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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제500호(1999. 12)에 실린 글입니다.
1.
내가 무교회신앙잡지 『성서연구』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 2학년 때인 1973년이었다. 가까운 친구 하나가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어 그 하숙집엘 종종 놀러가곤 했는데, 그 친구 옆방에서 하숙을 하던 경제학과 4학년 선배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손병철이란 분이었다. 그 선배는 군대도 이미 다녀온 처지라서 나와는 5, 6년의 나이 차가 있었다. 성품이 다정다감하여 우리와 즐겨 말상대가 되어주곤 했는데, 우리는 그 선배가 날마다 영어로 일기를 쓰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당시 그 선배는 <대학생 성경읽기>라는 선교 단체에 나가고 있었다. 나도 친구와 함께 선배를 따라 그 단체에서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숙집을 드나들던 중, 하루는 그 선배의 하숙방 앉은뱅이 책상 위에서 낯선 책을 보게 되었다. 『무교회 신앙잡지 성서연구』라는, 표지가 희고 얄팍한 잡지책이었다. 호기심에 들쳐보니 표지 안쪽과 첫 페이지에 쓰카모도(塚本)라는 분의 글에서 선정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지만 그 책은 내게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선배를 따라 선교 단체에 나가 그 단체에서 요구하는 대로 성경 공부를 했다. 상당한 기간 내 딴에는 참 열심히 따라다니며 성경 공부를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1년 정도가 지나자 어줍잖게도 남들 앞에서 성경 공부한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은 내게 하나의 문화 충격(culture shock)이었다. 그때까지 20년을 살면서 교회라곤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독교에 담을 쌓고 있었던 내게, 성경과 기독교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으로 와 닿았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도 늘 마음 속에는 까닭 모를 회의가 짙은 안개처럼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내게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찾아 도서관이나 책방들을 뒤지는 습관이 생겼다. 틈만 나면 광화문과 종로 쪽에 있는 기독교서점들을 찾아 나섰다. 나의 잡식성 독서 습관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주머니에 돈 몇 푼만 생기면 책방으로 달려가곤 했다. 다니던 선교 단체에서도 점점 멀어졌다. 그곳에서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74년 말경,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서점들을 뒤지고 다니다가 종로서적에서 우연히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기독교문답』과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같은 동양인의 입장에서 이질적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공감대가 느껴지면서 무교회주의에 강하게 끌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불현듯 선배의 하숙방 책상 위에서 봤던 『무교회 신앙잡지 성서연구』가 생각났다.
이 잡지를 구해 보려고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시청 옆의 국회 도서관(지금은 서울시의회 자리)을 찾았다. 규정상 외부인에게는 열람과 대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겉 표지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경비원에게 부탁을 했더니, 서고에 직접 들어가 『성서연구』 한 권을 가져다 내게 건네줬다. 잡지 뒤에 쓰여진 주소를 베껴, 당시 불광동에 사시던 노평구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 구독을 신청했다. 그때가 1975년 2월 24일이었다. 며칠이 지나 3월 4일에 잡지가 집으로 도착했고, 단숨에 읽어나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두문과 잡감록이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다.
『성서연구』 뒷표지에 실린 YMCA성서집회 광고를 보고 처음 집회에 참석한 것이 1975년 3월 9일이었다. 마침 그 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일기장에는 그 날의 감상이 이렇게 쓰여져 있다.
오후 2시 성서집회에 참석하다. 마태 16장 18절 말씀으로 노평구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다.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등에 대해 긴 말씀을 하시다. 신앙고백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에 접할 때, 자신을 죄인으로, 주를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 5: 8). 베드로의 이 고백은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루터의 그것과 공통되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직 거룩이라는 말의 의미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여겨졌다.
노평구 선생님은 종교 혹은 신앙을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깊이 인식하고 계신 것 같았다. “종교가 기껏 봉사라든가, 사랑의 실천 따위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면 정치 참여 같은 것도 해 볼 만 하겠지...” 말하자면 종교는 그 이상이라는 말씀이다. ... 신앙만의 신앙, 양심... 정말 믿음도 천차만별이다. 나는 기꺼이 무교회의 믿음으로 들어가련다.
YMCA에서 성서 강의가 끝나면 노 선생님 주관으로 단테, 밀턴 독서회가 있었다. 장문강, 임세영 등과의 우정이 시작된 것도 이런 모임들을 통해서였다. 매주 행해지는 성서 강의와 독서회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대학이었다. 아니, 지금의 시점에서 나의 솔직한 느낌을 말하자면, 내게는 그 시간과 공간이야말로 유일한 진정한 대학이었다. 진리에 대한 열망과 사랑, 그것이 바로 대학의 이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나라 어느 대학에서 그만한 진리가 가르쳐지고 있단 말인가?
2.
