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선답(禪問禪答)
무산 조오현 스님
제2부 한국선사 편
068. 만법(萬法)은 모두 마음에서 생긴다…元曉大師
원효(元曉;617∼686) 대사는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속성은 설(薛)씨이고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원효 대사가 의상 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求法)의 길에 올랐다가 어느 날 무덤 사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몹시 지치고 갈증이 나던 차에 그릇에 고인 물을 발견하고는 매우 시원하게 마셨다. 이튿날 보니 전날 밤에 마셨던 물은 다름 아닌 해골바가지에 담겼던 물이었다. 문득 구토증이 일어나는 순간 원효 대사는 확연한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며 말했다.
"마음이 생기면 우주 만물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물이나 깨끗한 물이나 서로 다를 것이 없구나. 부처님도 이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
원효 대사는 조용히 일어나 의상 대사에게 말했다.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소. 스님이나 다녀오시오."
의상 대사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 목숨을 걸고 온길이 아닙니까?"
"당나라에 유학가야 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오. 스님이나 다녀오시오."
하루는 원효 대사가 분황사(芬皇寺) 무애당(無碍堂)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제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웬일이냐?"
"요석 공주(瑤石公主)께서 금란가사(金 袈裟)를 보내 왔습니다."
원효 대사는 제자가 내민 금란가사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너의 눈에는 법의(法衣)로 보이는 모양인데 나의 눈에는 한 여인의 수많은 번뇌가 얽혀 있는 망상 뭉치로 보이는구나. 너나 입어라."
원효 대사는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음을 벌써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 대사가 어느 날 멀뚱히 서 있는 제자에게 물었다.
"대안(大安) 스님은 지금 어디 계신다더냐?"
"남산의 굴속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길로 원효 대사는 대안 스님을 찾아갔다. 대안 스님은 조그만 굴속에서 너구리 새끼를
안고 있었다.
"스님!"
대안 스님은 뒤를 돌아다 보고 너털웃음으로 답했다.
"하! 하! 마침 잘 오셨소. 이놈의 너구리 새끼들이 어미를 잃었기에 들고 왔습니다. 경주에 가서 젖을 얻어 올 때까지 이놈들의 어미가 되어 주시오."
그리고 대안 스님은 서라벌로 젖을 구하러 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너구리 새끼 중에 한 마리가 굶주림에 지쳐 죽어 버렸다. 원효 대사는 죽은 너구리 새끼를 안고 극락에 환생하라고 ≪아미타경≫을 외웠다. 이때 대안 스님이 젖을 얻어 돌아와 보니 굴속에서 원효 대사의 경 읽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대안 스님이 물었다.
"무엇하고 있습니까?"
"이놈의 영혼이라도 왕생극락하라고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허허, 그 경 소리를 죽은 너구리 새끼가 알아 듣겠습니까?"
대안 스님의 말에 원효 대사는 돌아보며 말했다.
"너구리가 알아듣는 경이 따로 있습니까?"
"있지요. 제가 읽을 테니 스님도 들으시오."
대안 스님은 얻어온 젖을 살아 있는 새끼들에게 먹이며 말했다.
"이것이 너구리 새끼가 알아듣는 경입니다."
원효 대사와 대안 스님이 서라벌의 저잣거리를 걷다가 문득 대안 스님이 말을 꺼냈다.
"원효 스님, 오늘 저녁 삼악도(三惡道)나 구경합시다."
"삼악도라니요?"
대안 스님은 껄껄 웃으며 기방(妓房)을 가리켰다.
"저곳이 삼악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서 제도합시다."
069. 산 고기를 가랑이에 끼고 다니다니…憬興法師
경흥(憬興;생몰 연대 미상) 법사는 웅천주(熊川州) 사람으로 신라 문무왕 때의 국사(國師)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삼장(三藏)에 통달하고 명망을 크게 떨쳤다.
경흥 법사는 궁중에 출입할 때 항상 말을 타고 앞뒤에 종을 거느리고 다녔다. 어느 날 궁중에 들어갔다가 절로 돌아와, 절 앞 하마대(下馬臺)에 이르러 말에서 막 내리는 중이었다. 그때 한 스님이 하마대 옆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마른 고기를 가득 담은 광주리를 지고 앉아 아픈 다리를 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명색이 먹물들인 옷을 입은 스님의 신분으로 더러운 고기를 지고 다니며 비린내를 풍기는가?"
그러자 그 스님은 종을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응수했다.
"너희들이 모시고 다니는 큰스님은 두 다리 사이에 산 고기도 끼고 다니는데 내가 시장에서 파는 죽은 고기를 등에 좀 지고 다니기로 무슨 흉될 것이 있으며 책잡힐 것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냄새가 난다고 야단이니 지고 갈 수밖에 없군."
그 스님은 고기 광주리를 지고 가버렸다. 이것을 들은 경흥 법사가 말했다.
"보통 스님으로는 나를 비난할 사람이 없는데, 내가 말을 타고 다닌다 하여 이와 같이 물고기를 지고 와서 야유하고 풍자를 하니 이는 보통 스님이 아니다."
경흥 법사가 하인으로 하여금 그 스님을 따라가 보게 하였으나 스님은 온데간데 없고 문수상(文殊像) 앞에 그 스님의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경흥 법사는 너무 이상해서 그 광주리를 들여다본 즉 그것은 고기가 아니라 소나무 껍질이었다.
이때 경흥 법사는 깊이 깨우침을 얻었다.
"문수보살 성현께서 나를 깨우치시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로구나."
이후로 경흥 법사는 평생 동안 다시는 말을 타지 않았다.
070. 나무에서 고기를 잡으려 하는가…廣德和尙
광덕(廣德;생몰 연대 미상) 화상은 신라 문무왕 때의 승려로 처를 거느리고 살림을 하면서
도를 닦았다.
광덕 화상은 엄장(嚴莊) 화상과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그들은 굳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먼저 서방 극락세계로 들어갈 때는 서로 알리기로 하세."
이때 광덕 화상은 서라벌의 분황사 서쪽 마을에서 처와 살면서 염불을 하며 수도를 하였고
엄장 화상은 남산(南山)에서 혼자 수행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엄장 화상의 창 밖에서 광덕 화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제 서방 극락세계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게."
이튿날 엄장 화상이 광덕 화상을 찾아가니 그는 전날 죽음의 길로 떠난 뒤였다. 엄장 화상은 광덕 화상의 아내와 함께 장사를 치른 뒤에 말했다.
"친구도 떠나갔으니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 화상의 처도 쾌히 승낙했다. 그날 밤 동침을 요구하자 그녀가 말했다.
"스님이 서방 극락세계를 원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사옵니다."
엄장 화상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친구도 그랬는데 어찌해서 나는 극락에 못 간다는 것이오."
그녀는 단정히 앉아 말했다.
"그 스님은 저하고 10년을 같이 동거했지만 한번도 동침한 일이 없고 매일 단정히 앉아
염불과 수도에만 전념했습니다."
엄장 화상은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길로 원효 대사를 찾아가 일심으로 수행했다.
071. 인왕(人王)과 법왕(法王)의 차이…福淸玄訥
복청(福淸;생몰 연대 미상) 선사는 신라 후기의 스님이다. 중국에 건너가 설봉(雪峰)의 법을 이었으며 천주(泉州)에 살았다.
어떤 사람이 복청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인왕(人王)입니까?"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느니라."
"어떤 것이 법왕(法王)입니까?"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지 않고, 손으로 땅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인왕과 법왕과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스스로 판단해 보라."
"학인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님께서 일러주십시오."
"내년이면 또 새 가지가 있어서 봄바람에 어지럽기 그지없으리."
어떤 스님이 복청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보리(지혜)입니까?"
"그대는 반년 양식을 잃었느니라."
"어째서 반년 양식을 잃었습니까?"
"그저 남의 쌀 한 말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072. 해와 달은 동서(東西)가 따로 없다…通曉梵日
통효(通曉;810∼889) 선사는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 속성은 김(金)씨, 법명은 범일이다.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출가인들과 동학들의 모범이 되었다. 831년에 입당(入唐)하여 염관제안(鹽官齊安)을 만나 '평상심이 도'라는 말에 크게 깨달았다. 그 후 약산유엄을 찾아가 도를 논하는 등 사방을 편력하다가 847년 귀국하여 사굴산문(사굴山門)의 개조가 되었다.
처음 통효 선사가 선지식을 찾아 두루 참문(參問)하던 끝에 염관 제안을 뵈니 그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동국(東國)에서 왔습니다."
염관이 다시 물었다.
"수로(水路)로 왔는가, 육로(陸路)로 왔는가?"
"두 길을 모두 거치지 않고 왔습니다."
"두 길을 모두 거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
"해와 달이 다니는데 동 서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이에 염관이 크게 칭찬하였다.
"실로 동방(東方)의 보살이로구나."
어느 날 통효 선사가 약산(藥山)을 찾아가니 약산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통효 선사가 말했다.
"강서(江西)에서 왔습니다."
"뭣하러 왔는가?"
"화상을 찾아왔습니다."
"여기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찾아왔는가?"
"만약 화상께서 한 걸음만 나아갔더라도 화상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에 약산이 찬탄하며 말했다.
"참으로 기이하구나, 참으로 기이하구나! 밖에서 들어온 맑은 바람이 사람을 얼리는구나!"
