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이통천 집안
강릉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강릉 제일의 명가(名家)로 ʻ배다리
이통천네(家)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다. 그러면
서 정작 ʻ이통천ʼ이란 말이 사람의 이름인지 택호인지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강릉사람들은 경포 호수 주변에 있는 거대한 규모
의 가옥인 선교장(船橋莊)이 바로 ʻ이통천 댁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
나, 집의 규모 때문에 선뜻 안채의 마당으로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 앞의 연못 주위에서만 어릿대게 된다. 연못엔 연꽃들
이 아름답게 피고 연못 주위로는 무궁화 울타리가 잘 다듬어져
있다. 나라꽃인 무궁화를 이렇게 공들여 가꾸는 것을 보면 정말
애국자인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하곤 했다.
강릉의 명가(名家)인 ʻ배다리 이통천네ʼ를 대변하는 것은 경포호
반에 자리 잡고 있는 선교장(船橋莊)이다. 선교장은 조선조 대표적
인 사대부의 저택으로 국가지정 중요 민속문화재 제 5호로 지정
되어 있다. 건물의 앞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이르기를 ʻʻ선교
장은 효령대군 11대손인 가선대부 무경 이내번(李乃蕃)이 1703년
에 건립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안채, 열화당, 행
랑채, 동별당, 서별당, 활래정의 부속건물로 되어 있다.ʼʼ고 기록
되어 있다.
선교장은 한국방송공사가 조사한 전통가옥 톱 10위중에서 한
국 최고로 선정된 가옥으로 300년 동안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
다. 선교장은 99칸의 상류 주택으로 예전 서민은 99칸을 넘지 못
했다는 기록을 참고할 때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최고의 부잣집
이라고 하겠다. 옥호를 당(堂)이나 각(閣)이라 하지 않고 장원이란
뜻의 장(莊)으로 부르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한 집안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다는 뜻이니 건물, 가구를 전담하는 목수와
옷이나 침구를 담당한 침모, 음식과 반찬을 담당한 찬모 같은 전
문 인력을 모두 갖춘 집이란 뜻이다.
배다리 이통천가(家)는 강원도 유일의 만석꾼 집안이다. 경상도
나 전라도와 달리 강원도는 산악지방이라 농토가 많지 않다. 그
런 강원도에서 만석꾼이란 대단한 것이다. 북쪽으로 주문진에서
남쪽으로 울진에 이르기까지 농토가 분포되어 있었다. 가을이면
소작인들이 땅을 부친 삯을 쌀로 가져왔다. 우차나 소에 싣고 온
짐들로 선교장 앞은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기록
물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이씨네가 하루아침에 명가(名家)가 된 것은 아니다. 삶의 터전을
배다리에 옮긴 것은 효령대군 11세손인 이내번(李乃蕃) 때였고 중
흥한 것은 그 아들 이시춘(李時春)과 손자인 이후(李厚) 때라고 한
다. 그리하여 당시 강릉 땅 대부분이 이씨의 소유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택호를 통천집이라 부르게 된 것은 후손인 이봉구(李鳳九)가 철
종 기미년(1859년)에 통천군수로 부임한 때문인데 통천군수를 지
냈다고 해서 통천댁으로 불린 것만은 아니다. 통천댁은 주변 사
람들의 존경이 담겨 있는 특별한 호칭이라고 한다. 이봉구는 영
동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선교장 쌀 창고에 저장되어
있던 곡식을 풀어 군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관동 사람들은 그
베풀어 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교장을 통천댁으로 바꿔 불렀
다고 한다.
여섯 번째 주인인 이근우는 재력을 바탕으로 용비어천가, 고려
사 등 수천 권의 책과 명품, 그림과 글씨 등을 수집하고 소장하게
되어 집안의 품위를 한층 높이게 되었다. 일제 때 중추원 참의를
지내기도 한 이근우는 독립군에게 몰래 자금을 대기도 했는데,
독립군으로 하여금 위패를 훔쳐가게 하고 그것을 찾는다는 명목
으로 독립자금을 건네기도 했다는 것이다.
