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교회탐방4] 칼빈이 설교하고 저술한 스트라스부르
임 태 수 박사
(호서대 명예교수/제2종교개혁연구소소장)
yimtaesoo@hanmail.net
(1) 스트라스부르에 도착
칼빈(Calvin)은 1509년 7월 10일에 프랑스 노용(Noyon)에서 탄생하였다. 그러니까 금년 2009년 7월 10일은 칼빈(Calvin)이 탄생한지 만 500년이 되는 해이다.이런 의미 있는 해에 칼빈의 발자취를 다시 더듬어보게 되어 더욱 보람을 느낀다 (사진 1).
젊은 시절의 칼빈
우리 부부는 1997년 4월 7일에 독일 보름스를 떠나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향했다. 프랑스 국경에 막 들어서니 남녀가 알몸으로 껴안고 있는 포스터가 길거리에 걸려 있었다. 프랑스의 성문화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프랑스도 기독교 국가인데 이렇게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 Information Centre에서 몇 가지 자료를 얻은 다음, 스트라스부르 시내에 들어가 무조건 지도에 나타난 스트라스부르 대학을 찾아갔다. 여기에 가면 칼빈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내가 찾아간 대학은 Place de Universite로서 내가 찾는 대학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신학과가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그나마 일과시간이 끝나 사람이 없었다. 캠퍼스에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프랑스 여학생을 만나 칼빈이 가르친 학교가 어디인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자세히는 모르지만 구시가지(old city)에 있을 것이라고만 알려주었다.
강이 흐르는 스트라스부르의 아름다운 시내모습.
결국 칼빈이 가르친 학교나 집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한 대학 옆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식사를 하였다. 신학대학을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본 스트라스부르 시가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강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시내 한 가운데로 흐르고, 그 강에서 백조들이 한가로이 떠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진 2,3). 스트라스부르는 한 때 독일 땅이었는데 빼앗긴 것을 아쉬워할 것 같았다. 독일이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한 기간은 1870년부터 1918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독일이 눈물을 머금고 내어준 땅이 스트라스부르와 주변 지역이었다.
강, 다리,건물이 잘 어우러진 스트라스부르 시내.
담요를 준비해오지 않아서 보름스에서 아주 춥게 잤기 때문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잠자리에 들 때에는 아예 우리가 가지고 온 옷들을 있는 대로 다 꺼내 5-6벌씩 껴입고 잤다. 그랬더니 한결 따뜻했다. 거지들이 두껍게 옷을 껴입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 칼빈에 대한 명상
1997년 4월 8일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잠깐 기도하고 칼빈 선생에 대해 명상했다. 칼빈은 여기에서 「기독교강요」를 비롯해 다른 여러 책들을 쓰고 또 가르친 곳이다. 칼빈이 460여년 전에 걸었을 이 땅을 내가 오늘 밟을 것을 생각하니 감격스러웠다. 칼빈은 27살 때인 1536년 3월에 라틴어로 「기독교강요」 초판을 완성하여 바젤에서 출판하였다. 그는 천재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성경을 수 십번 통독하지 않고서는, 그런 불후의 명저인 「기독교강요」와 기타 신학서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칼빈이 신학이론뿐만 아니라 제네바에 신정도시를 건설하려고 시도한 것은 그의 믿음의 실천의지를 보여준다고 생각되어, 나는 칼빈의 이 측면을 특히 좋아한다. 믿음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녹아들어가 체현(體現)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개인적인 삶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실천했던 것이다.
칼빈은 1536년부터 1538년까지 제네바에서 파렐(Farel)과 함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시당국과 의견이 맞지 않아 추방명령을 받고 1538년에 스트라스부르로 왔다. 스트라스부르는 자유도시로서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약 400여명의 프랑스 사람들이 스트라스부르에 머물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고 목사를 찾고 있었다. 칼빈은 개혁가인 부쳐(Martin Bucer)의 추천으로 1538년 9월에 이 목사직을 맡게 되었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스트라스부르에 머문 3년 동안에 칼빈은 부쳐(Martin Bucer), 스투름(Jean Sturm), 카피토(Wolfgang Capito) 등과의 만남을 가졌는데, 이들을 통해서 칼빈의 사상은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졌다.
(3) 칼빈의 가정생활
스트라스부르에서의 3년 동안은 칼빈에게 있어서 감히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칼빈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스트레스가 적은 기간이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칼빈은 가난했다. 그는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학생들을 모집해서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연구하고, 사색하고, 저술하고, 그리고 다른 어떤 때보다도 더 많이 여가를 즐길 수 있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결혼하게 되었다. 그가 찾은 여자는 재세례파에서 개종한 이델레트(Idellete de Bure)였다. 과부였던 이델레트는 두 딸을 데리고 1540년에 칼빈과 결혼했다. 이 부부 사이에서 한 아들이 탄생했으나(1542), 어려서 죽었다. 이델레트도 출산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1549년에 죽었다. 부인이 죽자 칼빈은 “내 생애 치고의 친구를 잃었다”고 극도로 비통해했다. (사진 4)
2005년에 다시 찾은 호서대교수 일행, 왼쪽부터 현우식, 필자,
서용원, 강일구(호서대 총장), 김동주, 서정익 교수.
칼빈은 6장으로 구성된 「기독교강요」 초판을, 17장으로 확장하여 1539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하였다. 이 증보판은 신학생과 교역자를 위한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는 이 증보판을 불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1541년에 제네바에서 출판하였는데 그에 대한 반응과 효과는 대단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은 1540년에 「로마서 주석」을 저술하여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하였는데, 이를 기점으로 하여 그의 남은 생애 동안에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성경 전체의 주석을 저술하여 남겼다. 그는 또 스트라스부르에서 「성만찬에 대한 소론」을 써서 1541년에 제네바에서 출판하였다. 칼빈은 교회 예배를 위해 20편의 시편과 다른 가사에 곡을 붙인 불어판 「시편찬송가」를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했다 (사진 5).
스트라스부르 거리에서 사진 찍기에 바쁜 일행들 (2005년)
yimtaes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