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독공 휘 세량의 행장
고은 성은 안씨요 본관은 순흥이요 벼슬은 천문학습독이요 휘는 세량이요 호는 만희당이니 문성공회현선생회향의 8대손이요 예문관부제학시량공공휘조동의 현손이며 증조는 수위교위행사직이니 휘는 인강이요 조는 사과니 휘는 우효요 고는 수의부위사맹이니 휘는 철동이요 비는 공인초계정씨니 시랑승서의 여라. 공이 나서부터 영리하여 일찍이 학업을 성취하고 경전을 탐구하여 일대에 명류들이 많이 추앙하다. 당시에 당내종족이 높은 벼슬에 있는자 손꼽아 셀 수가 없고 이형도 함께 군사에 있으나 공은 홀로 벼슬에 뜻이 없고 용감히 임천에 물러나 세월을 보내다. 애라 공이 몰한 후에 여러번 병화를 겪어 문헌이 증거가 없고 묘갈도 삭락되여 자형을 분간치 못하니 생졸과 표덕도 상고할 도리가 전혀 없다. 가승에 기재된 것은 목천으로부터 문산서람산하옥포상에 이거하여 우록이라는 이름을 부치고 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시서로 자오하였다는 27자만이 소연하고 정자는 퇴폐되고 지정촌호만 지금까지 전해오니 한점 고리로 왼솟에 맛을 알만하니 많아서 무엇하겠는가. 이만하면 가히 공의 둔세낙지한 것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만희라고 호를 지은 것은 회헌선생이 만년에 집을 짓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걸어 놓고 조석으로 첨갈하며 유학을 창명함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아 뚜렷이 동방도학의 조종이 되었으니 공도 역시기문의 도덕을 기뻐하여 잊지 않았다는 뜻에 의심이 없다. 공이 삼남을 두었으니 장은 성균생원원헌이오 차는 사직구요 차는 봉례준이며 생원남에 선전관처눌이라 증현이하는 호번하여 모두 기록지 못한다. 묘는 고람산하 우록안산 삼성촌후 록장등에 묘좌서향이다. 비는 숙부인임천조씨니 사직원경의 여라 묘는 동원도후동좌이다. 제종들이 나에게 기행을 부탁하니 천학의 뚝눈이 어찌 감히 하리오마는 감탄에 못이겨 대강 가전의 두어 구 문자를 가록하여 다음날 훌륭한 자손이 나면 관감하고 흥기하여 널리 상고하고 정일히 탐구하기를 기다리노라.
정유년맹춘하한에 13대손 교창은 삼가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