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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옥살이, 여러 번의 국문, 100대의 장형 맞은 후 충청, 전라, 경상을 향해 삼남길 가심을 묵상합시다.
제2장. 삼남길(서울 경기도) 순례
1. 서울-과천 구간
서울에서 순천까지의 순례길은 당일 구간과 1박2일 구간으로 나눈다.서울, 경기 지역 거주자가 당일 순례로 가능한 구간은 아래의 10개 구간이다.
1.서울 시내(충무공동상-동작), 2.서울(동작)-과천, 3.과천-수원, 4.수원-오산, 5.오산-평택, 6.평택-온양(음봉), 7.온양(온천)-해암(게바위), 8.온양(현충사)-온양(음봉 충무공묘소), 9.온양(온천)-보산원, 10.보산원-광정.
서울, 경기 지역 거주자라면 광정 이후의 6개 구간은 1박2일 일정으로 순례한다. 1박2일 구간은 아래와 같다:
11.광정-공주-노성, 12.노성-은진-여산, 13.여산-삼례-전주, 14. 전주-오원(관촌)-오수, 15.오수-남원-운봉, 16.남원-산동-구례.
17번째의 구례-순천-여수 구간은 2박3일로 순례한다.
충남, 전북 지역 거주자는 1박2일 구간이 적을 것이다. 남행하여 순천에 이르는 순례와 북행하여 서울에 이르는 순례로 나누면 좋을 것이다. 전남 지역 거주자는 순천에서 북상하여 서울에 이르는 순례를 하면 되므로 멀리 경기, 서울 지역 순례할 경우에 1박2일을 하면 될 것이다.
1.1 충무공 동상에서 출발
최초의 구간을 제물포고교 동창들과 걷기 위해 총동문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공지했다:
충무공께서 백의종군하는 첫발을 뗀 서울-과천 구간을 함께 걸어 봅시다.
1. 일시: 2012년6월21일(목) 오전 8시
2. 장소: 서울 광화문 충무공 동상 앞
3. 순례구간
- 1구간(08:00~12:00):
-- 충무공 동상-우포도청 터-충무공 생가터-동작대교- 동작역
-동재기 나루터 *한강둔치에서 점심식사(힘든 분은 중간에 귀가)
- 2구간(13:30~17:00):
-- 동작역-서초천-방배동-사당역-남태령-과천역 *뒤풀이
4. 준비물: 등산화, 선 크림, 우산(양산겸용), 중식
5. 회비: 없음(뒤풀이 참석자는 각자 부담)
6. 참석범위: 인중 제고 동문은 물론 전 세계인 모두 환영
7. 기타: 순례자 참고자료 제공
동창회 게시판에 안내문을 올렸으나 며칠이 지나도 참석하겠다는 동문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몇몇 갈만한 지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백의종군로 1구간 광화문-동작역 4시간 소요. 동창회 게시판 참고. 6월21일 08시 충무공동상 앞 집합>
“아니, 이게 웬 문자인가? ‘집합’이라고? 안 가면 안 되는 건가? 와서 사진 찍으라는 건가?”
이 문자를 받은 필자의 후배(문 총무)는 선배의 명령이니 집합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침 8시에 광화문에 겨우 도착해 보니 목요일 아침의 광화문 네거리는 인적이 드물고 출근하는 차량만 많이 있었다. 다만 한 시민이 입간판을 들고 시위하고 있었는데 내용 중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MB18nomA”.
‘어찌 저런 글을 들고 시위를 해도 잡혀가지 않나? 국가원수 모욕죄 아닌가? 집시법에 안 걸리나?’ 이런 생각이 났다. 1인 시위는 집회가 아니므로 집시법에 해당 안 되는지 모르겠다. 문 총무는 먼저 도착한 선배들에게 인사를 한 후 출발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다.
지리, 역사 등 한국의 문화에 해박한 동기동창인 검암(黔岩)과 여행전문가 노 작가(동아닷컴 기자)가 참가했다. ‘세상이 궁금한 여자’라고 명함에 새겨 있듯이 백의종군로 순례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 밖에 동기동창 3명(청운, 청호, 노 장군)이 참석을 권유받고 흔쾌히 동의했다.
“매년 6.25를 전후해서 육군은 대학생들을 ‘국토천리행군’에 초대를 해. 행군로의 각 지역 사령관들은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의 지원을 하지. 백의종군로 순례단도 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보자.”