대학 4학년이던 1977년 해인사 여름 성서집회에 참석한 후 선생님께 감상문을 몇 자 적어 보냈더니 선생님은 그것을 『성서연구』 274호에 실어주셨다.
“이번 하기 집회에서 몇 가지 느낀 점을 글로 올립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날마다 문 앞에 서서 떠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또한 못난 자식일수록 더욱 큰 염려와 사랑을 쏟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는, 하나님의 크고 섬세한 사랑에 그만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여태껏 천박한 신관으로 인해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세상 눈치에 쫓겨 살아온 저 자신이 더욱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생각되는 것은, 신앙은 담대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라면 어머니 품에 매달리는 젖먹이 아이처럼 전폭적으로 자신을 맡기게 될 것이요, 그러할 때 참된 의미의 배짱도 생기게 될 줄로 압니다. ...집회가 끝난 지 이제 겨우 며칠이 흘렀건만 벌써 제 마음 가운데 속진(俗塵)이 쌓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는 자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라오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 해 가을 대학 졸업논문을 무엇으로 쓸까 생각하다가 김교신 선생을 주제로 써볼 생각을 했다. 『김교신전집』을 두 번 정독하고 난 후 논문을 한 편 썼더니 노 선생님께서 『성서연구』에 실어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성서연구』 276호에 「김교신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시론」이 실리게 되었다.
전공이 역사학이면서 기독교를 접하게 된 인연으로, 나는 대학생 시절부터 종교, 문학, 역사를 함께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른바 학과간의 장벽을 허무는 학제적 연구(interdisciplinary study)를 해보겠다는 생각으로도 풀이될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신앙과 전공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나의 재주와 능력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에 한 쪽으로 힘을 몰아야만 하겠다는 판단도 틀림없이 작용했을 것이다. 문학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된 것은 우치무라의 『종교와 문학』, 『시인 휘트먼』 등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한다. 여하튼 그 때 가졌던 생각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바뀌지 않아서, 나는 지금도 내가 쓴 책들의 「저자(역자) 프로필」에 “종교, 문학, 역사의 학제적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주저 없이 써넣고 있다.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처음 석사논문 주제로 생각했던 것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사상이었다. 칼라일은 20세기 전반기에 접어들어 히틀러와 나치즘의 선구자로 매도당하는 등 엄청난 오해를 받고 있었다. 특히 『영웅숭배론』이 그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대학 시절 독서 경험에 의하면, 칼라일은 영웅이나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와 복종을 주장하는 파시즘적인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내게는 칼라일에 대한 기존의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기라성 같은 서구의 지성들(에른스트 카시러, 아놀드 하우저 등)을 조리 있게 논박하기에는 아직 힘이 부쳤다. 잠시 보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뒤늦게 1991년 『역사학보』 129집에 실린 <칼라일의 “영웅사관”>이란 논문으로 이 숙제를 대신하고자 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아예 칼라일의 문제의 책을 『영웅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고, 부록으로 『역사학보』에 실렸던 내 논문을 수록함으로써 칼라일에 대한 끈질긴 왜곡과 오해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그러나 『영원한 제국』의 이인화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진중권은, 극우와 진보라는 이념의 상반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토머스 칼라일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칼라일 대신 석사논문으로 쓴 주제는 영국의 철학적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사상이었다. 그의 보수주의의 이념적 기반이 기독교 사상이며, 한국 현대사에서 주장되어왔던 이른바 “보수주의”라는 것이 실제로는 “수구 반동”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려 한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역사학보』 101집(1984)에 게재되었다.
역사학도로서, 그리고 인문학도로서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연구 주제는 청교 시인 존 밀턴(John Milton)이었다. 내가 맨 먼저 다룬 것은 그의 언론 자유사상이었다. 밀턴은 악을 모르는 상황에서 행해진 선은 미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일 악에 대한 지식이 미덕의 전제 조건이라면, 온갖 책들을 읽는 것보다 더 안전하게 죄악과 거짓의 나라를 탐색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밀턴은 이런 점에서 인간이 악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또한 그는 “우리를 정화하는 것은 시련이며, 무릇 시련은 반대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이 말은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변증법적 진보 개념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내용은 1999년에 출간한 저서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를 통해 제시되었다.
밀턴은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시인이기에 앞서, 실명(失明)이라는 엄청난 육체적 시련, 이혼 문제라는 가정적 시련, 왕정복고라는 정치적 시련 등, 보통 사람 같으면 한 가지만 닥쳐도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해낸 탁월한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가 왕정을 반대하고 공화정을 주장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신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공화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종교적 확신이었다. 인간에게는 공적인 임무에 헌신할 의무가 있는데, 왕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적 예속의 굴레에 비끌어 매이게 한다는 것이다.
