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弟 四 學 年 | |||
題材의 內容 | 時間 | 題材의 內容 | 時間 |
( 9 月 ) 이과 공부(硏究法) 학교 뜰 花草 菜田 庭園動物 害虫과 益虫 개똥벌레 雜草 집에서 기르는 새 : 닭 비둘기 집 오리 가을 철 自然 가을 花草 氣象觀測 天文과 星座 晝夜의 長短 잎의 빛, 김장 材料 滲透作用--저리 |
2 6
3
3
| ( 12 月 ) 공기 空氣의 實在, 組成, 酸素 燃燒 元素와 化合物 酸化, 空氣와 生物, 衛生 겨울철 自然―樹木, 氣象觀測, 風向 어름과 눈 ( 2 月 ) 우리의 장난감 各種 硏究, 製造, 改良 악기 發音體―樂器, 音의 高, 低, |
3
3
5
10
|
㈏ 제1차교육과정
6.25 한국전쟁이 끝나자 국가도 점차 안정을 되찾으면서 1954년 4월 20일 에 ‘제1차교육과정’을 발표하였다.
⑴ 일반방침
第 二 章 國民學校
第七條 國民學校 敎育課程時間配當基準은 別表(-)에 依한다.
第八條 國民學校 敎育課程時間配當에 있어서는 各敎科 및 特別活動의 一年間 總授業時間數에 對한 百分率을 學年別로 表示하고 每週 平均授業時間量을 分으로 하여 參考로 表示한다.
第九條 國民學校의 授業時間은 四十分을 單位로 한다. 但, 學校長은 一授業時間을 二個以上으로 나누거나 또는 二個以上의 授業時間을 合칠 수 있다.
第十條 道義敎育은 全敎科 및 其他敎育活動全般에 亙하여 行하되 各學年 總授業時間數의 範圍內에서 年三十五時間以上을 이에 充當해야 한다.
第十一條 國民學校에 準하는 特殊學敎에 對하여는 前四條를 準用한다.
⑵ 교과 및 학년도
초등학교 교과목은 국어, 산수, 사회생활, 자연, 보건, 음악, 미술, 실과 특별활동 등 8개 교과이었으며, 특별활동 시간이 배당되었다.
이 때의 교육 사조는 진보주의 영향의 영향으로 생활중심 교육과정이었으며,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교육이 이루어져, 강의식 교육에서 경험중심 교육의 바뀌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해방 후 부터 1948년 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는 미군이 우리나라를 관장하였다. 따라서 학교의 학제도 미국식으로 하였기 때문에 학년도는 9월 1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8월 말로 끝나게 되었다.
그래서 1946년부터 1951년 까지는 입학을 9월 1일에 하고, 졸업은 7월에 하였다. 다만 1950년에는 5월 3일에 졸업하였다. 1952년부터는 4월 1일에 입학하고 3월에 졸업식을 하였다.
그러나 6.25 동란이 끝난 직후이어서 사회나 교육이 대부분 비정상적이었으며 아직 학습자료 등이 부족하여 대부분 수업은 강의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61년 5.16일 군부가 혁명을 일으킨 후 각급 학교가 3월 한 달을 수업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난다고 하여 1962년부터 새 학기가 종전 4월1일에서 3월 1일로 한 달 앞당겨져 이듬해 2월 말까지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제2차교육과정
1963년 2월 15일 문교부령 제119호로 제2차교육과정이 공포 되었다.
이 때는 소련이 소프티니크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는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우리나라는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국가의 정세가 격변하는 시기이며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일던 때이다.
따라서 교육도 이에 부응하여 자주성, 생산성, 합리성, 지역성을 강조하는 생활중심 교육을 강화하였고, 기초학력 충실에 역점을 두었다.
