼저 들렀다. 200미터 거리에 Rome Tiburtina 기차역이 있다. 버스는 12시 45분. 시간은 충분하군.
아내와 나는 아기를 데리고 Tiburtina 역에서 지하철 1.5 유로 1회권을 두 장 사서 테르미니 역으로 갔다. 4정거장 거리다. 테르미니 역 근방에 있는 한국식품점에 가서 라면 등 몇 가지 식품을 더 사기 위해서다. 9시 20분경 지하철을 타고 한국 식품을 몇 가지 사고 다시 Rome Tiburtina Bus station로 돌아오니, 무려 11시 40분. 총 지하철 왕복 8정거장을 다녀오고 잠깐 식료품 몇 가지 사니 2시간 20분이 지나갔다. 이상하게 이탈리아의 시간은 헤프다. 뭐 별로 한 것도 없이 하루가 휙휙 지나간다. 이제 12시 45분 버스를 타고 바스토 산살보까지 가면 오후 4시 15분. 저녁이다. 이탈리아에서의 또 하루가 속절없이 저무는 거다.
Rome Tiburtina Bus station. 시외버스 터미널의 쓸쓸함과 쇠락의 분위기는 이탈리아나 한국이나 비슷하다. 지저분한 화장실 앞에는 우중충한 남자들이 앉아 0.7유로 사용요금도 받는다. 한국의 휴게소나 버스 터미널보다 훨씬 소규모고 지저분하다. 화려하고 멋진 로마 유적과 깨진 보도 블록사이로 쓰레기 가득한 로마의 뒷골목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버스터미널 인터넷은 되지 않았다. 뭔가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탈리아는 퇴보하고 있는가?
12시 45분 버스를 타고 바스토로 향한다. 바스토에 도착하면 선주 까를로가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가족을 마리나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내가 월요일 로마로 온 사이 까를로와 그의 아버지 로코, 전문 기술자 세르지오는 열심히 잔 고장을 수리하고 있었다. 고생 좀 했을 거다. 한국으로 출항 전 저녁식사라도 대접해야겠다. 나는 물고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바바큐와 파스타 위주로.
잠시 눈을 붙였다 뜨니 버스는 이탈리아의 중부산맥을 넘고 있다. 흰 눈에 쌓인 산맥은 알프스를 연상케 한다. 멋지다. 산맥 한가운데 묘하게 끊어진 골짜기가 있다. 이 사이로 이탈리아 남북을 관통하는 도로가 있다. 기원전부터 사람들은 이 낮은 골짜기를 지나 로마를 향했겠지. 로마사람들은 높은 산위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한다. 아마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고지대에 요새 같은 마을을 만든 것이겠지만, 옛날엔 물을 산언덕까지 어떻게 길어 올렸을까? 신비하다.
4시 30분 바스토에 도착했다. 15분 연착이지만 괜찮다. 이탈리아에서 나는 바쁠 것이 없다. 까를로에게 전화하니 어쩐지 기다리고 있는 눈치가 아니다. 뭔 일이냐고 문자하는 사이 전화가 왔다. 까를로 친구 안토니오다. 자신이 4시부터 기다리고 있단다. 헤이, 뒤를 돌아봐. 돌아보니 흰색 밴이 다가오고 운전석에서 안토니오가 손을 흔든다. 가운데 짐을 실을 수 있는 실용적인 벤이다. 가방과 아기 유모차까지 한꺼번에 싣고 마리나스베바로 출발했다.
안토니오, 까를로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지? 까를로는 아파. 어제부터 열이 있어. 내가 대신 나왔어. 아 그거 걱정이네. 많이 아픈가? 아니 내일이면 좀 괜찮아 질 거야. 그거 다행이네. 이 동네 경치는 고향 강릉과 비슷해 한국도 가운데 동서로 산맥이 지나고 있지. 아드리아해와 눈 덮인 산맥. 바스토는 내 고향 강릉과 비슷해. 강릉도 역사가 오랜 도시다. 아마 도시 크기도 바스토와 비슷할 거야. 이탈리아는 한국과 경제력이 비슷하더라. 안토니오는, 이탈리아는 지금 침체기야. 한국은 떠오르고 이탈리아는 가라앉고 있다. 란다. 그런가?
너와 까를로가 함께 라이트하우스(등대) 차터회사를 동업하는 건가? 그렇다. 경기는 좀 어떤가? 우리는 건설업이 본업이야. 차터 회사는 부업이지. 그래서 우리는 세일링도 잘 못해. 나는 세일링을 두 번밖에 안 해봤다. 아 그렇구나. 나는 머잖아 한국에 갈지도 모른다. 우리는 국제적으로 건설업을 한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도 일해. 한국도 갈 수 있지. 그때는 반드시 내게 연락해줘라. 한국에서 만나면 내가 이탈리아에서 받은 너희 친절을 보답할게. 하하 그럴게 내가 한국가면 꼭 네게 연락할게.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사이 차는 곧 마리나에 도착했다. 안토니오는 가방을 배까지 들어주겠다 고집한다. 고마운 친절이다.
오늘과 내일이 이번 겨울에 가장 추운 날이야. 안토니오가 걱정한다. 핸드폰을 보니 이번 주 내내 최저기온 3~4 도다. 이미 온 가족이 콜록 거리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추운 시즌이 맞다. 출발 전까지는 기온이 좀 오르면 좋을 텐데. 야간항해 때 고생깨나 하게 생겼다. 안토니오를 보내고 배에 들어오니 싸늘하다. 하루 비웠다고 이렇게 까지 싸늘해지다니. 사람이 있고 없고는 굉장한 차이다. 집이나 배나 사람이 있어야 낡지 않는다. 사람의 온기에 배가 살아나는 거다. 멋진 꿈을 꾸고 배를 사서 방치하는 이들은, 사람도 배도 가엾다. 사람이 없어 배는 빠르게 낡고, 배가 낡아가니 사람은 배에 더 안가는 거다. 악순환이다. 사람이 배가 자주 가서 그 고리를 끊어야 꿈도 배도 다시 살아난다. 배를 타라. 떠나라. 현실을 꿈에 들이지 말고, 꿈을 현실로 끌어들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