073. 금이 귀하다고 눈에 넣으랴…齊雲靈照
제운(齊雲;870∼947) 선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스님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설봉(雪峰) 밑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그의 법을 이었다. 언제나 누더기 한 벌을 걸치고 대중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사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포납(照布衲)'이라고 불렀다. 전왕(錢王)이 선사를 흠모하고 존중하여 자의(紫衣)를 하사하고 호를 진각(眞覺)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제운 선사에게 물었다.
"들으니 선사께서는 '자리를 떠나기 전에 벌써 여러 사람을 만났다.' 하셨는데 '자리를 떠나기 전의 자리'는 어떤 자리이기에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가 나의 힘을 얻지 못했더라면 어찌 이런 질문을 펼 수 있었겠나."
제운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하고 있는가?"
"부처님 몸의 먼지를 털고 있습니다."
"이미 부처라 했으면 어째서 먼지가 있는가?"
그 스님이 대답을 못하니 제운 선사가 스스로 대답했다.
"금 부스러기가 아무리 귀해도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되느니라."
어느 날 산으로 올라오는 한 스님을 보고, 제운 선사는 손에 들고 있던 주장자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자네 것과 이것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 스님이 대답을 못하고 서 있으니 제운 선사가 대신 말했다.
"다르다면 눈이 산을 보았고, 같다면 산이 눈을 본 것이다."
074. 밥은 내가 먹고 배는 누님이 부를 수만 있다면…普照知訥
보조(普照;1158∼1210) 국사는 고려 중기의 고승이다. 속성은 정(鄭)씨이고 법명은 지눌(知訥)이다. 호는 목우자(牧牛子)이고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다. 8세에 출가하여 1182년에 승선(僧選)에 뽑혔다.
보조 국사에게는 누님이 있었다. 보조 국사가 누님에게 항상 염불을 하라고 할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부처님같이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염불 공부를 해서 무엇하겠나. 설사 내가 도를 닦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까지 제도해 주는 아우가 있는데 나 하나쯤 좋은 곳으로 제도해 주지 않을려고?"
보조 국사는 말로써는 누님을 제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어느 날 누님이 절에 오는 것을 미리 알고 국사의 방에 진수성찬을 가득 차려 놓았다. 이때 누님이 들어오자 국사는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누님 오셨습니까? 앉으십시오. 막 공양을 하려던 참입니다."
국사는 혼자서 음식을 맛있게 들고는 상을 물렸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보조 국사의 누님은 섭섭하고 노여운 감정이 일었다.
"자네가 오늘은 왜 이러나?"
"무슨 말씀입니까, 누님?"
"무슨 말이라니? 나는 그만 집으로 가야겠네."
"진지나 잡숫고 가셔야지 먼 길을 그냥 가시면 시장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밥을 줄 생각이 있으면서 이제까지 있었나? 몇십 리 결어온 사람을 보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한번 먹어 보라는 말도 없으니 그게 사람의 짓인가?"
"누님, 제가 이렇게 배가 부르도록 먹었는데 누님은 왜 배가 아니 부르십니까?"
"자네가 먹었는데 어찌 내 배가 부르단 말인가?"
"제가 도를 깨치면 누님도 제도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동생이 배부르면 누님도 배가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밥은 창자로 들어가고 염불은 마음으로 하며 정신이 극락을 가는 것이니 밥 먹고 배부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제가 음식을 먹어도 누님이 배부르지 않듯이 내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나의 영혼은 극락에 가도 누님은 갈 수 없습니다. 누님이 극락에 가고 싶으면 누님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음도 대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극락도 대리 극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보조 국사는 상좌를 시켜 누님의 점심상을 차려 오게 해놓고 말했다.
"누님, 이 동생이 제도할 것을 믿지 말고 당신 자신의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시오 내생에 극락으로 가도록 하십시오."
이후로 보조 국사의 누님은 지성으로 염불을 하며 수행하였다.
075. 물이 더러울 때 무엇으로 씻는가...眞覺慧諶
진각(眞覺;1178∼1234) 국사의 속성은 최(崔)씨이며 법명은 혜심(慧諶)이다. 호는 무의자(無衣子)로 일찍 진사(進士)에 급제했으나 보조 국사(普照國師)에게 출가해 그의 법맥을 이었다.
어떤 스님이 진각 국사에게 물었다.
"지금 한 글귀로 묻습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국사가 대답했다.
"구름이 흩어지면 집집마다 휘영청한 달이요, 가을이 오니 곳곳이 시원하구나."
진각 국사가 부채를 보이며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깨달은 사람도 이것을 부채라 할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도 이것을 부채라고 한다. 다같이 부채라 한다면 어떻게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분별하겠는가?"
그 스님은 대답을 못했다.
어느 날 진각 국사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다가 좌우에 있는 스님을 보고 말했다.
"물이 얼마나 깊은가?"
한 스님은 대답을 했고 한 스님은 말이 없었다.
이때 진각 국사는 한 스님을 붙잡고 왼쪽 볼때기를 때리며 말했다.
"이 손바닥은 대답한 놈이 받아라."
다시 오른쪽 볼때기를 때리고는 말했다.
"이 손바닥은 말이 없는 놈이 받아라."
또 정수리를 때리고는 말했다.
"이 손바닥은 내가 받겠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다시 한 손바닥이 있는데 이것은 누구에게 줄까?"
또 한번은 진각 국사가 어떤 스님에게 말했다.
"한산시(寒山詩)에 '살살 바람이 그윽한 솔에 불어 가까이 들으니 그 소리 더욱 좋다' 하였으니 그 좋은 것이 어디 있느냐?"
스님이 대답을 못하자 국사가 말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하루는 진각 국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더러운 물건은 물로 씻지만 물이 더러울 땐 무엇으로 씻는가?"
진각 국사가 젊었을 때의 일이다. 보조 국사를 모시고 길을 가는데 길바닥에 다 떨어진 짚신 한 짝이 눈에 띄었다.
보조 국사가 말했다.
"신발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갔지?"
이때 진각이 얼른 대답했다.
"그때 만나지 않았습니까?"
보조 국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각에게 법을 전해 주었다.
076. 네가 기쁘니 나도 기쁘다…白雲景閑
경한(景閑;1299∼1375) 선사는 고려 말의 승려이며 법호는 백운(白雲)이다. 처음 석옥청공(石屋淸珙) 화상에게 법을 받았고 1353년에 도를 깨쳤다. 1360년에는 해주 신광사에서 종풍(宗風)을 드날리다 77세에 취암사(鷲岩寺)에서 입적하였다.
경한 선사는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데바달다가 지옥에 있을 때 세존은 아난을 보내어 묻게 했다.
'그대는 지옥에서 그 고통을 견딜 만한가?'
데바달다가 말했다.
'나는 지옥에 있어도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세존은 다시 아난을 보내어 묻게 했다.
'그대는 지옥에서 언제 나오겠는가?'
데바달다는 말했다.
'세존이 지옥에 들어올 때 나는 나갈 것이다.'
아난이 말했다.
'세존께서는 삼계(三界)의 큰 법(法)이신데 어찌 지옥에 들어갈 이치가 있겠는가?'
데바달다가 이 말을 받아 말했다.
'세존이 지옥에 들어올 이치가 없다면 내가 어찌 지옥에서 나갈 이치가 있겠는가?'
대중들이여, 데바달다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겠는가? 그것은 지옥과 극락이 다 정토(淨土)로서 법계(法界)의 성품은 모두 마음이 지은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무엇을 부처라 하고 무엇을 악마라 하고 무엇을 극락이라 하고 무엇을 지옥이라 하겠는가?"
제자 석찬(釋瓚)이 깨달음을 얻은 후 경한 선사에게 세 번 절하고 곁에 서 있자 경한 선사가 말했다.
"너의 마음이 몹시 기쁜 것 같구나."
"매우 기쁩니다."
"어떤 도리를 얻었기에 너의 마음이 그처럼 기쁜가?"
"그것이 어떤 것인 줄 알고 나니 마음이 매우 기쁩니다."
이에 경한 선사가 말했다.
"내가 너의 기쁨을 도와 주리라. 네가 기뻐하니 나도 기쁘고, 나도 기뻐하니 시방의 모든 부처와 보살들도 기뻐하고 기뻐하실 것이다."
경한 선사는 임종 때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부지런히 수행하거라. 내가 지금 물거품처럼 꺼진다 해서 슬퍼하지 말아라. 인생 70은 옛날부터 드문 일인데 77년 살다가 77년에 가나니, 곳곳이 다 돌아갈 길이요, 모든 곳이 내 고향인데 무엇하러 배를 장만해서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가?"
077. 큰 도는 문이 없는데 어디로 들어가려는지…太古普愚
보우(普愚;1301∼1382) 선사는 충청도 홍주(洪州) 사람이다. 속성은 홍(洪)씨, 이름은 보허(普虛)이며 법호는 태고(太古)이다. 13세 때 경기도 회암사의 광지(廣智) 선사에게 출가하고 37세 때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1356년 고려 공민왕이 왕사로 봉했다.
보우 선사가 삼각산(三角山)의 중흥사(重興寺) 주지로 두 번째 취임할 때였다. 산문(山門) 앞에 이르자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도 이 문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늘도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중간에 머물지도 않는다. 대중들은 이 보우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를 보는가?"
보우 선사가 삼문(三門)을 가리키며 말했다.
"큰 도는 문이 없는데, 여러 스님들은 대체 어디로 들어가려고 하는가?"