⑴ 교육과정의 내용
① 자주성의 강조
② 생산성의 강조
③ 유용성의 강조
⑵ 교육 과정의 일반목표
㉮ 민주적 신념이 확고하고 반공 정신이 투철하며, 민주적인 생활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하는 데 가장 적합한 학습 경험을 포함하여야 한다.
① 민주주의 이념과 그 가치에 대한 이해와 신념을 가지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학습 활동을 시킨다.
② 모든 학습 활동은 학생 개개인의 인격과 개성이 존중되는 분위기를 보장하도록 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습관과 품성을 기를 수 있는 학습의 기회를 주도록 한다.
③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번영과의 상호 의존성을 체득시키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습관과 품성을 기를 수 있는 학습의 기회를 마련한다.
④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와 자유세계에 끼치는 해독을 인식시켜, 확고한 반공 의식을 앙양하는 학습의 기회가 충분히 마련되도록 한다.
㉯ 독립자존의 민족적 기풍과 아울러 국제 협조의 정신을 함양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학습경험을 포함해야 한다.
①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를 애호 육성하고, 미풍양속을 존중하는 생활 경험을 얻게 한다.
② 향토 사회와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의 해결을 돕는 창의적 실천을 위한 학습 활동에 노력한다.
③ 국어로써 자기 의사를 적합하고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 노력을 경주한다.
④ 우리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자주적으로 외국의 생활 양식을 적절히 받아들일 수 있는 학습 경험의 기회를 마련하도록 한다.
⑤ 각 국가의 독립 자결의 기초 위에서 공정한 상호 의존적 관계를 이해시키고, 국제 협조 정신의 앙양에 노력한다.
㉰ 일상생활에서 당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과 유용한 기능 및 과학적 생활 태도를 기르는 데 직결되는 학습 경험을 포함하여야 한다.
① 교과서 중심, 강의 위주의 학습 지도 활동을 지양하고, 일상생활에서 당면하는 중요문제를 해결하는 연구적 학습 활동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가도록 한다.
② 기초적 학습 활동을 중시하고, 그 내용 선정과 학습 지도에 있어서는 학생들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학습 내용의 선정에 노력한다.
③ 교과서 이외의 정선된 보조적 학습 자료를 풍부히 마련하여 줌으로써 발전적으로 학습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노력한다.
㉱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증진시키는 데 필요한 학습 활동을 충분히 포함하여야 한다.
① 사회의 필요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기능을 기를 수 있는 학습의 기회를 마련하도록 한다.
② 우리나라 산업의 기술적 후진성을 극복함에 필요한 과학 기술 교육을 강조하여, 발명 발견의 토대가 되는 실험, 실습 위주의 학습을 강조한다.
③ 노작을 통하여 근로정신을 애호하고 유능한 생산자가 될 수 있는 학습 경험의 기회를 충분히 마련한다.
④ 자원을 애호하고 금전이나 물자를 절약하여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하는 생활 습관과 태도를 기르기 위하여, 구체적인 학습 경험을 일관성 있게 마련한다.
⑤ 산업 개발과 해외 진출을 위하여 필요한 해양 및 항공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습득시키기에 노력한다.
㉲ 건전한 정신과 강건한 신체를 가진 국민을 양성하는 데 직접 기여할 수 있는 학습 활동을 계획하여야 한다.
① 모든 학습 활동을 계획하고 지도함에 있어서는, 공명정대한 운동 정신을 체득케 하고, 신체적 건강 증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세심히 배려한다.
② 심신의 건전한 성장을 위한 기초적 이해와 습관을 기를 수 있는 계획적인 학습 활동을 마련한다.
③ 신체 각부의 강건하고 조화로운 발달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충분한 체육 및 보건 시간을 마련하여 종합적 학습 활동을 계획 실천한다.
④ 공중위생의 필요와 중요성을 체득하고 위생적 태도와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구체적이며 가치 있는 학습 활동을 계획 지도한다.
㉳ 국민 생활을 순수하고 명랑하게 하는 심미적인 정서 생활을 위하여 풍부한 개성을 개발하도록 하여야 한다.
