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소유권 행사 자료] - 자료출처 : 위키백과.
1418년(태종 18)에 대마도는 큰 흉년이 들었다. 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종정무(宗貞茂, 일본어: 소 사다시게[*]) 또는 종정아(宗貞芽)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 일본어: 소 사다모리[*])가 뒤를 잇게 되었는데, 흉년이 들어 식량 문제가 심각해지자 크게 들고 일어나 명나라의 해안 지역으로 가던 도중,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 지역을 약탈하게 되었다. 조선은 이때 승계한 새 도주인 종정성이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쓰시마 섬을 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때 기록을 보면, 명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를 중간에서 공격하는 방법과 쓰시마 섬의 본거지를 치는 두 가지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1419년(세종 1년) 6월 9일, 상왕이 된 조선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중외(中外)에 교유하였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월 3일에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에 하륙한 지 13일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빼낸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선지(宣旨)하노라.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전곡(錢穀)을 약탈하고, 마음대로 고아와 과부, 사람들의 처자를 학살하며, 사람이 사는 집을 불사르니, 흉악무도함이 여러 해가 되었으나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신무(神武)하시므로, 하늘 뜻에 응하여, … 대마도의 작은 추한 놈들을 섬멸하게 하니, 마치 태산이 까마귀 알을 누르는 것과도 같고, 맹분(孟賁)·하육(夏育)같은 용사가 어린아이를 움키는 것과도 같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도리어 문덕을 펴고, 무위(武威)를 거두시고, 은혜와 신의와 사랑과 편안케 하는 도리를 보이시니, 내가 대통을 이어 나라에 임한 이래로 능히 전왕의 뜻을 이어서, 더욱 백성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비록 조그마한 공손하지 못한 일이 간혹 있어도, 오히려 종정성(宗貞盛)의 아비 종정무(宗貞茂)의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것을 생각해서, 범하여도 교계(較計)하지 않았으며, 통신하는 사신을 접할 때마다 사관(使館)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후하게 위로하고, 또 그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대개 수만 석이 넘었으니, 그것으로 거의 그 몸을 길러 주림을 면하고 그 양심을 확충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하였노라.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이 항복 권고문을 가지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는 예부터 조선의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항복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가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대마도를 다녀온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수강궁에 무릎을 꿇고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전했다.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
삼국시대 초에는 대마도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6세기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가 일본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389년(고려 창왕 2년)에는 박위가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조선 국왕은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통상의 편의도 봐주고 또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의 행패가 여전하자 세종 때인 1419년 음력 6월 조선의 세종이 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군사 1만 7285명을 동원하여 대마도 원정을 하는 등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이 설치되었고, 쓰시마 도주인 소(宗) 가문이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1871년에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인하여 쓰시마 후추 번이 폐지되고, 이즈하라 현(嚴原縣)이 설치되었다. 1876년에 나가사키 현(長崎縣)에 편입되었으며, 소 가문은 일본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는 일본 제국의 강요로 소 가문과 정략 결혼을 하기도 했다.
쓰시마 섬은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 구 해군이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소만(浅茅湾)에 있는 군함을 쓰시마 동쪽 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제키세토(万関瀬戸)라 불리는 운하를 만들게 되었다. 만제키세토는 쓰시마 섬을 위 아래로 나누는 경계로, 쓰시마 섬 북부를 가미시마(上島), 남부를 시모시마(下島)라 부른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쓰시마)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949년 1월 7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1][2] 또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였다.《2013년 3월 22일에는 대한민국 경기도에 위치한 의정부시의회가 대마도 반환을 촉구 하는 한편 대한민국 정부차원의 반환 촉구를 요청하고 있다.
대마도 분쟁(對馬島紛爭, 영어: Daemado dispute)은 일본 나가사키 현에 속한 섬으로, 부산에서 동남쪽으로 49.5km 떨어져 있다. 과거에 대한민국 중앙 정부가 영유권을 주장한 바 있고,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가 창원시 대마도의 날 조례를 통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국제사회와 일본 스스로도 독도와 대마도가 우리 영토임을 인정한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 등 각종 사료를 모아 개정안을 준비했다".
[대마도 지리적 특성]
대마도(對馬島) 또는 쓰시마 섬(일본어: 対馬 つしま, 문화어: 쯔시마 섬)은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일본의 섬이다. 원래 특정 국가가 공식적으로 통치하는 영토는 아니었으나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정식으로 편입한 뒤 지금까지 실효지배하고 있다.
규슈까지의 거리는 약 132km, 한반도와의 거리는 약 49.5km로 한반도 쪽에 더 가깝다. 섬 크기는 남북에 82km, 동서에 18km이다. 섬 넓이는 700km²이며, 섬의 인구는 2010년 기준으로 34,610명이다. 농경지는 전면적의 3.4%이며, 대부분이 산지이다.
(* 본 개인 카페는 상기 내용에 대한 상업성 연관이 없음을 밝힘. 역사 자료로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