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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1. 영미
1교시 수업시간 종이 울렸다.
영미는 복도에서 놀다가 뒤뚱거리는 몸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이 씰룩거리는 영미의 엉덩이를 보고 웃었다. 뒤이어 초희가 교실에 들어왔다. 몸 움직임이 영미보다는 훨씬 빨랐다. 아이들은 초희의 다리를 보고 또 웃었다. 젓가락 두 개가 교차하면서 움직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웃어!”
영미가 의자에 앉은 채 뒤돌아보며 화를 냈다. 코에서 바람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쉭쉭, 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아이들은 영미의 화난 얼굴을 보고도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참으려고 하니 웃음이 더 나왔다.
초희는 아무 말 없이 책을 폈다. 아이들이 자기를 보고 웃어도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다. 영미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동수는 웃다말고 영미가 앉은 의자를 바라보았다. 영미가 앉은 의자는 아예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허벅지와 엉덩이로 다 덮여버렸다. 동수는 다시 초희를 바라보았다. 초희가 앉은 의자는 책을 한권 놔도 될 만큼 많이 비어있었다. 태리를 툭, 치면서 영미의 의자와 초희의 의자를 번갈아 가리켰다.
“와하하!”
태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영미가 뒤돌아보았다. 태리는 입을 가리고 계속 웃었다.
“너!”
영미가 두 손으로 책상을 쾅 치면서 일어났다. 태리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그때였다. 태리의 모듬 아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차하면 영미에게 달려들 것이다. 태리 주변 아이들이 모두 일어나서 자기를 노려보자 영미는 씩씩거리면서도 제 자리에 다시 앉았다.
“까불고 있어, 뚱땡이가!”
동수의 목소리가 영미의 귀에 들렸다. 영미의 몸과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초희는 그런 영미와 반 아이들을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자, 조용.”
용대길 선생님이었다. 체구가 우람하고 입이 커서 아이들은 모두 하마라고 불렀다. 가끔,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하마다. 머리는 항상 까치집에다가 이도 누랬다. 세수를 안 해서 눈곱이 붙어있는 날도 많았고 단벌 양복에 막걸리자국이 묻어있을 때도 있었다. 희선이가 엄마하고 외출하는 길에 파전에 막걸리를 들이켜는 용대길 선생님을 보기도 했다. 촌스러워서 아이들도, 엄마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학기 초에는 반을 바꿔달라고 한 엄마도 있었다. 하지만 초희 생각은 달랐다. 3학년 때 담임이었던 김 미화 선생님과 달리 용대길 선생님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김 미화 선생님은 얘가 곧 쓰러질 것 같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를 만나서 면담을 했고, 겁이 난 엄마는 그 다음날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란 검사는 다 받게 했다. 게다가 김 미화 선생님은 점심시간만 되면 초희 옆에 앉아서 초희가 밥을 남기나 안 남기나 감시했다. 먹기 싫어도 꾸역꾸역 먹었다. 그래도 살은 안쪘다.
“많이 마르긴 했지만 병은 아닙니다. 운동을 시키면 식욕도 좋아질 겁니다.”
병원 의사의 말대로 초희는 태권도장에 다니게 되었다. 태권도장에서 초희가 발차기를 할 때마다 아이들은 또 얼마나 웃어댔는지 모른다.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빨간 띠다. 용대길 선생님은 일단 잔소리가 없다. 여전히 아이들이 놀리지만 3학년 때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놀림 당하는 횟수도 줄었고 영미만 빼면 특별히 괴롭히는 아이는 없다. 초희는 용대길 선생님 덕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워낙 뚱뚱한 영미 덕분이라는 걸 초희는 몰랐다. 영미만 놀려도 재미있는데 반응이 없는 초희까지 놀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자, 비사치기에 대해 말해볼 사람?”
용대길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조용했다.
“이 초희, 말해보렴.”
용대길 선생님이 초희를 보며 말했다.
“비석처럼 세워둔 돌을 넘어뜨리는 전통놀이입니다.”
초희가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면서 가슴이 콩콩 뛰었다.
“맞았어. 비사치기는 선생님 어릴 때 많이 하던 놀이에요. 모두 초희에게 박수!”
아이들이 마지못해 박수를 쳤다. 초희는 자리에 앉으면서 얼굴을 붉혔다.
영미는 수업에 관심이 없다. 선생님이 뭐라고 묻긴 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젓가락 같은 초희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걸 힐끗 보았을 뿐이다. 아이들이 박수를 치긴 했는데 왜 그런지도 몰랐다. 영미는 집에서 가져온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1학년 동생이 어제 사온 만화였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희선이 등에 바짝 대고 보았다. 그렇게 하면 선생님 눈에 만화책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용궁에 간 토끼가 간을 두고 왔다고 용왕님께 거짓말을 할 때 영미는 풋, 하고 웃었다.
“영미 너 뭐하니?”
영미의 귀에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용대길 선생님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대길 선생님뿐만이 아니었다. 영미 앞쪽에 앉은 반 아이들도 모두 뒤돌아서 영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미 얼굴이 빨개졌다.
“영미 지금 뭐 보는 중이야? 희선이 등 뒤에 있는 거 이리 가져와 봐.”
용대길 선생님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희선이가 획, 몸을 돌려서 영미와 토끼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쁜 듯 영미를 째려봤다. 영미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손에 토끼전이 들려 있었다. 영미의 손에 들린 토끼전을 본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영미가 둔한 몸으로 앞으로 나갔다. 선생님이 손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토끼전?”
“와하하하.”
용대길 선생님의 말을 들은 반 아이들이 그때까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동수는 과장된 몸짓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용대길 선생님이 책을 열고 갈피를 넘겼다.
“음, 토끼전이 재밌긴 하지. 하지만 수업시간엔 수업에 충실해야지, 그렇지, 영미?”
“네.”
영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교실 바닥에 깔린 나무 널판의 무늬를 보고 있었다. 용대길 선생님은 토끼전을 돌려주면서 영미의 어깨를 툭, 쳤다.
“괜찮아, 우리 영미는 착하니까 앞으론 잘 할 수 있을 거야.”
용대길 선생님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반 아이들은 웃음을 멈추고 시큰둥해 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실망한 표정들이었다.
2. 용대길 선생님
쉬는 시간이 되었다. 영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렀다가 운동장에 나가볼 생각이었다. 반에 있어봐야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놀아주는 아이도 없었고 괜히 따라붙어서 히죽거리는 아이들뿐이다.
힘으로야 얼마든지 혼내줄 수 있지만 영미를 놀리는 아이들은 언제나 패거리로 몰려다녔다. 특히 동수와 태리가 그랬다. 덩달아서 다른 아이들도 동수와 태리를 따라다니며 영미를 놀렸다. 영미가 화를 내면 일제히 도망갔다가 다시 나타나 혀를 내밀곤 하는 식이다.
“영미, 너 어디 가니?”
영미가 일어서자 태리가 물었다. 남이야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람? 영미는 들은 척도 않고 자리에 앉아있는 태리를 지나 교실 뒤편으로 갔다.
“어? 내 말이 말 같지 않나봐. 엉덩이 씰룩거리면서 굴러가 버리네?”
태리 말을 들은 아이들이 웃었다. 영미가 태리를 노려보았다. 태리는 영미의 눈길을 받고는 양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무섭다는 시늉을 했다.
“너희들 자꾸 이러면 가만 안둘 거야, 씨.”
영미가 소리쳤다. 영미가 화가 난 걸 안 아이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웃으면서. 영미가 화나면 무섭다는 건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학기 초에 동수가 놀리자 힘껏 밀었는데 동수는 5미터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동수는 남자아이들 중에서 힘이 가장 세다. 그런 동수가 나가 떨어졌으니 아이들이 놀란 건 당연했다. 특히 태리는 자기 자리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예쁘고 똑똑한데다 야무져서 아이들은 태리를 따랐다. 여자아이 중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태리. 공부든 힘이든 뭐든 최고여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데 영미가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태리가 모듬 아이들로 패거리를 만든 이유다. 일대일로는 영미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영미는 그렇게 소리치고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다. 사루비아 꽃이 붉게 피어나 있는 화단을 지나 스탠드에 앉았다. 운동장에서 또래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남자, 여자 구분 없이 편을 갈라서 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는 영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왜 저렇게 뛸 수 없을까? 뚱뚱한 자신이 미웠다. 병원에도 여러 번 가봤다.
그때마다 의사는 편식을 줄이고 운동을 하라고 했다. 살을 빼려고 하루 종일 굶은 적도 있었고 일주일 내내 저녁을 사과로 때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살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여기서 뭐하니?”
초희였다. 초희는 영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옆에 앉았다. 영미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너, 뭐야. 여긴 왜 왔어.”
왜긴, 그냥 심심해서 왔지.
영미의 물음에 초희가 심심하게 대답했다.
“누구 맘대로 내 옆에 앉는 거야. 이걸 그냥 던져버릴까 보다.”
영미가 소리쳤다. 초희는 눈을 크게 뜨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왜 그러냐고? 몰라서 물어? 생긴 건 꼭 젓가락 같은 게 까불고 있어. 앞으론 내 옆에 가까이 오지 마. 안 그럼, 혼날 줄 알아.”
“알았어.”
영미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 초희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초희 딴엔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나온 영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초희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서 속상했다. 만날 젓가락 같다고 구박이나 하는 영미를 위해서 큰 맘 먹은건데...초희는 말없이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수업시간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운동장에 퍼졌다.
2교시는 음악시간이었다. 용대길 선생님이 1교시와 달랐다. 영미는 헛것을 봤나 했다. 용대길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는 영미와 초희를 보고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 앞니를 내보이면서 살짝 웃기도 했다. 항상 눈을 게슴츠레 뜨고, 턱수염은 덜 깎여서 덥수룩하고, 코를 후비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따뜻한 웃음을 뱃속에서 퍼올리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앉아봐. 선생님이 말 할 게 있다.”
용대길 선생님이 커다란 코를 씰룩거리면서 말했다. 마치 하마 한 마리가 어린 물오리들을 모아놓고 물가의 법칙에 대해 일러두려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이번에 윈드 오케스트라를 만들려고 한다. 윈드 오케스트라는 관악기와 타악기 위주다. 하지만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도 상관없다. 나이나 체격에 상관없이 60명을 뽑을 거야. 전체 학년에서 뽑는 거니까 반마다 몇 명씩은 되겠지? 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지원자가 많았으면 좋겠어. 노래를 못 불러도 좋고 악기를 다루지 못해도 상관없다. 선생님이 다 가르쳐 줄 테니까 말이야.”
용대길 선생님의 말을 들은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영미의 짝인 서문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용대길 선생님과 오케스트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서문이의 웃음이 교실에 울려 퍼지자 전염이라도 된 듯 다른 아이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저기서 이팝나무 하얀 꽃들이 툭툭, 터지는 것 같았다. 영미가 생각하기에도 너무한다 싶었다.
오케스트라는 원래 음악가들이 하는 거고 그걸 가르치는 사람은 예술가여야 한다. 예술가가 아니라면 적어도 멋있고 예민한 사람이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영미는 지휘를 하고 있는 하마를 떠올리다가 소리 내어 웃을 뻔 했다. 웃음을 참자니 얼굴이 벌게졌다. 배가 울렁거렸다. 앙다문 입술로 나올 공기가 코로 다 나오는 바람에 코에서 쉭쉭, 소리가 났다. 콧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디, 관심 있는 사람 손 들어봐.”
용대길 선생님이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눈에 어떤 기대감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 ...”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용대길 선생님도, 그때까지 웃던 아이들도, 모두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어린 물오리들이 말이 없자 하마가 헛기침을 했다.
“뭐야? 아무도 없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피리도 못 불게 생긴 선생님과 오케스트라를 함께하려는 아이들이 없었다. 잠시 할 말을 잊은 용대길 선생님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 시간은 충분하니까 집에 가서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단원은 일주일 후에 뽑는다.”
3. 돈 내놔
초희는 손을 들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이들이 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희는 피아노를 잘 쳤다. 잘 치는 정도가 아니다. 상도 여러 번 받았다. 작년엔 전국 음악콩쿠르에 나가서 초등부 대상을 받았을 정도다.
초희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 뜻에 따라 의사가 되었다. 의사로 일하면서도 집엔 여러 종류의 악기가 있었다. 초희는 태어나서부터 그런 아빠의 영향을 받았다. 집안엔 늘 피아노 소리로 가득했고 초희는 건반을 두드리며 살았다.
네 살 때 시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나가서 입상을 했다. 주변 친척들은 신동이 나왔다며 좋아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초희 곁에는 항상 피아노 선생님이 따라붙었다. 방학 때면 독일과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초희는 자유롭게 사는 또래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피아노 외에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피아노는 잘 쳤지만 점점 내성적이 되어갔다. 반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 이유도 말이 없고 새침한 성격 때문이다.
초희는 어깨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교문을 나섰다. 젓가락 같은 다리가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보는 사람도 안타까울 만큼 걸을 때마다 두 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야, 너 거기 서 봐.”
초희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영미였다. 오동통하게 살찐 코알라 한 마리가 뒤뚱거리면서 오는 것 같았다. 초희는 걸음을 멈췄다. 영미가 헉헉대면서 초희에게 다가왔다.
