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27일부터 소련군이 철수를 완료하는 1989년 2월 15일까지 약 9년에 걸친 전쟁 동안 아프간에 주둔한 소련군의 병력은 제40군 산하 6개 기계화보병사단, 2개 공수사단을 주축으로 총병력은 약 8만명에서 가장 많을 때 15만명 선이었다. 또한 전차 및 장갑차 1800여대, 헬기 1400여대, 수송기 360대, 전술기 1200여대에 달했다.
이것은 분명 막강한 전력이었으나 65만㎢에 달하는 광대한 아프간 국토를 생각한다면 너무 적은 숫자였다. 이전에 소련군이 작전을 수행한 폴란드나 체코, 헝가리에 비할 바가 아닌데다, 아프간은 지형적으로 매우 험준하고 도로가 미비하여 기계화 부대를 운용하기에 부적절하였다. 대규모 기계화 전력을 투사하여 기동전을 펼치는 것이 장기인 소련군에게는 최악의 공간인 셈이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 절정이었던 1968년에 최대 54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으로 보낸 바 있었다. 또한 100만명에 달하는 남베트남군과 10만명의 동맹국 군대(한국, 태국, 호주 등)도 있었다. 반면, 아프간에서 소련은 남베트남의 네배에 달하는 면적에 병력은 미군의 1/4~1/7에 불과하였다. 비록 소련군의 총병력은 250만명에 달했으나 정치적인 부담과 병참 문제로 아프간에 상시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숫자는 고작 15만명이 한계였다. 사회주의 진영의 도움도 없었다. 훨씬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물론 소련 지도부도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소련군 참모본부에서는 베트남전쟁을 교훈삼아 섯불리 아프간에 발을 담구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아프간을 침공하려면 고작 4~5개 사단이 아니라 그 열배는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묵살되었다. 하지만 지도부의 입장은 아프간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정권만 교체한 뒤에는 카불을 지키고 아프간군을 훈련시키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긴 채 신속히 발을 뺄 것이니 걱정할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낙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아프간 정부군이 반란군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뒤에서 소련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버티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누가 감히 맞서겠느냐는 것이었다.
아프간군의 전력은 1979년 당시 3개 군단 11개 보병사단과 3개 기갑여단, 2개 산악여단, 1개 포병여단, 3개 포병연대, 2개 코만도 연대, 1개 공수 대대 등 장교 8천명, 사병 10만명으로 구성되었다. 각 보병사단의 인원수는 평균 5천여명 정도로 실제로는 여단 규모였다. 또한 전차 570대, 항공기 120대, 헬기 30대를 보유하였다. 소련은 1957년부터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아프간군의 훈련을 맡아왔다. 1979년에 오면 아프간에 배치된 군사고문의 숫자만 해도 5천명에 달했다. 아프간 장교의 절반은 소련에서 공부하거나 소련인에게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골수 공산당원은 그 중에서 10% 미만이었고 90% 이상은 아민을 추종하던 할크파(인민파) 지지자들이었다. 따라서 소련을 등에 업고 정권을 빼앗은 파르참파(깃발파)의 카르말에게 충성할리 없었다. 소련 지도부는 아프간의 복잡한 파벌을 간과한 것이 최대의 실책이었다.
무자헤딘(mujahidin)이란 아랍어로 "성전을 수행하는 전사"라는 뜻이다.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8년 4월 군부 쿠테타로 다우드 정권이 무너지고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부터였다. 타라키와 아민 정권은 사회주의 개혁을 명목으로 아프간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이슬람교를 탄압하자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무슬림들이 반발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지대의 페샤와르(Peshawar)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파키스탄 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소련 침공 이전만 해도 세력은 미미하였다. 아프간 각지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고 하지만 명확한 지도자가 없고 산발적이라 쉽게 진압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카불을 위협하기는 커녕 명맥만 간신히 유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침공은 하루아침에 상황을 일변시켰다. 소련군은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남의 정권을 뒤엎은데다 아프간군의 작전권을 장악하고 상전행세를 하면서 고압적인 태도로 이들을 대하였다. 또한 카르말은 정권을 잡자말자 가장 먼저 정부와 공산당, 군부 내 아민의 추종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나섰다. 반발은 당연하였다. 아프간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무기를 들고 탈영하여 무자헤딘에게 가담하였다. 1980년 1월에 10만명이었던 아프간군이 반년만에 3만명만 남았을 정도였다. 아프간군은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아무리 엄중히 감시하고 높은 봉급을 약속해도 소용없었다.
