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마을회관앞 주차장에 기념비가 건립된다.
합동시일식은 통영,진주,사천,삼천포,고성의 교구가 참여 했다.
인사하시는 교인들
내대리는 지리산 바로 밑에 위치하기 때문에 예정도착시간을 조금씩 초과하여 모이게 되었다.
거제에서 9시에 출발하였건만 10시40분이 되어서야 도착 했다.
산청군은 조선시대에 거의 산중에 산속이엇을것이다.
이곳에서 안심하고 동학을 했고 후일 무장기포시에 진주성을 공격 무혈입성하게 된다.
이 기념비로 산화하신 애국충절의 조상들과 지역 동학혁명의 위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천도교 중앙총부 종무원장님의 설교가 있었다.
역사적 사건과 후학들의 귀감이 되길 바라는 설교가 잘 조화를 이루어 무관심자도 배울 내용이 있는 배려가 있었다.
사진은 설교 하는 김인환 종무원장님이다.
============================전문 =========================================
경남 남서부 지역 동학혁명의 의의와 수도연성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먼저 오늘 경남 지역 5개 교구(진주, 사천, 삼천포, 고성, 통영) 교인들을 뵙고 함께 시일예식을 봉행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곳 경남 지역 천도교인들은 오랫동안 우리 교단의 활력을 만들어 내면서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제공한 전통과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아울러 121년전 영남지역 동학혁명 기포의 역사가 서려 있는 유서 깊은 자리에서, 여러 원로 숙덕어르신들과 교인들은 물론 특히나 이곳 산청지역의 주민들을 모시고 진행하는 합동시일예식에서 설교 말씀을 하게 되어 개인적으로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면서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곳 경남 남서부 지역은 수운 대신사 재세시인 포덕 3년, 1862년경 경남 고성에 사는 성한서 접주께서 수운대신사로부터 도를 받아 포덕을 시작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동학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성한서 접주의 포덕 성력은 큰 성과를 내어서 수운대신사께서 포덕 3년 섣달그믐에 최초의 각 지역별 접주를 정할 때 성한서 접주께서도 16접주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고, 경남 지역의 동학의 역사를 빛내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1862년은 이른바 진주민란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수십 개의 고을에서 민란이 발발하여 백성들의 불만과 불안은 한없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눈앞의 세상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근본적이며 진리에 입각한 후천 개벽의 대 변혁을 꿈꾸며 그 힘을 기르는 것이 바로 그 시대 동학 도인들의 올바른 모습이었으며, 이는 또 다시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가르쳐 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운대신사께서 좌도난정률의 억울한 죄목으로 대구장대에서 순도하면서 경남 지역의 동학 도인들도 지하로 잠복하여 은밀히 수도하며 신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지하 신앙을 하던 동학은 약 한 세대, 25년쯤이 지나는 동안 외견상으로는 쇠약할 대로 쇠약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 정신과 기운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1880년대 말에 백낙도, 손은석 등이 다시 포덕에 나서자 그야말로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이, 경남 지역의 동학 교세도 불같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인근의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에 입도하고 돌아왔지만, 그분들의 포덕이 위력을 발휘한 것은 바로 수운대신사 시대 때부터 이 지역에 잠복해 있던 동학의 기운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역사의 흐름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의 동학은 다시 1892년 이후로 공주와 삼례에서 수운대신사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내기 위한 동학 교인들의 신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을 계기로 2단계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희망 없는 삶을 살아오던 백성들은 동학 도인들이 수운 대신사 신원운동을 계기로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특히 과중한 세금이나 무도한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저항하여 백성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학에 살 길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893년 3월 보은 취회 때는 진주접과 하동접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도인들이 취회에 참여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바깥 나들이는 이 지역 동학 발전에 크다란 자극이 되었습니다.
