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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간 론
제 1 부 원시상태의 인간
I. 인간의 기원
교의학에서 인간은 피조물의 면류관일 뿐만 아니라 각별한 보호의 대상이다.
성경은 인간의 기원에 관하여 이중적으로 서술한다. 인간은 창조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이 선행한다. 인간의 기원에 관한 진화론의 견해는 인간이 생득적인 힘에 의하여 전적으로 통제되는 완전히 자연적이 과정에 의하여 하등 동물의 몸과 혼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진화론이 갖는 주도적인 특징은 동물의 세계와 인간과의 철저한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반론으로 진화론이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II. 인간의 구성적 본질
A. = 인간 본성의 구성적 요소들
신자들은 인간이 두 부분 곧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있다.이 견해를 이분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이 세 분분 곧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삼분설이라고 한다. 신이 제 3의 본질 또는 중간적 존재를 통해서 물질계와 서로 교류할 수 있다는 것처럼, 인간의 영도 제 3의 중간적 요소인 혼을 통해서만 몸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혼은 이성 혹은 영을 소유하고 있는 한 불멸의 존재로 간주되지만 몸에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는 육적이요, 또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조약한 형태의 삼분설은 몸을 인간 본성의 물질적인 부분으로 혼을 동물적인 생명의 원리로, 그리고 영을 하나님과 관계하는 합리적인 불변하는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
개인의 영혼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기독교 신학에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혼의 본질, 기원 계속적인 존재등에 관한 끊임없는 논의가있어 왔다.
몸과 혼의 관계를 말함에 있어서 먼저 일원론이 있다.몸과 혼은 원초적인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이론들이다. 이원론은 본질적인 이원성을 전제하고 양자의 상호관련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B. 개인의 영혼의 기원
1. 선재설
오리겐, 스코투스 에리게나, 율리우스 뮐러와 같은 일부 사변 신학자들은 인간의 영혼은 현재 상태와는 다른 일종의 전(前)상태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전상태에 어떤 사태가 발생하여 현재와 같은 상태 안에 영혼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성경적, 철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과 몸을 우연의 산물로 본다는 것과 인류의 통일성을 파괴한다는 것등의 반론에 직면하게 되었다.
2. 유전설
인간의 영혼은 몸과 함께 혈통을 통하여 전이 된다고 한다. 즉 그것은 부모에 의해 자식에게 유전된다는 것이다. 이 유전설은 루터교회의 지도적인 견해가 되었다.
유전설에 대한 반론은 유전설은 영혼의 단순성이라는 철학적 교리와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 유전설은 현실주의 이론과 잘 접목이 된다.
3. 창조설
각 개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로 간주되었야 한다. 영혼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 사역에 기인한다. 이 이론은 유전설보다 성경의 지배적인 표현들과 부합한다. 원초적인 창조에 관한 수술은 몸의 창조와 영혼의 창조를 엄격히 구분한다. 창조설은 유전설보다 인간 영혼에 더 잘 부합한다. 또 이 이론은 그리스도론에서 빠질 수 밖에 없는 함정을 피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성경의 표현을 더 바르게 평가하고 있다.
이 창조설에 대한 몇 가지의 반론이 있다. 1) 창조설은 만일 영혼이 원래 부패 성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면 하나님을 도덕적인 악의 직접적인 창시자로 만들게 된다. 만일 이 이론이 영혼이 순수하게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게 되면 하나님은 도덕적인 악의 간접적인 조성자가 된다는 것이다.
2) 창조설은 지상의 아버지가 다만 자식의 몸만을 낳았다는 사실은 부모의 지적, 도덕적 특성이 자식에게 재현되는 현상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3) 창조설은 하나님이 현재 세계와 관계하시는 방식과 세계안에서 사역하시는 방식과 조화되지 않는다.
4. 결론
이런 문제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은 주의를 요한다. 성경은 아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여러 이론들중에서 창조의 이론이 선호받을만 하다. 창조설의 한 형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전설이 빠진 극복하기 어려운 철학적 난점을 만나지 않기 때문이며 유전설에 빠져 들어간 그리스도론의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우리의 언약 개념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인간 영혼을 창조하실때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새로운 개인을 낳는 자연적 과정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기원을 말함에 있어서 몇가지 설이 있지만 성경적, 철학적근거에 합당하고 그래도 그리스도론의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창조론이다. 이 또한 한 이론으로써 존재할 수 밖에 없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사고하고 신앙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인간론을 발전시켜 왔는데 그럼이 인간의 이성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하게 된다.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경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때 이성을 불어 넣어주셨는가? 아니면 스스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셨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이며 인간의 어느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의 죄도 하나님의 창조된 것인가? 등의 질문을 하게 된다.
III.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럼 모양과 형상은 어떤게 구분되는가? 어떤 이들은 “형상”을 몸, “모양”을 영혼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전자는 지성을 , 후자는 도덕적 기능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지고의 완전성은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원래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상대적으로 완전한 상태, 곧 의와 거룩의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로마 카톨릭의 입장은 원의는 단순한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인 능력과 기능을 부여받았으며, 이 능력들은 자연적 의를 통해서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그리고 합리주의의 견해는 인간이 순전하고 도덕적인 면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중립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자유 의지를 부여받음으로써 선과악 그 어느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온전한 하나님이 모습인가?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을 닮아 있는가? 어거스틴의 말대로 형상이 지성을 가르킨다고 했을때 인간의 지성을 하나님의 지성을 닮아 있다는 것인가? 그럼 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가?
이런 점에서 볼때 인간의 지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할찌라도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태초의 아담과 하와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찌라도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은 변형되었다고 본다. 그 자체가 죄로 인식되고 그 죄에서 구원을 받음이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으로 회복이라는 견해가 생기게 된다. 만약 이렇게 되었을때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왜곡된 표현은 아니다. 단지 도덕적 인간을 위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아닌가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었고 인간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었을때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였을때 인간은 당연히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IV. 행위 언약 속에 있는 인간
인간의 원래의 상태, 곧 무흠의 상태(status integritatis)에 관한 논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특별히 인간의 종교 생활의 기원과 본질을 고찰함으로써 완결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 상태에서의 최초의 인류의 삶도 언약 안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이 언약은 「자연의 언약」 「생명의 언약」, 「에덴의 언약」, 「행위의 언약」 등으로 불린다. 이런 언약의 명칭중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어겨지는 것이 “행위의 언약”이다.