또한 무자헤딘은 자신들의 적을 카불에서 소련으로 돌리고 외세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하여 아프간 민중과 군대에 파고 들었다. 그동안 분열되었던 아프간 사람들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하여 무기를 들었다. 이런 상황은 소련 참모본부도 이미 경고한 바 있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와 강경파들이 애써 무시했던 사실이기도 했다. 소련 지도부는 한줌 밖에 안되는 무자헤딘만 생각했지 설마 자신들이 훈련시킨 아프간 군대가 무자헤딘에게 가담하여 총부리를 돌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미국과 서방, 중국의 비난은 물론이고, 명목상으로는 "비동맹"이면서도 나름의 사정으로 미국과 거리를 두면서 소련에 우호적이던 중동,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 또한 심각하게 악화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아프간은 소련의 위성국이 아니라 엄연한 비동맹 진영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침공 직후인 1980년 1월 7일 열린 UN 안보리 회의에서는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일주일 뒤 총회에서는 비동맹 17개국이 상정한 "소련군의 전면철수 요구" 결의안이 찬성 104, 반대 18, 기권 18로 통과되었다.
1월 26일 파키스탄에서 열린 이슬람 국가 외무장관 회의에서는 42개 회원국 중에서 36개국이 참석하여 만장일치로 소련을 비난하고 친소 카르말 정권이 수립된 아프간을 회원국에서 추방한다고 선언하였다. 서쪽으로는 서방, 동쪽으로는 중국과 대치하고 있던 소련이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남쪽까지 적으로 돌림으로서 사방이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또한 미국과의 데탕트는 깨졌고 군비 경쟁은 더욱 불이 붙었다. 결국 10여년 뒤 군비 부담을 견딜 수 없었던 고르바초프는 뒤늦게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소련식 개혁개방)"를 추진했지만 결국 소련의 붕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지도자들의 졸속 결정이 혹독한 결과를 불러온 셈이었다.
2월만 해도 소련 지도부는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오래지 않아 철수할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새해 벽두부터 아프간 북부 나흐린(Nahreen)에서 아프간 제4포병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련군이 출동하여 100여명을 사살하고 나흐린을 탈환했지만 반란군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저항을 계속하였다. 소련군은 처음에는 아프간군을 투입하여 이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소련군의 강요로 출동한 아프간군 병사들은 전우들과 싸우기를 거부하고 탈영하거나 도리어 반란군에 가세하여 소련군을 공격하였다. 소련군은 직접적인 전투는 회피한다는 원칙을 깨고 전투의 전면에 나서야 했지만 자신들에게 익숙한 산악지대에서 말을 타고 종횡무진하는 게릴라들을 상대로 전차와 장갑차는 무용지물이었다. 또한 반군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면서 민심은 빠르게 이반되었다. 3월이 되자 소련군은 카불과 몇몇 도시, 주요 간선도로만을 점과 선으로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고 국토의 80%는 무자헤딘의 통제 아래 넘어갔다.
아프간 정부군이 가세하면서 페샤와르의 반군 세력들은 비약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국제 사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중국은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통해 무기와 군수품을 제공하였다. 이집트, 사우디 등 이슬람 국가들이 보낸 대량의 무기와 물자가 파키스탄 카라치 항구를 거쳐서 내륙으로 운송되었다. 정규군 소속의 군인들이 가세하고 무기와 자금이 들어오면서 그동안 엉성하기 짝이 없었던 반군 세력들은 점차 조직화되어 군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분열된 채 개별적으로 활동했던 것에서 벗어나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1월 27일 5개 주요 반군 단체가 "아프가니스탄 해방을 위한 이슬람 동맹"을 결성하였다. 소련군은 전투기를 동원하여 접경 지대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브레즈네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5월 프랑스 데스텡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아프간에서 곧 철수할 것"이라고 장담하였고 참모본부에 불필요한 병력을 철수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야말로 현실감각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련 지도부의 희망은 정치적인 부담과 재정적인 압박 때문이라도 아프간에서 조기 철수하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점점 장기화되고 있었다. 이제와서 발을 뺀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편, 미국은 소련을 아프간이라는 수렁에 빠뜨릴 호기라고 생각하였다. 카터의 안보 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는 "우리는 소련에게 최대한의 대가를 치루게 해야 한다"라고 단언하였다. 하지만 내륙 국가인 아프간에 개입하려면 파키스탄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아프간 서쪽은 호메이니가 통치하는 이란이 있었고 그는 미국이라면 치를 떠는 인물이었다. 브레진스키는 파키스탄의 협조를 얻기 위하여 파키스탄 정부가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던 핵개발을 묵인할 것을 카터에게 건의하였고 수락을 얻어내었다. 카터가 오랜 동맹국인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가차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이중적인 잣대를 보여준다.
1977년 7월 군부 쿠테타를 일으켜 부토 정권을 무너뜨리고 파키스탄의 독재자가 된 지아 울 하크(Mohammad Ziaul Hag)는 미국이 아프간 저항군과 연계하는데 협조키로 약속하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미국이 협조하는 대가로 4억 달러를 제시하자 "껌값"이라고 코웃음쳤던 그는 다음해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무려 32억 달러를 얻어내었다.
연재가 너무 늦어진 점 죄송합니다..;;;ㅜㅜㅜㅜㅜㅜ
첫댓글 소련 병신새끼들 ㅋㅋㅋ 지능수준이 곰탱이만도 못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