“야, 이거 좀 들어봐.”
영미는 자기가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초희에게 건넸다. 초희는 무심결에 가방을 받았다. 영미의 가방을 받은 두 팔이 아래쪽으로 축 쳐졌다.
“너무 무거워.”
초희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눈은 영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무거워? 넌 운동을 해야 해. 운동을 해야 튼튼해지는 거야. 알겠어?”
영미가 윽박질렀다. 초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영미 뒤를 따라갔다.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앞서가던 영미가 뒤돌아보았다.
“너, 돈 있어? 돈 있으면 좀 내 봐.”
초희는 영미의 말을 듣고는 영미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놨어. 너 혼나고 싶어?”
영미가 한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아니, 그게 아니고 돈 꺼내려고...”
영미는 그 말을 듣고 잔뜩 찡그린 이마를 풀었다. 초희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영미에게 건넸다. 영미는 돈을 받아들고 학교 앞 분식가게로 갔다. 분식집 아줌마는 영미를 보고 반가워했다.
“어? 영미 또 왔니?”
“안녕하세요. 떡볶이 천 원어치만 주세요.”
영미는 넓은 사각 프라이팬 위에서 모락모락 뜨거운 김을 풍기고 있는 떡볶이를 보면서 말했다. 아줌마는 자주 먹을 걸 사러 오는 영미에게 떡볶이를 세 개나 더 담아주었다. 영미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너도 하나 먹어볼래?”
영미가 초희에게 물었다. 초희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영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매콤하고 싸한 떡볶이 양념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영미는 순식간에 8개나 되는 떡볶이를 먹어버렸다. 다 먹고는 좀 모자란지 입맛을 다셨다.
“너도 좀 먹지 그랬냐?”
영미는 다 먹고 나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슬쩍 초희에게 말했다.
“난 배 불러.”
초희가 말했다.
“어련 하겠어? 그러니까 젓가락 같지. 가방 이리 내.”
영미는 자기 가방을 초희에게서 빼앗았다. 초희 덕분에 떡볶이를 먹었으니까 자기 가방은 자기가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영미 가방 때문에 낑낑대던 초희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더니 영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집에 가서 뭐할거야?”
초희가 영미에게 물었다.
“뭐하면 뭐하려고?”
영미가 되물었다.
“응, 저기...같이 놀면 안 될까?”
초희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영미에게 말했다.
“너랑 같이 놀아달라고? 내가 미쳤니? 너랑 놀게. 집에 가면 컴퓨터게임도 해야하고 학원도 가야해.”
영미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학원 다녀?”
초희가 영미에게 물었다.
“그럼, 당연하지. 영어, 수학, 피아노까지 너무 많아.”
“피아노 학원도 다니니? 우리 집에 피아노 있는데.”
“흥, 누군 피아노 없는 줄 알아? 아빠가 얼마나 돈을 잘 버는데.”
영미가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종종걸음으로 가 버렸다. 영미가 빠른 걸음으로 가 버리자 초희는 울상이 되었다. 힘없는 모습으로 천천히 집으로 갔다.
4. 나는 왜 뚱뚱할까
영미는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십년은 넘을 것 같다. 영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기 살았으니까. 아파트는 낡을 대로 낡아서 콘크리트 벽에 금이 쩍쩍 가 있었다. 경비실 옆 소나무는 잎이 노랗게 변한 채 말라죽어 있었다.
“영미, 학교 갔다 오니?”
경비 할아버지가 아는 체를 했다.
“네.”
영미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미가 오늘은 힘이 없네? 배고파서 그래?”
영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자기 집에 피아노가 있다던 초희 말이 생각났다. 엄마는 지금 쯤 좁은 거실에 인형을 늘어뜨려 놓고 일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영미는 초인종을 눌렀다. 엄마가 반가운 얼굴로 영미를 맞았다.
“어서 와라. 배고프지?”
영미엄마는 영미를 보자마자 밥을 줄 생각부터 했다. 영미는 엄마를 볼 때마다 초희가 생각난다. 초희처럼 영미엄마도 비쩍 말랐다.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한 영미엄마는 가난해도 영미 먹을 건 잘 챙겨주었다. 고기를 먹고 싶다면 외상을 해서라도 사 주었다. 자신이 못 먹고 커서 한이 맺힌 듯했다.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먹어! 내가 돼진 줄 알아?”
영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영미엄마는 영미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었다.
“안 먹는다고 했잖아!”
영미는 그렇게 소리치고 나서 밖으로 나가면서 현관문을 쾅, 닫았다. 영미의 귀에 엄마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초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학원에 갈 준비를 했다. 영어학원 다음엔 수학학원, 수학이 끝나면 태권도장에 가야했다. 태권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빠가 돌아와 있을 것이다. 아빠 앞에서 피아노를 쳐야한다. 날마다 한두 시간은 피아노를 쳤다. 아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오래 쳐야한다. 초희는 언제부턴가 피아노가 싫어졌다. 이젠 피아노만 봐도 지긋지긋할 정도다. 아빠는 왜 피아노 밖에 모를까.
초희아빠는 성형외과 원장님이다. 어쩌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은 엄마를 앞에 앉혀놓고 자기자랑을 한다.
“이 손이 말이야. 신의 손이야. 못생긴 사람을 미인으로 만들어주지. 이건 신도 하지 못한 일이야.”
실제로 초희아빠 병원은 소문이 나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초희아빠는 그렇게 자기자랑을 하고 나면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 게 못내 걸리는지 초희에게 말하곤 했다.
“초희야, 아빠가 못다 이룬 꿈을 네가 이뤄주렴. 넌 꼭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피아니스트가 돼야 해. 아빠는 초희를 믿는다.”
초희는 집을 나섰다. 학원에 가기 위해서는 호수공원을 가로질러야 한다. 호수공원을 가로질러 100미터 쯤 가면 학원가가 있다. 초희가 다니는 학원에서 두 정거장 쯤 가면 아빠의 병원이 있다. 하지만 초희는 스스로 아빠 병원을 찾아간 적이 없다. 초희는 아파트 입구로 나왔다. 학원 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초희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오늘은 집 앞으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호수공원을 가로질러서 갈 생각이었다.
영미는 집을 나서 호수공원을 향해 걸었다. 영세민 아파트인 영미의 아파트 너머에 초희가 사는 아파트가 보였다. 이 근처에서 부자들만 산다는 아파트다. 영미가 사는 아파트는 영구임대 아파트다. 영미엄마는 날마다 부업을 하고 영미 아빠는 도배사로 일한다. 영미아빠는 성실하고 사람이 좋아서 여기저기서 일이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좀처럼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미는 호수공원의 나무다리를 걸었다. 활짝 핀 부레옥잠과 어리연꽃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뚱뚱할까. 우리집은 왜 못살까. 영미는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영미는 다리 난간을 잡고 주름져오는 물 나이테를 바라보았다.
“영미야. 여기서 뭐 해?”
영미 뒤에서 조그맣지만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초희였다. 영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학원 간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응, 그냥. 넌 어디 가?”
영미는 대답을 얼버무리면서 초희에게 물었다.
“응, 영어학원.”
초희가 말했다.
“그래? 그럼 어서 가 봐.”
“넌 학원 안 가니?”
“오늘은 그냥 하루 쉬는 거야. 가끔은 좀 쉬어줘야 해.”
영미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초희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학원 안 갈래.”
초희가 말했다.
“부모님한테 혼나지 않아? 어쨌든 난 지금 너랑 놀 기분이 아니야.”
영미의 말을 들은 초희 얼굴이 어두워졌다. 초희는 입을 삐죽 내밀고 영어학원 쪽으로 걸어갔다.
5. 학급신문
다음날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영미와 초희를 놀려댔다. 태리는 전에 모듬 얘들이 모두 일어섰을 때 영미가 꼼짝 못하는 걸 보고는 간이 커졌다. 이젠 숫제 영미 앞에서 영미를 놀려댔다. 동수도 함께였다.
“영미야, 넌 왜 그렇게 뚱뚱해?”
태리가 비웃는 투로 자리에 앉아있는 영미에게 말했다. 영미가 태리를 노려보았다.
“어쭈, 네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둥수가 옆에서 거들었다. 태리는 동수가 곁에 있어서 안심이 되었는지 영미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영미야, 나에게 살찌는 방법 좀 가르쳐 줘. 나도 너처럼 돼지가 되고 싶어.”
태리가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영미는 꾹 참다가 더 이상 안되겠는지 두 손으로 책상을 꽝, 치면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앞에 서 있는 태리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있는 힘껏 밀어버릴 생각이었다. 곁에 서 있던 동수가 영미의 팔을 잡았다. 영미는 동수가 그러거나 말거나 두 팔로 태리를 마구 흔들었다. 태리가 휘청거렸다. 태리는 잡힌 어깨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도와줘. 뚱땡이 좀 어떻게 해 줘.”
태리가 외쳤다. 모듬 아이들이 영미의 앞 뒤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영미에게 다가와서 팔과 다리를 잡았다. 태리를 흔들던 영미의 팔에 힘이 빠졌다. 영미는 태리를 놓치고 말았다. 태리가 자유로워지자 모듬 아이들 모두 영미에게 달려들었다. 영미가 아무리 힘이 세다지만 여섯 명을 당할 수는 없다. 붙잡힌 팔을 휘둘러 보았지만 뿌리치기 힘들었다. 그 틈을 타서 태리는 영미를 물었고 희선이는 손을 비틀었다.
“아야!”
영미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있는 힘, 없는 힘을 다해서 대항했지만 당하는 건 영미였다. 초희는 싸우는 걸 보고 안절부절 못했다. 말리자니 젓가락 같은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초희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다 반짝, 생각났다.
초희는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영미와 아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쉬지않고 찍었다. 반 아이들 모두 싸움 구경을 하느라 초희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영미는 어떻게 해도 당할 길이 없자 분한 나머지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영미가 교실바닥에 울면서 주저앉아 버리자 아이들은 그제야 영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야, 울지 마.”
동수가 당황한 듯 영미를 달랬다. 모듬 아이들은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 쉬는 시간이 끝나고 용대길 선생님이 올 것이다. 태리는 콧방귀를 뀌면서도 영미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초조한지 자꾸 교실 앞문을 바라보았다. 수업시작 멜로디가 울렸다.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용대길 선생님이 들어왔다. 동수는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갔다. 영미는 선생님을 보고는 울음을 멈추고 훌쩍거리기만 했다. 바보같이 엉엉 울면서 고자질하기는 싫었다.
“어라? 왜 이렇게 조용해?”
용대길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소대로라면 떠들고 장난치느라 난장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영미가 당한 일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공범이다. 태리의 모듬 아이들이 영미를 괴롭힐 때 아무도 말리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척 구경만 하던 아이들도 이 순간만큼은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 용대길 선생님은 훌쩍거리는 영미가 운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날은 아무도 영미를 놀리지 않았다. 영미는 시무룩해져서 교문을 나섰다.
“괜찮아?”
초희가 영미 뒤를 따르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지만 영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떡볶이 먹을 테야?”
초희의 말에 영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날 아침, 용대길 선생님은 무언가 다른 걸 발견했다. 교실 뒤편 게시판이 이상했다. 언제나 아침 일찍 출근해서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고 틀어진 책걸상을 바로 하고 교탁을 정리하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었다. 용대길 선생님은 교탁에 앉아 교실을 둘러보다가 게시판에 눈길이 멎었다. 희미하긴 했지만 가족 소개란이 평소와 달랐다. 도화지 한 장에 많은 사진이 붙어있는 게 보였다. 일어서서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큰 입을 쩍 벌렸다.
사진은 총 11장이었는데 한 가운데 영미가 서 있고 다른 아이들이 영미를 붙잡고 있었다. 11장 모두 영미가 주인공처럼 가운데 있었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영미를 붙잡은 아이들의 행동변화가 보였다. 태리가 영미의 한쪽 팔을 물고 있는 사진, 희선이가 영미의 손을 비트는 사진, 동수가 영미 뒤에서 어깨를 붙잡고 있는 사진이었다. 하영이가 영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사진도 있었다. 영미가 울음을 터트리는 사진도 보였다. 사진 맨 아래쪽에는 <어제 2교시 쉬는 시간> 이라고 컴퓨터 활자로 쓰여 있었다. 누가 붙여 놓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용대길 선생님은 흥분했다.
“세상에! 착한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이 싸움이라니!”
더구난 사진들은 영미가 여러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용대길 선생님은 사진을 떼었다.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업 시작 멜로디가 울릴 때까지 아이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웃고 떠들었다. 아무도 전날의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태리와 동수는 물론 영미도 여느 날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란, 참.’
용대길 선생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수업이 시작되자 용대길 선생님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물렁한 하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은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끼면서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용대길 선생님의 침묵과 무서운 눈빛이 계속되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나중엔 숨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용대길 선생님이 침묵을 깼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2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일 아는 사람 손들어.”
용대길 선생님의 말을 듣고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거나 모르는 척 옆 사람을 둘러보았다.
“한 아이가 여러 아이에게 괴롭힘 당한 걸 안다. 잘못을 시인하고 제자리에서 일어서면 용서해 주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땐 친구를 괴롭힌 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 알겠어?”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서는 아이도 없었다.