개혁주의의 입장으로서의 행위의 언약은 어떠한 인간의 법적입장의 변화도 율법의 권위를 폐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요구하신 순종의 요구는 인간의 타락과 그 파멸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종결된 것은 아니며, 죄의 삯은 사망이며, 완전한 순종은 언제나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들이다.
행위언약은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와 형벌에 관한 한 그렇다. 그리고 조건적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 한 또한 폐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새로운 긍정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한에 있어서는 언약은 폐기되었다. 또한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서도 행위의 언약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행위언약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따라 생각해 본다. 행위언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자연적 관계에서 아직 유효하고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벌로서도 아직 유효하다 하겠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언약이 폐기되었다는 것은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커다란 경고일 것이다.
제 2 부
죄의 상태 안에 있는 인간
I. 죄의 기원
A. 죄의 역사적 견해들
죄의 기원은 어디에서부터인가?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죄의 기원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레니우스는 죄가 낙원에서의 아담의 의도적인 범죄와 그로 인한 타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리겐은 선재설을 말하며 인간의 영혼은 선재의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범죄했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이미 죄의 상태로 들어온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죄의 연계 사상을 많이 받아들이는 어거스틴적 해석을 했으나 반 펠라기우스적인 방법으로 더 많이 해석하기도 했다. 칸트는 악을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한다.
B. 죄의 기원에 관한 성경적 근거
성경에서는 세상의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으로 명백히 규정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미 범법자로 묘사된다. 그럼 인간은 그의 본성을 어떻게 획득하는가? 또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죄의 조서자로 간주될 수 없다. 그리고 죄는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이 죄는 아담이 낙원에서 범죄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초의 죄악은 죄의 전형으로서 이를 통해서 참된 죄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 최초의 타락은 유혹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이 유혹은 뱀으로부터 나온것이지만 성경은 이 뱀이 사탄의 도구로 쓰여짐을 말하고 있다. 뱀은 사탄의 도구로서 죄를 의인화한 것이요, 죄의 교활하고 기만적인 성격과 사람을 죽이는 독침과도 같은 성격을 상징한 것이다.
II. 죄의 본질적 특성
A. 성경적 죄의 개념
죄는 악의 구체적인 형식이다. 죄든 죄가 악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는 악보다 더 구체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죄는 절대성을 갖는다. 죄는 선의 정도가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악을 말한다. 이 죄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는 죄에 대한 바른 관념을 가질 수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 죄는 죄책과 부패를 포함한다. 죄책은 율법 또는 도덕적 요구를 어긴 행위에 대해서 처벌 또는 정죄를 받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죄는 마음속에 거한다. 죄는 지성, 의지, 감성, 나아가서는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죄는 단순히 외적인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죄는 행위와 성격(기질)과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덕법에 순응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B. 펠라기우스주의의 죄관
인간에게는 선한일을 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의미의 자유가 부여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했듯이 선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죄는 개별적인 의미에서 의지의 잘못된 선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죄악된 본성이라든지 죄악된 성품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후손들에게 유전되는 원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기본적인 펠라기우스주의의 전제는 양심과 하니님 말씀에 완전히 모순되며 인간의 의지와 본성에 대한 낙관적 견해는 심각한 죄의 문제와 은혜로서 구원의 역사를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죄는 악과 구별된다. 죄는 악보다 더 구체적인 개념이다. 모든 악은 죄가 될 수 있지만 모든 죄는 악이 될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개념은 악보다 더 넓게 포함하는 것이다. 이 죄는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 죄의 기준이 되는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율법이 없었으면 죄는 세상에 있지 않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죄는 항상 세상에 있으며 그 죄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죄를 짓는 것과 구원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행위 율법의 카테고리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죄로 인해서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은 왜 죄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했으며, 인간을 왜 죄의 문제로 그렇게도 고민하고 있는가? 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가?
죄가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한다면 매일 기도하고 죄를 아뢰며 회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의 회개를 강조하는 교회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렇게 본다면 교회는 구원만을 위한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구원 받은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닌가 한다.
III. 죄의 전이
A. 역사적 개관
1. 종교개혁 이전
이레니우스,터툴리안은 인간의 죄악된 상태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라고 한다. 오리겐은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의 상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그는 전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아담의 죄책이 후손들에게 직접 또는 즉각적으로 전달된다고는 보지 않았다. 펠라기우스는 죄의 상관성을 거부하였다.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정직성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셀름,헤일스의 알렉산더, 보나벤투라 등은 죄의 상관성을 실재론적으로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몸의 한 지체의 행위가 전인의 행위로 간주되듯이 인류라는 유기체에 속한 한 지체의 죄는 전 유기체에 전가된다고 했다.
2. 종교개혁 이후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우리안에 내주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자 뿌리이기 때문에 모든 그의 후손들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며, 이는 생득적인 부패성으로 후손에게 전가되는 것이라 한다. 사우무르 학파의 플라케우스는 아담으로부터 죄악된 본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마치 원초적인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이된다는 교리를 전적으로 불신한다.
바르트,부룬너의 경우, 인류의 보편적인 죄성을 아담의 죄의 결과로 간주하지 않는다.
B. 죄의 보편성
종교사의 철학사는 죄의 보편성을 입증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도덕적 악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성경은 죄의 보편성을 명확히 가르치고 있다. 곧 죄는 원초적인 어떤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 안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저주아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필요로 한다고 가르친다.
C. 아담의 죄와 인류의 죄와의 관계
1. 관련을 부인하는 견해
펠라기우스 주의자들과 소지니주의자들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죄는 개별적인 것이므로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문제인 것이고 아담이 보여준 것은 인간의 약한 면모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학파(뉴헤이븐) 이론에서는 단지 인간은 선천적으로 죄를 지을수 있는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보며 이러한 경향이 곧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위기신학에서는 인류의 죄의 연대성을 강조하나 아담과의 관련성을 부정되고 있다.
그 외에 관련을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으로는 실재론은 인간의 본성이 포괄적으로 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단일한 단위를 구성한다고 보며 아담은 전인류의 계약의 대표였기 때문에 언약의 관계에서 볼때 그의 불순종은 모든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간접적 전가론의 입장에서는 아담의 죄책이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된다는 것은 부인하며 단지 후손들은 자연적인 출생과정을 통해 아담으로부터 내적인 부패를 물려받았으며 아담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생득적인 부패성 때문에 그들도 역시 배역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곧 아담안에서 죄책을 짊어졌기 때문에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패했기 때문에 죄책을 진 자로 간주된 것을 뜻한다.
