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22. 공중전의 내면 (Soul of Sky)
[전투기 공장을 둘러보는 독일의 조종사들]
1차대전에서의 공중전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과 모험이었다. 조종사들은 운명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전장이 되어버린 하늘에서 조잡한 비행기에 그들의 몸을 싣고 창공으로 날아오른다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옥과도 같은 지상전의 참상에 진저리를 친 대부분의 지상군 병사들은 참호속에 틀어밖혀 폭음과 함께 하늘을 누비는 전투기들을 보면서 막연한 동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조종사들이 마치 중세시대에 병사들을 진두 지휘하며 서로 대결하던 기사와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하늘에서 싸운다는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공중전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떤 위험이 숨어있는지 모른채, 수많은 조종사들이 싸우기 위해서 날아올랐다. 그리고 많은 젊은 청춘이 하늘에 목숨을 바쳤다.
[독일의 2인승기 알바트로스 C. I의 조종사들, 추위를 이기기 위한 복장을 잘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복장을 착용하여, 둘의 복장이 통일되지 않았다.]
우선 조종사들은 적과 싸우기전에 자신의 비행기와 싸워야 했다. 개전초에는 전투용으로 설계되지 않은 비행기들이 전선에 투입되어 정찰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나, 비바람이 그대로 들이치는 좁은 조종석에서 추위와 싸워야 했으며, 엔진은 사소한 고장이 빈번했으며 기체도 매우 불안정했다. 특히 항공기간의 공중전이 벌어지면서 기체 강도의 한계가 실전에서 시험되는 결과가 생겼으며, 결국 급기동과 급강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기체의 파손으로 추락하여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조종사들의 모습은 흔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항공기들이 전투를 위해 설계되고 이에따라 공중전이 새로운 전투형태로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서로 특성이 다른 기체들이 생겨났다. 기동성이 뛰어났던 뉴포트 17이라던가 빠른 속도로 안정성있게 비행했던 SE5a, 그리고 뛰어난 상승력을 보여주었던 포커 D. VII과 같은 기체들이 나타나면서 이러한 기체의 특성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이용하는 가가 승패를 좌우했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이시기에도 공중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적기를 찾는 것이었다. 레이더나 무전기도 없던 시대에 적기를 찾는 것은 조종사의 시야에 의존해야 했다. 대부분의 전투기들은 소형이어서 3-4km만 떨어져도 육안으로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정면으로 접근해오거나 그 반대로 적기의 뒷모습만 보이는 경우는 1-2km정도의 거리가 육안 식별에 있어서거의 한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적기를 먼저 발견한다는 것은 바로 공중전의 주도권을 쥐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적기인지 아군기 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항상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같은 방향으로 직선 비행을 오래하지 않는 것이 공중전의 기본이 되었다.
격렬한 공중전이 시작되면서 조종사들은 어떻게 적기를 격추 시킬것인가 하는 전투기술의 개발에 몰두하였다. 결과적으로 얼마나 능숙하고 자유롭게 전투기를 조종할 수 있는가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비행기의 조종장치는 각 방향키를 연결한 와이어가 직접 조종장치에 연결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투기의 조종감각은 그대로 조종간이나 러더페달로 전달되게 되었다. 그러니까 손이나 발에 전해지는 감각으로 조종상태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서 조종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미묘하고 정교하게 이러한 조종장치를 다룰수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게 되었다. 예를들어 선회를 하려해도 방향타만 기울이는 것보다 러더를 같이 조작하는 것이 더 예민한 기동을 할 수 있었으므로 손보다 떨어지는 발의 감각을 보충하기 위해서 초창기 조종사들의 기본 복장의 하나이던 두꺼운 밑창 있는 가죽 장화를 벗어 던지고 얇은 밑창을 가진 구두를 신거나 심지어 슬리퍼를 신고 탑승했던 조종사들까지 있었던 것이다.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기구 관측병을 아군기가 보호하고 있다.]
또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급격한 공중전투 기동술을 구사하던 중에 불안정한 기체에서 튕겨나와 떨어져 희생되는 조종사들이 생겨났다. 특히 2인승기의 경우 조종사들은 자신이 구사할 기동술에 심적으로 대비할 수 있었으나 후방석의 관측사나 기관총수는 이러한 준비가 없어서 기체에서 튕겨나갈 위험에 노출이 되어 있었다. 이때 까지만해도 조종사를 기체에 붙들어주는 안전벨트 같은 장치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결국 1918년에 이르러 안전벨트를 시트에 장착하여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조종사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낙하산또한 1차대전을 통해서 논란이 많았던 장비였다. 사실 낙하산은 1908년 미국의 스티브스가 실용이 가능한 자유개산식을 발명하여 전쟁전부터 사용 가능했으나,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절실하게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모르는 경직된 사고방식의 군수뇌부에 의해서 채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공중전이 격렬해지고 점점 높은 고도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기관총이나 대공포화에 피격되거나, 기체고장등으로 추락하는 기체들이 속출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져도 조종사들에게는 어떻게든 기체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불타는 기체와 함께 같이 소사하거나, 지상과 격돌하여 핏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화염에 휩쌓인 알바트로스 D.III와 기체에서 뛰어내린 조종사, 그런데 낙하산이 보이지 않는다.]
