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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 맥켄지 선교사를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극동방송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님의숲교회 이석배목사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선교사님은,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선교사님이십니다. 한국명으로 매견시 선교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분은 1910년 2월 21일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1938년2월 17일까지 사역하였는데,(만 28년 한국 사역) 지금도 살아계신 옛 어른들의 기억에, 희미하게나마 가장 자주 기억되는 선교사님이신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귀한 열매를 많이 맺은 선교사였던 것입니다. (특히 울산지역 순회전도뿐 아니라, 나환자 치료 사역으로 그렇습니다.)
1. 맥켄지의 유년시절
먼저 그의 유년초기를 알아보면, 그는 1865년 3월 7일 스코틀랜드의 아일 유(Isle Ewe)라는 섬에서 아버지 케네드(Kenneth) 매킨지와 어머니 케더린(Catherine) 사이에서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맥켄지가 5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기에 맥켄지의 삶은 순탄하지 못하여 16세에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글라스고(Glasgow)로 갔을 때, 당시 그곳에서 뜨겁게 일어나고 있던, 드와이트, 무디, 생키 등 미국의 부흥집회를 참석하면서, 그 신앙 부흥 운동의 열기 속에서 맥켄지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무디의 집회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은 그는, 1883년 봄에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결심을 이루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우선 생활 대책이 서지 않았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 교육과 신학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맥켄지는 1885년 1월 중국으로 파송되는 ‘캠브릿지 세븐’(Cambridge Seven)이라고 불리는 일곱 청년의 선교사 파송 예배에 참석하여 그들의 헌신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고 자신도 온전히 주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멕켄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1885년 글라스고 대학에 입학해 1891년 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 뒤에 존 페이튼 선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선교사로의 헌신을 확정하게 됩니다. 페이튼은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선교사 중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는데, 그는, 바로 뉴 헤브리디즈로 가서 일한 개척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위험과 고통스런 날을 인내하면서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피선교지의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도 중요한 기여를 했던 인물인데, 그 페이튼이 1894년 글라스고를 방문하고 글라스고 대학 강당에서 강연할 때, 맥켄지도 이 집회에 참석했는데, 거기에서 자신도 그 섬에 가서 선교하기로 작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참으로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선교사가 만들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디엘 무디의 전도 부흥 집회를 사용하시고, 7명의 케임브리지 학생들을 보게 하시고, 존 페이튼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만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맥켄지가 페이튼의 강연을 들을 때, 지금 필요한 것은 사실 선교 기금이 아니라 선교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매주일 모이는 해외 선교를 위한 기도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기도회를 통해, 그의 첫 번째 아내가 된 마가렛 켈리(Margaret Kelly)를 만나게 됩니다. 마가렛 켈리는 1870년 1월 17일 생인데, 콩고에 선교사로 갈 목적으로 간호사 훈련을 받은 여성이었는데, 이후 이들은 함께 뉴 헤브리디즈의 산토(Santo) 지방에서 일하도록 페이튼으로부터 정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선교지로 가기 전인 1894년 7월 3일 결혼하였습니다.
2. 한국에 오기전의 선교사역- 뉴헤브리데스에서의 사역
하지만, 그들의 뉴헤브리데스에서의 15년간의 선교 사역은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 기간이었고,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이곳에서 질병으로 잃고 맙니다. (그녀 나이 38세) 이곳에서 행한 그의 선교활동이 얼마나 힘겨운 것이었는지, 산토 섬에서 쓴 그의 일기 제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노고구(Nogogu)에서 야만적인 사람들이 교회 공격 / 주일아침 예배시간에 교인들에 대한 괴한들의 소총 공격 / 건장한 젊은이들이 부상자 구제사업을 벌임 / 15년간 정열적인 선교사업 후, 아름답고 용감했던 아내가 지독한 열병에 걸려 죽음 / 완전히 실망한 〈십자군 선교단〉의 호주 귀환.”설상가상으로 자신도 같은 병을 앓게 되어, 어쩔 수없이 본국으로 소환을 받게 됩니다. 멜버른으로 돌아가 있던 맥켄지는 다시 임지로 돌아갈 것인가를 고심했습니다. “한 번 더, 주여! 나를 고난과 파멸의 길로 이끌어주옵소서. 주여! 한 번 더!”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맥켄지 역시 15년의 사역 이후 열대성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고, 그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의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더 이상 뉴헤브라이디즈로는 갈 수 없었으므로 다른 지역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3. 한국에서의 사역.1- 순회전도