죄의 전이는 아담의 죄의 전가를 주장하게 되는 것은 계약신학이 등장하면서 아담이 인류의 대표라는 생각이 전면에 등장했으며 죄책의 전이와 죄의 부패의 전이를 엄격히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선천적인 부패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아담의 죄책이 그가 계약의 머리로서 대표한 모든 인류에게 “즉각적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의 전이를 말 할 수 있다.
IV. 인류의 삶에 나타난 죄
A. 원죄
인간은 죄악된 상태와 조건안에서 태어난다. 이 상태를 신학에서는 원죄라고 부른다.
1. 역사적 개관
펠라기우스적는 의지의 자유는 타락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신체적 부폐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희랍 교회에 나타난 경향은 원죄를 단호하게 거부한 펠라기우스주의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반 펠라기우스적 입장은 온 인류가 아담의 타락에 관여 했으며, 인간의 본성은 유전적인 죄에 의해서 오염되었고, 온 인류는 본질상 악을 향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어떤 선행도 이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나,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과 원죄의 죄책, 그리고 자유의지의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B. 자범죄
자범죄라는 용어는 몸을 통하여 행해진 외적인 행위들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안간의 선천적인 본성 및 경향과 구분되는 개별적인 죄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의식적인 의심이나 악한 계획 또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특별한 의식적인 욕망이나 탐욕 같은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성경은 악으로 범한 죄와 무지나 연약성이나 실수로 인하여 부지중에 범한 죄를 구분한다.
죄에 대한 개혁파의 견해는 죄는 증거와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성령의 증거를 의식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중상함과 동시에 질시와 증오심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어둠의 권세 잡은 자의 일로 돌리는 행위를 말한다.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개념으로 인해서 죄가 후세에게 전가 되었다면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면 그 죄의 해결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했을때,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죄 그 자체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로 인한 다른 문제로 인한 것인가? 개혁주의 견해에서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 인해 회개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럼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V. 죄의 형벌
죄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죄를 가볍게 여긴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율법 수여자를 공격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를 형성하는 신성 불가침의 하나님의 의를 침범하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삶속에서 거룩한 살을 살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의 흠없는 거룩함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형벌을 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A. 자연적인 형벌과 적극적인 형벌
형벌은 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이다. 인간은 회개와 용서를 통해 이 형벌에서 면제될 수 없다. 그리고 적극적인 형벌은 일반적이고 법적인 의미의 형벌이다. 이 형벌은 범법의 본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형벌이 아니라 거룩한 법령에 의하여 범법에 가해지는 형벌이다.
B. 형벌의 본질과 목적
형벌은 죄때문에 가해지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으로 가해지는 벌을 말한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공의에 기인하는 일종의 빚이다.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거룩한 의 또는 정의의 수호를 위해서이다.
2. 죄인을 교정하는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3.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C. 죄에 대한 실제적 형벌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은 성경적인 죽음이다. 그 죽음은 영적인 죽음을 말한다. 또한 그 형벌은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으로 나타난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한다. 이 도전에 대해서는 그 응당한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그럼 죄를 짓는 인간은 왜 하나님에게 그 댓가로 바로 응당한 형벌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벌은 더디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꺼번에 모아서 오는 것인가?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이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이라면 모든 이런 현상들은 죄의 댓가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증명되지 않는 것을 죄의 명목으로 타당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하나님의 형벌이 그때 그때 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거룩과 정의를 수호하거나 죄인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이 달성될 수 있는가? 그렇게 된다면 형벌의 원래의 목적달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제 3 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인간
I. 언약의 명칭과 개념
A. 명칭
구약에서 언약은 묶는다라는 뜻을 가진 베리트라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어느 한편이 복종하는 입장에 서고 다른 한편보다 말을 적게 하는 입장을 취할 때, 언약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에게 부과하는 약정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실 때는 일방적 성격이 드러난다.
신약에서는 디아데케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법적 동등성에 근거하고 있는 순데케를 대신하여 쓰여진 말이다. 왜냐하면, 언약을 체결할 때 우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개념과,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주권적으로 인간에게 부과하신다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헬라어에는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B. 개념
모든 언약 생활의 원형은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인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 은혜언약이란 언약의 형식으로 표현된 구원의 약속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약정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두 경우 모두 우선권을 쥐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엄연한 언약이다. 행위언약에서 있어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은사들을 사용하여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하나님은 은혜로써 자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 이것을 은혜 언약이라고 부른다.
II. 구속언약
“구속언약은 성자를 선택받은 자의 머리와 구주로 주시는 성부와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지원하여 대신하시는 성자 사이에서 맺어진 협정이다.”
A. 구속언약에 있어서의 성자
구속언약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공적인 위치는 보증의 위치이다. 이 보증은 조건적 보증과 무조건적 보증이 있다. 이 구속 언약이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취하는 형식은 죄인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은혜 언약의 영원한 원형이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은혜 언약이라기보다는 행위언약이다. 언약안에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선택의 작정에 의해 제한된다. 선택은 구속의 의논에 선행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보증적 사역은 그의 구속과 같이 특별한 것이 때문이다.
B.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과의 관계
구속의 의논은 역사적인 은혜 언약의 영원한 원형이며, 은혜 언약의 굳고 영원한 기초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은혜 언약을 유효학 하는 것이다.
III. 은혜 언약의 성질
A.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의 비교
두 언약의 일치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계약의 당사자들은 하나님과 인간이고, 외적 형식, 곧 조건과 약속, 약속의 내용, 곧 영생, 그리고 일반적 목적,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B. 은혜 언약의 내용
은혜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속에 언약의 내용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복을 공유하는 자들은 참되고 신실하고 성별되고 헌신된 사랑으로 반응한다.
C. 은헤 언약의 특성들
그 특성은 은혜로운 언약이라는 것이다. 또 삼위 일체적인 언약이며, 파기되지 않는 언약이며, 보편적이 아닌 언약이며, 그 시행의 형식은 변할 지라도 본질은 시대를 초월한 동일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D. 그리스도와 은혜 언약의 관계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 제사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보자로 표현된다. 그는 객관적인 법적 영역에서 그리고 주관적인 도덕적 영역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일과 인간에게 속한 일을 수행한다.
IV. 언약의 이중적 국면
A. 외면적 언약과 내면적 언약
외면적 언약에서는 인간의 신분이 전적으로 일정한 외적인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내면적 언약은 사실상 외면적 언약과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은혜 언약에는 외적인 국면과 내적인 국면이 있다는 견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어떤 이들은 참된 영적인 방법으로 언약상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한편, 어떤 이들은 다만 입으로만 하는 외적인 고백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언약에 참여한다.