선교장에는 동진학교터가 있다. 1908년 개화기 때 신학문을
교육하기 위해 이근우가 세운 학교인데 학생의 숙식과 교복 등을
무료로 지급하고 여운형, 이시영 같은 애국자를 교사로 초빙해서
민족의식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동진학교는 3년 후에 일제에 의
해 강제 폐교 되었다.
ʻ동진학교터ʼ를 보면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ʻʻ동진공화국ʼʼ
이 그것이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된 직후라고 한다.
강릉의 유지들이 모여서 강릉을 중심으로 영동지방 일대를 묶어
독립국가를 만들어 보자고 의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ʻʻ
동진공화국ʼʼ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 사실에 놀란 정부당국(미군정)
이 만약 철회하지 않으면 배급 쌀을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
다고 한다. 아무 경제적 기반 없이 불쑥 만들어진 ʻʻ동진공화국ʼʼ
이 시민을 먹여 살릴 수는 없는 일이라 결국 ʻʻ공화국ʼʼ의 꿈은 사
라지고 말았다. 비록 그 꿈은 사라졌지만 강릉사람들의 폐쇄성과
고집스러움, 그리고 불뚝하는 성깔 같은 것을 잘 드러내는 일화
라고 하겠다.
한 일간지에 소개된 것을 보면 이통천가(家)가 부호가 될 수 있
었던 발판은 첫째 염전사업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항진 등의
일부 구릉지에는 예전에 염전을 했던 자리라고 알려진 가마솥 자
리를 발견할 수 있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업에 손을
댄 것이다. 다음으로는 농토개간이라고 한다. 버려진 늪지대나
뻘을 농토로 개간함으로써 땅을 늘린 것이다. 당시에 농토개간은
세금이 면제되었다.
또한 집안의 계층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당대의 세도가와 주
변 부호들과 혼인을 맺어 인맥을 관리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에
게 정치후원금을 대는 등의 사교적 활동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거기에다 문화적 소통에도 노력하였으니 서책이나 골동품, 서화
등의 수집 소장이 그러하다. 추사 김정희, 몽양 여운형 같은 명망
가를 초청하기도 했는데 강릉이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한
양의 명망가들과 교류하기에 좋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릉의 명가 ʻ배다리 이통천네ʼ는 과거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
고 있지는 못하다. 이근우 이후의 후손들이 재산관리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소장했던 값진 유물들도 많이 지키지 못했는데
후손 중에 훌륭한 종부(宗婦) 한 분이 있어 선교장을 지키며 상당
수의 소장품을 잘 간직해서 그것이 현재 값진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이통천댁은 옥양목으로 된 ʻ만인솔ʼ을 집안의 가장 귀중한 보물
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ʻ만인솔ʼ은 농민들이 자기들을 후하게
대해준 이통천댁에 대한 고마움의 답례로 1만 명의 소작인들이
자기 이름을 옥양목에 써넣어 만든 우산이다.
현재의 후손 중에는 고려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국문학자 이기
서 교수가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있고, 출판사 ʻ열화당ʼ을 경영하
며 양질의 서적을 출판하고 있는 이기웅 사장이 좋은 평가를 받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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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암 문학박사, 전 동덕여대 교수
1942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남.
1979년 「월간문학」, 1980년 「현대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97년 제22회 ‘한국소설 문학상’ 수상.
저서 창작집: 아직도 출렁이는 어둠을, 큰물로 가는 큰 고기, 모깃불,
어떤 귀향, 영진리 마을의 개, 다리가 없는 통닭.
중편소설집: 가족.
장편소설집: 남한산성(전9권), 세발 까마귀의 고독1,2(2권).
강릉사범학교,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 수료. 문학박사.
초등학교, 중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동덕여대 교수(총장 직무대행)로 정년퇴임.
E-mail: hong7200@hanmail.net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