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1-11, 한나의 찬송, 23.12.13, 박홍섭 목사
본문은 한나가 사무엘을 바치러 가서 한 기도입니다. 아들이 없던 여인이 아들을 얻었으니 ‘아들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도 가능하고, 이제 막 젖뗀 아이를 성소에 바치는 상황이니 부디 이 아들을 잘 키워달라는 기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정말 젖뗀 아이를 떼어놓는 어머니가 맞나 할 정도로 한나의 기도는 아이에 대한 간구는 하나도 없고 오직 여호와에 대한 찬송과 즐거움으로 일관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지금 사랑하는 아들을 떼어놓는 상황인데 자기의 마음이 즐겁다고 말합니다. 아직 엄마 품에서 재롱을 부리는 아들을 떼어놓고 혼자 돌아와야 하는데 기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여호와로 인하여” 입니다. 여호와 때문에 즐겁고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쁘다고 합니다. 어떻게 젖뗀 아이를 떼어놓는 어머니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사무엘을 얻는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기도는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넘어 그것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2절이 이렇게 연결됩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세 번이나 ‘없다’를 반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같은 거룩한 분이 없고, 주밖에 다른 분이 없고, 하나님 같은 반석이 없다고 합니다. 없고, 없고, 없다로 반복되는 부정은 강한 긍정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에게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 사무엘도 귀합니다. 이 아들도 반석처럼 의지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게는 여호와 하나님만 반석이며 의지할 대상이며 최고라는 고백입니다.
누가 이런 고백을 기도로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절대주권을 믿는 사람입니다. 3-8이죠.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어떻습니까? 한나의 이 기도, 이 노래, 이 고백은 책상에서 연구하고 공부해서 깨우친 진리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렇게 나올 수 있는 노래가 아니고 그렇게 맺힐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오랜 고통과 설움의 시간을 보내면서 수많은 눈물과 한숨 속에서 인생을 배우고 자기를 배우고 하나님을 배워서 마침내 만들어진 신음과 같은 고백이며 호흡과 같은 노래입니다. 그 결과 한나는 자신의 소견을 하나님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사람만 할 수 있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2장의 이 기도를 1장 10-16의 기도와 비교해 보십시오. 1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는 억울한 마음과 원통한 마음이 울음과 통곡으로 속으로 삼켜졌던 격정적인 기도였습니다. 2장의 기도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입니다. 아들을 주셨다는 감사의 마음을 넘고, 아들을 바치는 어머니의 비장한 결심도 넘어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자만의 감격과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 흐릅니다. 불임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용사의 승전보와 같은 분위기의 노래입니다. 실제로 그녀의 이 기도에는 “용사의 활”이 언급되고 귀족들과 땅의 기둥이 거론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가 나오고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나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절망 속에 통곡하던 한나가 이렇게 용맹스러운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여인으로 바뀌어 있습니까? 단지 아들을 얻은 기쁨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기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기에 설명이 안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 연약하고 무력하고 절망에 빠진 여인, 눈물과 통곡으로 격정 어린 기도를 드리던 한나를 어떻게 만졌길래 이런 노래와 고백과 찬송의 사람으로 바꾸어놓았습니까? 그의 기도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생각을 바꾸었고 소견을 바꾸었습니다. 존재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왜 사무엘서의 처음이 이런 한나의 변화로 시작될까요?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앞으로 그렇게 한나를 바꾸셨듯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의 백성들의 삶 가운데 신비하게 펼쳐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녀의 바뀐 기도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묻어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얼마나 오묘하고 예측불허한지 우리의 상상이나 이 세상의 법칙이나 원리를 뛰어넘어 역사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역전을 만들어내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용사의 활은 꺾고, 넘어진 자는 힘을 주고, 풍족하던 자들을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게 하실 수 있고 주리던 자들을 주리지 않게 하실 수 있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게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한나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과 생각과 세상의 법칙에 갇혀서 그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의 원칙과 공식과 원리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만들어집니다. 한나의 믿음이 그렇게 생겼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칙과 원리도 만드셨고 그것을 운행하고 계시며 그 결과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원칙 안에 갇혀계시지 않습니다. 그 원칙과 법칙과 원리를 뛰어넘는 결과를 만드실 수 있고 그보다 큰일도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며 절대 주권자입니다. 한나는 그런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그 하나님이 자신 같은 여자에게도 찾아와 일하셨으며,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아들 사무엘에게도 그리하실 것을 믿기에 이제 막 젖뗀 이 아들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칠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로 인한 반전 속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보십시오. 1장과 2장에 브닌나와 한나로 대비되는 반전이 다음부터는 제사장 엘리의 가문과 사무엘의 대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오늘 한나가 예언적으로 기도한 10절의 ‘자기 왕’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다윗이 사울과 대조되어서 세워지고, 그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생식의 법칙, 물리의 법칙과 세상의 원리와 인간의 경험과 사고를 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로 역사 속에 오십니다.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가 구원얻는 믿음을 얻었고 지금도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안다면 한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고 그녀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사무엘서가 그렇게 진행됩니다. 사무엘서 첫 부분인 1장과 2장이 이렇게 한나의 기도와 노래로 시작되었다면,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삼하 22장의 다윗의 감사와 찬양도 거의 동일한 구성과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한나의 기도와 다윗의 기도는 몇 개의 유사한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왕으로 세우신 일과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같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서의 처음과 마지막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감싸고 있음은 그 중간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과 사건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그 속에서 사무엘이 자라고 제사장 엘리 가문을 대신하는 선지자와 사사로 세워지고 사울이 등장하고 다윗이 세움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다윗에게도 한나와 똑같은 믿음의 고백과 찬송과 노래를 만들어내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없이 자기가 왕이 되어 살아가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도 그렇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서를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우리의 소견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기도를 바꾸고 삶을 바꾸는 역사를 시행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지금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늘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일을 행하고 계시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죄와 사망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묶어서 정신없이 떠밀고 있어도 그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고 배워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만나고 일상의 여러 사건과 사람들 속에서 발견하고 한숨과 신음과 웃음과 울음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의 소유만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의 삶을 살지 말고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