당시 호주 장로교 연합회의 주요 선교 전략지역은, 이 뉴 헤브라이즈 지역과,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교의피가 흐르고 있는 미지의 나라 <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맥켄지 선교사는 호주선교회의 일원으로서, 여전도회 연합회 산하에 있던 청소년선교단의 선교 후원을 받아서, 1910년 2월 21일에, 한국의 남단 최대 도시인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감격적인 사실은, 이때 선교지원 재정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듣고, 뉴 헤브라이즈 지역에서 매견시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받았던 원주민들이 그의 조선 선교를 돕기 위해서 200파운드의 선교헌금을 보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매견시는 이 헌금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왔으니, 한국교회는 남태평양의 잘 알려지지 않은 섬 뉴 헤브라이즈에게 선교의 빚을 진 셈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를 위해서 고생을 하면, 힘들기는 하지만, 반드시 보람이 있고 결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맥켄지 선교사의 뉴 헤브라이즈 사역이 이렇게 선교헌금으로도 결실이 드러나지만, 그후에 우리나라의 원천희 선교사란 분이 거기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곳 원주민들 교회에서 맥켄지 선교사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더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의 수고와 땀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를 위해 흘린 땀과 수고는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우리도 또한 바라보며 사역해야 할 것입니다!
맥켄지 선교사가 1910년 2월 21일에 한국(부산)에 왔을 때, 13명의 호주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들이 다 나아가서 맥켄지를 환영해주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왕길지 선교사의 집에 함께 머물면서, 우리 울산을 비롯한, 경남 여러 지역을 순회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해야 할 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부인을 사별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매견시 선교사가, 자신보다 5년전에 먼저 들어와서 사역을 하고 있던 켈리 여선교사를 만나서, 다시 결혼하게 된 일입니다. 이 결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비록 당시에 캘리양이 진주에서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원래 1905년에 들어와서 우리 울산을 포함한 동부 경남지역을 먼저 순회전도하며, 여러 명의 신자들을 세웠던 호주 제 2진 선교사에 속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진주 지방에서의 사역도, 손이 많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진주에 가서 사역하고 있었는데, 마침 매견시 선교사가 그 사실을 알고(그 두 사람은 이미 한국에 오기 전에 서로를 알고 있었던 사이였으므로) 청혼을 하였던 것(1910. 8.)입니다. 그 후 1912년 2월에 홍콩에서 만나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 와서 본격적인 순회전도사역을 함께 시작하면서 사역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특히 울산을 포함한 동부 경남지역은 켈리부인이 결혼 전에 전도했던 지역이었으므로, 매견시 선교사와 함께 두 번째로 다시 순회전도를 하였을 때에는 더 풍성한 사역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매견시 선교사는 울릉도까지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매견시 이전에는 아무도 찾지 않았던 그 섬에, 서구인 최초로 방문하여 전도한 것입니다. 당시 울릉도에는 매견시가 첫 방문을 시작한 1910년 한 해 전에, 즉 1909년에 세워진 교회들이 몇 몇 있었는데, 나리동교회, 장흥교회, 저동교회, 도동교회 등이 바로 그런 교회들입니다. 특히 나리동교회의 설립자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송광수는 경북 경산에서 매견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통해서 울릉도에 초대를 받았을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이후에 매견시는 경상노회의 파송을 받아 정식으로 울릉도의 순회목사로 시무하게 됩니다. <울릉도 기독교 백년사>의 기록을 빌리자면, 매견시가 울릉도에서 했던 사역들은(그는 그 후에도 계속 울릉도를 방문했는데, 호주선교를 오래 연구한 양명득 목사에 의하면, 매견시 선교사는 적어도 울릉도를 최소 7번 이상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부흥집회 인도, 세례와 성만찬, 교육과 집례, 제직 임명, 교회조직, 감독, 심방, 교회재산권 보호, 목회자 발굴과 교육, 이단과의 싸움 등으로 실로 목회의 전 분야를 골고루 다 감당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이 지역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에 순회전도를 할 때, 자기가 먹을 양식을 직접 가지고 다녔다고 하는 일화는 매우 많이 알려져 있는 일화입니다. 이는 그 지역의 형편을 알려주는 말도 되지만, 매견시의 긍휼의 성품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그의 사역이 초기 울릉도 선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 울산지역에서는 1909년 3월에 울주군 삼동면 보은리에 세워진 보은교회에 매견시 선교사가 순회시찰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울산뿐 아니라, 양산, 기장 등지에 여러 교회들을 설립하기도 하고, 순회전도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4. 한국에서의 사역.2- 나환자 사역