학연, 지연의 패거리주의에 얽매어 공과 사를 분별 못하는 한국의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관료들의 멘탈리티가 왕정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300여 년 전 밀턴의 질타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1999년 한 해를 추악하게 물들인 고관 부인들의 옷 로비 사건과 언론대책 문건 유출 사건을 보라. 과연 그들에게 공적인 영역이 존재하는가? 권력이건, 언론이건, 지식이건, 이 모든 공적인 것들이 그들에게는 오로지 악착스런 사익 추구의 한 방편일 뿐이었다. 조선 왕조는 아직도 망하지 않았다. 왕정은 우리 사회에 아직도 건재하다.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밀턴에게”라는 시에서 읊었듯이, “밀턴이여! 그대 지금도 살아 있었으면” 하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3.
노평구 선생님은 언젠가 “우리 주변과 사회를 훌륭하게 만들지 못하는 신앙은 쓸모 없는 신앙”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민족과 국가를 도덕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크리스천의 공적 임무를 강조한 밀턴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 놓이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헌금 모아 예배당 건물이나 짓고, 교회 울타리 안에서 신도들한테 고임이나 받고자 하면서, 기복 신앙을 능사로 삼는 직업종교가, 교회주의자들의 종교는 기독교라고 할 수조차 없다.
오늘날의 인문학에는 기독교가 거의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에게 성경은 낡아빠진 구시대의 박제된 유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 결과 종교개혁 같은 주제로 논문을 쓰는 인문학자들마저 종교개혁의 정치, 사회적 국면만을 더듬을 뿐 그 핵심인 신앙 내용에는 손도 대지 않으려 한다. 본질적인 내용을 다루는 연구자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종교개혁과 직접 연관된 주제를 전공하는 어떤 서양사상사 연구자가, 자신의 성경 지식 부족을, 마치 당연하다는 투로 독자들에게 변명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던 적이 있다.
상황을 바꿔 생각해 보기로 하자.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를 공부하는 한국학 연구자가 『논어』, 『맹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조선 사회경제사 연구자에게조차도 유교 경전 지식은 필수적인 것이다. 서양 사상사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서양 역사와 사상을 연구한다는 학자들이, 그것도 종교적인 주제로 글을 쓰는 학자들이 헤브라이즘과 그 경전인 성경에 대해 이런 식의 안이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은 기독교 신앙에도 적지 않은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밀턴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대의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고민과 갈등을 읽어내어 그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메시지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성찰과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학식(學識)은 영어로 “eruditi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각별히 인문학적 지식을 일컫는 말이다. 만일 사도 바울에게 학식이 없었다면 과연 그토록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을지 심히 의문스럽다.
한국 교회의 또 하나의 폐단으로, 맹목적인 근본주의 신앙으로 인해 인문학적 지식을 등한시해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PC통신 토론방에 들어가 보면 지금도 몇몇 광신적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장승 파괴, 불상(佛像) 훼손 사건 등을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하다. 다원(多元) 종교 시대를 살면서도 다른 종교 신자들과 더불어 살 줄 모르는 시대착오적인 편협한 광신도들, 몰지각한 언행으로 사회의 기초 질서마저 파괴하는 파렴치한들이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현실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자는 한심한 의견마저 나온다. 그들에게는 기독교가 마치 자신들의 무지몽매와 몰상식을 가려주는 면죄부라도 되는 듯하다. 불학무식이 오히려 자랑거리가 되는 기막힌 현실에서 인문학의 대중적 확산과 계몽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류의 하나님,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국가적, 사회적인 주요 문제들이 터질 때 기독교는 신앙적 관점에 입각해 사회적 메시지를 공포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도 진보 지식인들은 좌파 이론에 입각하여 사회적 발언들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포수를 피해 도망치다가 땅속에 머리를 틀어박는 꿩처럼, 교회 울타리 안에 숨어서 복이나 빌고 성전 건물이나 잘 짓겠다는 일부 교회주의자들의 작태는, 하나님의 보편성과 권능을 무시한 불신이자, 신성모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과 사회의 비근한 현실은 하나의 인문학적 텍스트에 다름 아니다. 바르트(Karl Barth)는 신문을 성경이라 하지 않았는가? 무교회 신앙―그것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은 이 텍스트를 읽어내고 현 상황에 걸맞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노평구 선생님은 바로 그 작업을 일생 『성서연구』 권두문을 통해 하신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고자 한다. 나는 우리 무교회 진영에서 단테 연구자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물론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사명감만으로는 안 된다. 먼저 단테의 사상과 문학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즐길 줄 모르면서 다른 사람에게 감흥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즐겁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평생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건 누가 하라고 시켜서 되는 일은 아니다. 독립적 지식인, 독립적 사상가로서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선택해서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위해 정말 큰 일이 될 것이다.
첫댓글 "하나님은 기독교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류의 하나님, 우주의 하나님이시다."
공감100%^^
교회 안에 하나님을 가두면 안 되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