B. 언약의 본질과 시행
언약의 본질은 언약이 규정하고 있는 모든 복을 영적으로 수납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며,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C. 조건적 언약과 절대적 언약
쾰만은 조건적 언약과 절대적 언약으로 구분한다. 그는 외면적 언약과 내면적 언약은 하나임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한다.
D. 법적 관계로서의 언약의 회원이 되는 자격
언약의 회원이 되는 자격은 언약에 있어서의 성인들로서 자발적으로 믿음과 고백을 함으로서 언약의 관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또 신자의 자녀들과 언약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도 언약의 회원이 되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V. 언약의 여러 세대
A. 여러 세대에 관한 바른 개념
3세대 이론이라는 것은 이레네우스가 구분한 것으로 첫째 언약은 마음에 새긴 율법이 그 특징을 이루는 언약이요, 둘째, 언약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외적인 명령으로서의 율법이 그 특징을 이루는 언약이요, 셋째, 성령의 작용에 의하여 마음속에서 회복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모세 이전과 모세 이후의 언약의 시행을 구분한다. 여기서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과 이후의 언약의 시행에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언약의 은혜적 성격의 표현함에 있어서, 복의 영적인 성격을 강조함에 있어서, 언약의 보편적인 목적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차이점을 볼 수있으며, 신약의 시대와 구약시대의 일치점이 있는데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 후손으로서의 중보자를 예시함에 있어서, 의식과 모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예표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초기 공동체들을 통하여 언약의 영적인 실재에 참여하게 될 자들의 운명을 예시함에 있어서 일치점을 보인다.
구약의 언약은 최초의 언약의 계시로 원복음이 있고, 노아와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그리고 시내언약이 있다. 신약의 언약은 몇 가지 주목 할 것이 있는데 첫째, 신약에 계시된 은혜 언약은 본질적으로 구약의 신자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던 관계를 지배했던 것과 동일하다. 둘째, 신약 시대는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곧 모든 국가들에게 확장된다는 점에서 구약시대와 다르다는 것이다. 세째, 신약 시대는 언약의 은혜적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약속이 전면에 부각된다. 네째, 신약시대는 구약 시대보다 더 부요한 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언약론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인간의 원죄
A.원죄론의 성서적 근거와 유래
아우구스틴 이후부터 교회는 원죄(原罪)의 교리를 주장하여 왔다.원죄의 교리는 인간의 존재를 죄된 존재로 규정한다.원죄의 교리는 분명한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성서는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말하고 있다.“죄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왕상8:46) “모두들 다른 길 찾아 벗어나서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을 두어 착한 일하는 사람 하나없다”(시14:3,53:3) “올바른 사람은 없다.한사람도 없다.깨닫는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모두들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선한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단 한사람도 없다”(롬3:10-12) 원죄의 교리는 죄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수 없는 하나님의 힘,내지는 숙명으로써 모든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다.인간은 그가 임의로 행하는 죄된 행동들에 앞서서 그 존재(存在)에 있어서 죄인이다.그리고 이 원죄는 계속적으로 후손들에게 임신과 분만을 통하여 유전(遺傳)된다.원죄는 유전죄이다.
B.원죄론의 의도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원죄론을 그의 교리로 삼아왔다.그러면 원죄는 무엇을 말하고져 하는가?
첫째,원죄는 죄는 우리가 설명할수 없는 하나의 비밀(秘密)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지만 죄가 어떻게 이세상에 들어왔고 어떻게 우리의 삶속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한다.창세기 3장의 말씀은 바로 이부분을 말하고 있다.인간의 말로 설명할수 없는 죄의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죄가 어디에서부터, 그리고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하였는가 하는 죄의 비밀과 근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원죄는 죄의 불가피성(不可避性)을 말하고자 한다.우리 자신이 인간인 이상 우리는 죄를 피할수가 없다.우리는 이미 “죄인(罪人)의 존재”이다.우리는 죄와 함께 태어나서 죄가운데 살며 죄와 함게 죽을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이렇듯 원죄는 죄의 불가피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셋째,원죄는 우리는 죄에 있어서 서로 결속(結束)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우리모든 인간은 죄인이다.우리는 죄의 사귐속에 있으며 “죄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한다.유전죄로써의 원죄는 바로 이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유전죄는 아담의 죄가 인간의 성(性)을 통하여서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우리모든 인간은 아담이었던 바로 그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최초의 인간 아담”과 그리고 오늘 우리 인간은 죄에 있어서 서로 결속된 한 인간이라는 것이다.우리모든 인간은 아담안에서 죄를 지었으며 그 죄에 있어서 서로 결속되어 있음을 원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C.원죄의 문제점과 새로운 해석
교회의 전통에 있어서 원죄(原罪)는 유전죄(遺傳罪)로 이해되어 왔다.인간은 “죄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때부터 이미 죄인이었다”(시51:5) 욥기 15:4절에 의하면 “죽을 인생이 어찌 깨끗할수 있겠는가? 여인에게서 난사람이 어찌 죄없을수 있겠는가?” 이러한 성서적 근거에 의하여서 원죄는 유전죄로 이해되어 왔다.그러나 만약에 원죄가 유전죄라고 하면 몇가지 문제를 가지게 된다.첫째,만약에 우리가 아담의 혈통으로 인하여 다시말하여 상속관계를 통하여 죄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엄밀한 의미에서 없는 것이다.(고가르탱) 둘째,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性)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이다.따라서 성을 죄악된 것으로보고 죄를 유전시키는 수단으로 보는 아우그스틴의 견해는 성서의 정신에 위배된다.이상의 두가지의 문제점에서 우리는 원죄가 유전죄라는 사실에 동의할수 없다.
우리는 아담이 지은 원죄가 임신과 분만을 통하여서 생리적(生理的)으로 유전된다고 볼수 없다.성서가 말하는 아담은 개인인 동시에 “모든 인간의 근원적 통일성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즉 아담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간의 대표자이다.원죄가 말하려는 것은 아담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결속되어 있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앞에서의 죄인임을 말하고져 하는 것이다.아담이 지은죄가 생리적으로 유전되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인간은 그 존재에 있서서 죄인이라는 것을 원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어떠한 인간도 죄의 테두리를 벗어날수 없다.인간의 죄의 영역속에 있다.그는 죄된 세상에서 죄로 또한 세상을 물들이면서 죄가우데 거하다가 그 죄로 인하여 결국은 죽게 될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바로 이 원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할렐루야!
