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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0월1일 주일오전설교
성경합독: 이사야15장, 사도행전1장
성경낭독: 사도행전1:6-14절
설교본문: 사도행전1:6-14절
설교제목: 교회가 사명이다.
예배찬송: 찬송280장(시104), 찬송89장(시31), 찬송25장(시15), 찬송357장(시134)
행1장 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주님의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성령께서 주님께로 내려오셨던 것처럼(눅3:21-22), 이제 제자들과 성도들이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강림하셔야했습니다. 성령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대속의 사역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것을 믿는 성도들의 것이 되도록 만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하고 증거 하는 복된 소식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일하셔야했습니다. 오순절이 되기 전에 제자들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 하신 이후에 열흘 동안 기도하며 기다려야했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하나님의 강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행1:4).
1. 주님의 증인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 약속대로 부활하신 것을 증거 하시고,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내용이며, 사역 내내 전하셨던 핵심요지였습니다. 부활하신 뒤에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동일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를 물을 때에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있어 너희 알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와 세례요한이 약속한 것이며, 주님께서 예고하시는 성령의 강림이 몇 날이 못 되어 임하게 될 것이니, 그 날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6-8절입니다.
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주님의 대화 중 주된 주제는 하나님나라와 성령강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하고 증거한대로 메시아의 왕국을 세우실 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음과 혼돈 속에 살아가던 이들이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답고 살아갈 수 있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주의 통치가 살아있는 실제가 될 수 있게 만드실 약속이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성취되고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에 대해 제자들은 오해했고, 이스라엘의 물리적 회복의 때를 묻는 질문은 제자들이 여전히 어둠과 무지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적나하게 보여줍니다. ‘회복할 때’라는 단어는 정치적인 영토의 회복을 통해 이루어질 물리적 이스라엘을 기대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간곡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소망이었던 로마 식민지의 멍에를 벗어나 해방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유대는 BC 2세기경에 마카비 가문을 통해 일시적으로 독립을 되찾아 흥분하게 만들었지만 다시 로마에 의해 주권을 상실했습니다. 사도들은 여전히 협소한 민족주의적인 열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국가적 독립과 회복의 때가 도래하는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서 너무도 먼 이해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답변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본질과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아주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이라는 주제로 되돌아갑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임하시면 하나님나라의 증인이 되도록 권능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은 세상권력이 가지는 권세와 다릅니다. 하나님나라는 성령하나님의 임재로 백성들의 삶에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창과 칼, 방패를 든 군인들이 물리적 전쟁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증인들을 통해서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정치적 술책과 혁명적인 투쟁과 폭력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로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주님은 하나님나라를 제자들이 이해하고 때를 묻는 정치적 나라와 일치되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해석하여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나라가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프로그램과 동일시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정치, 문화, 삶의 변화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말하는 극단 또한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은 세속적 가치관과 충돌을 일으키고, 어찌 보면 매우 급진적인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이 땅의 이해관계와 갈등합니다. 우리는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의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변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이상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에 한정된 나라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증인의 사역을 시작할 것인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확장될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은 성령의 강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성령이 강림하시기 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율법은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라는 예언처럼(사2:3), 하나님나라의 사역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복음은 예루살렘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원수처럼 여겼던 사마리아로 세상 끝까지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과 안디옥 그리고 이방의 심장, 로마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애국심과 상반된 것은 아니지만, 협소한 민족주의는 용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국제적인 공동체이며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로 드러납니다. 인종도, 국가도, 계층이나 성별에서도 교제함에 있어 차별의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때가 도래하면, 구속받은 무수한 큰 무리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함께 나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7절). 때와 기한은 앞으로 이루어질 세상의 역사와 사건에 대해 물은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언과 성취에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여러 많은 진리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바 되지 않았으며 감추어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호기심을 접어두고, 기꺼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어야 했습니다. 감춰진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헤아리거나 캐내려 애쓰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속한 것은 나타난 것이며, 이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비록 때와 기한은 제자들의 알바가 아니었지만, 성령강림으로 권능을 받고서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예루살렘 뿐 아니라 땅 끝까지 증인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부터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의 중간기는 성령께서 복음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시간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택한 백성들의 수가 채워지는 기간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이후로 일어나는 교회공동체는 세상 끝 날까지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교회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것은 땅의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사명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수행해야 하며, 가장 중요한 사명이 교회자체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는 일에 수종 드는 일은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 서는 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는 일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복음이 선포되고 성례가 시행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으로 파송되어 복음의 산 증인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2. 주님의 승천
