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암사 전경. 국암사는 군서면 서구림리에 있는 낭주최씨 문중의 사우로 최지몽 선생과 최안우, 최진하, 최몽암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최씨(崔氏)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씨 중의 하나로, 많은 최씨 본관들이 경주최씨에 그 연원을 두고 동조동근(同祖同根)을 주장하기도 하는데,(낭주최씨는 연원을 달리한다) 오늘날 최씨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경주최씨상계세보'와 1968년 발행된 '아동최씨고'(我東崔氏考)의 주장도 상이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모든 최씨가 신라초기 소벌도리(紀元前 1세기)와 최치원(857년생)을 잇는 신라인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대체적으로 이론이 없는 것 같다.
최씨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명망을 높이고 권세를 누렸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약간 쇠침하여 상신 7명, 대제학 4명, 문과급제자 437명을 배출하였다. 최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153개 본관(인구 1명인 본관까지 포함)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인구수는 2,169,704명으로 김,이,박에 이어 제4위로 전국 총인구의 4.7%를 차지했다.
우리 영암지역의 최씨 인구는 3,649명으로 역시 김,이,박에 이어 제4위로 영암인구의 6.0%를 차지했다. 1897년에 간행된 호남읍지(영암편)에 기록된 우리 영암지역 성씨 '25개 성씨, 50개 본관' 중에는 최씨 6개 본관이 올라 있는데, 그 첫 회로 낭주최씨에 대해서 알아본다.
시조는 최지몽의 아버지 흔(昕)
낭주최씨(朗州崔氏)가 우리 영암에 살게 된 것은, 중국 제나라 태공망의 후예가 최씨 성을 얻고 제나라 말 반란으로 그 후손의 일부가 동쪽 바다 건너 피난하여 백제 때인 서기 588년 경 영암 군서면 성기동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혹자는 "흔(昕)의 아들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최지몽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기 때문에 최씨가 되었을 것"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 후 낭주최씨는 대대로 영암의 토착 호족 세력이었으며, 나아가 구림을 중심으로 하여 영암의 유력성씨가 된 것은 시조 흔(昕)과 그의 아들 지몽(知夢)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조 흔은 신라말 고려초 사람으로 고려왕실이 지방토호세력들에게 내린 원보상(元輔相)을 지냈으며, 아들 지몽은 고려초기 왕조의 기틀을 안정시키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러나 지몽이 죽은 뒤 고려왕실의 주도권이 신라계에 넘어가자 점차 구림리에서의 동족기반도 무너져 외지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지몽의 아들 현동(玄同) 이후로는 세계(世系)가 전하지 않아 고려 말에 전객령을 지낸 희소(希沼, 1세)를 중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중시조는 고려가 망하자 나주 봉황면 만봉리 용반의 도성산에 숨어들었던 4세손 안우(安雨 1332년生)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손자 4형제 후손들이 낭주최씨의 오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군서면 서구림리에 있는 덕성당(德星堂). 덕성당은 낭주최씨 화수회 장소 등으로 쓰이는 문각(門閣)이며, 고려태사 민휴공 최지몽의 유적비가 있다. |
영암의 낭주최씨 전국비율 26배
낭주최씨 인구수는 2000년 조사 때 4,417가구에 총 14,264명으로 전국 총인구의 0.03%, 최씨의 0.65%였으며, 영암의 낭주최씨는 197가구에 477명으로 영암인구의 0.79%를 차지했다. 영암의 낭주최씨 비율이 전국 비율의 26배나 되는 것이 아주 큰 특징이다.
낭주최씨의 집성촌으로는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 진리, 전남 영암군 군서면(구림리,양지촌,항동리), 학산면 용소리, 시종면 연소리, 나주시 왕곡면(덕산리,왕봉리),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부산면 용반리,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강진군 옴천면 황곡리, 전북 고창군 해리면 행산리, 정읍시 내장면 행정리, 진안군 상전면 월포리 등이 있다.
그리고 낭주최씨 분파를 보면, 6세손들을 파조로 하는 6개 파가 있는데, 양(漾)의 후손이 봉직공파(奉直公派), 창(漲)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상(湘)의 후손이 녹사공파(錄事公派), 영(渶)의 후손이 찰방공파(察訪公派), 간(澗)의 후손이 함안파(咸安派)이고, 양(洋)의 후손은 전하지 않는다.