① 예능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여 예술적 흥미를 발견하고, 창의적 표현 능력을 기를 수 있는 학습 활동의 기회를 충분히 마련한다.
② 건전한 민족 고유의 예술을 포함하는 여러 나라, 여러 시대의 가치 있는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학습 경험을 존중한다.
③ 취미에 따라 건전한 오락을 선택하여, 여유 있는 기간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④ 생활에 필요한 조형품을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학습 활동의 기회를 충분히 마련한다.
㉴ 형식적 추상적 지식에 치우쳤던 반공․도덕 교육을 쇄신하여 일관성 있게 지도할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하고,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실질적 교육에 주력하여야 한다.
① 학생의 도덕성의 발달은 학교, 가정, 사회의 모든 노력의 총화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으므로 개인적, 사회적, 도덕 생활을 종합적으로 지도한다.
② 각 교과의 학습 경험의 선정과 조직에 있어서 의도한 반공․도덕 내용은 일관성 있는 기본적인 교육 목표로 다룬다.
③ 일상생활의 개선과 사회적 국가적 행사의 참가, 국민의례 준칙의 실천 등을 통하여 민족정기를 앙양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학습 경험을 강조한다.
⑶ 교육 과정 개정의 요점
① 기초 학력의 충실을 기한다.
모든 교과의 기초가 되는 국어, 산수(수학)의 시간을 확보하여 실력 배양에 힘쓰고 교과 운영의 원활을 기하도록 한다.
② 교육 과정의 계열을 합리화하여 각 학교 사이에 일관성을 지니도록 한다.
③ 생활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교과 경영을 지향하여 관련성 있는 교과의 종합 지도를 강조한다.
④. 국민 학교와 중학교의 교육 과정의 전체 구조를 교과 활동, 반공․도덕생활 및 특별활동으로 한다.
⑤. 시간 배당 계획의 융통성을 주도록 한다.
⑥ 교육 과정 내용을 서술하는 형식을 통일한다.
⑷ 교과목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음악, 체육, 미술, 실과, 반공 도덕, 특별활동으로 제2차교육과정에서는 군사정부의 국정지표가 반공이었기 때문에 ‘반공 도덕’
이 추가된 것이 특징이다.
4. 주산으로 전국에 이름을 날리다
전국주산능력 검정에서 당당 5단을 얻은 본교 5학년 3반 윤석부 군은 1967년 10월 21일 전주상업고등학교에서 주최한 전국주산경기대회에서 계시암산부 1위로 우승하며 주산실력을 과시하였다. 삼남일보 1967년 10월 27일 신문에 이런 내용이 보도되어 모교를 한층 더 빛냈다.
또한 1968 11월 8일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의 주최로 열린 제3회 전국초등학교 주산경기에서 단체부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또 5학년 지순화 는 개인부 1등을 차지하여 모교의 주산실력을 전국에 알려 중 앙일보 1968년 11월 19일자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주산을 통해 어린이들의 두뇌성장을 꾀하고 있는 본교는 지난 3년 동안 피나는 훈련을 거듭하여, 전국 최고의 주산학교로 등장 계속 정상을 달리고 있다.