노 장군의 이 말은 참으로 말만 들어도 고마운 이야기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순례에 참여하면 좋겠다. 국토를 도보로 걸으면 차로 가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지방의 정취를 몸으로 느낄 수 있고 지방의 아름다움과 독특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 자연히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커진다. 방황하던 젊은이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충무공을 묵상하면서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도 있다.
나는 출발에 앞서 16쪽 분량의 참고자료를 나누어 주고 약간의 설명을 했다.
“여러분, 아침 일찍 나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여름철 긴 해를 활용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죄인 이순신이고, 저는 죄인을 호송하는 의금부도사, 금오랑(金吾郞)입니다. 잠깐 자료를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모여 자료를 보고 웅성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경찰이 다가왔다. 무허가 집회를 여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1.2 우포도청 터
“여기가 서린옥이 있던 바로 그 자리는 아닐 겁니다.”
검암이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의 우포도청터에서 표지석을 가리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좌, 우포도청이 있었는데 포도청은 감옥이 아니고 도적을 잡는 곳입니다. 당시는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던 시대였으므로 감옥도 구분했는데 서린옥은 양반을 가두는 곳이었습니다. 충무공이 갇혀서 국문을 받았을 서린옥은 아마 저쪽에 있었을 겁니다.”
그는 종로의 동대문 방향을 가리켰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이 동내에 살았는데 당시는 5층인 동아일보건물이 제일 높았어.”
청운은 자기의 고향 청운동을 상기하여 ‘청운’이라 호를 지었던 것이다.
“대동여지도를 보세요. 여기 서린방이라고 있잖아요. 여기에 서린옥이 있었을 겁니다.”
나는 나누어 준 자료의 대동여지도를 펴 보이면서 설명했다.
“광통방, 태평방, 명례방도 있네. 방이란 무엇이지?”
“방(坊)은 지금의 동(洞)에 해당합니다.”
검암은 요즈음 서울의 옛 지명을 고증하여 서울시 지명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
1.3 충무공 생가 터
순례자들은 청계천으로 내려갔다. 목요일 아침 청계천은 인적이 없었다. 그들은 청계3가에서 도로로 올라가 충무로 명보극장 쪽으로 향했다.
“이 아래 보도블록을 봐. 거북선이 새겨져 있잖아. 이 구역이 충무공 생가터가 있는 동네야.”
나는 작년 이맘때 쯤 이곳을 찾았었다. 당시는 비 온 후라 보도가 젖어 있어 거북선 모양이 분명히 잘 보였는데 이날은 희미했다. 거북선 그림과 각 해전의 장소와 날짜를 기록한 보도블록은 대략 10미터 간격으로 계속되었다.
충무공 생가터 표지석을 보며 검암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 동내는 원래 마른내입니다. 저기 도로 표지판을 보세요. ‘마른내로’라고 되어 있지요. 마른내를 한자로 번역해 건천동(乾川洞)이었는데 지금은 인현동1가입니다. 우리나라에 마른내 아닌 개천이 드뭅니다. 청계천도 가물면 마른내로 됩니다.”
이순신은 이 동네서 8세 정도까지 살았다. 10년, 3년 연상의 형 의신, 요신은 같은 마을 유성룡과 친하게 지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42년10월에 경북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 사울 건천동으로 이사 왔다. 이순신의 둘째 형 요신과 동갑이며 친했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1.4 남산길
검암은 명보극장 앞 충무공 생가터에서 퇴계로를 건너 남산골 한옥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원래 남산골인데 수경사 자리입니다.”
“5.16 후 박정희 장군이 또 다른 쿠데타를 막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를 설치했어. 병력이 없었으므로 33사단 33대대로 만든 거야.”
노 장군이 검암의 말을 부연 설명했다.
순례자들은 서울시청 남산별관 앞, 등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 연수원에서 남산북순환로로 접어드는 길이 있다. 남산은 대동여지도에 목멱산(木覓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멱(覓)자가 무슨 뜻인가?”
“찾는다는 뜻인데 목멱산 보다는 흔히 잠두봉이라고 불렀어.”
검암이 나의 물음에 답을 하고 계속 이어갔다.
“옛날 서울 샌님 말투에 ‘여쭈어라’는 어투가 있습니다. 당시는 남녀가 직접 말을 건넬 수 없기에 몸종을 중간에 두어 말을 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인이 없는 가난한 양반도 이런 어투를 쓰는 거예요. 종도 없으면서...”