첫째, 취회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전국 동학도인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동학의 물결이 한반도 전역에서 크게 일어남을 확인할 수 있었고, 둘째, 동학도인들의 성숙한 신앙 자세를 더욱 폭넓게 그리고 실증적으로 견문할 수 있었으며, 셋째, 또한 세상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활발한 포덕 활동과 동학의 후천개벽사상, 그리고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비전을 이 지역의 민중들에게 전파할 수 있게 되었으며, 넷째, 조선 사회의 운수가 쇠락할 대로 쇠락하고 서양의 문화와 종교, 서양 세력이 우리 국토와 경제를 유린하는 실상을 생생히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 민중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동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어찌할 수 없는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신분 차별이나 빈부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메시지,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고귀한 존재라는 것,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라는 사회 윤리를 제창하고, 또한 유무상자의 정신으로 나눔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는 것을 보면서 동학에 깊이 매료되어, 동학에 입도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날이 높아져 가던 혁명의 기운은 1894년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전라도 고부봉기를 신호탄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곳 경남 산청은 바로 그 시기인 1894년 4월에 영남지역에서 최초로 동학 포접의 기포가 일어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산청 동학 기포의 핵심적인 역사는 앞으로 더욱 더 정밀한 고증을 통하여 그 역사를 밝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얘기하기보다, 한두 가지 분명한 의의를 간단히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산청 동학 봉기와 이 지역의 동학혁명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이미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듯이 동학혁명이 결코 갑오년 초기부터 전라도 지역만의 거사가 아니었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즉 이곳 산청을 비롯하여 경상도 지역은 물론 충청도 지역 등지에서도 이미 고부 봉기나 무장 기포 당시부터 동학도들은 조직적인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바로 그러한 사실로부터 동학혁명은 결코 동학교단과 별개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해월 최시형 신사님을 정점으로 하는 동학 교단의 조직적인 계획 속에서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사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앞으로 가장 주목해서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은 백낙도 대접주 등이 주도한 1차 기포가 관군의 선공으로 실패로 돌아간 이후 본격적인 경남 남서부 지역 기포가 전개되었을 때 경상 우병사 민준호를 비롯한 관과 동학도들 사이에 일정한 협력 관계가 이루어진 점입니다.
이것은 이 지역의 동학도들이 보국안민의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포용력과 상생의 동학 정신을 일찍부터 발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추진하여 건립하게 되는 기념비 건립의 참 된 의미는 - 여러분들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인들과 뜻있는 이 지역의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산청군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원으로 영남지역 동학혁명기포기념비를 건립함으로써, 지금까지 전라도 일변도, 전쟁과 전투, 항쟁과 희생에 맞추어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좁은 이해 방식을 벗어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더불어 모두가 잘 사는 공생 공존의 세상’을 꿈꾸었던 참된 의미에서의, 그리고 보다 광의의 시각 속에서 넓은 이해의 시작-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산청 동학 기포는 그 선도적인 의미만을 남긴 채 1차적인 실패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불쏘시개와 같은 역할,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하여 대대적인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가능하게 했고, 집강소 통치기를 지나 2차 기포 때에도 진주와 하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동학농민군 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천도교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단서를 제공하고, 교화해 나가야 합니다.
당시의 동학 도인들은 혁명을 위한 혁명, 억압과 착취에 대한 분노의 봉기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후천개벽의 새 세상이 올 것을 알았고 또 믿었으며, 그것을 가로막는 낡은 사고방식, 정의로운 세상이 오는 것을 저지하고 있던 선천 관념과 질서의 운이 다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고함으로써 새 세상의 도래를 앞당기고자 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 도인들이 스스로를 갈고 닦아 나갔던 신앙생활의 모습과 당시 동학 도인들의 사고방식, 그리고 동학 고유의 생활양식에 대한 재조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들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규칙을 군율의 제1조로 삼았던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를 일러 당시의 동학농민혁명군을 “사람 살리는 군대”라 부르고, 동학혁명의 참된 의미를 “생명과 평화를 살리려는 민중의 혁명”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들이 그들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직접 기록해 놓은 글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들은 동학군을 진압했던 관군이 남긴 기록이나 관군들보다 훨씬 더 잔혹하게 동학군들의 씨를 말리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던 일본군들이 남긴 자료, 그리고 동학군들이 징치하였던 양반들이 남긴 자료를 동학군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동학군의 입장에서 최대한 재구성하였지만, 특히 그 기록 속에 동학군 이전에 동학 도인이었던 그들의 신앙 생활, 일상생활에서 사계명과 임사실천십개조, 십무천 등의 계명을 지키며 사인여천, 성경신의 태도로 생활해 나갔던 신앙의 문화를 복원해 나가는 것도 앞으로의 중대한 과제라고 할 것입니다.
동덕 여러분! <천도교신문>이나 <신인간>을 통해서 아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지금 중앙총부는 박남수 교령님을 중심으로 활발한 각종 사업을 통해 대외적으로 천도교의 위상을 드높이는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언론 매체는 물론 한국 내 여러 종교인들과 정치, 사회, 문화계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수십 년 간의 침체를 벗어나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 천도교인들 스스로의 모습, 각 지역 교구의 상황을 돌아보면, 우리의 형편이 그리 녹록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성운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으며, 한울님의 천명이 주어지고 있다는 분명한 조건에 더하여, 현실적으로 그러한 성운을 충분히 수용하여 교회 중흥과 교회 목적 달성의 동력으로 삼아나가는 노력이 맞물려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수도 연성을 강화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수도 연성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도 아님이 없듯이 수도원과 교구는 물론이고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쉼없이 행하는 것이 정도일 것입니다.
동덕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기회는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성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운에 즈음하여 우리 모두가 동귀일체하여 교단 중흥과 자아완성이라는 두 방향의 과제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심고하면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