078. 지공의 천검(千劍), 나옹의 일검(一劍)…懶翁慧勤
나옹(懶翁;1320∼1376) 선사는 경상도 영해(寧海) 사람이다. 속성은 아(牙)씨이며 이름은 원혜(元慧)이다. 법명은 혜근(惠勤, 慧勤)이고 법호는 나옹이다. 20세에 요연(了然) 선사에게 출가한 후 1347년에는 원(元)나라 연경(燕京)의 법원사(法源寺)에 갔다. 당시 그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指空) 화상을 만나 불법을 닦았다. 고려 우왕(禑王)이 왕사로 봉했다.
나옹 선사는 처음 요연(了然)를 찾아가 머리를 깎았다. 요연 선사는 나옹의 머리를 깎으면서 그가 큰 인물임을 알고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무슨 일로 머리를 깎는가?"
"삼계(三界)를 초월하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출가하였습니다. 부디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요연 선사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여기 있는 이것(나옹을 말함)은 무슨 물건인가?"
"다만 말할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것이 여기 있습니다. 볼 수 없는 몸을 보고 싶고, 찾을 수 없는 물건을 찾고 싶습니다. 어떻게 닦아나가야 합니까?"
"나도 역시 그대 같아 아직도 모르고 있다. 다른 선사를 찾아가서 묻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첫 스승과 이별한 나옹은 선지식을 찾아 수행의 길을 떠났다.
나옹 선사가 원나라의 연경에 있는 법원사에 도착하여 그 당시 유명한 지공 화상을 찾아가니 지공 화상이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를 타고 왔느냐? 육로로 왔느냐? 아니면 신통으로 왔느냐?"
"신통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내 앞에서 신통을 보여라."
그러나 나옹 선사는 그저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움켜잡고 말없이 있었다. 이에 지공 화상이 다시 물었다.
"누가 그대더러 여기까지 오라 하던가?"
"스스로 왔습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후세 사람을 위하여 왔습니다."
이에 지공 화상은 나옹 선사를 대중들에게 소개하며 함께 머물도록 했다.
나옹 선사가 수행승으로 다니며 평산(平山) 화상을 찾아갔을 때였다. 평산 화상이 물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을 만났는가?"
나옹 선사가 대답했다.
"지공 선사를 뵈었는데 그분은 날마다 천검(千劍)을 쓰고 있었습니다.
평산 화상이 말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가져오라."
그러자 나옹 선사가 앉아 있던 방석으로 평산 화상을 쳤다. 평산 화상은 자리에서 쓰러지면서 크게 외쳤다.
"이 도적이 나를 죽인다."
나옹 선사가 평산 화상을 붙들어 일으키며 말했다.
"나의 검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합니다."
079.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無學自超
무학(無學;1327∼1405) 대사는 경상도 합천 사람으로 속성은 박(朴)씨이다. 법명은 자초(自超)이고 법호는 무학(無學)이다. 나옹(懶翁) 선사의 법맥을 이어 조선불교의 터전을 닦은 스님이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 대사를 수창궁으로 불러들여 환담을 나누다가 문득 농을 던졌다.
"스님은 오늘 따라 돼지같아 보입니다."
무학 대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조의 말을 받았다.
"오늘 따라 대왕께서는 부처님같이 보입니다."
태조는 의외란 듯이 물었다.
"어째서 농을 하지 않소이까."
이때 무학 대사가 말했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080. 참 도(道)는 따로 있지 않다…碧松智嚴
벽송(碧松;1464∼1534) 선사는 전라도 부안 사람으로 속성은 송(宋)씨이며 법명은 지엄(智嚴)이다. 28세 때 허종(許琮)의 군대에 들어가 여진족과 싸워 공을 세웠으나 삶과 죽음을 체험한 후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으로 들어가 조징(祖澄) 대사 밑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조선 중종 15년(1520) 3월 지리산으로 들어가 초암에 머물면서 외부와의 일체 교류를 두절한 채 정진하였다. 중종 29년(1534) 겨울에 ≪법화경≫을 강하다가 71세로 입적했다.
벽송 스님은 처음으로 정심(正心) 선사를 찾아갔다.
"소승 문안드립니다."
"어디서 온 납자(衲子)인가?"
"참선의 묘리를 배우고자 왔습니다."
"나는 도(道)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보다시피 먹고 살기에 바쁘네, 그리고 자네가 거처할 방도 없고."
벽송 스님은 그날부터 토굴 하나를 따로 짓고 정심 선사와 같이 나무를 해다 팔며 생활하였다. 날마다 두 스님은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리고 벽송 스님은 산에 오를 때마다 정심 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오늘은 좀 바빠서 말해 줄 수 없다."
"스님께서 깨쳐서 얻은 도리만 일러주십시오."
"산에 가서 빨리 나무를 하자. 그것은 내일 말해 주겠다."
이렇게 대답을 3년이나 미루어 왔다.
벽송 스님은 어느 날 정심 선사가 없는 사이에 짐을 꾸려 떠나면서 밥 짓은 공양주 보살에게 말했다.
"저는 오늘 떠나야겠습니다."
"별안간 무슨 소립니까?"
"제가 스님을 찾아온 것은 도를 배우러 온 것이지 고용살이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3년이 지나도록 도를 가르쳐 주지 않으니 더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정심 스님이 오시면 떠나세요."
"지금 떠나겠습니다."
벽송 스님은 일종의 분노를 안고 발길을 옮겼다.
이때 정심 선사가 나무를 해가지고 돌아오자 공양주 보살이 다급하게 말했다.
"벽송 스님이 떠났습니다."
"왜 떠났는가?"
"도를 가르쳐 주지 않아 화가 나서 떠났습니다."
"무식한 놈,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았나 제놈이 그 도리를 몰랐지. 자고 나서 인사할 때도 가르쳐 주었고 산에 가서 나무할 때도 가르쳐 주었지."
"그런 것이 도입니까?"
"도가 따로 있나? 따로 있다면 도가 아니고 번뇌지."
"그럼 저에게도 가르쳐 주었겠습니다."
"암, 가르쳐 주었지?"
"벽송 스님은 왜 몰랐을까요?"
이때 정심 선사가 토굴 밖으로 뛰어나가 멀어지는 벽송 스님을 소리쳐 불렀다. 이에 벽송 스님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정심 선사가 또 한번 크게 소리쳤다.
"내 법 받아라."
이 순간 벽송 스님은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081. 달빛 비쳐도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淸虛休靜
청허(淸虛;1520∼1604) 선사는 평안도 안주(安州) 사람으로 속성은 최(崔)시, 이름은 운학(雲鶴)이다. 21세에 숭인(崇仁) 스님을 은사로 부용영관(芙蓉靈觀) 선사를 전법사로 출가했다. 묘향산에 오래 주석했으므로 서산(西山) 대사라 칭했다.
선조 22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있었다. 포도청에 검거돼 문초를 당하던 무업(無業)이라는 사람이 선사를 무구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다.
역모사건의 연루자를 국문(鞠問)하는 국청에는 거적에 싸인 시체, 피에 젖은 형틀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등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선사는 겁에 질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다른 연루자와는 달리 매우 의연했다. 말은 조리가 있고 분명했으며 결코 변명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마치 심산유곡의 도량에 앉아 있는 듯 태연자약하게 묘향산과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까지 했다. 곧 선사의 무죄가 입증되었고 선조는 선사의 인품에 감명받아 친히 묵죽(墨竹) 한 폭에 시 한 수를 지어 하사했다.
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뿌리는 땅에서 난 것 아니네
달빛 비쳐도 그림자 드리우지 않고
바람이 흔들어도 소리 아니 들리네
葉自毫端出
根非地面生
月來難見影
風動未聞聲
선사가 화답했다.
소상강 변의 우아한 대나무가
임금님 붓 끝에서 나와
산승의 향불 사르는 곳에서
잎마다 가을 바람에 서걱거리네
瀟湘一枝竹
聖主筆頭生
山僧香?處
葉葉帶秋聲
082. 장군의 머리가 조선의 보배요…四溟惟政
사명(四溟;1544∼1610) 대사는 경상도 밀양군 무앙면 고라리(古羅里;괴나리 과나루)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임(任)씨이고 이름은 응규(應奎)이다. 16세에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信默) 화상을 은사로 출가 득도하였다. 1561년 승과(僧科)에 합격한 후 서산(西山) 대사의 법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승장(義僧將)으로 많은 활약을 하였다.
선조 27년(1594)에 사명 대사는 임진왜란의 휴전강화를 위해 울산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치고 있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중으로 들어갔다. 왜적들이 창칼을 들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적진에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들어가 담소(談笑)를 시작했다. 말 끝에 가등청정이 대사를 보고 물었다.
"당신네 나라에 보배가 많지요?"
이에 사명 대사는 태연스레 말했다.
"우리 나라에는 별달리 보배가 없소. 오히려 당신 나라에 큰 보배가 있다고 생각하오."
가등청정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나라의 보배를 물었는데 우리 나라에 보배가 있다니 무슨 뜻이오."
사명 대사는 꼿꼿이 앉은 채 가등청정을 보며 말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장군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소."