D.원죄와 자범죄(自犯罪)
원죄는 우리 모든인간이 죄를 지을수밖에 없다는 보편적인 운명을 가르키며 자범죄는 이 보편적인 운명을 증명한다.원죄가 죄의 뿌리라고 한다면 자범죄는 죄의 열매이다.우리는 죄라는 나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죄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고 있다.죄의 열매는 무엇인가? 미움,시기,다툼,살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셨다.그는 원죄와 자범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셨다.원죄는 일회적인 예수의 죽음과 일회적인 인간의 회개로써 해결되었다.그리고 자범죄는 십자가에서의 인간의 계속적인 죽음을 통하여 해결된다.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다.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번 완전히 죽은 삶(원죄 해결)이며 날마다 죽는 삶(자범죄 해결)인 것이다.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길과 은총의 길,축복의 길이 있는 것이다.
E.죄(罪)와 벌(罰)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라온다.그것이 빨리올수도 있고 늦게 올수도 있다.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오고야만다.부모의 죄에 대한 벌이 자식에게 나타나는 일도 있다. 이것은 개인에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와 한 민족과 세계에 이르기까지 타당한 진리이다.부패하고 부도덕한 조상을 가진 민족은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분노의 벌을 면할수가 없다.한 나라와 민족이 회개하지 아니하고 부패하고 부도덕한 삶을 그치지 아니할때 차츰차츰 몰락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이러한 사실은 세계사에서 얼머든지 찾아볼수 있다.수많은 제국들이 흥왕하다가는 몰락하였다.그런데 모든 제국의 멸망의 원인은 물질적 빈곤에 있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물질적 풍요에 있었음을 우리는 발견할수 있다.물질적 풍요는 생활의 나태와 권태를 불러오며 생활의 나태와 권태는 사치와 방탕과 허영과 부도덕을 일으키며 공동체의 부패를 초래한다.
이렇게 일어나는 공동체의 몰락은 이 공동체에 속한 조상들과 자녀들이 공동으로 받는 하나님의 심판(審判)이라고 말할수 있다.죄와 벌은 반드시 따라다닌다.이 둘을 나누어 놓을수가 없다.아니 이미 죄는 그 자체로써 벌이라고 말해도 좋다.벌은 이미 죄의 행위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에서 발견할수 있다.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인을 살해한다.그는 자기나름대로 전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리대금업을 하는 전당포 노인은 그가 볼때 인간 쓰레기이며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인류의 적(敵)인것이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살해는 분명한 죄였다.그는 이 노파를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지 아니하고 자신이 이 노파에 대한 심판자로써 심판을 집행한다.이리하여 그는 오히려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아래 세우게 된다.그는 자신의 범죄행위와 함께 자신의 벌을 초래한다. 그의 벌은 이때 양심(良心)의 가책(呵責) 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라스콜리니코프가 받는 이 말할수 없는 양심의 가책은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이 자기에게 불러온 벌이며 그의 범죄행위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벌인 것이다.그는 마음의 괴로움을 견디다 못하여 그의 범죄사실을 애인 소니아에게 고백한다.소니아의 권유로 그는 경찰에 자수하고 먼 시베리아로 유형(流形)의 길을 떠난다.그는 사랑하는 애인 소니아를 버릴수 없음에도 불구히고 기꺼이 유형의 길을 떠난다.그는 죄에 대한 벌로써 시베리아를 선택한 것이다.사랑하는 사람을 뒤로하고 떠나는 그의 발길에서 우리는 죄와 그 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모든 인간은 죄와 벌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수 없다.우리가 범죄한 그 죄속에 이미 벌이 포함되어 있다.그리고 그 벌은 결코 피할수가 없다.그 벌은 여러가지 형태로 반드시 나타난다.그런데 인간은 어리석게도 죄를 지으면서도 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양심이 무디어 졌는데 원인을 찾을수 있다.라스콜리니코프의 양심이 우리안에 반만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벌이 나타나는데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가지고 나타난다는 점이다.첫째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나타난다.죄를 지은 시점에 바로나타난다면 누가 감히 죄를 짓겠는가? 그런데 벌은 잠복하여 있다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 나타난다.조상이 지은 죄가 후대에 나타난다.아버지의 죄가 아이들에게 나타난다.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죄의 댓가를 치룬다.이 세상에서 못치루면 저세상에서 하나님앞에서 치루게 될것이다. 둘째는 공간의 차이이다.여기에서 죄를 지었는데 그 결과는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나는 갑이라는 사람에게 죄를 지었는데 을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보응이 온다.공간의 차이를 두고 벌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우리를 죄와 벌에서 해방시키신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자.
인간의본질
序 論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점에 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계시요 하나님의 완전하신 덕을 반영하는 거울 이지만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요 가장 높고 부요한 신적 계시이다.
창세기 첫장에서 우리는 인간 창조의 유독성(惟獨性)을 발견 한다. 하나님 께서 다른 동물들을 창조 하실때는 ‘각기 그 종류 대로’ 만드 셨으나(21,24,25절),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 하셨다. 최홍석, 「교회와 신학」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pp.30-31.
창1:26에서 보는 바와 같이 26절의 주동사는 복수 이다. 많은 학자 들이 이 복수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을 시도 보편적으로 삼위 일체를 함의(含意) 하는 것으로 석의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26절은 또한 인간 창조에 앞서 신적 협의(協議)가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 하기도 하는데 이점은 인간 창조의 유독성을 다시금 드러 낸다. 왜냐 하면 다른 아무 피조물에게서도 인간 창조시 나타난 것과 같은 표현을 결코 발견 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에 관해 잠시 고찰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목표로 하는 우리의 삶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
本 論
1.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의 성경적 용어 고찰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 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
위의 본문 에서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이라는 말이 교대로 사용 되어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 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그것은 공허한 일이다. 하문호, 「기초 교의신학 Ⅲ, 인간론」 (서울: 한국 로고스 연구원,1991). p.63.