“좋아, 그럼 어제 영미하고 아이들이 싸우는 걸 보지 못한 사람 손들어.”
아무도 손들지 앉았다.
“흠, 그래. 싸움을 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지? 선생님 말이 맞아, 안 맞아.”
조용했다.
“선생님 말이 맞아, 안 맞아!”
“맞..아요.”
그제야 몇몇 아이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다시 말하겠다. 어제 싸우지 않은 사람은 모두 뒤로 나가. 단, 싸운 사람은 제자리에서 일어서지 마. 자, 어서!”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 둘씩 뒤로 나갔다. 영미는 가만 앉아 있었다. 태리와 동수는 아이들 틈에 껴서 엉거주춤 일어서려다가 용대길 선생님의 무서운 표정을 보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영이는 뒤로 나갔다가 태리와 동수가 가만 있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희선이는 뒤로 나가서 아이들 틈에 숨었다.
“자리에 앉은 친구들은 방과 후에 남아. 그리고 안 희선은 내일 부모님 모시고 오기 바란다.”
아이들 틈에 숨어있던 희선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용대길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난 줄 알았을까, 희선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6. 단원 모집
일주일이 지났다. 오케스트라 단원을 뽑는 날이 왔다. 이번엔 제법 희망자가 많았다. 얼마 전에 집으로 보낸 안내장에 음악점수에 플러스가 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용대길 선생님은 중학교에 가서도 악기를 잘 다루면 내신등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글귀도 집어넣었다.
지금 손을 들고 있는 열 명은 아마 엄마가 시켜서일 것이다. 영미와 초희는 손을 들지 않았다. 태리와 동수, 그리고 희선이와 하영이는 손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아마 태리 모듬은 단원이 되기로 의견을 모은 것 같았다.
“허, 오늘은 희망자가 제법 되네? 아주 좋은 현상이야.”
용대길 선생님은 흡족한지 환히 웃어보였다.
“아참, 미리 말해둘 게 있다. 희망한다고 해서 모두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는 건 아니다. 방과 후에 간단히 실력을 테스트 해보고 뽑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도록.”
용대길 선생님이 말했다. 영미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싶었지만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었다. 겨우 피리나 부는 정도였다.
용대길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고 오케스트라 희망자들을 관악부실로 데려갔다. 관악부실엔 용대길 선생님의 반 아이들만 있는 게 아녔다. 3학년부터 희망자를 모집했으므로 무려 백 명이 넘었다.
관악부실엔 용대길 선생님 말고도 교장선생님과 처음 보는 선생님들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자, 선생님 말을 잘 듣기 바란다. 지금 시간 상 일일이 모든 악기를 다룬다는 게 불가능하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한 소절씩 노래를 불러서 정확한 음으로 부르는 학생을 뽑는다. 정확한 음을 알고 있어야 정확한 연주가 가능하다. 모두 알아들었지?”
용대길 선생님이 말했다. 용대길 선생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 앉아있던 여자 선생님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가 피아노에서 흘러나왔다. 피아노 뒤쪽에 옹기종기 앉아 대기하고 있다가 한 사람씩 나가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의자에 앉은 선생님들이 노트에 기록을 했다. 태리가 노래를 부를 때는 와, 하는 소리가 나왔다. 태리는 음악시간에도 언제나 칭찬을 듣는다. 학교 합창단에서 독주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온 아이가 독주를 차지하자 바로 그만 두었다.
동수는 낮은 음으로 뭉기적거리듯 불렀지만 박자는 잘 맞았다. 희선이는 잘 부르다가 두어 번 삑싸리를 냈다.
“모두 잘했어요. 결과는 내일 발표하겠습니다. 떨어지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다시 도전하면 된다. 관악부는 언제나 문이 열려 있으니까 말이야.”
용대길 선생님이 말끝을 올렸다 내렸다 갈피를 못 잡고 말했다. 교장선생님의 격려를 끝으로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영미 아빠가 돌아왔다. 객지공사를 나간 지 보름 만이다. 영미 아빠는 영미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살이 많이 빠졌다면서 삼겹살집으로 데려갔다. 영미동생 영호는 모처럼 먹는 삼겹살이어서인지 입 안 가득 고기를 넣고 우물거렸다. 영미는 살이 찌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너무 맛있는 고기를 앞에 두고 참을 수 없었다.
“왜 자꾸 고기를 사주는 거야. 그러니까 뚱뚱하다고 놀리잖아.”
영미는 그렇게 투덜대면서 고기를 상추쌈에 세 점씩이나 얹었다.
“어떤 녀석이 그래. 우리 영미가 살도 토실토실하고 얼마나 귀여운데. 안 그래?”
영미아빠가 영미엄마에게 동의를 구했다. 영미엄마는 삼겹살을 입에 넣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영미처럼 예쁜 얘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영미엄마가 말했다.
“에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영미가 투덜거렸다.
영미아빠는 소주잔을 기울였다. 영미와 영호만 봐도 흐뭇한지 내내 싱글벙글 했다.
“아빠, 오케스트라 알아?”
오케스트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
영미의 물음에 영미아빠가 되물었다.
“옛날에 아빠 드럼 쳤다고 했잖아. 학교에서 단원 뽑는대.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
“그래?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예전엔 아빠가 이 도시에서 알아주는 드럼이었지. 헤헤.”
영미아빠가 싱겁게 웃었다.
“참, 너도 오케스트라 하지 그래? 드럼도 있니?”
“응, 관악부실에 드럼도 있다고 그랬어.”
“그래? 그럼 네가 제격일 거 같은데? 너도 아빠의 엄청난 음악성을 물려받지 않았겠어, 으헤헤.”
영미아빠가 말하면서 또 실없이 웃었다.
“아빠는 좀 바보처럼 웃지 좀 마. 그렇게 웃으니까 정말 바보 같잖아.”
영미가 아빠에게 핀잔을 줬다.
“누가 뭐래도 난 상관없다. 딸 바보 맞으니까. 세상에 우리 영미처럼 귀여운 얘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영미아빠가 혀가 약간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영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7. 아빠의 드럼실력
다음날 영미는 아빠를 따라 시내에 나갔다. 아빠가 젊었을 때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이 여전히 그룹사운드를 하고 있다고 했다. 영미아빠는 생활이 어려워서 음악을 그만 두었지만 가난한 건 여전했다. 시내의 공원 옆에 몇 군데의 맥줏집이 있었다. 영미아빠는 그 중 한 곳으로 영미를 데리고 갔다. 대낮인데도 안이 어두웠다.
“어, 임 성택. 오랜만이야.”
“음, 그래. 자넨 여전하군.”
안에서 구레나룻을 기른 사람이 영미아빠 이름을 부르며 반겼다.
“우리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그거 좋지.”
영미아빠가 되받았다.
“네가 영미니?”
구레나룻을 기른 아저씨가 영미에게 말했다.
“네.”
“음, 그래. 아주 귀엽게 생겼구나. 오늘 아저씨가 드럼 치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보고 따라해 보렴.”
구레나룻 아저씨는 말을 마치고 드럼이 있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곤 곧바로 드럼 뒤에 앉아 페달을 밟았다. 발동작에 따라 쿵쿵, 북소리가 울렸다. 진동이 느껴졌다. 발로 밟고 있는 바닥의 진동이 아니라 영미의 가슴 저편에서 울려오는 진동이었다.
“지금 두드리는 악기가 베이스드럼이야. 음악시간에 온음표 배웠지? 온음표는 네 박자가 기본이야. 잘 들어 봐.”
영미아빠가 말했다. 베이스 드럼소리에 섞여 약간 높은 음의 북소리가 영미 귀에 들렸다. 왠지 조금 들뜨는 기분이었다.
“스내어 드럼. 어때 훨씬 듣기 좋지?”
영미아빠가 또 말했다.
구레나룻 아저씨는 이제 두 개의 막대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럼 위의 솥뚜껑 같은걸 쳤다. 쨍쨍 소리가 나면서 절로 흥겨워졌다. 베이스드럼과 스내어 드럼, 하이햇 심벌, 등이 한데 어우러져 기분 좋은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영미는 저도 모르게 발꿈치를 들어 박자를 맞췄다.
오래 전 시골 할머니 집 양철지붕 위에 떨어지던 빗소리, 빗방울이 떨어지는 자리마다 양철지붕은 다른 소리를 냈다. 외양간에선 황소가 낮은 음으로 울었다. 마치 베이스드럼처럼.
구레나룻 아저씨의 연주가 끝나고 영미아빠가 스트로크를 넘겨받았다. 영미아빠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영미는 그때 알았다. 아빠가 멋있는 사람이라는 걸. 얼굴은 햇볕에 타서 가무잡잡하고 피부는 거칠지만 스트로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경쾌한 리듬을 타는 아빠가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멋져보였다.
“와, 아빠 최고야.”
영미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구레나룻 아저씨가 어느새 영미 곁에 와서 웃고 있었다.
“하하, 네 아빠가 한때는 이 지역에서 최고수였단다. 나도 아빠에게 배웠어.”
영미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아빠의 연주가 끝나고 영미는 구레나룻 아저씨 손에 이끌려 드럼 뒤에 앉았다. 구레나룻 아저씨가 영미의 발을 들어 페달 위에 얹었다. 구레나룻 아저씨의 손동작을 따라 페달을 밟았다. 온몸이 저릿해지는 저음의 소리가 났다. 한쪽 발로 쉼 없이 베이스드럼을 치면서 다른 악기를 두드리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발과 손이 따로따로 제 할 일을 해야 가능한 드럼연주였다. 영미는 두 시간동안 아빠가 지켜보는 가운데 구레나룻 아저씨에게 드럼을 배웠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재미있었고 영미는 자기 안에서 알 수 없는 희열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8. 영미와 초희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초희아빠는 당분간 피아노를 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대신 초희는 날마다 밤
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초희가 공부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초희아빠는 잠을 자지 않았다. 초희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과일이며 음료수를 초희 방에 가져다주면서 ‘잘 되니?’ ‘잘 되니?’ 를 반복했다. 초희아빠도 30분마다 방에 들어와서 열심히 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올백을 맞으면 놀이공원에 데려간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초희는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면서도 답답하고 부담스러웠다.
시험을 앞두고 초희는 더 말랐다. 학교에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꾸벅꾸벅 졸다가 책상 위에 이마를 부딪혀 양호실에 가기도 했다.
‘아, 이대로는 정말 너무 힘들어.’
초희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영미생각이 났다.
‘영미는 날마다 무엇을 할까. 나처럼 방에 갇혀 공부만 할까? 아마 아닐 거야. 영미는 자기 마음대로 학원도 하루 쉬면서 호수공원에서 놀기도 하잖아? 나 같진 않을 거야.’
초희는 수업시간에 영미에게 넌지시 물었다.
“요즘 집에서 뭐해? 공부 해?”
“내가 뭐하는지 그건 알아서 뭐하게? 네 일이나 신경 써.”
영미는 여느 때처럼 초희에게 쏘아붙였다.
“아니, 그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시험?”
“어? 시험인줄 몰랐어? 곧 중간고사인데.”
“야, 누가 모른대? 얘 좀 봐? 날 뭘로 알고. 그런데 넌 공부 많이 했어?”
“응.”
초희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래?...그럼 있지, 방과 후에 떡볶이 집 앞에서 보자.”
영미가 잠시 뜸을 들이고 난 뒤 말했다.
“알았어.”
영미의 말을 듣고 초희가 웃으며 말했다.
용대길 선생님은 점심을 먹고 나서 오케스트라 합격자 명단을 발표했다.
“어험, 우리 반에서 많은 단원이 뽑히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외부에서 전문적인 음악선생님들하고 같이 뽑는 거니까 선생님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태리하고 동수, 그리고 교희 일어나 봐.”
용대길 선생님이 세 명을 불렀다. 희선이하고 하영이는 떨어졌다.
“너희들 혹시 희망하는 악기가 있니?”
태리는 바이올린을, 동수는 호른을 맡겠다고 했다. 교희는 플롯을 희망했다. 태리는 바이올린 학원을 다녔었고 교희도 마찬가지다. 동수는 호른의 생김새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방과 후에 관악부실로 오도록.”
수업을 마치는 멜로디에 섞여 용대길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쉬는 시간에 영미에게 태리와 동수가 왔다. 영미는 흠칫, 놀랐지만 모르는 체 했다.
“영미 너도 오케스트라 하지 그러니?”
태리가 영미 앞에 서서 말했다. 영미는 들은 체 만 체 연필을 깎고 있었다.
“야, 저 몸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바이올린이 남아나겠냐?”
동수가 태리 뒤에 서서 말했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영미가 바이올린을 하고 싶겠니? 드럼을 치면 딱이지. 물론 드럼에 구멍이 나겠지만.”
태리가 영미를 위하는 척 하면서 또 놀렸다. 초희는 태리와 영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영미가 당하지만 말고 무언가 해주기를 바랐다.
영미는 가만 참으며 숨을 고르고 있다가 발딱 일어났다. 초희의 바람대로. 영미는 잽싸게 태리를 밀었다. 영미의 기습에 태리는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태리 뒤에 비스듬히 서 있던 동수도 넘어지는 태리에 깔려 같이 나동그라졌다.
“한번만 더 놀려봐. 그땐 귀를 물어뜯어 버릴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고 있어.”