영암은 주로 봉직공파 후손들
우리 영암 군서지역 에 살고 있는 낭주최씨들은 봉직공파 후손들이며, 입향조는 영암읍으로부터 선조들이 살았던 이곳에 들어와 정착한, 중시조 희소의 13세손인 최진하(鎭河 1600~1673)선생이다. 그리고 구림에 직접 들어와 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에 5세손 운(雲 1361~1420)이 구림으로 장가들어 구림과 인연을 맺었고 그의 아들 양이 한대리에서 영암읍내 남문밖(혹은 구림 남문밖)으로 옮겨 왔다.
영암지역 인물로는 우선 민휴공 최지몽선생이 있다. 고려사 열전 최지몽조에 그는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뛰어나 왕건이 장차 삼한을 통일할 것이라는 해몽을 했고, 두 차례 반란 음모를 점쳐 고려왕실의 신임을 두텁게 받은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신라 효공왕 11년(907)에 흔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의 이름은 총진(聰進)이고, 대광(大匡) 현일(玄一)의 가름침을 받았다. 그는 천성이 총명 온화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유학적 지식인 관료로서, 태조 왕건부터 성종에 이르는 동안 고려왕조의 기틀을 안정시키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18세에 왕건의 꿈에 대해 장차 삼한을 통일 하게될 징조라고 해몽하여 知夢(자몽)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후 태조의 측근에서 보좌하며 정치적 자문에 응하였다. 혜종 때에는 왕규의 반란을 예측하며 혜종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암살의 위기를 모면케 하였고, 경종 때에는 왕승의 반란을 점쳐 고려왕실의 신임을 받았다.
정종, 광종으로부터도 후대를 받았으나 왕권강화를 적극 추구하던 광종 말년에는 미움을 받아 한동안 폄출되기도 하였다. 경종 5년(980) 복귀하여 성종 원년 좌집정 수내사령의 직위와 홍문숭화치리공신의 호와 함께 왕의 지극한 존숭을 받았다. 성종 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태자태부를 증직하고 시호를 민휴(敏休)라 하였다. 고려 초기 지방출신의 대표적 문신 관료이며 주로 국왕의 측근에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경종 묘(廟)에 배향되었으며 현재는 서구림리 국암사에 모셔져 있다.
최지몽 후예들 각계서 활동
그외 영암인물로, 최안우(安雨)는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봉열대부, 검교군기사소감을 지냈다. 성리학의 대가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우애가 깊었으며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최수미(守眉)는 조선초의 승려로 황폐한 도갑사를 중수하였으며 윤찬, 정은을 도와 해인사 대장경 50부 인쇄를 감독하였고 후에 왕사(王師, 수미왕사, 묘각국사)가 되었다.
최황(滉)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6살에 소학을 공부하였으며 음직으로 사복시정, 사헌부지평, 남대장령을 역임하였다. 최노겸(勞謙)은 민휴공 24세 봉직공파11세로 절충장군, 중추부첨지사를 역임하였다. 최복용(復龍)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정자, 경연시독, 춘천현감(통훈대부), 사간원헌납겸 춘추관수찬, 통정대부승정원우승지를 역임하였고 1628년10월9일 48세로 졸하였다.
최정한(廷漢)은 무과에 등제(登第)하여 훈련원판관,문학당첨사 등을 지냈고 25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녹도만호 정운(鄭運)이 전투 중 순절하자 제문을 지어 장례를 치뤘다. 최몽암(夢嵒)은 문과에 급제(1750년 식년시 11/51)하였고 한성우윤, 오위도총부도총관 등 수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최진하도 문과에 등과하였고 마지막 직은 병랑이다.
또 낭주최씨 가운데 학계의 최철호(전 전남대 사범대학장), 최규철(전 전남대 미술대학장, 현 광주예총회장), 법조계의 최동(전 법원 이사관), 관계의 최수일(전 농림수산부 서기관), 최남호(전 영암군청 기획실장), 최진(전 영암경찰서장), 의료계의 최태옥(전 목포시 의사회장), 언론계의 최승호(전 광주일보 사장), 예술계의 최연섭(서향화가), 경제계의 최영오(한국환경개발 대표), 최장용(남송산업건설 대표), 금융계의 최계섭(전 농협전남지역본부 검사부장) 씨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