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팔천송반야경 ③
상대가 못나게 보이는 건 내 아집 때문
나라는 존재, 곧 오온의 청정을 눈치 채어 일으키는 지혜의 빛이 반야라면, 이번에는 나 아닌 존재들, 곧 유정의 청정을 눈치 채고 일으키는 지혜 또한 반야이다. 하지만, 나의 청정을 눈치 채는 일에 비한다면, 이 유정들의 청정을 눈치 채는 일은 그 행복의 질이 다르다.
우리는 습관처럼 남의 오염을 알아채지만, 남의 청정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 잘난 줄 알아 교만해지기는 쉬워도 남 위대한 줄 알아 겸허해지기는 지극히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정의 청정을 눈치 챌 수 있을까?
집착이 없다면 나라는 관념이나 내 것이라는 관념은 알려지지 않으니, 실로 수부띠여, 이러한 방식으로 일체 유정의 청정이 알려지느니라. 유정들에게는 파악도 없고 집착도 없기에 청정이 있느니라. (팔천송반야바라밀다경, 제22장)
붓다는 말씀하시기를, 존재가 오염되어 보임은 모두 ‘나’와 ‘내 것’이라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자체가 텅 비어 있음을 알 때 오염에서 벗어나게 된다. 곧 나라 존재가 텅 비어 있듯이 저 모든 유정들도 주인 없이 텅 비어 있다고 눈치 채야 비로소 유정의 청정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유정은 곧 가없고 불가사의하며, 위대할 뿐이다.
유정의 위대함. 여기서 유정이란 인간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유정이다. 그렇다면 그 유정들의 가없고 불가사의한 세계를 안다고 함은 과연 어떤 것일까? 더구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서 유정이라는 포괄적인 개념 속의 존재의 위대함을 안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는 곧 불교의 생명관이 깨달음의 세계와 연관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를 둘러싼 뭇 삶들이 얼마나 진지하고 헌신적으로 주어진 삶에 힘쓰고 있는지를 알아채야 하며, 저들의 생존고에 진지한 연민을 보내라는 것이다. 지혜란 또한 연민을 통해서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는 도토리를 주우러 장충당 공원에 자주 놀러 가곤 했다. 남산 입구에 자리 잡은 그 공원에서는 가끔 투견대회가 열렸는데, 철창 속에 셰퍼드나 도사견 같은 개들을 밀어 넣고는 싸움을 시켰다. 잔인한 싸움을 굳이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마주치면 어린 마음에 가슴 떨며 구경을 하게 되는데, 참으로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요즘에는 프라이드니 K-1이니 하면서 사람들도 그런 싸움을 흉내 내고 열광하는 이상한 시대가 됐지만….
어느 날 나는 셰퍼드 두 마리의 싸움을 구경하게 됐다. 시합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두 마리 다 주인의 눈치를 보며 달려들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급소를 물렸는지 그 자리에서 옆으로 눕고 말았다. 그런데 상대의 개는 쓰러진 개를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 어쩌지 못하고 당황만 하는 기색이었다. 뒤에서 고함치며 물기를 재촉하는 주인을 난처한 듯 바라보기도 했다. 심판도 그 개가 쓰러진 개를 다시 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아마도 끝까지 물고 있어야 이기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 개는 상대 개를 물지 못한 채 시합이 끝나고 말았다.
그 날 하루 종일 나는 영문 모르게 가슴이 벅찼다. 그 뒤로 한참을 그게 뭔지 잘 모르다가, 자타카를 읽다가 문득 알게 되었으니, 그 개는 바로 보살이었다. 사람들 속에서는 여간해서는 만나기 어려운 그런 뭉클한 감동이 있으니, 그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붓다의 메시지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개의 불성을 운운한다면 나는 그저 미소 지으리라.
그 때의 그 셰퍼드를 떠올리면서 나는 다시 지혜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때 무는 시늉이라도 해서 그 위기를 넘겼다면 그걸 지혜라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반야의 지혜란 그런 것이 아니리라. 그것은 헤아림을 떠나 조작함도 없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선(善)한 광채이기에 말이다.
통상 지혜는 정서가 배제된 채 너무 메마른 방식으로 이해되는 듯하다. 지혜를 그저 교리를 파악하고 법상을 이해하는 지적인 능력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간주하는 한 불교는 영원히 학문의 영역에 갇힐 뿐이다.
김형준 박사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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