영미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태리와 동수는 넘어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둘 다 교실 바닥에 앉아 멍하니 영미를 바라보았다. 희선이가 엉거주춤 일어서고 하영이가 뒤쪽에서 달려왔지만 영미는 지지 않았다. 둘을 한꺼번에 잡고 이리저리 마구 흔들어 버렸다.
“앗, 아파.”
희선이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고 하영이는 왔던 자리로 내동댕이쳐졌다. 초희는 영미의 모습을 보고 기뻐서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전에 놀림을 당했던 복수를 멋지게 해낸 것이다.
초희는 깜빡 생각에서 깨어났다. 영미는 초희의 상상대로 발딱 일어서긴 했다. 하지만 복수는커녕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태리를 밀긴 밀었는데 태리가 피하는 바람에 영미만 나가 떨어졌다. 영미는 제 힘을 못 이겨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교희 책상 밑으로 얼굴이 들어가 버렸다. 태리와 동수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게 영미를 바라보았다. 올챙이 같은 배를 내밀고 교희 책상 밑에 얼굴을 묻은 영미. 희선이가 영미 배를 툭툭치면서 깔깔거렸다. 교희는 그때까지 가만 앉아 있다가 고개를 책상 밑으로 내리면서 말했다.
“너 거기서 뭐하니?”
영미는 그날 수업시간 내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을 더 모집한다는 용대길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미는 교실에서 뛰쳐나왔다. 초희는 허겁지겁 영미를 따라갔다. 영미를 기다리게 하면 가방을 들게 하고 꼬집기도 한다.
“야, 너 천원 있어?”
떡볶이집 앞에서 영미가 초희에게 말했다. 초희는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킨 뒤에 떡볶이를 뒤집고 있는 아줌마에게 말했다.
“여기, 떡볶이 이천 원 어치 주세요.”
컵 두 개에 나눠줄까?
“아뇨, 그냥 큰 컵에 이천 원 어치요.”
초희가 말했다.
“내가 천원 말했지 이천 원 말했어?”
초희가 선뜻 이천 원 어치를 주문하자 영미는 괜히 겸연쩍어서 되레 큰소리를 쳤다. 내내 초희 돈을 빼앗아서 사먹었는데 오늘은 초희가 사주는 걸 먹는 기분이 들어서 자존심도 상했다.
“미안해. 네가 배고플 것 같아서.”
초희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영미는 떡볶이 큰 컵을 받아들고 앞장서 갔다. 초희가 졸졸 따라갔다.
“너도 먹을 거야?”
영미가 떡볶이를 먹으려다 말고 뒤돌아서 초희에게 말했다. 초희는 걸음을 멈추고 대답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흥, 그럼 먹든지 말든지.”
영미는 그렇게 말하고 가는 플라스틱 포크로 떡볶이를 찍어 입에 넣었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초희에게 말했다.
“아참, 너 공부 많이 했다 그랬지?”
“응, 좀 했어.”
“흠, 그렇다 이거지? 그럼 너 중간고사 때 나한테 답안지 좀 보여줘. 넌 13번이고 내가 18번이니까 네 뒤에 내가 앉게 될 거야.”
“......”
초희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너 내 말 안 들으면 혼난다. 나 힘 센거 알지? 그리고 난 무지 거친 사람이야.”
영미가 초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면서 눈을 부라렸다. 초희는 영미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참 뭔가 생각하던 초희가 말했다.
“그건 나쁜 짓인데...선생님이 아시면 큰일 나.”
“얘 좀 봐? 시키는 대로 안하겠다 이거야 지금?”
영미가 잔뜩 인상을 썼다.
“아니, 알았어.”
초희가 겁에 질렸는지 몸을 움찔하면서 말했다. 그러더니 또 뭔가를 한참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미는 초희의 대답을 듣고 기분이 좋아져서 떡볶이를 자꾸 입에 넣으며 걸어갔다.
“영미야, 저기 있잖아. 우리 같이 공부하면 어떨까?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재미도 있고...능률도 오르지 않겠어?”
“으응?”
초희의 말에 조금 당황한 영미가 대답을 얼버무렸다. 의아하기도 했다. 자기는 초희를 항상 괴롭히는데 공부를 같이하자고 하다니! 전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또 있었다.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초희는 영미를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왜 그럴까 내심 이상했지만 아직 얘가 순진해서 그러나보다 했었다. 하지만 공부는 다르다. 서로 마음이 맞고 친한 친구끼리 하는 게 공부다. 영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초희는 영미와 공부를 같이하자고 하는 것이다.
“공부를 같이 해? 내가 왜 너랑 공부해야 하는데? 나 혼자도 잘할 수 있어.”
영미가 쏘아붙였다.
“난 그냥,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고...너랑 같이하고 싶어서...왜냐하면 심심하니까.”
초희가 우물쭈물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양손 검지손가락을 맞대면서 말했다. 초희는 영미의 다음 말을 애타게 기다렸다.
“흠, 그래? 심심하다고?”
영미는 그렇게 말해놓고 생각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초희랑 같이 공부해서 손해 볼 일을 없을 것 같았다. 초희는 공부도 잘하는데다가 착해서 모르는 걸 물어봐도 잘 가르쳐 줄 것 같았다.
“그럼, 뭐 그러던지.”
영미는 지나가는 듯한 말로 초희에게 말했다. 초희가 활짝 웃었다.
“와아! 정말 고마워.”
초희는 신이 나는지 젓가락 같은 다리로 폴짝폴짝 뛰었다.
“그렇게 좋아?”
영미는 초희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왜 이렇게 좋아할까. 영미와 초희는 오후에 호수공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9. 영미를 좋아하는 이유
“넌 악기 다룰 줄 아는 거 없어?”
호수공원 정자에서 책을 펴놓고 누워 영미가 초희에게 물었다. 초희는 국어책을 읽다 말고 영미를 바라보았다.
“으응, 있긴 한데.”
초희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뭔데?”
“피아노.”
“그래? 잘 쳐?”
“응, 조금. 학원 다녔거든.”
“그래? 그럼 오케스트라 왜 안했어?”
“오케스트라? 아, 그거. 그냥 치고 싶지 않아서...”
영미의 말에 초희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다시 말했다.
“그러는 넌 왜 안하는데?”
“나? 난 사실은...다른 악기는 잘 못해. 드럼이 재미있긴 하던데...”
영미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우리 같이 오케스트라 할까? 너랑 같이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초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넌...왜 나하고 뭐든지 같이하려고 하지? 내가 뭐 잘해준 적도 없는데 말이야.”
영미가 물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초희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응. 그건 말이지.”
초희는 영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뭔데? 빨리 말해봐.”
“학기 초에...”
초희는 자기가 영미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학기 초에, 그러니까 반이 막 배정되어서 서로 얼굴도 몰랐을 때 초희는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괴롭힘이나 마찬가지였다. 젓가락 같다며 놀리고 발로 툭툭 걷어차기도 했다. 돈을 뺏으려는 아이도 있었다. 초희가 다니는 학교의 옆 학교에서 질이 안 좋기로 유명한 아이들이었다. 다른 학교에까지 원정을 와서 아이들을 괴롭힌 것이다. 초희는 힘이 없고 가냘프지만 딱 봐도 곱상하게 생겨서 부잣집 아이같이 생겼다. 괴롭히기도 좋고 돈도 많아 보였을 거다.
“야, 너 돈 이것 밖에 없어?”
초희에게 이천 원이나 뺏은 아이들이 초희 어깨를 툭툭 때리고 있었다. 그때 영미가 나타났다. 영미는 초희가 맞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는 영미에게 아이들이 시비를 걸었다.
“야, 너 뭐야. 빨리 안 꺼져?”
그중 대장인 듯한 아이가 영미에게 말했다. 영미가 뚱뚱하고 키도 제법 크지만 힘없는 물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네가 뭔데 나한테 가라마라 해?”
영미가 그 아이의 말을 맞받았다. 영미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초희를 잠시 놔두고 영미에게 다가왔다. 걸리적거리는 영미부터 손봐줄 생각이었다. 처음 영미에게 시비를 걸었던 아이가 영미의 팔을 잡고 비틀었고 다른 아이는 머리를 잡았다.
“에이 씨.”
영미는 팔을 비트는 아이의 멱살을 잡고 제 앞으로 당겼다가 힘껏 밀었다. 아이가 나가 떨어졌다. 영미는 머리를 잡힌 손을 뿌리치고 손을 꺾어 버렸다.
“으악!”
비명이 터졌다. 마지막 아이는 영미 뒤에서 허리를 잡고 있다가 두 아이가 꼼짝 못하는 걸 보고는 영미를 놓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넘어진 대장아이는 영미가 다시 다가가자 친구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쳤다. 나머지 두 아이들도 영미가 다가가자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쳤다. 초희는 영미의 모습에 반해 버렸다. 불량아들 세 명을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우다니! 그 뒤로 옆 학교 아이들은 초희 곁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초희는 영미를 은인처럼 생각했다. 그런 영미가 같은 반이라는 걸 알고 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 일이 있었니? 난 생각도 잘.... 아참! 그러고 보니 이제 기억난다. 뭐 저런 말라깽이가 다 있나 했었지. 하하.”
영미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물었다.
“헤, 내가 좀 마르긴 했지. 그땐 정말 고마웠어.”
“야, 뭐 그런 거 가지고.... 너 구해줄려고 그 애들 혼내 준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마.”
“그래도....”
“공부하자면서 공부는 안할 거야?”
“아참! 그렇지.”
호수 공원의 물결이 나이테로 접히고 물결이 접히는 만큼 바람은 시원하게 불었다. 낮이라서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조용하고 답답하지 않아서 집중이 잘 됐다. 영미도 오랜만에 공부에 빠져들었다.
영미는 초희가 공부 중간에 영어학원에 다녀올 때까지 계속 공부했다. 모르는 문제는 표시를 해두었다가 초희가 학원에서 돌아오자 꼬치꼬치 물었다. 둘은 해질녘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에 열중했다. 영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하면서 스스로 신기해했다.
10. 중간고사
영미는 그 뒤로도 쭉 구레나룻 아저씨를 찾아가 드럼을 배웠다. 베이스 드럽으로 일정하게 박자를 맞추어서 스트로그를 사용하는 연주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시험기간이 아니라면 영미는 계속 드럼을 치러 갔을 거다. 하지만 초희가 같이 공부하려고 애타게 자기를 기다린다는 걸 알고 나서는 시험이 끝날 때까지만 드럼 치는 걸 쉬기로 했다.
영미와 초희는 처음 정자에서 공부한 이후로 날마다 방과 후에 만났다. 초희엄마는 초희가 친구와 정자에서 공부한다는 걸 알고 김밥과 음료수와 과자는 정자까지 가져다주었다. 초희엄마는 초희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무척 감격한 듯 했다. 영미를 볼 때마다 눈웃음을 지었다. 영미는 뚱뚱하다고 놀리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듯한 초희와 초희엄마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자기를 외톨이 초희의 구세주처럼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괜히 쑥스럽기까지 했다.
“야, 이 초희.”
정자에 누워서 공부를 하다 말고 영미가 초희를 불렀다.
“응? 왜?”
“전에 말한 거 있잖아. 오케스트라 말야. 내가 듣기로 학교에 피아노를 잘 치는 애가 없대. 넌 실력이 어느 정도야?”
“으응. 그냥 조금 하지 뭐. 그런데 왜?”
“왜는 자꾸 왜야. 애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나랑 같이 하면 너도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영미가 답답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
“아참, 그렇구나. 그런데 너도 할 거야?”“뭐, 시켜주면 할 수도 있지, 나 아빠 친구 분한테 드럼 배우러 다니거든.”
“와! 정말? 너무 멋있다. 영미 네가 드럼을 치면 정말 어울릴 것 같아.”
초희의 말을 듣고 영미가 우쭐 해졌다.
“너 피아노 잘 치냐니까 엉뚱한 말만 하고 있니?”
영미가 겸연쩍어서 말을 돌렸다.
“그럼. 우리 집에 갈까? 거실에 피아노 있는데. 말로 설명하기도 그렇고 직접 들어보면 알 거 아냐.”
초희가 말했다.
“어,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영미는 초희 집에 가는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딱히 거절하기도 묘했다. 초희의 아파트가 호수공원 바로 옆이고 영미가 사는 아파트는 초희가 사는 아파트 뒤쪽에 있었다. 호수공원에 오다보면 초희가 사는 아파트 담장 길을 따라오게 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영미는 깨끗하고 잘 정돈된 아파트를 보면서 눈을 크게 뜨곤 했다. 영미가 사는 아파트와 비교가 되었다. 금이 가고 낡은 16평 아파트와 40평이 넘어 보이는 초희네 아파트. 볼 때마다 부러웠다. 그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했던 적도 있다. 초희가 그 아파트에 사는 줄 알고 괜히 심통이 나서 초희에게 쌀쌀맞게 굴었던 생각도 났다.
“와! 영미 왔니? 반갑다, 어서 와.”
초희엄마가 영미를 반겼다. 초희의 집은 영미의 생각보다 더 으리으리했다. 거실 천장의 등은 샹들리에였고 커다란 수족관엔 파랗고 빨간 열대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벽걸이 TV역시 영미네 TV보다 열배는 커 보였다. 가죽소파 옆 베란다 쪽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피아노가 보였다. 영미는 거실풍경을 보고 왠지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다.