히브리 원문을 보면 ‘형상’과 ‘모양’이란 두 표현 사이에 아무런 접속사가 없다. 그러나 칠십인경과 라틴 벌게이트 역(Vulgata)에서는 και와 et라는 접속사가 첨가 되어 있다. 그래서 ‘형상’과 ‘모양’이 전혀 다른 별개의 내용을 가리키는것이 아니냐 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 나타난 데로는 ‘형상’과 ‘모양’이란 두 표현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 차이를 발견할수 없다. 이와 같은 점은 본문과 더불어 다른곳에 나타난 관련 귀절들의 용례(用例)를 살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창1:26에서는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이란 용어가 둘다 사용 되었으나, 27절 에서는 단지 「形象」(셀렘,םלצ )이란 단어만 사용 되었고 반면 창5:1에서는 「貌樣」(데무드, תגמד )」이란 용어만 사용 되었다. 그리고 창5:3에서는 두 용어가 다시금 사용 되었으나 1:26과는 역순(逆順)으로 표현 되었다. 그리고 9:6에서는 다시금 ’형상‘이란 말만 사용 되었다. 만일에 인간 존재의 상이한 국면들을 묘사 하기 위하여 이 두 용어들이 사용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살펴 본바와 같이 이 두 용어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용어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말할수 없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그와 같은 용법은 히브리 인들의 관습 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히브리 인들의 어법에는 반복이 많이 사용 되고 있는데 한가지 사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종종 두 낱말을 쓸때 가 있는데 이를 연구법(parallelism, 聯句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용어가 비록 일반적인 의미에서 유사어로 사용 되었다고 할찌라도 양자 사이에 개념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形象」(셀렘,םלצ )는 “새기다”(to carve)혹은 “탁마(琢磨)하다”(to cut)는 의미를 가진 어근 으로 부터 유래 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동물이나 인간을 조각한 모양을 묘사 하기 위하여 사용 되었다고 할수 있고 ‘모양’에 해당되는 「貌樣」(데무드, תגמד )라는 말은 “비슷하다”(to be like)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 부터 파생 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모양’이란 말은 형상이 닮았다는 사실을 강조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형상’이란 말이 강조 하는 바는 하나님은 원형이시고(dearchetype)인간은 그 모형(de ectype)이라는 사실이요 ‘모양’ 이란 말은 그 상(象)이 모든 면에 있어서 원형과 일치 한다는 것을 강조 한다. 따라서 두 용어의 연구법(parallelism, 聯句法)적 용례로 부터 추론 할수 있는 사실은 것은 그와 같은 표현 양식을 통해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관념이 드러 난다는 점이다.
2. 성경 신학적 관점(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나타난)을 통해서본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의 의미
26절과 27절은 인간 창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이 두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계획과 목적을 세우신 사실(26절)과 사람을 만드신 사실(27절)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26절을 원어를 직역해서 살펴 본다면 아래와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다
우리가 만들자
사람을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처럼
그리고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그 바다의 고기를, 그리고
그 하늘의 새를, 그리고
그 육축을, 그리고
그 땅 모두를, 그리고
그 땅위에서 기는 모두를(26절)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으려는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 목적은 26절 후반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후반절은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로 시작 된다. 즉 「다스리게」 하는것이 사람을 지은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다섯개의 목적어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이제껏 엿새동안 지음받은 모든 동식물을 총 망라한 표현이다. 이러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 하셨다. 이 사실은 27절이 잘 말해 주고 있는데 이를 직역 하여 보면
a.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 그 사람을
b. 그의 형상대로
b.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a. 그분께서 창조 하셨다 그를 (상반절)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께서 창조 하셨다 그들을 (하반절)
26-2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과정에 대해서 알만한 단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런 단서는 창세기2:7에 가서야 발견할 수 있는데 반면 창2:7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려는 계획과 목적등 여기서 알 수 있는 내용이 생략 되어 있다. 이렇듯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 내용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기록자가 말하려는 의도 또는 촛점이나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7절에서 강조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누가 사람을 창조 하셨으며, 둘째: 지음 받은 사람은 어떠한 존재 인가 하는 점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는 언급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함으로써 사람을 창조한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크게 강조 하고 있다. 그 다음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 시키고 있다.따라서 우리가 사람의 존재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면 무엇 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문맥에 가장 알맞는 것을 살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표현은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지을 수 있는 독특한 차이점을 찾은 다음 그것을 이 표현과 연관 시켜 본다면 차이점은 단 한가지 인데 그것은 인간은 “다스리는”존재로 지어 졌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다스리는 역할”과 연관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스리는 자’로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6절에서도 살펴본 바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지으시려는 목적은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러한 문맥적 이해가 타당 하다는 것을 입증해 줄만한 성경 안팎의 증거들이 있다.
고대 근동 에서는 ‘신(神)의 형상’이라는 표현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였다. 왕이 가진 권위와 그의 통치는 신의 권위와 통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왕은 신의 권력을 그대로 소유 하고 있는 이른바 신의 복사본(copy)인 것이다. 그리고 복사본(複寫本)이란 원형을 본뜬 것이므로 ‘형상’(image)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었다. 따라서 ‘신의 형상’ 이라는 표현은 다름아닌 ‘왕’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차 독자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는 신은 하나님 이시다. 그렇다면 일차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표현은 ‘왕’이라는 개념으로 이해 되기에 충분하다. 온 세상에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다스림을 나타낼 형상으로서 사람을 창조 하셔서 그로 하여금 세상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다스림을 나타내시려고 인간(남자와 여자)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으로써 그분의 다스림을 피조물 세계에 반영 하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술을 몇 가지의 성경적인 증거를 통하여 입증한다면
첫째 증거는: ‘다스리다’는 동사 “라다”(radah)의 쓰임을 통해서 이다.
이 동사는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다스리다’라는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특이 하게도 왕의 다스리는 행위를 묘사 하고 있다(왕상4:24; 사14:6; 겔34:4; 시72:8; 110:2). 따라서 이 동사가 창세기 1:26, 28에서 선택된 것은 아담의 다스리는 행위가 통치의 행위 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증거는: 성경 전체에 비추어 볼 때 아담은 분명히 왕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가지 직임(職任)은 왕직, 제사장직, 선지자직이다. 이것은 두번째 아담으로서 갖는 직임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 직임을 행하시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그런 직임을 행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류의 대표로서 그 직임을 맡아 행하셨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두번째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김영철, 「주님의 주님 되심」 (서울:여수룬, 1992), pp.68-88.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점을 살펴 점을 살펴 보았으나 어떤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는지 창조 기사 가운데 정확히 나타나 있다고 확언(確言) 할 수는 없지만 그럼 에도 불구 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유사성(類似性)을 어느 정도 발견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창1:26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피조물에 대한 통치(dominium)를 인간 속에 나타나는 신(神)형상 발현(發顯)의 한 국면으로 추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홍석, 「교회와 신학」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p.35.
3. 조직신학 관점(성경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서 나타난)을 통해서 본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의 의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각 교파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로마 교회와, 루터파, 의 견해를 간략하게 고찰한 후 개혁파 교회의 견해는 여러 신학자들(죤칼빈, 칼바르트, 에밀 부룬너, 벌 카워)의 의견을 검토해 본 후 박형룡 박사의 교의 신학에 있는 내용을 빌어서 조직신학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논술 하고자 한다. 하지만 본인이 신학적 지식의 짧음으로 인하여 여러 신학자들의 깊은 사상을 올바른 관점(저자의 의도와 논술 목적)에서 제대로 이해 했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시인한다.