전우가 불타는 기체와 함께 추락해가다가 절망의 순간에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조종석에서 스스로 뛰어 내려 죽음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어떤 조종사는 이런 최후의 순간을 대비해서 자살용 권총을 휴대하고 다녔던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경직된 군 수뇌부의 사고 때문에 1차대전이 끝나가도록 군에서는 표준 장비로 채택되지 못했다. 어떤 장군은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만일 낙하산을 채용한다면, 겁많고 비겁한 조종사들이 전투중에 아무렇게나 소중한 국가의 재산을 포기하고 뛰어내려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할 것이다!"
이점은 연합군측에서 더 심했는데 영국공군의 경우만 하더라도 표준장비로 낙하산이 채용된 것은 1차대전이 끝난후 한참 지난 1925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1차대전중에도 낙하산을 사용한 사람들은 있었다. 그것은 기구에서 정찰을 하던 기구 정찰병이었는데, 이는 기구가 매우 공격받기 쉽고, 쉽게 불타올라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구 정찰병은 적의 전투기들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면 그대로 지상으로 뛰어내려 탈출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구에 수소가스를 채우는 장면, 이러한 기구는 매우 취약하여 이에 탑승하는 관측병은 1차대전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중 하나였다.]
비행복의 경우만 해도 사연이 참으로 복잡한 것이었다. 비행복의 개념이 없던 개전초에는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지상군이 사용하던 정복을 그대로 입고 날아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상전용으로 디자인된 이 복장은 멋있어 보이기는 했으나 불편한 점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때만해도 정복은 긴칼이나 날카로운 무기를 사용하는 백병전에서 목부분을 다쳐 치명상을 입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두꺼운 깃으로 단단한 칼라를 부착하여 목부분을 두르는 목닫이 옷깃의 군복이 많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매서운 추위와 싸우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야 하는 조종사에게는 매우 불편한 것이었다. 결국 양복점에 주문하여 목부분을 열어 젖혀 목을 편하게 하여 입는 조종사들도 있었다. 조종사의 상징과도 같은 비단 머플러는 멋으로 착용했던 것이 아니었다. 고공의 추위로부터 목부분을 보호하면서 고개를 자유롭게 돌리기 위해서는 목부분을 부드러운 비단 머플러로 두르는 것이 최고의 효과를 내었던 것이다. 이후 머플러는 조종사들을 상징하는 소도구가 되어 버렸다.
[미군 최고의 에이스 에디 리켄베커의 사진, 원피스형의 신형 방한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점점 더 높은 고도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견딜수 없는 추위가 조종사들의 새로운 적으로 나타났다. 습도가 높은 구름속을 지나가거나 하면 옷이 흠뻑 젖어 버리거나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는 개방식 구조의 조종석에 앉아있는 조종사들은 고고도의 추위와 이를 더 악화시키는 찬바람, 그리고 습기속에서 뼈까지 사무치는 추위속에서 온몸을 진저리 쳐야 했던 것이다. 결국 옷자락이 긴 가죽제 코트형식의 방한복이나 가죽제 비행모, 고글등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장비들은 군에서 지급되었던 것이었으나 품질이 거의 엉망이어서 조종사들은 자신에게 맞는 것을 스스로 구입하거나 노획한 것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장을 해도 추위가 파고들자, 이속에 두꺼운 옷을 끼어 입어 온몸이 뚱뚱하게 살찐 것 같은 조종사들이 많았고 이는 이당시 조종사들의 사진을 보면 쉽게 알수 있었다. 이후 공중전이 격렬해지면서 이러한 복장이 좁은 조종실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자, 원피스 형식의 통자의 방한복도 사용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요즘의 플라이트 슈트의 원조일 것이다.
1차대전에서는 모르스 부호정도만을 송신할 수 있는 정도 이외에는 무전기가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공중에서 의사 교환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몸짓이나 수신호로 의사를 전달했다. 결국 과거의 전투에서 말을탄 기병들이 사용하던 이러한 고전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다. 편대의 지휘관이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면, 적기가 공격을 해온다는 신호이고, 손을 들고 앞뒤로 흔들면 적이 물러갔다는 뜻이었다. 비행기의 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또한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신호였는데 이는 '적기가 근처에 있으니 와서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좌우로 날개를 흔드는 동작은 적기의 조종사들이 보기에는 매우 우호적으로 보여서 적기가 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 우호적으로 접근했던 비행사들은 곧 떼지어 몰려드는 적기들을 보고 질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면 의사 전달은 거의 불가능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지휘관의 신호를 보거나 또 신호를 할 정신이 없었던 것이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전투를 해야했다. 결국 전투중에 우군기들을 잃어 버려 전투가 끝난후에 혼자 기지로 돌아와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적의 전투기 편대기를 아군기들인줄 알고 따라가다가 적기로 확인이 되면 기겁을 하여 기수를 돌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정찰기들의 경우는 정찰한 내용을 지상부대에 전달하기 위해서 정찰내용을 직접 종이에 적어 통에 담아 아군 부대위에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1차대전의 조종사들은 도전과 모험정신으로 무장한 선구자들이었다. 좌절과 공포, 그리고 실수, 불운으로 사라진 많은 조종사들은 그들의 후배들인 현대의 조종사들이 귀감으로 삼을 여러 가지 교훈과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 물론 많은 세월이 흘러 그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은 잊혀져 가고 있지만, 아직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 이들의 정신은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