“영미 뭐 줄까? 오렌지 주스?”
초희엄마가 말을 걸 때까지 영미는 정신이 몽롱했다. 초희가 피아노를 쳐보겠다면서 의자에 앉았다.
“아빠 있을 땐 피아노복을 입고 쳐야 해. 이렇게 바지 입고 치면 혼나.”
초희가 말했다. 영미는 말없이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럼 칠게. 이 곡은 쇼팽의 강아지 왈츠인데 강아지가 제 꼬리를 물려고 빙빙 도는 모습을 곡으로 표현한 거야.”
초희가 말을 하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초희의 손이 건반을 마구 뛰어다녔다. 피아노에서 경쾌한 음이 울려나왔다. 작은 강아지가 통통 뛰어다니는 모습이 절로 보이는 것 같았다. 영미의 가슴속에 들어온 강아지 한 마리가 제 꼬리를 물려고 한없이 제자리를 돌았다. 영미는 기분이 좋아져서 해맑게 웃었다. 초희의 손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건반 위에서 춤추는 손.
젓가락 같고 늘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초희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빠르고 경쾌한 피아노연주였다. 영미는 언젠가 아이들을 따라간 피아노학원에서 아이들이 연주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빠르고 리듬감 있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놀라워했었다. 하지만 초희의 연주는 그 아이들의 연주와 차원이 달랐다. 초희의 연주엔 영미의 가슴 속 응어리들을 녹아내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영미는 초희의 연주를 들으면서 감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초희엄마는 영미의 맞은편에 앉아서 자랑스러운 눈으로 초희를 바라보았다.
초희의 강아지가 영미의 눈에 보였다. 잔디 위에서 제 꼬리를 물려고 빙빙 도는 흰 강아지, 하지만 꼬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오전의 햇살이 쳐들린 꼬리 끝에 매달려 있다. 강아지는 꼬리 끝 엷은 햇살이 신기하다. 멈출 줄 모르고 돈다. 붉고 작은 입안과 목젖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숨을 할딱이는 강아지. 우습다. 영미는 저도 모르게 깔깔 웃었다. 초희가 연주를 끝냈다. 초희엄마가 박수를 쳤다. 아직도 영미의 눈엔 놀람이 가득 들어있었다.
드디어 시험 날이 왔다. 영미는 초희와 함께 한 일주일 동안 난생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 첫 시간은 국어였다.
다음과 같은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는 말로 가장 바른 것은 어떤 것입니까?
평가관점: <예의바르게 거절하는 말하기.>
그 책 재미있겠다. 빌려 줄 수 있니?
[1]나 지금 읽고 있는 것 안 보이니?
[2]나 지금 방금 읽기 시작했단다.
[3]야, 지금 나하고 한 판 싸우자는 거야?
[4]지금 읽고 있는 중이거든, 다 읽고 빌려줄게.
[5]읽고 있는데 빌려달라는 건 좀 심한 거 아니니?
예전 같으면 영미는 1,2,4, 중에서 답을 고르느라 땀을 삐질삐질 흘렸을 거다. 1번도 안 보이니? 하는 말투가 상냥해 보이고 2번은 마치 엄마가 말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한다. 4번도 나중에 빌려준다고 하니까 예의바르다. 영미는 초희가 생각났다. 초희 같으면 어떻게 말할까. 분명 초희는 거절하지 않고 자기에게 책을 빌려줄거다. 그런 점에서 거절은 했지만 나중에 빌려준다고 하는 4번이 답이다. 영미는 주저 없이 4를 적었다.
4교시는 영어였다.
What are these? - They're pigs.{ }
What are these? - They're hens.{ }
What are these? - They're cows.{ }
그림판에 그림이 있었다. 돼지, 토끼, 오리, 새, 소. 등이었는데 모두 4가지 동물의 그림꾸러미였다. 예전 같으면 단어를 모르기 때문에 어림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 안다. 초희가 돼지를 영어로 말하면서 유난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던 기억도 났다. 영미의 별명이니까 조심스러웠을 거다. 영미는 무심코 태리 쪽을 바라보았다. 태리가 영미를 보더니 시험지를 들고 돼지 그림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입모양으로 피그, 그랬다.
확 달려가서 입을 찢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대신 영미는 암탉을 가리키며 킥킥, 웃었다. 머리는 작고 목은 긴데다가 입이 좀 나와 있는 태리가 암탉 같았기 때문이다. 태리가 영미를 보더니 웃음을 멈추고 이마를 찌푸리면서 숨을 마구 몰아쉬었다. 영미에게 놀림을 당한 건 처음이니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중간고사 시험이 끝났다. 영미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시험이 끝나자마자 교실에서 뛰쳐나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용대길 선생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정말 그랬을지 모른다.
“내일 모레까지 추가로 단원을 뽑겠다. 거의 다 정해졌지만 몇몇 악기는 아직 적합한 연주자를 구하지 못했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거나 전에 하고 싶었는데 신청을 못한 학생이 있으면 모레까지 선생님한테 말을 하도록. 이상이다. 시험 보느라 고생했다.”
영미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초희에게 눈짓을 하고는 교실을 뛰쳐나왔다. 살찐 영미가 뛰어가자 뒤에서 아이들이 킬킬거렸다. 마치 동그란 공 하나가 굴러가는 것 같았다. 영미는 떡볶이 집에서 그날 처음으로 초희에게 떡볶이를 사 주었다. 초희는 감격에 겨워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11. 드럼 배우기
영미는 여전히 드럼을 배우러 다녔다. 처음, 아빠와 함께 구레나룻 아저씨를 만나 드럼을 배우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었다. 단원을 추가로 뽑는다고 했으니까 열심히 해볼 생각이었다.
“단원을 뽑는다고? 그럼 오늘부터는 배우는 시간을 늘려보자.”
구레나룻 아저씨가 말했다. 영미는 서툴러나마 악보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쉬운 곡만. 날마다 열 시간 씩 드럼을 칠수록 몸 안에 잠자고 있던 감각세포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어떤 곡은 영미 자신도 모르게 격정적으로 드럼을 치게 되었고 또 어떤 곡을 칠 때는 좀 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곡에 따라 혹은 박자에 따라 영미의 몸과 정신의 오르내림도 달라졌다.
“그렇지, 영미 너 이제 조금씩 리듬을 탈 줄 아는구나.”
구레나룻 아저씨가 칭찬할 때면 영미는 우쭐해져서 팔에 소름이 돋았다. 영미는 해질 무렵까지 열심히 드럼을 두드렸다. 팔과 다리가 얼얼했다. 손님을 맞을 시간이 아니었다면 언제까지나 두드리고 싶었다.
“좋아, 내일은 한 시간 일찍 오는 거다? 열심히 배우면 학교에서 널 따라올 사람이 없을 거야. 영미야, 네 아빠를 닮아서인지 진도가 빠르구나. 짧은 시간에 이 정도라면 상당한 재능이 있는 거야.”
구레나룻 아저씨의 칭찬을 뒤로 하고 영미는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포만감이 밀려왔다.
‘나도 잘 할 수 있는 게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배어나왔다.
다음날, 영미는 구레나룻 아저씨에게 초희를 데리고 갔다. 구레나룻 아저씨는 영미와 초희를 보더니 웃었다. 영미는 워낙 뚱뚱하고 초희는 바람에도 쓰러질 것처럼 가늘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너도 드럼 배워 보려고?”
구레나룻 아저씨가 초희에게 물었다.
“아뇨, 얘는 피아노가 특기에요. 얘도 단원으로 신청할 건데 아저씨가 봐주셨으면 해서요.”
영미가 대신 말했다. 구레나룻 아저씨의 가게엔 드럼과 피아노, 기타와 색소폰도 있었다. 초희는 그냥 놀러가는 줄 알고 따라왔다가 영미의 말을 듣고는 큰 눈을 깜빡거렸다.
“흠, 그래? 그거 잘됐다. 단원이 되기 전에 영미랑 손을 맞추어 보는 것도 좋겠지. 좋아, 그럼 실력 좀 보자.”
구레나룻 아저씨가 초희를 피아노 앞으로 이끌었다. 초희는 구레나룻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영미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꼭 먼 길 떠나는 아이처럼 겁먹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디, 쳐 보렴.”
구레나룻 아저씨가 재촉했다. 초희는 강아지왈츠를 쳤다. 영미 앞에 다시 흰 강아지가 나타났다. 어두운 실내가 갑자기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구레나룻 아저씨는 처음엔 웃음을 머금고 있다가 초희가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웃음기를 싹 거뒀다. 그리곤 굳은 표정으로 초희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잔디밭을 뛰어다니던 강아지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초희의 연주도 끝났다.
“넌 대체 누구니?”
구레나룻 아저씨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레나룻 아저씨가 보기에도 초희의 연주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나이만 어리지 않다면 구레나룻 아저씨의 가게에서 연주를 해도 될 정도로.
“네?”
구레나룻 아저씨의 말에 초희가 되물었다.
“너처럼 피아노 잘 치는 아이는 처음 본다. 도대체 피아노를 어디서 배운 거냐.”
구레나룻 아저씨는 초희의 실력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냥, 여기저기서...요.”
초희가 말끝을 흐렸다.
“어쨌든 영미와는 좋은 팀이 되겠구나. 둘이서만 합주를 할 수도 있겠고 말이야. 실제로 피아노와 드럼으로만 연주한 콘서트도 있었지.”
구레나룻 아저씨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영미와 초희는 오후 내내 드럼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피아노와 드럼을 서로 섞어서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구레나룻 아저씨가 말했다. 그러면서도 피아노와 드럼소리를 섞게 만들었다. 피아노와 드럼이 합쳐지니 왠지 더 신나고 독특한 소리가 났다.
“피아노와 드럼의 합주는 드문 대신에, 사람들에게 독창적인 연주를 들려줄 수 있단다. 관객들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감동을 하곤 하지.”
구레나룻 아저씨는 만족한 표정으로 영미와 초희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질 때까지 피아노와 드럼을 연주했다. 구레나룻 아저씨가 그만 멈추라고 할 때까지.
“너희 둘은 묘하게 잘 어울리는구나. 외모도 그렇고 피아노와 드럼도 그렇고.”
구레나룻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단원을 모집하는 날이 되었다. 용대길 선생님은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양복을 입고 왔다. 머리도 단정하게 가르마를 탔고 얼굴엔 콜드크림이라도 발랐는지 기름기가 번들번들했다. 양복바지가 좀 짧고 2대8 가르마여서 좀 촌스럽긴 했지만 아이들은 처음 보는 모습에 ‘와’ 하며 놀라는 표정들을 지었다.
“자, 주목. 오늘 오케스트라 단원을 추가로 뽑는다고 얘기했지? 아직 빈자리가 많으니까 많이 지원해도 상관없다. 물론 지원한다고 해서 다 뽑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특히 피아노가 좀 약하다. 타악기 쪽도 마땅한 아이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고 지원하도록.”
용대길 선생님이 말했다. 서너 명의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영미는 초희를 바라보았다. 초희도 영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영미는 여전히 초희를 바라보는 채로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영미가 손을 들자 초희도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어? 쟤들 좀 봐.”
반 아이들이 영미와 초희를 보면서 웃었다. 특히 동수와 태리는 배를 잡고 마구 웃었다.
“조용!”
용대길 선생님이 소리쳤다. 그리곤 말을 이어갔다.
“오, 그래. 6명이구나. 지금 손을 든 사람은 5교시 끝나고 관악부실로 오도록. 이상이다.”
용대길 선생님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관악부실은 백여 명이 모여서 시끄러웠다. 이미 뽑힌 아이들은 느긋하게 관악부실 뒤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추가로 모집한 아이들은 차례를 기다리느라 앞쪽 바닥에 앉았다. 오늘도 교장, 교감선생님이 왔다.
“자, 오늘은 특별한 손님들이 오셨어요. 이 지역 파출소장님과 교육청 장학사님도 오셨어요. 여러분에게 아주 기대가 크다는 말과 다름없겠죠? 단원을 뽑는 오디션에도 참관하러 오신 분들께 박수.”
교장선생님이 소개를 했다. 아이들은 마지못해 박수를 쳤다. 높은 사람 들려주려고 오케스트라에 지원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자기가 자신 있는 악기를 치기로 했다. 전에, 노래는 잘하지만 악기는 전혀 다루지 못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영미 반 웅철이는 드럼 앞에 앉자마자 심벌만 줄기차게 두드리다가 그만하라는 말을 들었다. 박자도 없고 리듬감도 없었다.
영미 차례가 왔다. 씰룩거리는 영미의 몸을 보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영미는 드럼으로 가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자, 침착하고. 혹시 아는 곡 있으면 연주해 보렴.”
용대길 선생님이 영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영미가 베이스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베이스 드럼 뿐인데도 심상치 않은 박자와 리듬감이 관악부실에 울렸다.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영미는 스내어 드럼과 하이햇 심벌을 치기 시작했다. 낮은 음의 베이스드럼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그 위에 스내어 드럼 소리가 얹어졌고 간간이 하이햇 심벌 소리가 섞였다.