남산 순환로는 그늘지고 걷기 좋게 단장되어 있었다. 와룡묘, 김구와 이시형 선생의 동상이 있다. 이희승, 조지훈 선생을 기리는 추모비와 시비, 한옥 형식의 깨끗한 화장실이 눈길을 끌었다.
“이희승 선생이 지은 <딸깍발이>라는 수필이 있어. 딸깍발이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지.”
검암이 수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산골 샌님들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는데 ‘딸깍딸깍’ 하는 소리가 유난해 이런 별명이 붙었다. 그들은 변변한 벼슬 없이 극도로 궁핍했지만 의관을 정비하고 청렴과 지조를 신조로 삼았다. 생계에 재주가 없지만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앙큼한 자존심’과 . ‘꼬장꼬장한 고지식’으로 똘똘 뭉쳐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지조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산우회 코스로 여기 남산 순환로는 어때? 나는 처음 와 봤는데 참 좋다. 서울 사람 중에도 이곳을 걸어본 사람 드물 거야.”
“산우회 코스로도 좋지. 남산도 산이잖아. 나는 가끔 외국인 안내할 때 이 길로 해서 타워까지 몇 번 갔었어.”
청운이 청호의 제안에 찬동했다.
“이 곳은 이승만 박사 동상이 있던 곳 아닌가? 저런 분들 동상은 있는데 대한민국 건국의 국부라 할 수 있는 이 박사 동상은 전국 어디에도 없구나.”
나는 최근에 이승만 연구 포럼에 참석하면서 이 박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기에 이러한 화제를 던졌다.
“그동안 4.19세대와 좌파가 ‘이승만 = 독재자’라는 등식으로만 몰아갔지.”
“사실 이 박사의 업적을 야박하게 평가해도 공은 적어도 7 이상이고 과는 3 이하라고 포럼에서 들었어.”
1.5 후암동-전쟁기념관-이촌역
순례자들은 소파길을 거쳐 후암동 주택가로 들어갔다. 검암이 골목길을 앞장서서 갔다.
“나더러 전국 이장이라서 이런 길까지 다 아느냐고 하는데, 오해하지 마. 방향을 보고 가면 대충 맞아. 나도 신작로, 대로를 걷는 사람이야.”
검암의 별명은 전국이장(全國里長)이다. 그는 체중이 많이 나가지만 문 총무는 그보다 더 나간다. 체중 100 킬로그램 이상의 거구가 잘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라 좀 쉬울 것 같지만 기온이 오르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용산고등학교 입구에서 수도여고 앞을 지나 미군부대 담을 끼고 걸었다. 남영동 미대사관 부속건물 앞에 이르자 노 작가가 어디서 잠깐 쉬자고 청했다. 나는 크라운해태 빌딩 로비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 안으로 순례자들을 안내했다.
“여름철에 시원한 생수가 필요하면 은행에 가서 리필하면 됩니다.”
대부분의 은행은 고객을 위해 냉, 온수기를 설치하고 있기에 문 총무가 이를 활용하는 노하우를 알려 준 것이다. 이제부터는 한강 인도교까지 대로가 이어진다.
“전쟁기념관에서 유물 감상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냥 통과만 할 겁니다.”
대로보다는 뒷길이 걷기에도 좋고 사람 사는 모습을 느끼기에도 좋다. 평일이면 전쟁기념관, 동작동 현충원 등, 공원 녹지에서 유치원 꼬마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순례자들은 벤치에 앉아 쉬면서 행동 간식을 서로 나누었다.
“여기 국방부 자리는 오늘 받은 자료의 대동여지도에 둔지산(屯之山) 당고개(堂峴)로서 동작진까지 가는 길로 나와 있을 겁니다.”
검암의 설명을 들으며 순례자들은 원불교 교당, 용산 우체국 뒷길, 통일교 건물 앞을 지나 이촌역에 도달했다.
1.6 이촌역-한강공원-동작대교
이촌역에서 철로를 지하로 건너 동으로 직진하여 현대아파트까지 가면 동작대교로 오르는 육교 계단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은 내가 사전 답사하여 알고 있는 길이다. 그러나 나는 한강 둔치를 걷는 것이 보다 운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촌역에서 남으로 곧게 뻗은 길을 찾았다. 마을 사람이 한강 공원 들어가는 토끼굴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었다.