가등청정은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러자 사명 대사가 말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1천 근의 황금과 1만 호의 식읍(食邑)을 현상금으로 내걸고 장군의 머리를 구하고 있으니 그보다 더 큰 보배가 어디 있겠소"
083. 곡차를 마실 만한 그릇…震默一玉
진묵(震默;1562∼1633) 선사는 조선조 인조 때 스님으로 법명은 일옥(一玉)이다. 7세에 전주(全州) 봉서사(鳳棲寺)에 출가하였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영리하여 경을 막힘 없이 해석하였다. 한번 눈에 스치면 외워 누구도 스승이 되어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진묵 선사가 전주의 봉서사에 있을 때였다. 당대의 대유학자 봉곡(鳳谷) 선생이 진묵 선사를 초대했다. 술과 기름진 고기를 마련해 놓은 자리에 진묵 선사가 앉자 봉곡 선생이 말했다.
"스님은 술은 아니 드시지만 곡차라면 좋아하시오? 여기 곡차도 많고 고기도 많으니 한번 마음껏 자셔 보시지요."
진묵 선사가 대답했다.
"그거 참 고마운 일이오. 그러나 나는 양이 커서 한 사발의 곡차나 한 그릇의 물고기 안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으니 주려거든 곡차도 동이로 주시고, 고기도 냄비째 주셔야 하오."
진묵 대사는 동이째로 술을 마셔 버렸다.
한번은 진묵 선사가 제자와 함께 연못가를 거닐다가 물 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제자에게 물었다.
"얘야, 저 물 속에 비친 그림자는 누구의 것이냐?"
"스님의 그림자지 누구의 그림자입니까!"
이에 진묵 선사가 말했다.
"너는 어찌 석가여래의 그림자로 보지 못하고 단지 진묵의 그림자로만 보느냐?"
진묵 선사가 전라도 부안군 변산의 월명암(月明庵)에 머물 때였다. 시자(侍者)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속가(俗家)로 가면서 진묵 선사에게 말했다.
"공양을 준비해 놓았으니 때가 되면 드십시오."
"알았다."
이때 월명암의 스님들은 모두 탁발하러 나가고 진묵 선사 홀로 창에 기대 앉아 문지방에 손을 얹은 채 ≪능엄경≫을 읽고 있었다.
시자가 속가에서 하룻밤 묵고 절에 돌아와 보니 진묵 선사는 전날에 앉아 있던 그대로 경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바람에 문이 흔들려 문지방 사이로 손가락을 찧어 피가 흐르는데도 태연스러웠다. 탁상의 공양물도 차려 놓은 그대로였다.
시자가 문안을 드리자 진묵 선사는 그제사 독서삼매에서 깨어나 시자에게 말했다.
"너는 왜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벌써 왔느냐?"
어느 날 진묵 선사가 길을 가다가 소년들이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아서 끓이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몸을 구부려 끓는 솥 안을 보며 탄식했다.
"잘 놀던 고기들이 죄없이 삶아지는 괴로움을 받는구나."
이에 한 소년이 조롱을 했다.
"스님께서 이 고깃국을 잡숫고 싶은 게로군요."
"암, 준다면야 맛있게 먹지."
"그럼 이 한 솥을 모두 스님께 드릴 터이니 다 드셔 보셔요."
그러자 선사는 구리솥을 번쩍 들어 단숨에 먹어 치웠다. 소년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금하라 하셨는데 스님은 고깃국을 자셨으니 진짜 스님이 아닙니다."
진묵 손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고기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그것을 살리는 일은 내가 하기에 달렸지."
그리고는 아랫도리를 벗고 냇물을 등지고 앉아 설사를 했다. 그러자 수많은 은빛 물고기들이 진묵 선사의 항문에서 쏟아져 나와 물 위로 솟구치며 뒤놀았다. 진묵 선사는 자유롭게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말했다.
"귀여운 물고기들아! 멀리 큰 강으로 가서 다시는 삶아지는 고통을 받지 말거라."
하루는 진묵 선사가 시자를 부르더니 다짜고짜 소금을 가지고 봉서사 남쪽 부곡(婦谷) 골짜기로 가라고 하자 시자는 물었다.
"누구에게 갖다 주라는 것입니까?"
"가보면 알게 된다."
시자가 소금을 가지고 재를 넘어 골짜기로 내려가니 사냥꾼 두어명이 노루고기를 회쳐 놓고 소금이 없어 먹지 못하고 있었다. 시자가 소금을 갖다 주자 그들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는 반드시 진묵 노장께서 우리들의 허기를 불쌍히 여겨 보내 주신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부처님이 골짜기마다 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군."
084. 매미 울음소리가 최상의 설법…虛舟德眞
허주(虛舟;1806∼1888) 선백(禪伯)의 법명은 덕진(德眞)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학문을 성취, 도를 통하였으나 사람을 피하여 송광사 선암사 칠불사 등 명찰에서 지내다가 대원군의 청으로 철원 보개산 초암과 지장암에서 기도 불사를 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사부 대중이 운집한 근세의 이름난 선객이다.
어느 때 신도 수백 명이 화계사에 모여서 허주 선백에게 설법을 청했다. 선백이 법상에 올라가 한 시간이나 말없이 앉았다가 그냥 내려왔다. 뒤에 어느 신도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허주 선백이 말했다.
"내가 말하려는 자리는 언어도 끊어지고 생각도 끊어진 곳이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한테는 눈꼽만큼도 허물이 없다."
허주 선백의 무언설법(無言說法)은 그 가치가 유언(有言) 설법보다 더욱 높아졌다. 그 후 신도들이 다시 허주 선백에게 청했다.
"무언설법은 못 알아듣는 사람이 많으니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법해 주십시오."
허주 선백이 쾌히 승낙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많은 신도들이 다시 화계사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허주 선백이 법상에 올라갔다. 그러나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청중들은 수군거렸다.
"말로 하신다더니 또 무언설법인가?"
허주 선백은 청중의 수군거림을 못 들은 체하고 태연히 앉아 있다가 청중 가운데 무료와 권태를 이기지 못해 하품하는 사람이 보이자 문득 입을 열었다.
"용하다, 용해."
이 말을 해놓고는 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뒷말을 기다리다 못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스님, 무엇이 용하다는 말씀입니까?"
"굼벵이가 땅속에 엎드려 있다가 앙금앙금 기어나왔단 말이야."
이 말을 끝내고 다시 침묵을 지켰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물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씀입니까?"
"그 굼벵이가 나무 밑에서 등이 터지더니 매미가 되어서 또 앙금앙금 나뭇가지로 기어올라 가서……."
허주 선백은 여기까지 말하고 또 침묵을 지켰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응, 정신을 차려서 '맴맹'하고 울었지. 이것이 용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중생이 번뇌 속에 묻혀 있다가 염불하고 참선하여 부처가 되는 것도 이것과 똑같단 말이야. 용하고 용하지."
이 말을 끝낸 허주 선백은 다시 "맴맴!" 하고 매미 우는 소리를 내고 법상에서 내려왔다. 이것이 유명한 허주 선백의 매미법문이다.
085. 찬 화로에서 연기를 피우리라…一如信淳
일여(一如;1807∼1832) 스님은 전라도 완도군 청해의 망리(望里) 사람이다. 속성은 이(李)시, 법명은 신순(信淳), 법호는 일여이다. 16세에 두륜산 대둔사로 들어가 당대의 선지식 경월(鏡月) 선사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은 뒤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일여 스님은 금강산 제일의 명소인 관음봉 아래 자리잡은 만회암(萬灰庵)에 이르자 불현듯 오랜 과거부터 살아온 자신의 거처인 양 아늑한 느낌이 들어 그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여기서 목숨을 걸고 성도(成道)해 보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곧 다음과 같은 서원을 세웠다.
'이곳 관음봉에서 백일 기도를 올리되 불꺼진 찬 화로에서 백일 안에 연기가 오르면 기도를 마치려니와 백일이 다 되어도 연기가 오르지 않는다면 내 육신을 불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리라.'
일여 스님은 이때부터 기도하는 틈틈이 나무를 베다가 볕에 말려 차곡차곡 쌓았다. 만약 기도의 효험이 없을 경우에는 나뭇단 위에 올라 부처님께 공양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러나 참으로 처절할 정도의 구도집념을 불태우며 기도를 했건만 백일이 다 되어가도 식은 화로에서는 불씨가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정하게 시간은 흘러 백일이 되었으나 식은 화로에서는 불씨가 살아나지 않았다.
하루는 일여 스님이 백인 스님을 찾아가 말했다.
"기도를 시작한 날로부터 백일이 지났는데도 향로에서 연기가 오르지 않으니 나의 정성이 부족한가 보네. 이제 나는 곧 육신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드릴까 하네."
백인 스님은 깜짝 놀랐다.
"자네에게는 부모님과 스승이 계시지 않는가.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네."
"나는 이제 끝났네."
이 말을 남기고 옷소매를 떨치며 밖으로 나갔다. 백인 스님은 일여 스님을 따라가며 말렸지만 끝내 만류할 수 없었다.
법당 건너편에서 연기가 치솟아 백인 스님이 정신없이 달려가 보니 이미 일여 스님은 장작더미에 불을 지르고 그 위에 앉아 염불을 하고 있었다.
"자네, 도대체 왜 이러나! 빨리 내려오게."
백인 스님은 엉겁결에 곁에 쌓여 있는 눈을 두 손으로 퍼다가 불길 속에 던졌으나 뜨거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불길 속에서 일여 스님이 말했다.