낮은 음과 높은 음의 조화. 영미는 구레나룻 아저씨와 손발이 저리도록 연습한 곡을 쳤다. 아이들이 모두 드럼과 영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영미는 느꼈다. 그 순간, 드럼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걸.
칙칙폭폭, 기차 프랫폼이었다가, 버스 정류장이었다가, 물이 흐르는 폭포였다가, 눈보라가 날리는 설산이었다가.
영미는 곡을 연주하면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풍경들을 보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부럽지 않았다. 드럼소리 속에서 영미는 자신을 감싸는 또 다른 자신을 보았다.
“오오,”
교장선생님과 장학사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용대길 선생님도 깜짝 놀란 듯 하마 같은 입을 쩍 벌렸다. 영미가 연주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단해.”
파출소장님이 느닷없이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그때까지 조용하던 아이들이 따라서 박수를 쳤다. 오래도록. 용대길 선생님이 손을 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쳤을지 모른다. 영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태리와 동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영미를 보았다.
이제 초희의 차례였다. 초희의 연주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모두 나자빠질 지경이 되었고 동수는 콧물을 흘렸다. 누가 지렸는지 오줌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교육청에 가자마자 예술학교로 지정을 하고 예산을 집행하겠습니다.”
장학사는 떠나면서 교장선생님에게 그렇게 말했다. 파출소장은 별 상관은 없지만 학교 순찰을 자주 돌겠다고 했다.
영미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다고. 영미아빠는 축하를 해주러 밤에 오겠다고 했다.
“맛있는 고기 사갈 테니까 저녁 먹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영미아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영미의 엄마 역시 영미가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서 기쁜지 인형눈깔을 붙이면서 자꾸 히죽히죽 웃었다. 영미는 인형눈깔을 같이 붙이다가 지겨워져서 공원호수 정자로 갔다.
“어? 너 웬일이니?”
영미가 말했다. 정자엔 초희가 와 있었다. 두 무릎을 세우고 무릎에 얼굴을 폭 파묻고 있었다. 초희는 영미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들었다. 눈가가 촉촉했다.
“무슨 일 있니?”
영미가 물었다.
“아니, 아니야.”
초희가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곤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얼굴을 파묻고 훌쩍거렸다. 초희는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가 있어서 더 눈물이 났다.
“무슨 일이야. 말을 해 봐.”
“아빠가, 좋아하지 않아.”
“뭘?”
“나 오케스트라 단원 된 거.”
“왜?”
“아까 전화 했었는데 학교 오케스트라에선 배울 것도 없다면서 끊어 버렸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말 너무해.”
초희는 그렇게 말해놓고 또 훌쩍거렸다.
“네가 얘니? 질질 짜게. 그만 좀 울어.”
영미가 말했다. 영미의 말에 초희가 울음을 뚝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닦았다. 울지 않는다는 걸 알리고 싶었는지 영미를 향해 눈을 말똥말똥 떴다. 그런 뒤 씨익 웃었다.
“얘 좀 봐? 울었다, 웃었다 아주 제 마음대로네?”
영미가 웃으며 말했다. 초희가 따라 웃었다. 둘은 드럼과 피아노에 대해서, 오케스트라 연주에 대해서 한참동안 얘기하다 헤어졌다.
12. 누가 짱이야?
태리와 동수는 모듬 아이들을 불러냈다. 요즘 태리는 불안했다. 반 아이들이 영미와 초희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영미가 문제였다. 원래 힘이 좋아서 반에서 짱이나 다름없었는데 태리가 모듬 아이들을 부추겨서 번번이 골탕을 먹였다. 그 결과 영미는 웃음거리가 되고 태리가 짱이 되었다.
그런데 엊그제 오케스트라 오디션부터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쉬는시간에 영미를 놀려도 모듬 아이들을 빼고는 아무도 웃지 않는 것이다. 영미를 뚱보라고 놀려도 웃지 않았고 영미와 싸울 것 같은 분위기에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동수는 여전히 태리와 행동을 같이했지만 모듬 아이들조차 엉거주춤 눈치만 볼 뿐 태리를 거들려고 하지 않았다.
“야, 안 희선 넌 왜 그러고 있는데?”
영미와 동수가 한 판 붙으려고 할 때 태리가 그렇게 말했다.
“으응, 그냥 좀 피곤해서...”
희선이는 말끝을 흐렸다. 전엔 태리의 말만 듣고 영미가 살만 뒤룩뒤룩 찐 돼지거나 제 힘만 믿고 날뛰는, 공부 못하는 바보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관악실에서의 연주를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영미는 돼지도 바보도 아니었다. 드럼을 제 몸처럼 다루고 거기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특별한 아이였던 것이다.
그동안 태리의 말만 듣고 영미를 그렇게 생각해버린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초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틈나는 대로 초희를 건드렸던 교희는 관악부실에서 피아노연주를 직접 듣고는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아이로 생각했다. 툭툭, 어깨를 치거나 책상에 금을 그어 영역을 침범하면 초희의 손목을 한 대씩 때리던 짓도 그만두었다. 이젠 되레 힐끗힐끗 초희의 눈치를 보았다.
“너 연필이 왜 그 모양이니, 이리 내. 내가 깎아줄게.”
교희는 사물함에서 연필 깎는 기계를 꺼내 초희의 연필을 깎아주었다. 태리는 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모듬별로 피자 한판씩을 돌렸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곁들였다.
“와아! 태리는 역시 대단해. 집이 굉장한 부자래.”
아이들은 피자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즐거워했다. 몇몇 아이들이 태리에게 고맙다고 했고 태리의 모듬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영미는 제 모듬 아이들과 피자를 먹으면서도 떨떠름했다.
학기 초에 태리의 모듬 아이들이 달려들어 영미가 울어버린 날도 태리가 피자를 돌린 날이었기 때문이다. 영미는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영미는 수업 끝 멜로디가 나오자마자 밖으로 나와 운동장 옆 스탠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덕분인지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태리는 일방적으로 영미를 놀리던 학기 초부터의 작전을 바꿨다. 계속 그랬다간 자기 이미지만 나빠질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태리를 좋아하게 되면 영미에게 짱을 빼앗길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짱이야, 내가 짱이야?”
언젠가 방과 후에 영미를 만나 그렇게 따진 적도 있었다.
“짱? 짱 해서 뭐하는데? 너 다해.”
영미가 그렇게 말했다. 영미의 말에 괜히 태리만 머쓱해졌다. 하지만 태리가 그러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힘 센 영미와 친해지려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저희들끼리 싸웠다가 영미에게 고자질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만큼 영미의 힘을 아이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 본다는 증거였다. 남자 아이들도 영미에게 꼼짝을 못하니까 여자아이들에겐 영미가 가장 믿음직한 존재였다. 태리는 두고 볼 수 없었다.
1학년 때부터 뭐든 최고였던 태리에게 영미는 눈엣가시였다. 아이들끼리 다툼이 있으면 선생님에게 말해야 맞다. 혹은 태리거나. 3학년 때까진 늘 그랬다. 공부도, 체육도, 태리가 항상 최고였다. 달리기도 줄넘기도 태리는 1등이었다. 4학년이 되어서도 최고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간고사 때부터 일이 터졌다. 초희에게 반 1등을 빼앗겼고 힘은 영미가 최고였다.
태리가 영미와 초희를 미워하는 이유다. 게다가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배운 자신보다 영미와 초희가 더 화젯거리가 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어쨌든 태리는 이제 영미와 초희를 괴롭히기보다 반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럼, 자연스럽게 영미는 찬밥 신세가 될 것이다.
13. 영미의 떡볶이
단원이 정해지고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방과 후에 연습이 있었다. 영미와 초희는 연습시간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했다. 동수는 호른을 불었다. 누가 보더라도 오동통한 동수에게 호른은 잘 어울렸다. 태리는 연습이 있을 때마다 레이스가 달린 긴 치마를 입고 왔다. 태리의 바이올린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음악학원에 3년이나 다녔다고 했다. 지역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음악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기도 했다.
용대길 선생님은 독주할 사람을 뽑으려는지 영미와 초희, 태리에게 가끔 독주를 시켰다.
“한 달 연습 후에 강당에서 학부모들을 모시고 음악회를 가질 예정이다. 모두 열심히 연습하도록.”
용대길 선생님이 말했다. 연습을 할 때마다 관악부실엔 듣기 좋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럼과 피아노, 바이올린과 첼로, 호른과 플룻, 실로폰과 탐탐 등의 악기가 한 데 어우러져 내는 소리는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끔 동수가 한 박자 빠르게 소리를 내기도 했고 영미도 박자를 놓친 적이 있었지만, 그런 건 사소한 일이었다. 영미는 많은 악기들이 내는 웅장한 소리에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다.
시험공부를 같이 한 이후로 영미는 초희를 괴롭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시험결과가 나온 후 일거다. 시험을 본 날 영미가 떡볶이를 사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 다음날, 영미는 또 초희에게 돈을 빼앗아 떡볶이를 사 먹었다.
시험결과는 영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중에서 8문제. 지금까지는 30개쯤 틀리는 게 보통이었다. 영미는 힘만 셌지 공부는 못한다, 이게 반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험에서 그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게다가 시험이 어려웠던 편이어서 한, 두 문제 틀리던 아이들도 중간고사와는 대여섯 개씩 차이가 났다. 등수가 발표되진 않았지만 대략 영미의 등수는 5위권이었다. 꼴찌에서 왔다 갔다 하던 영미가 졸지에 5위권 안에 들어온 것이다.
“놀라운 소식이 있다. 영미가 이번 기말시험에서 8문제 밖에 틀리지 않았다. 중간고사에서는 33문제를 틀려서 반 점수 다 깎아먹었는데 말이야. 영미는 이번에 노력하면 무엇이든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자 모두 영미에게 박수!”
용대길 선생님도 놀랐는지 침이 마르도록 영미를 칭찬했다. 초희는 하나도 틀리지 않아서 1등이었고 한 문제를 틀린 태리가 2등이었다. 태리는 시험결과를 듣고는 억울한지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리고 얼굴을 묻었다.
영미는 그날, 또 초희에게 떡볶이를 사 주었다. 하지만 그 돈 역시 엊그제 초희에게 빼앗아 떡볶이를 사먹고 남은 돈이었다. 어쨌든 초희도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올백을 맞은 것보다도 영미가 8문제밖에 틀리지 않았다는 게 더 기분이 좋았다. 시험을 앞두고 정자에서 영미와 함께한 시간들이 헛되지 않아서였고 영미가 모르는 문제들을 열심히 가르쳐 준 보람도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분명 새로운 경험이었다.
“야, 이 초희. 내가 특별히 사주는 거니까 많이 먹어.”
영미는 초희에게 떡볶이를 사 주면서 거드름을 피웠다. 주머니에 삼천 오백 원이나 있어서 떡볶이를 실컷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어제 엄마가 인형눈깔 붙인 품삯을 받았다면서 삼천 원을 한 달 용돈으로 주었다. 나머지 오백 원이 초희에게 빼앗아서 떡볶이를 사먹고 남은 돈이다.
“응, 영미 너도 좀 먹어.”
초희가 말했다. 영미는 떡볶이를 양껏 먹으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나를 들고 오래오래 먹었다. 초희가 두 개를 먹는 동안 하나 밖에 안 먹었다.
“왜 그렇게 느리게 먹어?”
초희가 물었다. 평소의 영미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 뱃속이 별로 안 좋아서 그래. 너나 많이 먹어.”
영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14. 엉망이 된 공연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방과 후에 열심히 연습을 했지만 모든 악기 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강당에서의 공연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전교생의 학부모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오늘부터는 정말 공연을 하는 것처럼 연습을 하겠다. 한 눈 팔지 말고 집중하도록.”
용대길 선생님이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말했다. 걱정이 되기도 할 것이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연주는 별로 없었으니까. 호른이 제 차례가 아닌데도 불쑥 끼어들고 곡 연주 중간에 들어와야 할 실로폰은 언제 들어와야 할지 몰라서 허둥댔다. 호른과 실로폰이 잠잠하다 싶으면 드럼이 한 박자 빠르게 들어오기도 했고 트럼펫은 자주 소리가 옆으로 샜다. 돌아가면서 한 번씩 실수를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동수가 실수하는가 싶더니 실수를 거의 하지 않던 태리가 바이올린으로 방귀소리를 냈다.
“지금 연습을 하자는 거냐, 말자는 거냐. 정신 안 차려?”
용대길 선생님이 소리쳤지만 아이들은 킥킥 웃었다.
드디어 공연 날이 왔다. 학부모들이 하나, 둘씩 강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모두 위아래 검정양복을 입었다. 여자는 흰색 블라우스, 남자는 와이셔츠를 입고 빨간 넥타이까지 맸다. 용대길 선생님 역시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지휘자 옷을 입었다. 강당에 의자를 수백 개나 가져다 놓았지만 자리가 없어서 서 있는 학부모도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이 끝나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들으실 곡은 한 아이의 인생을 그린 곡입니다. 즉, 태어날 때부터 무덤으로 들어갈 때 까지죠. 잘 들어 보세요.”
용대길 선생님이 태리 쪽으로 손짓을 했다. 태리가 들고 있던 바이올린 활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이올린에서 아기 울음 같은 소리가 나왔다. 뒤이어 호른과 트럼펫이 소리를 냈다. 세 악기가 어우러지자, 제 있는 힘을 다해 으앙, 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 어떻습니까. 아기 울음소리 비슷하죠?”