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승천을 확실하게 확인시키셨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제자들이나 따르는 무리 모르게 조용히 사라지셨다면, 제자들조차도 어찌할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약속하신 때를 따라서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이 선명하고 분명하게 하늘로 올라가심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눈을 볼 뿐 아니라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도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게다가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그들 곁에 나타나서 주님의 승천을 증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가를 통해서 상세하게 승천의 내용을 기록한 것은 오늘날 주를 믿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록 이 세상에 인성으로는 계시지 않지만 하늘에서 살아계시며, 변함없는 능력의 통치로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된 것도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게 만들어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흰 옷 입은 두 사람이”라는 표현은 천사들의 모습 때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천사들이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들이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사람이라든지, 소돔을 방문했던 이들의 모습들에서도 사람의 형상을 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입고 있던 흰 옷은 그들이 범상치 않은 위엄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보다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부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두 천사가 제자들이 하늘을 쳐보다는 것을 마치 책망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시선에 땅에서 하늘로 들어올라 가시는 것을 쳐다보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어찌 책망을 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책망 받고 있는 이유는 단지 하늘만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자신들과 주님을 갈라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구름에 가려져 주님이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육신적인 시선으로 주님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늘에 머무르시기 위해 승천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다시 보고 싶어 곧장 되돌아오시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하늘에서 찾아서도 안 되고, 땅에서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찾고, 보좌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인성을 지닌 모습으로 이 땅에 머물러 계셔주기를 바라는 열망에 사로잡히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열망과 어리석은 열정은 도리어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우리들은 천사들이 말한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을 따라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끌어내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주님을 우리의 손으로 만져볼 수 있거나, 우리의 다른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미련하게도 아버지 우편에 계신 주님을 감각적인 체험이나 신비로운 경험으로 만나고 만지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같이 뜨거운 가슴이나 어떤 신비로운 체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주님을 눈앞에 나타나기를, 빛 가운데 계신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초자연적 방식으로 영화롭게 된 주님의 몸이 기적적으로 임재 한다고 말합니다. 천주교의 화체설이 그러나고 루터파의 공재설도 주님의 인성을 이 땅에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적과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고안해 낸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주님의 부재로 인한 모든 슬픔은 가라앉았을 것이고, 염려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습니다. 성도들에게 주님의 다시 오심은 영원한 복과 삶으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장차 오실 때에 주님은 빈손으로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오실 그 때에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에서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잘 이야기합니다.
첫째, 주님은 승천하셔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 우리를 위해 실패 없는 변호를 하십니다. 둘째, 주님께 속한 우리의 육체 또한 이미 하늘에 있다는 것이며, 우리 또한 주님이 계신 곳으로 승천할 것에 대한 보증입니다. 셋째,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더 확실한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삶의 목표를 이 땅의 것으로 삼지 않고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위의 것을 구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삶의 목표로 삼게 하십니다.
3. 기도에 힘씀
12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셨던 감람원이라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약속을 따라 떠나지 않고 보내실 성령을 기다리기 위해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에서 돌아왔는데, 이 산은 안식일에 가기에 알맞은 거리였다고 말합니다. 약 1,000m~1,200m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열 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머물던 다락방에 모였고, 부활을 목격했던 여인들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주님의 육신의 혈육인 아우들도 함께 모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건물이었기에 부유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자들’이라는 부르는 사람들은 부활을 목격했던 여인들 뿐 아니라 사도들의 아내들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은 베드로처럼 믿음의 자매 된 아내들을 데리고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고전9:5). 사도들의 아내는 그들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성령강림의 은혜는 사도들만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함께했던 여인들과 동역자가 되었던 아내들도 참여하였고, 낙심하지 않고 사역을 이어가기 위해 아내들의 헌신들이 더해졌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붙들어 모여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실 성령을 기다리는 명령 앞에서 제자들은 함께 모이는 일과 기도하는 일로 순종하였습니다. 공동체로 하나는 이루는 일이 가장 우선적인 일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데 모이는 일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주의 약속에 대한 확신의 증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알고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약속을 따라 주실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함께 약속을 구하고 주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한 주, 한 성령, 한 믿음으로 모여 교회로 서는 것, 이것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었습니다. 동일한 믿음의 유대는 혈육의 유대보다 더 강력하고 진한 것입니다. 가족이 되는 일이며 함께 실질, 곧 믿음의 공유와 함께 서로의 삶을 돌아보는 형제자매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한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뿔뿔이 흩어졌던 이전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교회공동체 전체를 위해 기도할 것을 명하셨고, 나아가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간구하듯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 몸, 한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유난히 많습니다.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우리 죄를, 우리를”(마6:9-13)로 반복됩니다. 기도는 이렇게 한 성령 안에서 한 주를 통해 한 아버지께 나아가는 한 몸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의 기도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일러주신 기도에는 어떤 구분이나 분리도 없습니다. 차별은 제거되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롬15:6).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우리 모두는 형제가 되어야 하고, 형제처럼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더욱 굳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주님의 증인으로 서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사명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