"자네는 이 육신이 흩어지면 마치 꿈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게송도 모르는가? 나는 고통이 지배하는 이 사바세계를 떠나 즐거움이 가득찬 극락세계로 가려네."
백인 스님은 울음섞인 목소리로 일여 스님에게 말했다.
"자네, 만약 이 산에서 죽는다면 극락왕생은 못할 걸세."
"어째서 극락에 왕생하지 못한단 말인가?"
"옛날 의상(義湘) 조사께서도 맑고 깨끗한 이 도량을 더럽힐까봐 이 산에서 죽지 못하셨으니 자네도 속히 이리 나오게."
이 말에 요지부동일 것 같던 일여 스님도 마침내 마음에 충격을 받고 불길 속에서 나왔다. 백인 스님은 일여 스님을 눈 위에 내려놓은 뒤 급히 부근 암자로 달려가 스님들께 도와 줄 것을 호소하였다.
뭇 스님들이 달려와 보니 마치 흰 눈 위에 먹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새까맣게 탄 일여 스님이 아직 기운이 남아 있었던지 계속 중얼중얼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일여 스님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여러 스님들을 향해 말했다.
"소승이 육신을 불사르려 한 것은 극락에 왕생하고 싶어서 스스로 한 것일 뿐 다른 사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날 밤 일여 스님은 마침내 입적했다.
086. 죽으면 썩을 고깃덩이인 것을…鏡虛惺牛
경허(鏡虛;1849∼1912) 선사는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子動里) 사람으로 속성은 송(宋)씨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이며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9세때 경기도 청계산 청계사의 계허(桂虛) 대사에게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23세 때 동학사에서 학인을 가르치다가 악성 호열자가 만연되어 시신(屍身)이 널려 있는 참혹한 현장에서 생사(生死)의 절박함을 깨닫고는 학인들을 해산시켰다. 이후 참선과 무애행으로 살다가 1912년에 64세로 입적했다.
만공(滿空) 스님이 경허 선사에게 볼 일이 있어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누워 있는 경허 선사의 배 위에 시커먼 뱀 한 마리가 걸쳐 있었다. 만공 스님은 깜짝 놀랐다.
"스님, 이거 뱀 아닙니까?"
경허 선사가 말했다.
"가만 두어라. 내 배 위에서 실컷 놀다 가게."
하루는 천장사(天藏寺)에서 49재(齋)가 있어 떡 과일을 푸짐하게 진설해 놓았다. 이때 경허 선사는 떡과 과일을 내다가 구경온 아이 어른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었다. 이것을 안 주지 스님은 노발대발했다.
"재를 지내고 난 뒤에 주어야지, 어째서 재 지낼 것을 주었느냐?"
그러자 경허 선사가 말했다.
"이렇게 지내는 재가 진짜 재입니다."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등의 쌀 자루에는 쌀이 가득했다. 길은 먼데 몹시 무겁고 피곤했다. 경허 선사가 말했다.
"무겁고 힘들지?"
"예."
"그러면 빨리 가는 방법을 쓸 테이니 너도 따라와야 한다."
"어떻게 빨리 간단 말입니까?"
"좀 있으면 알게 될 거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젊은 아낙네가 물동이를 이고 나왔다. 경허 선사는 그 아낙네의 양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에그머니나."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물동이를 떨어뜨리고 마을로 달려갔다. 이 소문이 곧 마을에 퍼지고 급기야는 몽둥이를 든 마을 사람들이 뛰어왔다.
"저놈들을 잡아라."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두 스님을 마을 사람들은 따라 올 수가 없었다. 이윽고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경허 선사가 말했다.
"쌀 자루가 무겁더냐?"
"그 먼 길을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 재주가 어떠냐? 무거움도 잊고 먼 길을 단숨에 지나왔으니 말이다."
경허 선사가 청양(靑陽) 장곡사(長谷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경허 선사가 곡차를 잘 드신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사람들이 곡차와 파전을 비롯한 여러 안주를 들고 왔다. 이것을 맛있게 먹다가 만공 스님이 물었다.
"스님, 저는 술이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 마십니다. 파전도 굳이 먹을려 하지도 않지만, 생기면 굳이 안 먹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스님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경허 선사가 대답했다.
"나는 술이 먹고 싶으면 밭을 갈아 밀을 심고 가꾸어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고 걸러서 먹을 것이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하여 밭을 일구어 파를 심고 거름을 주며 알뜰히 가꾸고 키워서 파전을 부쳐 먹겠네."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이 먼 길을 나섰다가 때마침 어느 고개에서 쉬고 있는 상여 행렬을 만났다.
경허 선사가 그 행렬 속으로 들어갔다.
"시장해서 음식을 좀 청합니다."
"행상(行喪) 길이니 술밖에 없습니다."
"슬이든 고기든 아무거나 주십시오."
사람들은 별난 스님도 다 보겠다는 듯이 의아해 하면서도 망인(亡人)을 위해 푸짐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상주는 부탁을 하나 했다.
"스님들의 자비로 우리 아버님의 명당(明堂)을 하나 잡아 주실 수 없는지요?"
경허 선사가 말했다.
"명당은 해서 무엇하는가, 죽으면 다 썩은 고깃덩이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느 날 경허 선사는 제자 만공 스님과 길을 가고 있었다. 경허 선사가 만공 스님을 돌아보며 말했다.
"단청불사(丹靑佛事) 권선(勸善)을 하자."
그리고 두 사람은 권선문을 만들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돈을 모은 후 경허 선사가 말했다.
"이만하면 단청불사하기에 넉넉하겠군."
경허 선사는 제자 만공 스님을 데리고 술집으로 들어가 불사 시주금으로 술을 청했다. 만공 스님은 놀랐다.
"스님, 부처님을 팔아서 술을 마시다니 말이나 됩니까!"
아무런 말도 없이 술만 마시던 경허 선사의 얼굴에 취기가 돌았다. 겨울 추위 탓으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경허 선사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아, 이상 더 좋은 단청불사가 어디 있나!"
087. 천진도인의 이상한 산수법(算數法)…慧月慧明
혜월(慧月;1861∼1937) 선사는 충청남도 예산 사람으로 속성은 신(申)씨이다. 11세 때 예산 정혜사의 안수좌(安首座)에게 출가했다. 24세 때 경허 선사의 문하에서 수행을 했다. 부산 선암사(仙巖寺)에 살면서 많은 산지를 개답(開沓)하였고 77세에 입적했다.
혜월(慧月) 선사의 회상(會上)에 고봉 스님이 계셨다. 하루는 혜월 선사가 출타 중인 틈을 타서 고봉 스님은 몇몇 스님을 꼬드겨 이 절에 있던 소를 팔아 그 돈으로 곡차를 실컷 마셨다. 남은 돈으로는 맛있는 반찬을 장만해 대중공양을 했다.
혜월 선사가 돌아와 보니 소가 없어져 버렸고 스님들은 아침 예불도 안 하고 모두 술에 떨어져 자고 있었다. 화가 치민 혜월 선사는 대중을 다 깨웠다.
"누가 소를 가져 갔느냐?"
제자들은 겁이 나서 말도 못하고 고봉 스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혜월 선사는 고봉 스님의 소행인 줄 알고도 모른 체하며 고함을 쳤다.
"누가 내 소를 가져 갔느냐?"
그러자 고봉 스님이 벌떡 일어나 옷을 홀랑 벗고 혜월 선사의 방에서 네 발로 기어다니며 "음매!" 하고 소 우는 흉내를 냈다.
이에 혜월 선사는 고봉 스님의 볼기짝을 한 대 후려치고는 말했다.
"내 소는 어미 소이지 이런 송아지가 아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내쳤다.
어떤 스님이 혜월 선사를 찾아왔을 때 혜월 선사가 물었다.
"자네 어디서 왔나?"
"전라도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무엇하러 왔는가?"
"참선 공부하러 왔습니다."
"참선해서 뭣하려고?"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참선은 앉아서 하는가, 서서 하는가?"
"앉아서 합니다."
이에 혜월 선사가 한마디 쏘았다.
"그놈의 부처는 다리 병신인 모양이지, 앉아만 있게!"
혜월 선사에게는 손수 개간하여 만든 논 서 마지기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유혹에 의해 그 논을 팔았다. 서 마지기를 두 마지기 값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자 제자들이 펄펄 뛰면서 속았다고 했다.
"스님, 그 돈은 두 마지기 값밖에 안 됩니다."
모두 해약하라고 야단들이었다.
이에 혜월 선사가 말했다.
"두 마지기 값을 받고도 논 서 마지기는 그대로 있지 않느냐! 장사는 이렇게 해야지."
혜월 선사가 파계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혜월 선사는 열두어 살 되는 동자승과 함께 살았는데 마치 친구처럼 지냈다. 하루는 혜월 선사가 장에 가려고 절 문을 나서니 방안에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혜월 선사가 돌아오더니 방문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큰스님, 저는 오늘 장에 다녀오겠습니다. 객스님하고 재미있게 노십시오."
"아니, 내 점심은 안 주고 너 혼자 가려고?"
혜월 선사는 동자승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난 후 다시 장을 향해 떠났다. 혜월 선사가 떠나자 동자승은 그 객승을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디서 온 객승인데 건방지게 앉아만 있는가. 우리 스님은 아침 저녁 나에게 문안을 올리는데 당신은 인사도 할 줄 모르더냐?"
객승은 하도 기가 차서 말문을 잃고 있다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동자승을 방안으로 불러들였다.