순례자들은 햇볕이 따갑지만 한강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탁 트인 강변을 걸었다. 검암이 남산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기 남산을 보면 둥그런 능선이 두 개 보이지요. 서쪽이 약간 높은데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잠두봉이라 부른 것입니다. 누에는 머리를 들면 안 되고 잠을 자야하는데... 서울에는 누에치는 뽕밭이 동서남북 네 군데 있었는데 잠실과 여기 강 건너 잠원동도 그런 곳입니다.”
둔치에서 동작대교 오르는 계단이 없으면 낭패이므로 나는 앞서서 길을 찾았다. 다행히 강변북로 아래를 통과하는 토끼 굴을 찾았다. 굴을 통과하면 동작대교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동작대교에는 동과 서에 보도가 있다. 순례자들은 서쪽 보도에 진입했다. 차량의 우측 진행과 같은 방향이다. 동작대교는 서울 권역 한강의 25개 다리 중에 한강대교 다음으로 짧은 다리(960 미터)지만 건설비용(현가 3,100억 원 정도)으로 계산하면 자산가치가 가장 높은 다리 중 하나라 한다. 청운은 이 다리를 걸어서 여러 번 건넜다. 그는 최근에 다리 남단의 달빛 카페 건축 시 전기 부문 감리를 맡았었기에 이 다리에 익숙하다. 다른 순례자들은 평생 처음으로 한강을 걸어서 건너는 경험을 즐겼다. 그들은 ‘달빛 카페’에 이르러 하강 엘리베이터를 탔다.
원래의 계획은 한강 둔치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인데 점심을 준비한 사람이 둘 밖에 안 되었기에 식당에 가기로 했다.
“9호선 흑석역 앞에 있는 쌀밥집이 어때?”
청호가 추천했다.
“전철 타나?”
“우리가 누구냐? 순례자 아냐? 여기까지 땡볕을 걸어왔는데, 그까짓 전철 한 정거장을 못 걸어?”
“그렇게 하자.”
노 장군의 제안에 거구의 검암도 흔쾌히 동의를 했다. 그들은 예정에 없던 2킬로미터를 더 걸었다. 밥집에는 인송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원래 순례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논문심사 등 바쁜 일로 불참했다. 그래도 순례자들이 자기 동내에 온다니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어 나왔다. 오랜 시간 땀 흘리고 나서의 막걸리는 요기가 될 뿐 아니라 청량감도 뛰어났다. 이렇게 자리에 앉아 탁배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더 이상의 걷기는 엄두가 안 나는 법이다. 과천까지 더 걷겠다고 용기를 낸 희망자는 세 사람 뿐이었다.
1.7 율곡 누이와 한음 부인의 투신
흑석동 밥집에서 과천까지 순례를 위해 출발한 세 사람은 동작역까지 9호선을 타고 갔다. 동작역에는 동재기 나루터 표지석이 있다. 그들은 반포천변을 따라가다 이수교를 넘어 방배천 복개한 이면도로를 걸었다. 날씨가 무척 더워 그늘진 길가의 벤치에 앉아 쉬었다.
“저 오래된 빵집건물을 보세요.”
문총무가 독일빵집이라는 큰 글자가 벽 전체에 흐리게 남아있는 집을 발견했다. 그는 노점에서 부추 빈대떡을 사왔다. 노 작가는 세계여행을 위해 단련한 체력으로 더위를 잘 버티는 듯 했다.
나는 전쟁에 대해 여성들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지 잠깐 상념에 빠졌다. 임진년 5월10일, 양력으로는 6월19일이므로 오늘과 절기가 같다. 당시 서울에는 11만7천의 왜군이 집결해 ‘대휴식’에 들어갔다. 왜적은 여자 전리품을 갈구했다. 율곡 부인 노씨는 파주에 있었다. 부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묘에서 시묘하다가 율곡의 무덤까지 쫒아온 왜적에게 참살 당했다. 뛰어난 여류화가 율곡의 누님 이매창(李梅窓) (주: 김성한, 시인과 사무라이, 제2권, 56쪽. 2003 참조. 이탕종의 딸 여류시인 기생 이매창 (1573-1610)과 동명이인.)은 강원도 안협으로 피난했으나 왜적이 덮치려 하자 벼랑에서 투신 자결했다. 같은 동네에 피난한 한음 이덕형 부인 이 씨는 영의정 이산해의 둘째 딸인데 그녀도 절벽에서 투신했다. 정숙한 여인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貞女不更二夫)는 조선 여성의 정조관념에 비추어보면 이 기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남자들이 국방을 소홀히 하면 그의 아내와 누이와 딸이 적에게 당하는 법이다.
