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8-29, 교회 진단서 4-두아디라 교회, 23.12.3, 박홍섭 목사
저는 중학생 때 독학으로 기타라는 악기를 배웠습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기타와 가까이 지내다가 신학대학원을 가면서부터 30년을 넘게 손에 놓고 지냈습니다. 지금은 한 번씩 연주를 해보려고 해도 운지도 잘 안되고 코드 잡는 것도 영 어색해서 금방 그만두고 맙니다. 어떤 한 분야를 계속 꾸준히 잘 연마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기타를 볼 때마다 느낍니다.
인생은 연주와 같습니다. 성도의 인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허락받은 삶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이 연주가 어떠했는지 결산할 때 어떤 부분은 아예 연주되지 않았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줄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을 때입니다. 깨어있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편하게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삶은 연주하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부분은 연주한다고 했는데 도저히 듣지 못할 정도로 소리가 엉망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삶이 말씀으로 조율이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소리는 나는데 듣기가 싫습니다. 공해입니다. 어떤 때는 정말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면서 멋지게 연주되는 부분도 있겠죠. 영적 긴장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으면서 그 줄이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조율이 된 상태일 때입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깨어있으면서 모든 일을 주님의 뜻대로 하려고 노력한 그때 한 말과 행동과 모든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연주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냥 살지 않습니다. 연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잘 연주되고 있습니까? 제대로 된 소리를 내고 있습니까? 악기의 줄을 팽팽하게 당기고 각각의 음을 맞추어서 거기에 혼을 불어넣어 연주하고 있습니까?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들, 이들을 향한 주님의 진단서는 한 교회, 한 교회의 연주에 대한 평가와도 같습니다. 어떤 교회는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고, 어떤 교회는 아예 연주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불협화음을 내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연주는 어떠했습니까? 처음에는 바른 교리와 바른 행위로 아름답게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지휘자 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향한 간절함과 사모함과 가난한 마음도 빠진 체 형식적인 연주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회개하고 고치지 않으면 연주자를 바꾸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연주는 주님을 감격하게 했던 연주입니다. 그들은 환난과 궁핍과 훼방을 당하면서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정절을 버리지 않고 죽기까지 충성하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연주를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이들의 연주는 왠지 음란한 곡조와 분위기를 풍기는 연주였습니다. 곡조 내내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색채가 흘러넘치면서 듣는 사람들로 우상숭배와 행음의 죄에 빠지게 만드는 연주였습니다. 주님은 이 교회의 연주를 아름다운 연주로 바꾸시려고 이들과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두아디라 교회의 연주는 어떠합니까? 이들은 이세벨을 용납하기 전까지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사업과 행위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문법상 사업에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포함되어 있으니 이들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는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와는 달리 이들의 연주는 처음보다 나중이 좋았습니다. 섬김과 봉사와 믿음과 인내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았고 풍성했습니다. 이때까지 이들의 연주는 감동이 있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들의 연주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이세벨을 용납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두아디라라는 도시를 이해해야 합니다. 두아디라는 로마 제국에서 영향력 있는 도시가 아니었기에 황제 숭배의 압박이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여러 도시로 갈 수 있는 길목을 활용해 다양한 상업과 제조업을 발달시킨 경제도시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도시는 상인과 장인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조합형태의 길드가 유명했습니다. 양모업, 염색, 가죽, 의복, 요업 등이 이런 길드의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문제는 이 도시에서 어떤 형태의 직업을 가지려면 그 직업의 조합원이 되어야 했고, 조합원이 되려면 그 조합의 수호신을 섬기는 축제에 참여해서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함께 먹고 음란한 파티에 끼어야 했습니다. 그 조합이 주도하는 이런 음란하고 우상숭배로 가득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는 이 도시에서 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기가 힘들었습니다. 바클레이의 말처럼 조합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직업적인 자살행위와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신자들은 조합의 요구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하는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자니 따돌림을 당하고 생활이 어렵게 되고, 조합의 요구를 따르자니 신앙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들은 그 속에서도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가지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이 나타났습니다.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이세벨이란 이름을 가졌던 여자라기보다는 구약의 이세벨처럼 공동체에 굉장히 심각하고 나쁜 영향을 미쳤던 여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아합왕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끌어들여 이스라엘 전역을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물들게 한 이방 여자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이와 비슷한 여자가 나타나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주의 종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20). 그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 한 조합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라면서 교인들을 미혹했습니다. 이 여자는 기도도 많이 하고 직통 계시와 같은 종교적인 체험을 앞세워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영적 체험과 사상을 ‘깊은 것’ 혹은 ‘심오한 것’으로 주장하면서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24). 그러니 이런 문제로 갈등하던 교인들이 얼마나 솔깃했겠습니까? 그동안 가책과 고민의 쇠고랑을 차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이세벨이 그 쇠고랑을 벗기고 풀어주니 얼마나 후련했겠습니까?
