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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2> 각묵 스님 “사성제=연기=무아 철견하는 것이 깨달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는 불교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질문이지만,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물음이기도 하다. 어렵다고 그대로 놔둔다면 점점 관념화되고 신비화될 뿐이다. 관념화되고 신비화된 깨달음은 중생의 구체적 삶을 바르게 이끌어갈 지남이 될 수 없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로 본지는 지난호(2028호)부터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강호제현의 주장을 소개하는 기획토론을 시작했다. 이번호에는 두번째로 각묵스님의 기고를 싣는다.
불교 2600년 역사에서 가장 많이 받아온 질문이면서도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필자는 초기경에 근거하여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이에 바탕하여 수행을 살펴보려한다.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은 왜 자신이 깨달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밝히신다.
그리고 사상제 가운데 괴로울 수밖에 없는 중생의 삶의 실상(고성제)과 그러한 삶의 복잡다단한 전개의 원인을 밝힌 집성제는 연기법의 순관과 일치하고, 괴로움의 소멸(滅聖)과 그러한 소멸로 인도하는 길(도성제)은 연기법의 역관과 일치한다고 많은 경과 주석서들은 설명하고 있다.
경과 주석서들에서는 중생의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며(苦苦性),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끝내 변하고 말기 때문에 괴로움이며(壞苦性), 본질적으로는 오온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라거나 ‘내 것’으로 취착하기 때문에(五取蘊) 괴로움이라고(行苦性) 설하셨다. 이 가운데 오온을 나라고 취착하는 오취온이 괴로움의 본질이다.
우리의 삶은 어떤 불변하는 실체(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몸, 색) 느낌(수) 인식(상) 심리현상들(행) 알음알이(식)라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가합하여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거듭하면서 흘러가는 존재일 뿐인데 중생들은 이러한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이것을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이름붙이고 취착하여 거머쥐고 있기 때문에 그 삶은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온을 취착하는 데서 기인한 괴로움(오취온고 = 五陰盛苦)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들에서는 무명과 갈애를 괴로움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있으며 이것은 두 번째 진리인 집성제이다. 이러한 무명과 갈애가 완전히 해소된 경지가 바로 멸성제며 이것은 열반의 동의어이다. 그러면 어떻게 열반을 실현할 것인가. 그 방법론으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것이 바로 팔정도이며 이것이 네 번째 진리인 도성제이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를 몸.느낌.마음.심리현상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그 중 하나에 마음챙기고(念) 집중하고(定) 관찰할(慧) 때 나니 내 것이니 하는 삿된 견해와 갈애가 근원적으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의 출발은 ‘해체해서 보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분석.해체해서 관찰하면 무상 깨닫고 해탈
오똑한 코, 반달같은 눈, 앵두 같은 입술 … 모두가 함께 특정한 부위에 특정한 색조를 띠면서 뭉쳐져 있을 때 그것은 집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분리되어 있을 때 그것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을 나라는 존재에서 해체시켜 볼 때 우리는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의 무상함을 체득하게 되고 그래서 마음을 나라고 집착하는 갈애에서 벗어나게 된다.
제법으로 표현되는 수많은 심리현상들을 나라는 존재에서 해체시켜서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아무런 실체도 없으며 매순간 상호관계(연기)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임을 체달하게 된다.
이처럼 깨달음 혹은 해탈.열반은 나라는 개념적 존재(산냐, 빤냐띠)를 해체할 때 드러나는 제법들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을 통해서 실현되며 이것을 체계적으로 설한 것이 〈대염처경〉이다.
이처럼 필자가 파악한 수행의 핵심은 바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a)’으로 정의되는 위빳사나의 핵심이요 분리해서 ‘무아의 성질(性)을 보는 것(見)’이라는 견성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리고 열반의 실현은 개념적 존재를 해체해서 꿰뚫어 보는 기초를 튼튼히 닦는 것을 통해서 성취된다. 분석하고 해체해서 보는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돈오직관의 간화선도 무상.고.무아의 체득이라는 위빳사나도 완성되지 않는다. 분석과 해체는 깨달음이라는 결과물에만 집착하는 우리 불교가 새겨봐야 할 부처님의 고구정녕한 메시지이다. 각묵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출처 : 불교신문 2030호/ 5월11일자]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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