1967년 4월 조종곤 지도교사가 적성검사를 통해 선발한 60명의 주산부 어린이들을 처음에는 주산을 전혀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주산부 어린이들은 매일 강훈련을 하여 지난해 대한교육연합회 전북지부 주최로 초·중등 및 학원대항 주산경기에서 개인종합 및 단체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주산학교로 등장하였다. 동교 주산부 어린이들은 1968년 5월 31일 서울덕수상업고등학교 주최 제17회 전국 국민학교대항 주산경기대회에서 6학년 이영연 군이 개인 최고상으로 전국주산왕이 되었고, 1968년 6월 1일 서울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 주최 전국 국민학교대항 여학생 주산경기대회에 본교 여학생 7명이 출전하여 지순화 양이 독산가감산 등 7개 부문에서 만점으로 특등을 차지하였으며, 단체우승까지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일보 1969. 6. 10일자 신문뿐만 아니라 전북일보 1969. 6.19일자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그리고 주산 본교 6학년 김수기양 등 6명의 주산부 어린이들은 1970년 5월 30일부터 2일간 서울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 주최로 제9회 전국 국민학교 여자 주산경기대회에서 개인 부문 우승과 단체 부문 우승을 독차지 하였다. 본교는 지난해에도 우승하여 금년 2연패를 차지하였다. 부문별 수상자는 제산 1등 김수기, 3등 김후경, 가감산 1등 이미선, 승산 3등 한영순, 가감산 3등 김희자, 계시암산 3등 박경희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일보 1970. 6. 6., 전북매일신문 1970. 6.17., 조선일보 1970. 6.21., 일요신문 1970. 6.21.자에 보도 되었다.
주산부 단체 우승 기념 사진
※ 주산경기대회별 입상 내력
일 자 | 대회명 | 주최 | 수상 실적 | 비 고 |
1967.10.21 | 전국 주산경기대회 | 전주 상업고등학교 | 암산부 1위 | 5-3반 윤석부 |
1968.11. 8. | 3회 전국국민학교 주산경기 |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의 주최 | 단체부 우승 개인부 1등 | 개인부 5학년 지순화 |
1968. 5.31. | 제17회 전국 국민학교 대항 주산경기대회 | 서울덕수상업고등학교 | 개인부 1등 | 6학년 이영연 |
1968. 6. 1. | 전국 국민학교 대항 여학생 주산경기대회 | 서울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 | 단체우승 | 지순화 양 7개 부문 만점 |
1968. 5.31. | 제17회 전국 국민학교대항 주산경기대회 | 서울덕수상업고등학교 | 개인 최고상 | 6학년 이영연 |
1970. 5.30. | 제9회 전국 국민학교 여자 주산경기대회 | 서울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 | 개인 및 단체 부문 우승 | 6학년 김수기양 등 6명 |
5. 아름답고 착한 마음
㈎ 거리청소
전북 이리시 이리국민학교는 권갑석교장을 비롯한 전 교직원과 4, 5, 6학년 어린이들이 일요일마다 새벽 6시에 나와 1시간 동안 거리청소를 하였다. 어린이들은 ‘내 고장은 내 손으로 깨끗이 하자’라는 구호아래 학년초인 3월부터 이 운동을 펼쳐, 거리 청소뿐만 아니라 길가에 꽃도 심어 길거리에 그윽한 꽃향기가 그윽하다. 이런 사실은 소년조선일보 1970. 5. 23.일자 및 일요신문 1970. 5. 24.일자 신문에 보도되었다.
㈏ 선행
본교 오정순 양은 편모슬하의 가정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소아마비에 걸려 걷지를 잘 못하는 급우 박영자 양을 4년 동안 5리나 되는 길을 업어서 등하교를 시켜주고 화장실에 갈 때도 항상 업어서 데려다 주었으며, 푼돈을 모은 돈으로 어려운 급우 5명에게 학용품을 사주는 등 선행이 뚜렷하여 타의 귀감이 되므로 1956년 5월 31일 전라북도 이정우 지사의 상을 받았다. 이런 사실은 삼남일보 1967. 6. 17일 및 조선일보 2월 11일 자 신문에 보도되었다.
또한 이리국민학교 청소년 적십자 단원 15명은 그 동안 푼푼이 모은 돈으로 운동화 15켤레를 사서 이리보육원에 추석선물로 기증하였다. (동아일보 1967. 9.19.)