매견시 선교사의 사역가운데, 우리 울산과 직접적인 관계는 적어보이지만, 가장 빛나는 사역은 한센병 환자, 즉 나환자 사역입니다. 우리가 그를 “나환자들의 친구”, 또는 “성자”로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1911년부터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원래 미국 북장로교선교부에서 시작했던 일인데, 호주선교부가 맡아주길 요청해왔을 때, 호주 선교부에서 매견시에게 일임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먼저 부산 용호동에 세워져 있던 〈나환자의 집〉 등지를 돌며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매견시가 원장으로 취임했을 때에는 당시 환자수가 54명이었는데, 그 수가 급속히 늘어서 1916년경에는 150여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에 여러 가지 환경과 전란으로 인해 한센병 환자가 늘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가 얼마나 이 일을 사명감으로 알고 열정적으로 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후에 한센병 환자 치료사업을 도운 공로로 파란색 리본의 훈장까지 수여받을 정도로 열심히 헌신하였습니다. 이 때 부산의 나환자 수용시설을 “상애원”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부산 남구 감만동 외국어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매견시는 이렇게 상애원에서 나환자 치료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동부 경남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와 목회 활동을 병행했던 것입니다. 그가 맡은 교회들도 많이 성장하여 처음 맡았던 초기였던 1912년 당시에는 약 20여개 교회였으나, 1916년에는 5개 지역에 52개 교회로 증가되었고, 그 관할 하에 세례교인 수도 12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가 맡은 5개 지역이란, 울산과 온양, 기장, 동래, 그리고 부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로 방대한 사역을 모두 잘 소화해낸 것입니다.
물론, 그가 다 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제 침략 시대에 사역을 하면서, 가장 예민한 문제인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일제에 협조하는 자세를 취하여, 일부 교인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혹자는 그가 사역할 당시에 4차례나 걸쳐서, 일제 즉 총독이나 천황으로부터 메달과 하사금을 받는 일이 있어서 암암리에 그이 마음속에는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나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사역하는 주 대상이 환자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일이었기에, 당장 환자들의 건강과 치료에 직결되는 일본과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본질적으로 중요하겠지만,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예민한 문제를 갖고 일본과 부딪히지 않기를 원하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가 책임을 맡았을 때 환자사망률은 25%였으나 그가 은퇴할 때 사망률은 2%로 떨어졌습니다. 참으로 귀한 결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그의 말년과 자녀들 이야기
이렇게 만28년을 우리나라 경남지방에서 사역하다가, 1938년에 자기 고국으로 귀국한 맥켄지 목사는, 1956년 호주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약속대로 두 딸을 한국에 또 보냈습니다. 큰 딸인 의사 헬렌 맥켄지와 동생이자 간호사인 캐서린 맥켄지는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인 1953년 9월에, 부모가 일했던 부산으로 건너와 동구 좌천동에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했고, 이들은 6·25사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헌신적으로 의료사업을 펼쳤습니다. 이 병원은 국내 굴지의 산부인과병원으로 자리 잡아, 1982년 11월 일신기독병원으로 승격했으며, 지금은 시설 확장으로 320병상의 종합병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헌신했던 그들은 1972년에 병원을 한국 측에 환원하고 귀국했습니다. 이처럼, 맥켄지 집안의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는 앞으로도 큰 숲을 이루고 열매를 맺어갈 것입니다. 맥켄지는 1939년에 선교사직에서 은퇴했고 이듬해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에큐메니즘, 즉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을 촉진시켰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데 그의 모든 기회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청취자 여러분, 맥켄지 선교사 즉 매견시 선교사의 사랑과 헌신, 긍휼의 사역은 오랫동안 우리 한국민족에게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그가 펼친 나환자선교와 우리 울산을 포함한 동부경남지역 순회전도를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사역을 펼친 사람도 영원히 남습니다. 역사에 남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속에 남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의로운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비치리라.”(단12:4)
매견시 선교사...그의 사랑의 빛을 우리도 같이 실천해서 비치게 하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첫댓글 매견시 선교사님에 관한 숨겨진 자료나 일화가 있다면, 여기에 올려주세요~ 함께 공유하면 더 풍성해질것입니다^^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더욱더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