용대길 선생님이 연주를 멈추게 하고 학부모들에게 말했다.
“네에.”
학부모들이 대답했다.
“이번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등교하는 모습을 표현한 부분입니다.”
용대길 선생님이 영미와 초희를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피아노에서 아침햇살을 표현한 밝고 맑은 음이 흘러나왔다. 드럼에서는 통통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표현한 스내어드럼 소리가 울렸다. 마치 개구쟁이 한 녀석이 아침햇살을 받으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와.”
학부모들이 탄성을 질렀다. 용대길 선생님의 설명대로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성공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곡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에 용대길 선생님이 단원들을 바라보고 섰다. 두 손을 양쪽으로 벌렸다. 오른 손에 지휘봉이 들려 있었다. 이제 정식으로 곡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그 순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었다. 학부모들도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는 걸 알고 조용해졌다. 용대길 선생님이 두 팔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모든 악기가 일제히 소리를 냈다. 피아노를 제외하고 비올라, 첼로, 바이올린, 드럼, 호른과 트럼펫 등이 각자 다른 소리를 냈다. 소리들은 강당 공중의 빈곳을 날아 학부모들의 귀에 울렸다.
어떤 소리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해 천장에 부딪히거나 유리창에 부딪혀서 되돌아왔다. 강당 전체가 들썩이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악기끼리 서로 화음이 되어주면서 잘 어울렸다.
학부모들은 얼마 되지 않은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저 정도였던가 하면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곡 중간에 문제가 생겼다. 줄곧 좋은 소리가 나던 튜바에서 갑자기 꽤액, 하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나왔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연주를 하면서도 그 소리를 들은 아이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지금까지의 긴장이 확 풀어져버렸다. 트럼펫 소리에 이어 호른에서 지나치게 큰 소리가 나왔다. 사춘기의 고민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부분이어서 모두 조용한 음을 낼 때였다. 듣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소리였다.
3반 경호는 엉겁결에 트럼펫소리를 한 옥타브 높게 해버렸고 영미는 놀라서 스틱을 놓쳤다. 하이햇 심벌을 쳐야할 때였는데 바닥에 떨어진 스틱을 찾느라 베이스드럼 페달도 밟지 못했다. 도미노처럼 아이들이 실수를 연발하자 강당엔 음악도 아니고 뭣도 아닌 소리들이 꽉 찼다. 어떤 땐 돼지 멱따는 소리 같기도 했고 또 어떤 땐 각설이타령 같기도 했다. 귀를 막는 학부모들이 더러 보였다.
용대길 선생님이 바이올린에 이어 피아노 독주로 황급히 바꾸지 않았다면 공연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태리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학부모들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고 초희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되찾았다.
“아이들이 좀 서툴러도 이해를 해 주시고 다음 공연은 준비를 잘 해서 좋은 음악으로 모시겠습니다.”
용대길 선생님의 인사말을 끝으로 음악회는 끝이 났다. 학부모들은 무언가 찜찜하면서도 딱히 무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기분으로 집에 갔다.
15. 싸움
영미가 공연에서 스틱을 놓친 실수를 두고 태리는 이때다 싶었는지 자주 영미를 약 올렸다.
“넌 드럼을 그 따위로 치니? 그래가지고 어디 불안해서 같이 공연을 할 수 있겠어?”
영미는 태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흥, 넌 저번에 방귀소리 안 냈어? 그런 연주는 나도 하겠다.”
그 대신 영미는 태리의 실수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번 연주는 태리가 잘했지만 어쨌든 그 전에 방귀소리를 낸 적이 있었으니까.
태리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정리를 할 필요를 느꼈다. 모듬 아이들을 불러 모아 작전을 짰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영미는 수업을 마치고 초희와 함께 교문을 나섰다.
떡볶이집에 들를 생각이었다. 여느 때처럼 영미가 앞장을 섰고 초희가 졸졸 따라갔다. 영미가 떡볶이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영미의 눈에 태리가 보였다. 태리 뿐만이 아니었다. 태리의 모듬 아이들도 보였다. 영미가 다가가자 모듬 아이들이 영미를 둘러쌌다.
“너희들 뭐야.”
영미가 말했다.
“뭐긴 뭐야. 너 오늘 혼 좀 나야겠어. 방귀소리 냈다고 나를 약 올려?”
태리가 이마를 찌푸리면서 허리춤에 양 손을 올렸다.
“흥, 내가 겁낼 줄 알아? 저리 비켜. 안 그럼 가만있지 않을 거야.”
영미가 소리쳤다. 태리와 모듬 아이들이 영미를 잡았다. 희선이는 한 팔을, 하영이는 어깨를, 태리는 머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이야앗!”
영미가 소리치면서 팔을 마구 휘둘렀다. 영미를 잡은 아이들이 후두둑,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곧 일어나 다시 영미에게 다가왔다. 영미는 아이들이 자신의 몸을 붙잡을 때마다 팔을 휘두르거나 있는 힘껏 밀었다. 아이들은 영미가 힘을 쓸 때마다 뒤로 밀려나면서도 금방 달라붙었다. 영미는 점점 숨이 찼다. 영미는 팔을 꼬집히고 머리도 쥐어뜯겼다.
“으앙!”
영미는 제자리에 앉아 울어버렸다. 영미를 충분히 혼내줬다고 생각한 태리는 누가 보기 전에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아침, 영미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머리칼이 뜯긴 자리도 아팠고 꼬집힌 자리들도 피멍이 들었다.
용대길 선생님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교실을 둘러보았다. 빨리 온 아이들 서넛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평상시와 다른 학급신문에 눈이 멎었다. 용대길 선생님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학기 초와 마찬가지로 영미가 여럿에게 둘러싸여 당하고 있는 장면이 사진으로 붙어있었다. 영미의 머리칼을 쥐어뜯는 태리의 찌푸린 얼굴과 팔과 다리를 꼬집는 희선이도 보였다. 하영이는 영미의 무릎에 매달린 채 종아리를 물고 있었다.
“오늘 수업은 없다. 저 사진에 나오는 여섯 명은 지금 당장 부모님을 모시고 오도록. 모시고 오지 않으면 모두 전학을 보내겠다.”
용대길 선생님이 불같이 화를 냈다. 콧김을 내뿜는 소리가 쉭쉭, 났다. 태리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영미와 싸울 때 아이들이 몇 있었지만 다른 반 아이들이었다. 다른 반 아이들이 학급신문을? 태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초희도 있긴 했지만 젓가락 같은 초희가 그랬을 리는 없다.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 것 같은 초희였다. 게다가 겁은 또 얼마나 많은가. 태리는 한참을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학급신문에 사진을 붙였을까’
태리는 멍한 기분으로 초희를 바라보았다. 초희를 의심해서 바라본 건 아니었다. 눈이 가는 곳에 초희가 있었을 뿐이다. 그때 초희도 태리를 바라보았다. 태리는 그때 알았다. 초희의 짓이라는 걸.
무언가 할 것을 했다는 듯한 초희의 눈빛, 겁쟁이 초희의 눈빛이 아니었다. 눈매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태리의 눈길을 받으면서도 전혀 겁내는 표정이 아니었다.
‘세상에 저 젓가락 같은 초희가?’
하긴, 가만 생각해보면 학급신문을 붙일만한 아이는 초희 밖에 없었다. 게다가 요즘 영미와 부쩍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초희, 가만 안 둘 거야’
태리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하지만 당장의 복수보다 부모님께 혼날 일이 걱정이었다.
“이번엔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사진에 찍힌 여섯 명은 봉사활동 한 달이다. 그 기간 동안 태리는 방과 후 활동에서도 제외한다.”
용대길 선생님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학부모들과 면담을 하면서 태리엄마가 방과 후 활동은 하게 해달라고 했지만 용대길 선생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건 매우 중대한 잘못입니다. 영미가 경찰에 고소장이라도 제출하게 되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교육청에서 감사도 나올 거구요. 어떻게 보면 이번 사건은 왕따보다 더 큰 집단폭행과 다름없습니다. 이 정도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아셔야 해요.”
용대길 선생님의 말을 듣고 학부모들은 풀이 죽어 돌아갔다. 주동자인 태리는 오케스트라에서 빠졌다. 그 사실을 알고 태리는 엉엉 울었다. 영미를 괴롭힌 일이 이렇게까지 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리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자기가 큰 잘못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초희 저게 고자질을 했어’
마음 속에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미에 대한 미움은 싹 가신 대신 초희가 미워졌다.
16. 방과 후 연습
태리는 오케스트라에서 빠지고 나서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었다. 무얼 해도 재미가 없었다. 영미를 놀리려고 다가가다가도 이래봐야 남는 게 뭐 있나 싶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방과 후에 다른 아이들이 오케스트라 연습을 하러갈 때 느껴지는 질투와 부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바이올린은 내가 최고인데’
태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눈물이 찔끔, 났다. 학원에 가서 연주를 하면서도 관악부실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관악부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연주하고 싶었다.
“너, 왜 연주하면서 눈물을 흘려?”
태리를 바라보던 학원 선생님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대회날짜가 잡혔다. 한 달 후였다. 1년에 한 번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가장 큰 대회였다. 참가 초등학교만 17곳이었다. 그 학교들 중에 영미가 다니는 연제초등학교처럼 새로 생긴 윈드 오케스트라는 없었다. 가장 최근에 생긴 화정초등학교도 3년째다. 용대길 선생님은 태리가 빠졌지만 다른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 제2바이올린을 맡은 교희 혼자였다. 바이올린이 하나 빠지니 연주가 어딘지 모르게 심심했지만 용대길 선생님은 그대로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연습을 할 때마다 소리는 좋아졌다.
“대회에서 연주할 곡의 악보를 가져왔다. 바로 비발디의 사계다. 즉,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느낌을 표현한 곡이다. 우리가 연주할 곡은 사계 중 봄1악장이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연습하면 충분히 좋은 공연을 할 수 있을 거다.”
용대길 선생님이 한 달 후 공연에 쓸 새로운 곡을 준비해왔다. 영미는 듣지도 못한 곡이었지만 CD로 틀어주는 곡을 들으니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다. 과연 우리가 저런 연주를 할 수 있을까?
“초희야, 너랑 나랑 오케스트라 연습 끝나고 조금 더 하고 갈까? 용대길 선생님이 곽악부원들은 따로 와서 연습해도 된다고 했잖아.”
영미가 초희에게 말했다. 비발디의 사계 중 봄 1악장을 드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드럼으로는 봄 천둥과 번개는 칠 수 있지만 혼자 할 수는 없었다. 피아노를 치는 초희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샘물이 솟아오르는 소리, 산들바람 소리 등을 표현해줘야 가능한 연주다. 초희는 알았다고 말하고 헤, 웃었다.
그날부터 영미와 초희는 방과 후에 오케스트라 연습이 끝나면 스텐드에 앉아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을 구경하거나, 교무실 앞에 활짝 핀 사루비아 꽃을 구경하다가 4층 관악부실로 올라갔다. 초희가 먼저 피아노를 쳐서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표현하고 나면 영미는 메마른 천둥과 번개소리를 베이스드럼과 하이햇심벌로 표현했다. 아무도 없는 관악부실에서 단 둘이 연습을 하니 악보와 곡의 느낌이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초희야 어때? 재미있지?”
“응.”
영미와 초희는 날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했다. 영미와 초희는 단 둘이 연습하면서 느꼈다. 어느새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잘 되는데 샘물소리나 바람 부는 건 표현하기 힘들어.”
며칠 동안 연습을 하다가 초희가 말했다.
“그러게. 드럼으로도 그렇고, 무언가 빠진 느낌이 들어.”
영미도 초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땐 바이올린이 있으면 참 좋겠어.”
초희가 말했다. 처음엔 둘이서만 해도 재미있었지만 연습을 거듭하고 곡의 느낌을 알아갈수록 무언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연주를 하다가도 중간 중간, 악보 속의 음표가 사라져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영미와 초희는 둘이만 남아서 연습을 계속했다.
“너 요즘 통 안보이던데?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어느 날, 교실에서 태리가 영미 자리로 와서 물었다.
“흥, 왜? 방과 후에 날 기다렸나보지? 또 괴롭히려고?”
영미가 태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괴롭히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그냥 안보여서 물어본 거야. 물어보지도 못해? 대답하기 싫으면 관 둬.”
태리가 냉랭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뭐, 그냥 궁금한 거라면 말해 줄 수는 있지. 오케스트라 연습 해.”
“오케스트라? 그건 요즘 날마다 하잖아.”
태리가 되물었다.
“그 연습 끝나고 나랑 초희랑 따로 연습 해.”
영미가 말했다.
“얼씨구, 아주 음악가라도 되려나보네?”
태리가 영미를 비꼬았다.
“바이올린이 있으면 좋은데...”
저쪽에서 영미와 태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초희가 태리를 보면서 살짝 말했다.
“초희 넌 그동안 태리에게 당한 게 화가 나지도 않니? 공주병 걸린 얘니까 내버려 둬.”