그리고 본교 이순애양은 1970년 7월 18일자 소년조선일보에 실린 전남 진도군 조도면 고사분교 어린이들의 ‘못견디게 동화책을 읽고 싶어요’란 애절한 기사를 읽고 세계전설문학 선집 10권 1질을 고사분교 어린이들에게 보내달라고 소년조선일보에 맡겼다. 이 양은 채소 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50일 동안 도우면서 모은 돈으로 이 동화책을 사게 된 것이다. 이 양은 돈이 적어 한 질 밖에 못 보내주지만 고사분교 어린이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기를 바랬다.
(소조선일보 1970. 9.12)
학생뿐만 아니라 본교 양종석 선생님(6학년 6반 담임)은 4학년 때부터 자기반 학생이던 金容任 양을 박봉을 털어 가난한 제자에게 3년 안 학비와 식량을 대 주어 졸업식장에서 수많은 학부모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金容任 학생은 남달리 재주가 있으면서도 가정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음을 알고 김양의 학비와 학용품뿐만이 아니라, 식량까지 보태주었다.
김양은 이에 분발하여 3년간 우등상을 수상하였으며, 지난 12월 시내 성신여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수석합격을 하여 3년간 학비면제를 받았다.
3남매를 거느리고 홀로 삯바느질을 하며 살아오던 김양의 어머니는 이날 졸업식장에서 양교사의 손을 붙잡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이런 사실은 한국일보 1969. 2.14. 신문에 보도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6. 첫 개교 40주년 기념행사
연혁지를 보니 6.25 전쟁이 끝나고 2년 정도 지난 1955년 4월10일 개교 4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당시 학교를 다닌 우리는 어느 날 학교의 생일이라고 운동장에서 기념식을 하고 떡을 나누어 준 일이 생각났다.
필자는 당시 4학년이었고 너무 오래되어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식이 끝난 후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를 학교 뒤편 농고 방죽(지금은 방죽 흔적은 없고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이 보이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를 맨바닥에 앉히시고, 떡을 하나씩 나누어 주시면서 오늘은 학교 생일이어서 학교에서 떡을 준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 떡을 받아 맛있게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오늘은 학교 생일이라 공부를 하지 않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말에 우리는 모두 기분이 좋아 큰 소리로 ‘야호’하며 박수를 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살기가 어려운 때인데도 개교기념일 행사를 했다는 것이 이리초등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 저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개교기념 행사는 1975년 4월 10일에 개교 6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고, 1985년 12월 7일에 개교 70주년 기념행사를 한 흔적이 연혁지에 적혀 있다.
7. 새로 개교하는 학교에 학생 분여
우리 학교는 이리시에서 가장 먼저 공립학교로 개교했기 때문에 이리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원거리 통학을 줄이기 위하여 이리시내에 초등학교가 하나씩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 때마다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의 일부를 분여하였다.
맨 처음에 1941년 4.10 이리동산초등학교가 대화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자 본교에서 2학급을 분여하였고, 다음에는 1945. 10. 1 이리중앙국민학교가 신설되자, 여자만 15학급을 분여하였다. 그 후부터 몇 년 동안은 이리중앙초등학교는 여자만 다니고, 우리학교는 남자만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또 1951. 7.1 고현초등학교의 증설에 따라 5학년 남 13명, 여 2명, 4학년 남 7명, 3학년 남 56명, 여18명 계96명을 분여하였고, 1963. 3. 1에는 이리남창초등학교 신설로 1학년 3학급(남 105명, 여109명), 2학년 3학급(남 110명, 여 124명) 총 448명을 분여하였으며, 1974. 3. 1. 이리북국민학교 신설로 1, 2, 3, 4학년 4학급 분여하였다. 이 이외에도 이리동초등학교, 이리동북초등학교에도 학생들을 분여하였다.