1) 로마 교회의 견해 하문호, 「기초 교의 신학 Ⅲ」 (서울: 한국 로고스 연구원, 1991), pp.65-66.
로마 교회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초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구분한다.
①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하실 때 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육체의 불사성(不死性)같은 어떤 자연적인 은사들을 인간에게 주셨는데 이것들이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한다.
②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인간은 위에서 말한 자연적 은사를 통해서 자연적 의(義)를 소유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식욕, 정욕등 열등한 성향이 있으며 이것들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니나 죄를위한 기회 또는 연료가 되기 쉬우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초자연적인 은사를 덧붙여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은사 곧 초자연적인 은사로 말미암아 「原義」가 주어 졌으니 이것이 곧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한다. 로마 교회는 이와 같은 주장으로 말미암아 범죄후의 인간 상태를 본래 창조된 대로의 인간은 원의(原義)가 없었으나 또한 죄도 없었고 다만 죄의 결과를 낳기쉬운 경향을 가진 것 뿐이었는데 범죄 후 인간은 다만 원의가 상실 되었을 뿐이어서 범죄한 인간은 창조된 때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 후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로마 교회의 견해는 타락의 원인 설명이 곤란하며 범죄 후 인간 상태의 심각성을 간과(看過)할 위험이 있다.
2) 루터파의 견해 박형룡, 「朴亨龍 博士 著作 全集 Ⅲ. 人罪論」 (서울: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81), pp.101-102.
루터파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좁은 의미에서 제한 하여 이것을 사람의 「原始的 義」와 동일시「同一視」하며 이것이 타락을 통하여 전적으로 잃어 졌다고 결론한다. 즉 루터파는 「靈的 特質」(Spiritual qualities)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말한다. 이때 「靈的 特質」이란 참 지식(知識)과 의(義)와 성(聖)을 가리키며 이것은 또한 「原始的 義」라고 불리어 진다. 결국 루터파의 「原始的 義」는 로마 교회의 그것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서 틀림 없다. 이렇게 볼 때 루터파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로마 교회가 범죄 후에 잃어 버렸다고 말하는바 「原始的 義」만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잃어 버린 후에도 범죄한 인간이 동물과 똑같은 상태로 전락 되지 아니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게 되다.
3) 개혁파 교회의 견해 안토니 A.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1), pp.76-117.
① 죤 칼빈(John Calvin)의 견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죤 칼빈(1506-1564)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에 대한 이해를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지는데 인간 안에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발견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자리 잡고 있는 좌소는 인간의 영혼 속이다”라고 말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심지어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속의 어느 곳에도 없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오는 세상에서 온전히 회복될 때에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온전히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Comm. on Ⅰ Cor. 15:49. : 「개혁주의 종말론」, p.76. 에 나타난 관주를 인용.
또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원래적으로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아담이 부여 받은 순결성은 이 단어로(하나님의 형상(Imago Dei))표현 된다. 라고 하면서 골로새서3:10과 에베소서4:24에 근거하여 칼빈은 결론 짓기를 인간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원래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타락 하기 전에는 인간은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소유 하고 있었으나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엄청난 파괴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한 인류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그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도말되었다(utterly defaced), 파괴 되었다(destrroyed)고 종종 말하므로 타락 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연구 해보면 타락한 인간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미워하는 자들 마저도 사랑하라고 권하면서 그 이유를 “그 사람의 악한 의도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쳐다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끼친 영향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사라져 버리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 하더라도 죄로 인한 오염이 너무나도 심하여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끔찍하게 기형적이 된 형상일 뿐이다”고 했다.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Philadepha: Westminster, 1960), Ⅰ.15. 4. : 「개혁주의 종말론」,p.81.에 나타난 관주를 인용함
이렇게 부패하고 오염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롭게 되어질 수 있으며,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완전히 회복되어지는 때는 장차 오는 삶이 도래 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② 칼 바르트(Karl Barth)의 견해
이제 우리는 최근의 신 신학자 이며 신 정통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워 지는 칼바르트(1886-1968)의 견해를 살펴 보려고 한다.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이성과 지성 속에서 발견 되지 않는다. 그는 창 1:27을 주해 하면서 “위의 본문이 너무도 명백하게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의 형상과 모습은 인간 존재가 대면(confrontation)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 한다. 인간과 인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결은 대면의 관계를 말한다.” Karl Barth, Church Dogmatics, Ⅲ/1. p.195. 「개혁주의 종말론」에 있는 관주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임.
바르트는 이러한 대면적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동일한 대면적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존재 하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도록 규정지어 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피조물적 존재는 만남의 존재라는 사실 - “나”와 “너”, “남자”와 “여자”사이의 - 속에 분명한 상응 점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러한 대면 속에 인간됨이 있으며 이러한 인간됨 속에 인간의 창조주를 닮은 모습이 있다” ?) Church Dogmatics, Ⅲ/,p.203. :「개혁주의 종말론」,p.91.에서 각주 인용
그러면서도 그는 인류역사 속에서 인간이 실제로 정결한 상태에서 부패된 상태로 전락하게 된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타락”후에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상실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순전히 관계성으로만 이해 하려는 바르트의 입장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미친 타락의 엄청난 영향력과 그 형상의 갱신의 절실한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은 성경적 인간론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③ 에밀 부른너(Emil Brunner)의 견해
바르트와 동시대 인물이며 소위 변증법적 신학을 대표하는 에밀 부룬너(1889-1966)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을 고찰 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본다. 바르트처럼 부룬너도 아담의 역사적 실존성과 인간 타락의 역사성을 배격한다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역 (서울:기독교 문서 선교회,1991)p.94.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성의 모든 영역,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능성 속에서 발견 되어 진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자신을 스스로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시고 자신을 나누어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대하여 감사와 반응적 사랑으로 반응하는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랑은 부룬너의 인간이해와 인간 존재목적 이해의 중심부에 놓여있는 개념이다. 또한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는 뜻은 인간은 결코 상실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죄를 지었을 때도 인간은 그것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성경의 두귀절(고전11:7; 약3:9)에서도 가르친다고 말했다 Man in Reuolt, p. 500 : 「개혁주의 종말론」, p.98.의 각주를 인용함
그래서 타락한 인간도 실제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는 점을 강조 한다. 그러나 부룬너의 이러한 견해에는 몇 가지 심각한 의문이 제기 되는데 첫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부룬너는 결국 첫 아담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배격하는 것이며 따라서 제2아담이신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제기 하게 된다는 점이다. 둘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의 입장은 결국 그가 주장하고 있는 창조와 죄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도록 한다. 셋째: 인간의 죄악성 에도 불구 하고 형식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고 주장하는 등의 몇 가지 문제점을 갖는다.