이때 두아디라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탄의 깊은 것을 가르치는 이 여자를 책망하고 교회에서 몰아내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용납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본은 20절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네 아내, 이세벨”이라고 ‘네 아내’라는 말이 더해진 사본이 있습니다. 이 사본 대로라면 그녀는 두아디라 교회 핵심 지도자의 아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물리치기 쉽지 않았겠죠. 여하튼 이들은 그녀를 용납했습니다. ‘용납함이니’라는 말은 해로운 가르침에 저항하여 적극적 대응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용과 지원을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고 동조했을 때부터 두아디라 교회의 아름다운 연주가 엉망으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변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체험도 하고 뜨거워진 것 같은데 교회 밖의 일상에서는 경건이 사라지고 영적으로 죽어갔습니다. 악한 이세벨을 약한 지도자와 약한 교인들이 용납함으로 그 악함이 교회 전체에 물들어 마침내 주님이 불꽃 같은 눈과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진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영적 행음과 우상숭배에 깊이 물들게 되었습니다.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은 너희들이 우상숭배와 행음에서 돌이키고 원래의 아름다운 연주를 회복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이세벨처럼 교묘한 악인이라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그와 더불어 악에 빠져 행음했던 자들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우신 주님입니다. 아무리 무서운 영적 음행과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다시 원래의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회개할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침상에 던져버리고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겠으며 그래도 듣지 않으면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음 가운데 넘기겠다고 여러 차례 경고하십니다. 여러 차례 경고하셨다는 말은 여러 차례 기회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연주는 어떠한지요? 어떤 이유에서든 화음이 깨어지고 조율이 되지 않아서 시끄러운 소리만 울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음을 조율하고 말씀으로 튜닝해서 아름다운 연주로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연주를 망쳐버렸던 이세벨의 미혹이 무엇입니까?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도 있었던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혼합주의입니다. 여호와 신앙과 세상의 반 하나님 문화와 사상을 섞어서 행음과 우상숭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오게 하는 세속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정신만 차리고 있다면 모든 것은 다 진리로 통한다면서 사탄의 깊은 것을 전파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아야지 사탄의 깊은 것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 악에 동참하지 않고 계속 깨어서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올 때까지 계속 그 연주를 하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세벨의 유혹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유혹이니 신앙의 줄을 느슨하게 풀지 말고 계속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연주를 잘하라고 하십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비록 시대의 조류에 역행한다는 말을 듣고 현실감각이 없고 고지식한 사람으로 평가되더라도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연주, 믿음의 연주, 복음의 연주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계속하고 있으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26)와 새벽 별을 주겠다는 종말론적인 약속을 주십니다(28). 지금 당장은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주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성도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만국을 다스리는 왕권에 동참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끝까지 이기고 지키는 자들에게 새벽 별 되시는 그리스도 자신을 주시겠다고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있는 복음의 진리를 굳게 잡읍시다. 세상과 타협하여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새로운 가르침, 직통 계시 같은 새로운 현상에 현혹되지도 말며, 배운 말씀과 교리를 따라 거룩과 성결의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