1.8 사당에서 남태령 넘어 과천까지
사당역을 지나자 남태령까지는 지루하고 힘든 언덕길이다. 순례자들은 남태령만 넘으면 과천까지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애써 걸었다.
“언덕을 오를 때는 차량이 내려오는 쪽의 인도를 택하는 것이 좋답니다.”
차량은 언덕을 오를 때 엔진을 많이 가동하므로 매연이 심하다. 우리는 남태령 정상 가까이 가서 수경사 쪽으로 건넜다. 이제 부터는 차량이 내려가는 쪽이 오른 편이기 때문이다.
나는 벌써부터 발가락에 물집이 잡혀 쓰린데도 금오랑 역할을 하느라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과천 경계석이 있는 정상에 오르자 땅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청운이 군에서 배운 방법이라면서 언젠가 가르쳐준 대로 바늘로 좌우 새끼발가락의 물집을 찔러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실을 꿰었다. 실은 삼투작용으로 진물을 계속 밖으로 내보낼 것이다.
순례자들은 과천경마공원을 알리는 말 조각상을 멀리 보면서 중앙로를 걸어 과천성당 쪽으로 갔다. 문 총무는 더 이상 걷기 힘들어 빨리 과천역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역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는 과천역에 도착하면 우선 가까운 호프집에 들어가겠다는 희망으로 거구를 끌며 걸었다.
“여기서 좀 쉬다 갑시다.”
노작가가 패미리 마트 앞 길가의 파라솔과 의자를 보더니 배낭을 벗었다. 전원도시의 한산한 거리에서 여름나절에 순례자들은 캔 맥주를 마시면서 피로를 풀었다. 그들은 천천히 10분을 더 걸어서 겨우 과천역에 도달했다.
“휴우. 이제 다 왔다. 그런데 근처에 호프집이 안 보인다.”
문총무가 도착기념 사진을 찍고 내 뱉은 말이다.
“여기서 그냥 전철을 탈 수는 없다. 좀 더 가봅시다.”
이번에는 문 총무가 앞장을 섰다. 순례자는 전철 한 정거장을 더 걸었다. 그들은 정부과천청사역 11번 출구의 호프집에 들어갔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았다. 허기진 상태이므로 요기를 해야겠기에 문 총무가 안주로 양념 안한 치킨을 시켰다.
“치킨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1.9 우리의 순례를 해군에게 알리자
“오늘 몇 킬로 걸은 건가요?”
“원래 계획은 25킬로인데 강변도로를 3킬로 쯤 더 걸었으니 28킬로는 될 겁니다.”
“작가님은 끄떡없으십니다.”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백의종군로를 순례하는 민간인이 있다는 것을 전임 해군총장에게 전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거예요. 금오랑님, 프로필을 주실 수 있겠죠?”
나는 노 작가가 전임 총장에게 나의 글, <구례-순천 구간 순례기>를 이메일로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해군이 관심을 가지고 백의종군로 개발에 일익을 담당하면 좋겠네요. 제가 오늘 순례기를 쓴 다음 프로필을 드리겠습니다.”
긴 여정을 끝내고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니 긴장이 풀어졌다. 나는 어느 듯 임진왜란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이매창이 절벽에서 투신하던 5월 초에 이순신은 첫 번째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전투가 두려워 탈영한 황옥천을 체포하여 목을 베고 군중 앞에 높이 매어 달았다. 출동에 앞서 군사들의 사기를 바로잡기 위한 엄한 조치였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신중하라.”고 전군에 명을 내렸다. 여수를 새벽에 출발한 이순신 함대는 소비포와 당포에서 일박을 했다. 격군을 호령하여 사흘을 항해해 피곤한 이순신 함대는 거제도 옥포에서 왜선 50여 척을 만났다. 원균은 자기의 본진인 경상우수영에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한산도에서 단 한척의 전선을 타고 와 참전했다. 옥포 해전은 최초의 해전이며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꾸는 계기가 된 전투였다. 이 전투 이후로 일본 해군은 해상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기나긴 육로를 방어하면서 보급해야 했다. 육상 보급로는 의병의 중요 공격목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식량난으로 패전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순례자들은 1,000시시 이상을 마시고 충분히 휴식했다. 그들이 전철을 탄 시간은 21시이니 출발 후 11시간이 지났다. 충무공이 하루에 간 이 길을 현대의 일반인은 이틀에 나누어 걷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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