④ 박형룡(朴亨龍)박사의 견해 박형룡, 「朴亨龍 博士 著作 全集 Ⅲ. 人罪論」 (서울: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1981), pp.95-106.
개혁파 여러 교회는 칼빈의 발자취에 따라 다른 교파들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관념을 가진다. 즉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독점적으로 사람의 이성적 성질(理性的 性質)로 구성된다는 견해와 이것이 전혀 그의 창조주의 도덕적 일치(道德的 一致)로 구성된다는 견해 사이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여 둘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위의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고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개혁파 입장에서 본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요약할 수 있는데
a. 인격 혹은 영혼에서
즉 그의 단순성, 영성, 불현성, 불사성 등의 품질들과 지(知), 정(情), 의(義)등의 심력(心力)들과 자의식및 자결성의 권능에서 자연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b. 원의(原義)에서
사람이 창조 되었을 때 참된 지식, 의, 거룩을 나타낸 그 본성(本性)과 지성적 도덕적 완의(完義) 혹은 원의에서(엡4:24; 골3;10)도덕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c. 신체에서
그 물질적 실체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영생에 참여 하는 적당한 기관과 하등 피조물 계에 주권을 행사하는 기구로서의 신체에서 외면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d. 지상 주권에서
사람의 지상 주권에서(시8:5-6;계5:10) 권위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⑤ 하문호 교수의 견해 하문호 「기초 교의신학 Ⅲ 人間論」 (서울:한국로고스연구원,1991),pp67-74.
하문호 교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말하기를
a.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한마디로 말해서 범죄 후에 잃어 버린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으로서 「참 지식, 義, 聖)(엡4:24; 골3:10)등을 말한다.
b.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범죄 후에도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으로서 다른 동물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理性,과 知識과 良心, 그리고 만물 통치권 등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통하여 영적 생명을 가진 결과로 인간은 다음과 같은 동물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소유 하게 되었는데 바로 인간은 영생의 가능성을 가진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만물을 주관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4.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최홍석, 「교회와 신학」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pp.36-41.
어떤 이들은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했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상실하였고 더 이상 신(神)형상의 소유자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5:1은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 본문은 타락한 이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임에도 불구 하고 아담에 대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만일 그 당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전적으로 상실되어 버린 상태라고 한다면 본문은 아마도 그와 같이 기술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더럽혀 졌다(Cf. 창6:5; 롬7:18)고는 생각할 수 있으나 타락 이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전적으로 상실해 버렸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 본문이 말하지 아니하는 것을 주장하는 격이 되고 만다. 창5:3에서는 1:26의 용례와 같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으나 어순은 역(逆)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담의 아들인 셋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고 진술되어 있지 아니하고 단지 아담이 그의 모양을 따라 그의 형상대로 출생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 후에 비록 죄로 말미암아 부패(腐敗)되고 오염(汚染) 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아담의 아들인 셋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추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들은 타락 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전적으로 잃어 버렸다는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사실은 창세기 9장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다시 반복된다. 그리고 이제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할 것이라는 사실이 계시되어지고(2절), 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 되었다(3절). 그러나 피 채로 먹는 행위는 금지 되어지고(4절) 또한 사람을 죽인 동물이나 사람을 살해한 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의 피를 요구 하신다(5절). 이와같은 맥락 속에서 우리가 다룰 주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 6절이 나타나게 된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즉 살인이 죽음 으로써 처벌 되어질 만큼 가중한 죄로 지목되는 이유는 살해된 자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사람을 죽였다고 할 때 그 행위는 단순히 한 사람의 생명을 손상 시키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도전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파멸시키는 행위는 바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 하신 창조주에 대한 범죄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귀절들은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의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神)형상과 관련된 신약의 중요한 귀절 가운데 하나는 야고보3:9절 말씀이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죄의 문제를 취급하는 중 동일한 문맥에서 혀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또한 사람을 저주 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죄악된 자기 모순 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왜 이와 같은 일들이 상호 모순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본문은 그 이유를 분명히 제시한다. 즉 우리가 저주하는 바로 그 대상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피조물들 이기 때문에 사람을 저주 한다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 그들을 자신의 모양 대로 창조 하신 하나님을 저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구 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지음 받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시상이다. 이 동사는 “ ---이 되다.” 혹은 “만들어 지다”는 의미를 가진 γινομαι의 완료형 분사 γεγονοται로서 헬라어의 완료 시제는 “결과가 계속 되어 지는 과거 행위”를 묘사 하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인간은 과거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은바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모양 속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야고보 3:9은 우리가 저주하는 인간이 비록 죄로 인하여 오염(汚染) 되었다 해도 - 전적 부패로 표현 될수 있을 만큼 - 신(神)형상이 전적으로 제거 되어지지는 아니하였고 여전히 하나님의 모양 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의 하고 있다.
結 論
신약의 여러 귀절 들은 타락 이후의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로의 회복이 요청 되는 존재로 묘사 하고 있으며(엡4:22-24, 골3:9-10), 또한 그와 같은 귀절 들은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갱신(更新)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이루어져 가는 점진적 과정임을 시사 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신약이 가리키는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목적은 우리가 더욱 더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요 혹은 더욱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롬8:29; 고후3:18; 골3:9-10; 엡4:22-24).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우리 안에 회복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신 형상이 우리 속에 왜곡 되어 있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가운데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또 다른 국면은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정적인(statisch)성질의 것이 아니라 동적인(dynamisch) 것이며 우리가 향해 나가야 할 종말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마땅히 되어져야 할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에 의하여 점점 하나님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도록 변화 되고 있는 중이며 미래에 언젠가는 온전히 하나님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갱신은 우선적으로 구속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노력을 함의 하는 것으로 신약에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새롭게 되는 일은 직설적(indicative)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골3:10), 동시에 명령적(imperative)인 요구로 나타난다(엡4:24; 5:1).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회복은 은사일 뿐 아니라 중요한 성도의 과제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성화의 최종 목적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데 -물론 신인 합일(神人 合一)의 의미는 아니지만-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반영하게 된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히 될 것이라는 표현인데 이를 종말론적 언어로서 묘사 하고 있다(고전15:49; 요일3:2).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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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석, 「교회와 신학」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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