8. 연구학교 운영으로 교육발전에 노력
㈎ 시청각 교육 연구학교 운영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의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런 중에도 본교는 1962 시청각 교육에 관한 전라북도교육위원회로부터 연구학교로 지정받아 시청각 교구의 제작 활용으로 학습지도 개선 방안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당시의 우리나라 교육 행태는 교사 중심의 강의식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모든 교육학자는 이 강의식 수업은 학습활동이 교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학생들은 듣기만 함으로써 이해해야 하므로 학생들의 학습 성취도가 떨어지는 좋지 않은 수업이라고 했다.
따라서 학습은 학생들이 학습 자료를 직접 만져보고 실제로 다루어 보아야 원리를 깨닫고, 학생들의 학습 성취도도 높아진다고 하였다. 이를 실천하려는 학습방법이 바로 시청각 교구를 활용하는 수업이다.
그런데 당시는 경제적으로 열악하여 시청각 교구를 구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본교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직접 시청각교재를 만들어 수업하는 시청각 교구의 제작 활용으로 학습지도 방법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며 그 결과를 발표하여 참관한 교육 관계자들의 호평을 들었다.
㈏ 산수과 연구학교 운영
산수라면 대부분이 싫어하는 교과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산수과 교육에 관한 학습지도 방법의 연구가 매우 필요한 교과이다.
본교에서는 1971년 전라북도교육위원회로부터 산수과 연구학교로 지정받아 산수과 교육방법에 대해 노력했다.
산수과의 가장 핵심적인 수업은 학생들의 문제해결력의 신장이다.
문제해결력을 신장시키려면 문제해결을 하기 위한 사고하는 방법을 체계화 해야 한다.
본교에서는 문제해결을 위한 단계적 사고 모형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신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첫 단계는 주어진 문제를 직관적 사고로 이해하고, 그 결과를 예상하게 하였다. 다음에는 그 문제를 그림이나 도표로 그려보면서 단순화 하여 결과를 알아보게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얻어진 답을 문제에 대입시켜 그 결과로 자기가 해결한 문제의 답이 옳은지를 확인하게 하였다.
이런 학습모형을 정립하는 연구를 끝내고, 1982년 12월에 많은 교육관계자를 모시고 본교에서 연구한 위와 같은 3단계 지도법을 정립 실천한 결과를 발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 서예 연구학교 운영
서예는 붓으로 글자를 쓰는 예술이다.
이러한 서예의 기초학습 단계는 붓 잡는 법, 팔의 자세, 기본 점획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교과와 관련되는 기본은 점획의 필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ㄹ, ㅁ, ㅂ, ㅇ 등의 필순을 잘 익히지 못한 사람은 중 고등학교까지 이어지고 심지어는 어른이 되어서도 필순이 틀리는 사람도 있다.
이에 초등학교에서 부터 필법과 필순을 익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당시 권갑석 교장선생님은 1973년에 전라북도교육위원회로부터 서예지도 연구학교로 지정받아 교사와 학생들에게 서법을 연구하게 하였다.
권 교장선생님은 호가 여산이며, 당시 국전 서예부문에서 특상을 3회 이상 수상하시어 초대작가가 되셨고, 후에는 국전 서예대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셨다.
그래서 서예 과목을 이수해야하는 4학년 이상 학생들에게 붓 잡는 법, 팔의 자세, 기본 점획의 필법 등 서예의 기초 기본을 철저히 지도하게 하였다. 다음에는 배자 방법을 알고 궁체 정자를 어울리게 쓰기를 지도하였으며, 다음에는 정자와 흘림의 차이점 알고 조화롭게 쓰는 능력을 길렀다.
서체학습은 4학년은 판본체 자형 익히기와 궁체의 기본 점획을 학습하게 하고 5학년은 궁체쓰기를 학습하게 하였다. 6학년에서는 5학년에서 배운 궁체쓰기를 한 단계 발전시켜 궁체 흘림쓰기를 학습하게 하였다. 또한 매년 서예대회를 열어 우수학생에게는 시상을 하여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렇게 2년 동안 서예지도를 한 결과 학생들의 서예 실력이 월등히 향상되었으며, 노트에 필기를 하는데도 자형과 글씨체가 아름다워져 학생들의 심성도 순화되었다. 그리고 1974. 11월에 연구학교 공개발표를 하여 참관인들로 부터 많은 격려와 호응을 받았다.
