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화엄경(華嚴經) ②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비로자나 법신
<사진설명>신라백지묵서화엄경(국보196호)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어떤 분으로 드러나시며, 『화엄경』에서 교설하고 있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님 몸은 법계에 충만하여
널리 일체중생 앞에 나타나시니
연을 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으시되
항상 보리좌에 앉아 계시도다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隨緣赴感未不周 而恒處此菩提座)
보현보살을 위시한 수많은 보살대중들과 후에 화엄성중으로 모셔진 세주(世主)들이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 처소에 모여와서 ‘부처님’과 ‘보살’에 관하여 갖가지로 구체적인 질문(40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답을 해주신 광명 속에서 나타난 보살이 “여래께서 모습을 나타내심 [如來現相]”을 읊은 게송이다. 이 게송은 사찰의 큰 법당에 걸려있는 주련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화엄경』에서 펼치는 깨달음의 세계, 대방광(大方廣)하신 부처님의 세계, 보살도로 장엄하는 불세계가 연화장세계로서의 법계(法界)이다. “온 우주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시방삼세에 두루하신 부처님”, “언제 어디나 안 계신 곳이 없는 부처님”께 우리는 예와 존경을 바쳐 발원하고 있다. 그 부처님이 바로 『화엄경』의 변만불(遍滿佛)인 것이다. 부처님은 인연에 따라 중생에게 오시며, 또한 중생에게도 부처님의 지혜가 다 갖추어 있어서, 중생들이 자신의 지혜를 쓸 때, 새록새록 부처가 출현하게 되니 그 자리가 곧 보리좌임을 알 수 있다.
“크고 반듯하고 너르다”는 ‘대방광’은 부처님의 본체[體]와 형상[相]과 역용[力用]이며, 그것은 바로 마음의 체상용이다. 부처님 마음, 부처님과 다르지 않는 중생의 지혜로운 마음의 체상용이다.
‘크다’는 것은 ‘작다’의 반대가 아니라 그 보다 더 밖이 없어 일체에 두루하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상호가 단엄하여 반듯하다는 것은 일체 공덕이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며, 너르다는 것은 신통 묘용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이다. 법계에 충만하여 오고 감이 없어서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니, 그 어디에도 집착이 없는 무착불(無着佛)이다. 언제나 보리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마냥 그러함[如如]이니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한[舊來不動] 구래불(舊來佛)이다.
수명이 한량없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보신 노사나불로 나투어 설법하시며, 유한한 중생 앞에 화신 석가모니불로 인연에 따라 오고 가시기도 한다. 유한한 삶 속에 무한 생명을 드러내니 법보화(法報化) 삼불이 원융한 비로자나불이고 석가모니불이다. 염오와 상대적인 청정이 아니라 본래 더러움이 없는 청정신이다.
부처님이 중생에게 오시니 중생이 사는 예토가 곧 부처님의 정토가 되어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둘이 아니다. 당나라 때 소동파가 여산에서 소나기 내리는 하루 밤을 지새면서 밤새도록 흘러내리는 계곡 물소리가 부처님 설법이고 여산의 산색이 청정법신임을 깨달아 게송을 읊었던 것도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비로자나진법신 아님이 없음을 보여준다.
『화엄경』의 불, 깨달음의 세계는 여래성이 그대로 드러난[如來性起] 세계이다. 여래성은 여래마음이고 여래지혜이며 중생의 본래마음이다. 그러나 부처님과 불국토, 여래지혜조차 자성이 없어 공한지라, 환과 같고 그림자 같다. 그래서 연(緣)을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나 오고 간 적이 없다. 생각하고 분별한 대로 한량없이 나타나서[如是如是 思惟分別 如是如是 無量顯現] 온 누리가 법계이고 불세계이다.
신라시대 자장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들었다는, “일체법이 자성이 없는 줄 요달해 알라. 이같이 법성을 안다면 곧 노사나불을 뵈오리라[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는 화엄경 게송이나, 의상이 “가도 가도 본래자리, 이르고 이르러도 출발한 자리[行行本處 至至發處]” 라 설파한 것도 이 경계와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화엄법계는 내가 일체 존재와 하나 되고 서로 용납하여[相卽相入] 원융하고 무애자재하며 청정하며 평등한 세계이다. 지혜 마음의 눈만 떠보면 본래 언제나 환한 광명이 온 누리에 가득한 것을.
해주 스님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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