"네 이놈! 어디서 그런 무례한 짓을 배웠느냐! 당장에 옷을 벗겨 절 밖으로 쫓아낼 것이다."
처음 당하는 호통이요, 절 밖으로 쫓아낸다는 말에 겁이 난 동자승은 빌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리 와서 꿇어앉아라."
동자승은 꿇어앉는 법도 제대로 몰랐다.
"오늘부터 내가 가르치는 대로 하여라."
"네."
"스님이 어디 갔다 오시면, '스님 다녀오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고 앉을 때는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봐라."
저녁 늦게 혜월 선사가 장에서 돌아왔다. 절 문에 들어서면서 "큰스님, 큰스님!" 하며 동자승을 불렀다. 풀이 다 죽은 채 동자승이 밖으로 나가더니 혜월 선사 앞에서 절을 하며 말했다.
"스님, 이제 다녀오십니까?"
혜월 선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 날 저녁을 먹은 후 혜월 선사가 객승에게 물었다.
"스님, 동자승에게 무엇을 가르쳤소?"
"예, 하도 무례해서 예법을 가르쳤습니다."
혜월 선사는 실의와 노기를 띠며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예법을 몰라 저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았겠소. 천진한 그 모습이 하도 좋아 때묻지 않게 정성껏 가꾸고 있었는데 스님이 그 천진성을 깨뜨리고 말았소. 이제 나 하고 인연이 다됐으니 스님이 데리고 가시오."
객승을 따라가는 동자승을 보고 혜월 선사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큰 스님, 공부 잘하십시오."
혜월 선사가 울산 미타암(彌陀庵)에 있을 때였다. 재(齋)를 지내기 위해 신도에게 받은 돈 백 원을 가지고 장을 보러 갔다. 마침 길가에서 울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이유를 물으니 여인이 말했다.
"저는 남에게 빚진 돈 80원이 있습니다. 독촉은 심한데 갚을 길이 없어 이렇게 길에 나와 피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혜월 선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에게 80원을 내주면서 물었다.
"그래, 빚을 갚으면 당장 애들 밥 지어 줄 쌀은 있는가?"
"아이고 쌀이 다 뭡니까? 한 끼 죽거리도 없습니다."
혜월 선사는 즉시 나머지 20원까지 주어 버렸다. 뒤에 이 말을 들은 재주(齋主)는 기쁜 마음으로 다시 백 원을 내어놓으며 말했다.
"참다운 재를 지냈습니다."
한번은 혜월 선사가 어느 신도가 해준 깨끗한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장터에 나갔다가 마침 아이들이 개울에서 미꾸라지를 잡아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얘들아, 그 미꾸라지 나한테 팔아라."
"안 됩니다."
"나한테 팔래두."
"안 됩니다."
혜월 선사는 아이들을 막아 서며 팔라고 했고 아이들은 한사코 팔지 않겠다고 맞섰다. 서로 밀치며 입씨름까지 하다 보니 깨끗한 모시 두루마기는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면서 오다가 혜월 선사는 아이들을 끌고 주재소로 들어가 담판을 짓기로 했다. 혜월 선사는 그 지방에서 무심(無心) 도인으로 이름이 난 분이라 순경들이 곧 아이들을 달래어 그 미꾸라지를 마침내 선사에게 팔게 했다. 그 미꾸라지는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088. 사람마다 있는 한 물건…龍城震鍾
용성(龍城;1864∼1940) 선사는 전라북도 장수군 하심암면 사람으로 속성은 백(白)씨, 이름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이다. 16세때 해인사의 화월(華月) 화상을 은사로, 혜조(慧造) 율사를 계사로 하여 득도하였다. 기미년(1919)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힘쓰다 1940년 음력 2월에 세수 77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
용성 선사가 법문을 하였다.
"사람마다 한 물건이 있으니 하늘과 땅과 허공을 전부 삼켰으나, 적어서 티끌 속에도 차지 않는다. 밝기는 수천 개의 일월(一月)과 견줄 수 있고 검기는 먹물보다 더 진하다. 찾으면 더 멀리 도망하고 그냥 두면 여러분 앞에 있어 항상 손바닥 안에 머문다. 이것이 어떤 물건인가? 모든 도인은 알거든 내어 놓아라."
어느 날 용성 선사가 전강(田岡)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第一句)냐?"
전강 스님이 답했다.
"예!"
용성 선사가 말했다.
"틀렸다."
이에 전강 스님이 손뼉을 치고 웃어 보였더니 용성 선사가 다시 말했다.
"틀렸다."
그러자 전강 스님이 말했다.
"제가 묻겠습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이때 용성 선사가 느닷없이 "전강아." 하고 불렀다.
"예!"
전강 스님이 대답하자 용성 선사가 말했다.
"그것이 제일구니라."
어떤 사람이 용성 선사에게 물었다.
"금생에 인(因)을 지으면 다음 생에 과(果)를 받는다는 인과의 말씀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용성 선사가 말했다.
"자리에 앉으면 일어설 것이며, 섰으면 누울 것이고, 누우면 일어날 것이니 이것이 인과의 이치이다."
089. 내 얼굴 어디가 보고 깊은가…石顚鼎鎬
석전(石顚;1870∼1948) 스님은 전라북도 전주 사람으로 속성은 박(朴)씨이다. 19세에 전주 태조암(太祖庵)에서 득도하고 선암사 백양사 등에서 경전을 연구한 후 널리 불법을 강의하였다. 근래 교학승(敎學僧) 가운데 제일인자라 할 만큼 식견이 넓었다.
석전 스님이 서울 개운사에 있을 때였다. 계행이 청정하고 학덕이 높다는 명성을 듣고 보살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그러나 스님은 오히려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도들의 방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석전 스님은 보살들이 찾아오면 으레 이렇게 물었다.
"뭐 하러 왔소?"
"스님 뵈려고 왔습니다."
"나를? 나를 봐서 뭣하게……."
보살들이 말문이 막혀 안절부절못하자 스님이 다시 말했다.
"내 얼굴 어딜 보려고……. 요기? 아니면 여기?"
찾아온 신도들은 더욱 당황해 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석전 스님의 표정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이제 다 보았소? 다 보았으면 돌아가시오."
090. 부처 속에는 부처가 없다…滿空月面
만공(滿空;1871∼1946) 선사는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 사람으로 속성은 송(宋)씨, 이름은 도암(道岩)이며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1884년 14세로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 화상에게 출가하고 경허(鏡虛) 화상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대중이 수박 공양을 할 때였다. 만공 선사가 나뭇가지에서 우는 매미 소리를 듣고 말했다.
"매미를 가장 빨리 잡아 오는 사람에게는 수박 값을 받지 않겠지만 못 잡아 오면 동전 서 푼씩 받아야겠다."
이 말에 대중 스님들은 한마디씩 했다.
어떤 스님은 매미 잡는 시늉을 하였고, 어떤 스님은 매미 우는 소리를 내었다.
이때 금봉(錦峰) 스님이 나와서 둥근 원을 그려 놓고 말했다.
"상(相) 가운데 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 보월(寶月) 스님이 들어오자 만공 선사가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보월 스님이 즉시 주머니 끈을 풀고 돈 서 푼을 꺼내 스님에게 보였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자네가 내 뜻을 알았네."
어떤 학인이 만공 선사에게 물었다.
"불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네 눈앞에 있느니라."
"눈앞에 있다면 왜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까?"
"너에게는 너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느니라."
"스님께서는 보셨습니까?"
"너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다면 더욱 보지 못하느니라."
"나도 없고 스님도 없으면 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자는 누구냐?"
혜암 스님이 어느 날 만공 선사를 모시고 법당에 서 있었다. 불상을 쳐다보며 만공 선사가 말했다.
"부처님의 젖통이 저렇게 크시니 스님들 양식 걱정은 없겠다."
혜암 스님이 물었다.
"무슨 복으로 부처님 젖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소린고!"
"복업을 짓지 않고 어떻게 부처님의 젖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저 사람은 부처님을 건드리기만 하고 젖은 먹지 못하는구나."
어느 해 여름, 만공 선사가 참선하는 스님들을 칭찬한 뒤 말했다.
"내가 홀로 하는 일 없이 그물을 하나 쳤더니 그물 속에 한 마리 고기가 걸려 들었다. 어떻게 해야 이 고기를 구해 낼 수 있겠는가?"
한 스님이 일어나더니 오므리고 입을 고기 입처럼 들먹거렸다.
이때 선사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옳다, 또 한 마리 걸려 들었다."
어느 해 가야산 해인사에서 만공 선사에게 편지가 왔는데 내용은 이랬다.
"시방세계가 적멸궁(寂滅宮) 속에 건립되었다 하는데 그 적멸궁은 어느 곳에 건립되었습니까?"
만공 선사가 답했다.
"시방세계는 적멸궁에 건립되었으나 적멸궁은 나의 콧구멍 속에 있느니라."
다시 편지가 왔다.
"적멸궁은 선사의 콧구멍 속에 건립되었으나 선사의 콧구멍은 어느 곳에 건립되었나이까? 저희들을 그곳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만공 선사가 답했다.
"가야산엔 적멸궁만 있다더니 지금 보니 과연 그렇구나."
고봉(古峰) 스님은 술에 취하는 날이면 스승인 만공 선사를 헐뜯었다.