9. 이리시에 우뚝 서다.
우리학교는 이리시의 중심학교일 뿐만 아니라 학교 규모도 제일 컸다. 그래서 이리시 각종 행사 및 경기에서 우승을 휩쓸었다.
1975년 이전만 해도 우리나라 생활 형편이 그리 잘 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교통도 불편하여 멀리 다실 수도 없었다. 필자가 1957년에 수학여행을 부여로 가는데 기차를 타고 가서 대전에서 내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가는데 하루 종일 걸려서 부여에 도착할 정도였다
그래서 축구대회나 육상경기 등 모든 경기가 시내 대여섯 학교가 모여 경기를 하였다. 예를 들면 축구경기는 대부분 이리동중학교(현 이리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왜냐하면 이리동중학교 운동장이 이리동중학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리공설운동장이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시작되면 우리학교 응원부대들이 한 쪽을 차지하고 또 다른 학교도 다른 한 쪽 차지하여 응원전을 펼친다. 그 때에 빠지지 않는 노래는 ‘썪었다 골았다 이리○○(학교명)’ 하면서 상대방 학교를 얕잡는 노래였다.
물론 우리학교가 거의 모든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우승기와 우승컵을 타 왔다. 이런 우승기, 우승컵, 상장 등이 2008년까지만 해도 본교 역사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최근에 개교100년사 발간을 위해 자료를 찾아보니 어디로 치웠는지 흔적이 없어서 경험으로만 글을 쓸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10. 상급학교 진학률 점차 증가
1969학년도 까지는 상급학교인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입학시험을 보아야 했다. 당시의 6학년 학생들은 중학교 시험에 대비하여 정규 수업이 끝나고 2~3시간은 과외수업을 해야 했다. 물론 과외회비도 내야 했다.
당시 전기 사정이 나빠서 해가 짧은 겨울에는 양초를 준비해 가지고 와서 촛불을 켜 놓고 수업을 해야 했다.
1970학년도부터는 중학교 시험제가 없어지고 무시험제로 바뀌어 중학교 입학시험은 영원히 사라졌다. 따라서 초등학교 학생들은 입시지옥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당시 중학교 진학률을 보면, 본교는 그래도 도시 중심학교 이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시골에 비해 많았지만 그래도 당시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를 졸업식 때 발표하는 학사보고서에 나타난 진학생 추이를 보면 아래 표 ‘학년도별 진학현황’을 보듯이 진학생 통계가 보이는 1960년 이후 점차 진학률이 높아지고 비 진학률이 낮아지면서 1961학년도 진학률이 69.1%인데 비해, 중학교 입시 시험제 마지막 해인 1969학년도 진학률은 91%로 향상되었다.
참고로 학년도별 진학현황을 조사하여 표를 만들어 제시한다.
학년도별 진학현황(입학시험 진학시기)
학년도(회수) | 진학 | 비율(%) | 비진학 | 비율(%) |
1960 (45회) | 403 | 69.1 | 135 | 30.9 |
1961 (46회) | 423 | 77.6 | 122 | 22.4 |
1962 (47회) | 399 | 77.4 | 118 | 22.6 |
1963 (48회) | 546 | 89.6 | 69 | 10.4 |
1964 (49회) | 495 | 80.7 | 118 | 19.3 |
1965 (50회) | 554 | 86.0 | 88 | 14.0 |
1966 (51회) | 562 | 77.4 | 164 | 22.6 |
1967 (52회) | 530 | 86.0 | 90 | 14.0 |
1968 (53회) | 530 | 86.0 | 90 | 14.0 |
1969 (54회) | 506 | 91.0 | 48 | 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