영미는 태리가 자기 말을 듣는지 살피면서 초희에게 핀잔을 줬다. 그날, 태리는 초희를 점심시간에 불러냈다. 초희가 정말 학급신문을 붙였는지 알고 싶었다. 초희 말고는 그런 일을 할 아이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초희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운동장 구석의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였다. 크고 푸른 잎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네가 학급신문에 사진 붙였지?”
태리는 초희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으응?”
초희가 우물쭈물했다. 태리의 화난 눈을 보는 순간 겁을 잔뜩 먹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사진 말이야. 네가 붙인 것 맞지? 빨리 말해.”
태리가 다그쳤다.
“저...그게...그러니까...선생님이 무슨 일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초희가 머뭇거리면서 사실대로 말했다.
“흥, 그래? 그랬단 말이지? 이걸 그냥 콱.”
태리는 잔뜩 화난 모습으로 초희를 때릴듯이 한손을 치켜들었다. 초희는 그런 태리를 힐끗 보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후, 이걸 그냥 때릴 수도 없고...너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러면 죽을 줄 알아. 알겠어?”
태리가 큰 소리로 윽박질렀다.
“아, 알았어. 미안해.”
초희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초희의 말을 듣고 나서 태리의 찌푸린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태리가 관악부실에 나타난 건 그로부터 삼일 후였다. 영미는 베이스드럼을 작고 낮게 두드리고 있었고 초희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어? 너 여기 웬일이야?”
영미가 태리를 발견하고는 베이스 드럼을 밟던 발을 멈췄다.
“그거야 내 맘이지.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니? 니들 보러 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태리가 뚱하게 말했다. 초희는 태리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어서 와.”
초희가 말했다.
“흥. 지금 치는 곡이 뭔데?”
태리는 관심 없는 척 두리번거리면서 초희에게 슬쩍 물었다.
“응, 비발디의 사계 중 봄1악장이야.”
“그래? 그런데 연주실력이 그것 밖에 안돼? 내가 발로해도 그 정도는 하겠다.”
태리가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면... 직접 한 번 연주해 보시지.”
영미가 비꼬는 투로 말하고는 페달을 밟았다. 초희는 영미가 연주를 시작하자 머뭇거리다가 다시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와 드럼소리가 어울려 관악부실을 가득 메웠다. 영미와 초희는 태리의 존재를 잊은 듯 연주에 집중했다. 태리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둘이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서 바이올린 앞으로 갔다. 그리곤 예전에 자신이 연주하던 바이올린을 살살 매만졌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번개와 천둥. 드럼과 피아노가 이것들을 연주하는 동안 태리는 하염없이 바이올린 앞에 서 있었다.
영미가 잠시 쉬고 초희가 봄 햇살의 밝은 늘어진 분위기를 표현할 때였다. 태리가 서 있던 자리에서 비둘기 울음 같은 소리가 났다. 태리는 저도 모르게 봄날의 비둘기 소리를 표현하고 있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어울리니 정말 그럴 듯 했다.
그 전까지 드럼과 피아노만으로 연주할 수 없던 소리들이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왔다. 드디어 연주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와아, 태리랑 같이 하니까 소리가 훨씬 좋아진 것 같아.”
연주를 마치고 초희가 말했다.
“흥.”
초희의 말을 들은 태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입을 삐쭉거렸다.
“내가 떡볶이 사줄 테니까 따라와.”
셋이 함께 교문을 나서면서 태리가 말했다.
“네가 왜?”
영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흥, 먹기 싫으면 말든지.”
아니야, 사주면 우리야 고맙지. 참 맛있겠다.
초희가 영미와 태리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영미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태리가 사주는 떡볶이를 맛있게 먹었다.
그 후로 셋은 날마다 방과 후에 연습을 했다. 하루는 용대길 선생님이 관악부실로 들어왔다. 태리는 용대길 선생님을 보고 얼굴이 빨개졌다. 태리는 오케스트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용대길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관악부실을 나갔다.
17. 연제 오케스트라
대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영미와 초희는 들떴다. 그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마음껏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영미아빠는 영미의 연주소식을 듣고는 당장 오겠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객지생활을 그만두고 집에서 출퇴근해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초희가 오케스트라 연주대회에 나간다고?”
초희아빠는 초희의 연주소식을 듣고도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초희처럼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가 겨우 초등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게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들떠 있는 초희의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회 날이 밝았다.
“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좋은 성적은 내지 못해도 좋다. 지금까지 배운 대로만 하면 선생님은 만족한다. 단, 최선을 다하도록.”
대회장으로 떠나기 전에 용대길 선생님이 눈을 퉁방울만하게 뜨고 말했다.
장소는 문화예술회관이었다. 아침부터 학교 운동장에 악기를 싣고 갈 트럭이 왔고 교문밖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다림질 잘 된 검정치마와 윗도리, 그리고 빨간 넥타이를 맸다. 여느 때와 달리 아이들이 말이 없었다.
태리는 아침부터 교실 밖에 서 있는 관악부원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찔끔찔끔 짰다. 코도 훌쩍거렸다. 악기가 차에 다 실어지고 관악부원들이 교무실 앞에서 일렬로 서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태리는 숨을 몰아쉬면서 교실 창밖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 태리야. 너 나오라는데?”
희선이가 교실 문을 열더니 태리에게 말했다.
“누가?”
태리가 되물었다.
“용대길 선생님이 너 빨리 나오래. 차 곧 떠난다고.”
희선이가 급하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태리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곤 당황해서 책가방을 챙겼다.
“아니, 책가방 놔두고 그냥 오라니까?”
희선이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리는 다리가 안 보일만큼 빠르게 교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다 관악부원이 있는 곳까지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을 죽이며 맨 뒤에 섰다.
문화예술회관은 여러 학교에서 온 아이들로 붐볐다. 학교마다 악기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첫 학교부터 악기를 배치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무대는 가장 아래쪽이었고 계단처럼 관객석이 뒤로 갈수록 높아졌다. 홀 안엔 학부모들로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자, 모두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도록.”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용대길 선생님이 말했다. 연제초등학교는 마지막 무대였다. 다른 학교 아이들의 연주에 기가 죽다가도 가끔, 실수가 나올 땐 웃음이 나왔다. 태리는 어느새 검정 옷을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있었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연제초등학교의 차례가 왔다. 드럼과 실로폰 등은 같이 온 선생님들이 배치를 해 주었고 나머지는 각자 자기가 쓰던 악기를 들고 나갔다. 관객석 중간쯤에 교장, 교감선생님과 파출소장님이 앉았다. 영미 눈에 손을 흔드는 아빠가 보였다. 엄마도 곁에 있었다. 그 옆에 뚱한 표정의 초희아빠와 초희엄마도 보였다.
용대길 선생님이 지휘봉을 들고 양팔을 올렸다 내리면서 연주가 시작되었다. 웅성거리던 관객석은 조용해졌다. 방음장치가 잘 되어서 연주하는 소리가 홀 구석구석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초희가 경쾌한 새소리를 냈다. 마치 이른 봄날, 참새 떼가 지저귀는 듯한 음이었다. 뒤이어 바이올린, 첼로, 실로폰과 드럼이 한데 어우러졌다. 태리는 연주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슴 속에서 밀려나오는 희열을 느꼈다. 얼마나 하고 싶었던 연주였는지. 관악부원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관악부원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혼자 외톨이가 되었던 한 달. 자신에게 왕따를 당한 영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제1바이올린이 함께하지 못했던 지난 연습 시간들. 이제 온전히 사계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새가 날고 샘물이 솟아오르고 산들바람이 불었다. 천둥과 벼락이 치고 마른번개가 지나갔다. 아이들은 모두 그 순간, 악기와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영미의 드럼소리를 초희가 부드럽게 해주고 초희의 피아노는 태리가 내는 바이올린 소리에 섞여 더 아름답게 들렸다.
셋은 느꼈다. 관악부실에서 연습했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따뜻함이 되고 외로움을 달래 준다는 걸.
용대길 선생님도 지휘를 하면서 놀랐다. 그 동안 빈자리였던 제1바이올린이 채워지자 그동안 해왔던 연습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선율이 홀 안에 퍼졌다. 봄날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차례대로 연주될 때 초희아빠는 초희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초희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초희는 마치 피아노 선율과 함께 헤엄치듯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손을 높이 드는가 하면 머리를 위 아래로 흔들기도 했다.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저럴 수가’
그동안 항상 약하고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던 초희가 아니었다. 초희아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초희의 새로운 모습에 콧날이 시큰거렸다.
사계가 끝났다.
관객석은 연주가 끝난 뒤에도 조용했다. 용대길 선생님은 연주가 끝난 후에도 박수소리가 나오지 않자 당황했다. 인사를 해야 박수를 치려나보다 생각하고는 얼른 인사를 했다. 단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그제야 박수소리가 나왔다. 파출소장님이 벌떡 일어나 혼자 치는 박수. 영미와 초희, 태리도 떨떠름했다. 우리가 그렇게 못했나?
하지만, 잠시 후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나왔다. 곳곳에서 일어서는 학부모들이 보였다. 박수는 계속 이어졌다. 기립박수였다. 용대길 선생님은 몸 둘 바를 모르고 헛기침을 했다. 각자 들고 온 악기를 들고 퇴장할 때까지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너희들 참 잘했다. 선생님은 오늘처럼 기쁜 적이 없었다. 정말, 훌륭하다.”
무대 뒤에서 용대길 선생님이 촉촉이 젖은 눈으로 말했다. 아이들도 모두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영미와 초희, 태리는 서로를 보면서 활짝 웃었다. 그동안의 미움들이 모두 오케스트라 연주에 날아간 것 같았다.
18. 화해
문화예술회관에서 차를 탔다. 가을이 와 있었다. 가로수 잎에도,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마음에 맑고 높은 가을이 넘실거렸다. 꼴찌를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던 모두에게 대회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은상이었다. 몇 달 연습한 것 치고는 대성공이었다. 버스기사 아저씨도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사님, 잠깐 차를 세워 주시죠.”
용대길 선생님이 말했다. 버스가 섰다.
“오늘, 선생님이 한턱내겠다. 저 앞 중국집에서 짜장면 어때?”
“와아!”
용대길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식탁 하나에 네 사람씩 짝을 지어 앉았다. 영미는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초희는 어느새 영미 옆자리에 앉았다. 영미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영미 앞엔 태리와 동수가 앉아있었다.
“넌 잘 사니까 짜장면 같은 건 맛도 없겠다, 그렇지?”
영미가 할 말을 찾다가 태리에게 말했다.
“아니야. 나도 자장면 좋아해. 곱빼기도 먹은 적 있어.”
“그래?”
영미가 대답했다. 짜장면이 나왔다. 영미의 입에 군침이 돌았다.
“초희 넌 몸이 약하니까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해.”
영미가 초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알았어.”
초희가 자기를 생각해주는 영미에게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짜장면을 다 비비고 면을 집어 드는 순간 영미 그릇 위에 젓가락 하나가 왔다. 면이 들린 젓가락이었다. 영미는 젓가락 주인을 바라보았다. 태리였다. 태리가 영미에게 면을 덜어주려고 했다.
“왜?”
“응, 난 배고프지 않아. 너 많이 먹으라고...”
태리가 말했다. 영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놓고 다 먹으면 뚱뚱이라고 놀리려고 하는 거지?”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어서 먹어.”
태리가 영미 그릇에 면을 얹었다. 동수는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태리를 따라했다. 영미 그릇은 금방 곱빼기가 되어버렸다.
“너희들 도대체 왜 이래?”
영미가 이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영미의 물음에 태리가 대답을 망설였다. 옆에 앉은 아이들이 허겁지겁 자장면 먹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그동안 너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태리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영미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런 생각만 맴돌았다. 동수가 자기도 그렇다는 듯 태리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저...”
영미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버벅거렸다.
“와아! 이제 화해하는 거야?”
영미와 태리를 번갈아보던 초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영미와 태리도 초희를 바라보면서 슬쩍 웃었다. 태리 옆에 있던 동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그 학급신문은 누가 붙인 거야? 아는 사람 있어?”
동수의 말을 들은 초희가 고개를 숙이고 자장면을 바라보았다. 태리가 말했다.
“학급신문을 누가 붙였든 그런 거 알아서 뭐해? 학급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나 붙일 수 있는 거잖아.”
태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초희를 바라보았다. 영미는 무슨 말인가 싶어서 눈만 꿈벅거렸다. 초희가 고개를 들고 태리를 보았다. 태리가 웃었다. 굳어졌던 초희 얼굴이 밝아졌다. 초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헤헤, 미안.”
영미는 태리와 초희의 대화를 한참 생각해보다가 알았다. 영미가 초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희도 영미를 보고 있었다.
“너...”
영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초희가 그랬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움 은 더 컸다. 그때였다. 천둥처럼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짜장면 안 먹을 거야? 안 먹으면 선생님이 다 먹어 버린다!”
용대길 선생님이 영미식탁에 앉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입가에 짜장이 잔뜩 묻어있었다.
“아, 아니. 지금 먹어요!”
영미가 짜장면을 한 젓가락 가득 떠올리면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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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판매중이지만 영미문학이 워낙 많아서 첫화면엔 안뜨네요. 그래서 그냥 올립니다.
판토마임님!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반목과 갈등 그리고 화해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천진난만하여 아주 재미지게 읽어 내렸습니다... 감사합니다.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