"만공 그게 무슨 도인이야, 알기는 개떡이 알아."
하루는 만공 선사가 고봉 스님의 방 앞을 지나다가 이 소리를 들었다. 만공 선사는 방문을 활짝 열어제치며 소리쳤다.
"고봉! 내가 자네한테 잘못한 게 있는가? 왜 욕을 하나!"
고봉 스님이 놀라 벌떡 일어나 말했다.
"스님, 제가 왜 스님에게 욕을 합니까? 저는 만공에게 욕을 한 것이지 스님에게 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만공과 나는 같은가, 다른가?"
이에 고봉 스님이 "할(喝)!" 하고 소리쳤다.
만공 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취했구먼, 어서 자게."
만공 선사가 오대산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 한암(漢巖) 스님이 몸소 산문(山門)까지 전송하였다. 둘이 다리에 다다르자 만공 선사가 돌멩이 하나를 주워 한암 스님 앞으로 던졌다. 그러자 한암 스님이 그 돌멩이를 냉큼 주워 개울에 던져 버렸다. 이에 만공 선사가 말했다.
"이번 여행에 손해가 적지 않다."
만공 선사가 한암 스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북방에 계시지 말고 걸망을 지고 남쪽으로 오셔서 납자들이나 지도함이 어떠하겠소?"
한암 스님은 만공 선사에게 이렇게 답했다.
"가난뱅이가 묵은 빚을 생각합니다."
만공 선사가 다시 답했다.
"손자를 사랑하는 늙은 첨지는 자연히 입이 가난하느니라."
한암 스님이 다시 답했다.
"도둑놈 간 뒤에 활줄을 당김이라."
만공 선사가 다시 답했다.
"도둑놈 머리에 벌써 화살이 꽂혔느니라."
어느 날 금봉 스님이 혜월 스님에게 물었다.
"견성(見性)을 한 사람에게도 나고 죽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저 허공이 나고 멸함이 있더냐?"
금봉 스님이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후일 만공 선사를 찾아가 혜월 스님과 대화한 내용을 말했다.
만공 선사가 말했다.
"왜 대답을 못했느냐?"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그러자 만공 선사가 말했다.
"대답하라고 했는데 무슨 잔소리가 많으냐?"
금봉 스님은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만공 선사에게 절을 올리며 말했다.
"스님! 참 그렇습니다."
이에 만공 선사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선지식의 대가리가 깨지는 대목이다."
한번은 만공 선사가 오대산 적멸보궁에 들렀다가 정혜사로 돌아오자 벽초(碧超) 스님이 물었다.
"오대산 적멸보궁에는 용이 있다는데 그 용의 콧구멍을 보셨습니까?"
"보았지."
"용의 콧구멍은 어떻습니까?"
이에 만공 선사는 "푸우!" 하고 콧소리를 냈다.
어느 날 만공 선사가 창가의 등불을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했다.
"이 등불과 창문에 비친 등불 가운데 어느것이 진짜 빛이냐?"
시자가 훅! 하고 불어서 끄고 말했다.
"노스님, 이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공 선사는 아무 말없이 꺼진 등불을 들어 보였다.
만공 선사가 어느 스님에게서 질문을 받았다.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 깨달은 도리는 무엇입니까?"
만공 선사가 말했다.
"세존이 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다 함은 눈에 모래가 떨어진 것이니라."
석두(石頭) 스님이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만공 선사에게 말했다.
"천하 납승(衲僧)이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 들어가지 못합니까?"
만공 선사가 말했다.
"천하 납승이 무엇 때문에 이 속에서 나가지 못하는가?"
만공 선사가 법좌에 올라 설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혜봉 스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만공 선사가 그를 보자 말했다.
"큰 호랑이 한 마리 들어온다."
갑자기 혜봉 스님이 "어흥!" 하며 호랑이 우는 소리를 냈다.
이에 만공 선사가 말했다.
"제 할 일 잘 지키는구나. 그만 나가거라."
091. 창문을 여니 담장이 눈앞에 있네…漢巖重遠
한암(漢巖;1876∼1951) 선사는 강원도 화천 사람으로 속성은 방(方)씨이다. 1897년 금강산 장안사의 행름(行凜)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으며, 경상북도 청암사에서 경허 선사를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 1951년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서 세수 76세, 법랍 54세로 입적하였다.
경허 선사가 한암 선사에게 물었다.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라는 말을 듣고 어떤 이가 견성했다고 하는데 무엇을 깨달았는가?"
한암 선사가 답했다.
"창문을 열고 앉으니 담장이 앞에 있습니다."
일본의 사토 스님이 한암 선사를 찾아와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한암 선사는 곁에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올렸다.
다시 사토 스님이 물었다.
"스님이 모든 경전과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보아 오는 가운데 어디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한암 선사는 사토 스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참배나 다녀오너라."
다시 사토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수도하였는데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모르겠노라."
이때 사토 스님은 일어나 큰절을 하면서 말했다.
"활구(活句)의 법문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암 선사가 말했다.
"활구라 해버렸으니 이미 사구(死句)가 되고 말았다."
092. 소를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느냐…慧庵玄門
혜암(慧庵;1885∼1985) 선사는 황해도 백천군 해월면 사람으로 속성은 최(崔)씨이다. 13세에 입산하여 16세에 보암(保庵) 선사를 은사로 하여 득도하였다.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면서 많은 수행승들을 지도해 왔다. 1985년 음력 3월에 입적하였다.
어느 날 용성(龍城) 스님이 만공 스님에게 물었다.
"어(語)· 묵(默)· 동(動)· 정(靜)을 떠나서 한마디만 이르시오."
만공 스님이 못 들은 체하자 용성 스님이 다시 물었다.
"지금 양구(良久;잠시 침묵을 하다)하고 계시는가?"
"아니오."
이런 일을 두고 훗날 전강 스님이 말했다.
"두 큰스님께서 서로 멱살을 잡고 진흙탕에 들어간 것과 다름이 없다."
이때 혜암 선사가 말했다.
"깨진 그릇은 다시 본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하겠노라."
한번은 어떤 젊은 수좌가 혜월 스님에게 물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데 이게 무슨 도리입니까?"
혜월 스님이 말했다.
"그 따위 소리하며 다니지 말라."
이때 혜암 선사가 조실 스님에게 물었다.
"혜월 스님이 젊은 수좌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 잘 일러주신 것입니까?"
조실 스님이 말했다.
"그 늙은 놈이 그래가지고 어떻게 학인의 눈을 열게 하겠느냐."
혜암 선사가 말했다.
"그럼 조실 스님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조실 스님이 말했다.
"그 젊은 수좌가 혜월에게 물은 것과 꼭같이 내게 물어봐라."
혜암 선사가 절을 세 번 한 뒤에 물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데 이게 무슨 도리입니까?"
이에 조실 스님이 말했다.
"네가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데, 찾아다니는 소는 그만두고 네가 탄 소나 이리 가져오너라."
혜암 선사가 수덕사에 계실 때 범종을 새로 달고 대중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 종을 만들었다. 이 종이 여러분 마음속에 있느냐, 마음 밖에 있느냐?"
대중이 아무 말을 못 하고 있자 혜암 선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높이 쳐들며 말했다.
"만일 이것이 맞다고 하면……."
곧 이어 주먹을 활짝 펴고 말했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093. 여기까지 이렇게 왔습니다…曉峰元明
효봉(曉峰;1888∼1966) 선사는 평안남도 양덕 사람으로 속성은 이(李)씨이다. 1925년 금강산 보운암에서 석두(石頭) 화상을 은사로 득도하고 유점사에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1966년 5월 표충사에서 세수 79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다.
효봉 선사가 젊었을 적에 금강산의 석두 스님을 찾아가 절을 하고 말했다.
"석두 큰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가?"
이에 효봉 선사는 벌떡 일어나 큰방을 한 바퀴 잽싸게 돌고는 말했다.
"이렇게 왔습니다."
효봉 선사가 법문을 통해 대중들에게 물었다.
"내게 한 문(門)이 있다. 동쪽에서 보면 서문(西門)이고, 서쪽에서 보면 동문이고, 남쪽에서 보면 북문이고, 북쪽에서 보면 남문이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이 문으로 출입했고, 시방 보살, 역대 조사, 천하 선지식들도 모두 이 문으로 출입했으며, 금일 효봉도 이 문을 통해 출입했다. 자, 지금 모인 대중들은 어느 문으로 출입할 것인가?"
효봉 선사가 말했다.
"마음과 짝하지 마라. 무심(無心)하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하니라. 만일 마음과 짝하게 되면 움쭉만 해도 그 마음에 제가 속아넘어가느니라."
한번은 만공 스님이 효봉 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 대중과 함께 길을 가다가 한 곳을 가리키며 '여기에다 절을 지었으면 좋겠다'하니 제석(帝釋)이 풀 한 줄기를 땅에 꽂으며 '절을 다 지어 놓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미소를 지었다 하는데 그 뜻이 무엇인가?"
이에 효봉 선사가 대답했다.
"스님은 참으로 절 짓기를 좋아하십니다."
이 말에 만공 스님은 한바탕 웃었다.
094. 오동잎 떨어지니 온 천하가 가을이로세…東山慧日
동산(東山;1890∼1965) 선사는 충청북도 단양군 사람으로 석성은 하(河)씨이다. 29세 때 범어사 용성(龍城)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1965년 4월 범어사에서 세수 76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태국의 승려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 동산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번 제가 당신 나라에 갔을 때 멋진 선물과 후대를 해주셨소. 오늘은 제가 선물을 드리겠소."
그리고 동산 선사는 돌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자가 보입니까?"
"예."
"그럼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니까?"
태국에서 온 승려는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때 동산 선사가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선물할 것은 그것뿐입니다."
하루는 동산 선사가 법상에 올라 주장자로 법상을 치며 말했다.
"오동잎 하나가 금우물에 떨어지니 이로써 온 천하가 가을인 줄 알겠다."
095. 손바닥 소리 찾아오라…鏡峰靖錫
경봉(鏡峰;1892∼1982) 선사는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사람으로 속성은 김(金)씨 이름은 용국(鏞國), 법명은 정석이다. 1907년 통도사에서 성해(聖海)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1982년 7월 극락호국선원에서 세수 91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어떤 스님이 경봉 선사를 찾아와서 절을 하니 선사가 물었다.
"요즘 어떤가?"
"한 소식을 얻었습니다. 스님께서는요?"
"어디 손바닥을 내놓아 봐라."
그 스님이 손을 내미니, 경봉 선사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방금 소리 난 그 놈을 잡아 오라."
어느 날 한 스님이 경봉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너는 어디서 왔느냐?"
"부산에서 왔습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멀리서 왔구나.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느냐?"
096. 우주는 5분 전에 창조되었네…金烏太田
금오(金烏;1896∼1968) 선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 사람으로 속성은 정(鄭)씨, 법명은 태전이다. 16세 때 오대산 월정사 선원에서 도암긍현(道庵亘玄) 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1968년 10월, 73세로 충북 보은군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어느 날 금오(金烏) 선사가 만공 스님을 찾아와 말했다.
"이 집엔 노스님이 안 계십니까?"
만공 스님이 말했다.
"저 사람 노스님에 눈이 가리웠군."
금오 선사가 다시 말했다.
"과연 이 집엔 노스님이 안 계십니까?"
만공 스님이 말했다.
"저 사람은 사람을 속이러 다니는 자가 아닌가?"
이에 금오 선사가 말했다.
"노스님, 속지 마십시오."
하루는 어떤 스님이 금오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금오 선사가 말했다.
"허공에 밝은 달이 뜨니 옛사람이 왔구나."
금오 선사가 말했다.
"눈앞에 부처님이 살고 계심을 보지 못하니 눈먼 사람이며, 부처님이 항상 설법하시는 것을 듣지 못하니 귀먹은 사람이며, 설법하되 부처님 진리를 알지 못하고 말을 하니 벙어리가 아닌가."
금오 선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할 때이다. 산길을 가는데 한 중년 신사가 금오 선사를 불렀다.
"스님, 나하고 얘기나 한번 합시다."
"할말이 있으면 해보구려."
"스님은 우주가 창조된 지 몇 해나 되었는지 아시오?"
"당신 소견에 내 이야기가 통하겠소. 걸음이나 같이해서 갑시다."
중년 신사는 불쾌해 하면서 화를 냈다.
"스님, 사람을 이리 무시할 수 있소. 대답도 못하는 주제에……."
"나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 무시한 건 그쪽이요."
"그럼 스님은 우주창조 연대를 안단 말이오."
"알다마다요."
"그럼 말해 보시오."
"당신이 먼저 말해 보시오."
그 중년 신사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서 있었기 때문에 금오 선사를 크게 놀려 줄 생각이었다.
"먼저 말하리다. 우주가 창조된 것은 39년 전이오."
중년 신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금오 선사를 힐끔 바라보았다.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금오 선사가 되받았다.
"당신 소견이 그것뿐인 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신 나이가 39센가 보구려."
그 신사는 움찔 놀라며 말했다.
"그럼, 스님이 말해 보시오."
"당신 소견에 맞춰 말해야 알아들을 것 같으니 속이 상하더라도 잘 들으시오. 자만심을 버리고 들으면 재미도 있을 것이오."
이 말에 이어 금오 선사는 말했다.
"우주의 창조 연대는 약 5분 전이었소. 알겠소?"
중년 신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약 5분 정도가 흘렀던 것이다.
097. 땅을 보고 별을 찾다…全岡永信
전강(田岡;1898∼1975) 선사는 전라남도 곡성 사람으로 속성은 정(鄭)씨, 법명은 영신이다. 16세 때 해인사에서 인공(印空) 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25세 때 만공 선사께 법을 인가받고 법맥을 이었다. 1975년 1월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전강 선사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고 나서 말했다.
노랑 꾀꼬리 나무에 오르니 한 떨기 꽃이요,
백로가 밭에 내리니 천점(千點)의 눈송이다.
"이것이 부처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 게송에서 부처를 보았다고 하면 몸을 잃게 될 것이고, 또 부처를 못 보았다고 하여도 이 주장자로 30대를 맞을 것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선사는 잠시 있다가 다시 말했다.
"이미 나타났구나."
어느 날 만공 스님이 물었다.
"부처님은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는데, 저 많은 별 중에 전강, 자네의 별은 어느것인가?"
이에 전강 스님은 땅바닥에 엎드려 손을 허우적거리며 별을 찾는 시늉을 해보였다.
만공 스님이 말했다.
"옳다, 옳다."
한번은 전강 선사가 마곡사의 혜봉 스님을 찾아가서 물었다.
"조주(趙州) 스님의 무자(無字)의 뜻을 천하 선지식들이 반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 무자의 뜻을 반만 알려주십시오."
혜봉 스님이 답하였다.
"무(無)!"
전강 선사가 말했다.
"그것이 어찌 반이 될 있습니까?"
혜봉 스님이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이르면 반이 되겠는가?"
이에 전강 선사가 말했다.
"무!"
혜봉 스님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매우 훌륭하구나!"
전강 선사가 보월 스님에게 물었다.
"옛날 마조(馬祖) 선사가 원을 그려 놓고 '이 원 안에 들어가도 때릴 것이고 안 들어가도 때릴 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물었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이에 보월 스님은 곧 원을 발로 뭉개 버렸다.
후일 전강 선사가 자답(自答)했다.
"방망이를 짊어지고 들어가는 데는 함부로 칠 수가 없지."
098. 칼날 위의 길을 갈 뿐…古庵祥彦
고암(古庵;1899∼1988) 선사는 경기도 파주 사람으로 속성은 윤(尹)씨, 이름은 지호(志豪)이다. 1918년 해인사에서 제산(霽山)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1922년 용성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용성 선사가 고암 스님에게 물었다.
"조주 무자(無字)의 10종병(十種病)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만 칼날 위의 길을 갈 뿐입니다."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인 뜻은 무엇인가?"
"사자굴 속에 다른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조 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습니다."
그리고는 고암 스님이 물었다.
"스님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용성 선사는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치며 반문하였다.
"너의 가풍은 무엇이냐?"
고암 스님도 주장자를 세 번 내리쳤다.
099. 부처와 조사도 몰랐던 일…香谷蕙林
향곡(香谷;1912∼1978) 선사는 경상북도 영일군 토성리 사람으로 속성은 김(金)씨이며 이름은 진탁(震鐸), 법명은 혜림이다. 18세 때 성월(性月)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고, 20세 때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운봉(雲峯) 스님의 문하에서 참구하였다. 1978년 12월에 세수 67세, 법랍 60세로 입적했다.
어느 날 제자가 향곡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뉘 집 노래를 부르시며, 누구의 종풍(宗風)을 이으셨습니까?"
향곡 선사가 물음에 답했다.
"운문(雲門) 선사로부터 일구(一句)를 받았는데 영겁을 쓰고도 남았느니라."
다시 제자가 물었다.
"이 밖에 별다른 한마디가 있습니까?"
"허리춤에 10만 관 돈을 두둑이 차고 하늘에나 땅에나 마음대로 놀러 다닌다."
하루는 제자가 향곡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의 말씀 한마디를 들려주십시오."
"진흙소 한 울음에 천지가 놀라 부처와 조사가 모두 죽었다."
"기특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만 들먹이면 일곱을 잃느니라."
어느 땐가 한 스님이 향곡 선사에게 물었다.
"큰길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란 뜻이 무엇입니까?"
"쉬! 쉬! 말조심해라."
"'쉬쉬' 한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동쪽 서쪽이 백억세계요, 남쪽 북쪽이 십억국토이니라."
젊은 시절 향곡 선사가 바늘로 누더기를 깁고 있는데 고봉(高峰) 스님이 다가와 물었다.
"바느질은 어떻게 하는 거냐?"
향곡 선사는 바늘을 빼어 느닷없이 고봉 스님의 다리를 찔렀다.
"아야!"
향곡 선사는 다시 찔렀다. 그러자 고봉 스님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 바느질 잘하는구나."
하루는 향곡 선사의 제자인 진제 스님이 물었다.
"부처와 조사(祖師)가 아는 곳은 묻지 않습니다. 부처와 조사가 몰랐던 것을 일러주십시오."
"구구(九九)는 팔십일(八十一)이니라."
진제 스님이 다시 말했다.
"그것은 이미 부처와 조사가 아신 곳입니다."
"육육(六六)은 삼십육(三十六)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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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선답(禪問禪答) 목차
선문선답(禪問禪答) 제1부 중국선사 편
선문선답(禪問禪答) 제2부 한국선사 편
선문선답(禪問禪答) 제3부 일본선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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