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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질문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목적으로 읽어야 하는가?
죽으면 어떻게 되며 천국은 어떻게 오는가?
이런 질문은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목사에게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고민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목회를 할 때, 심지어 가정을 이끌어갈 때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 차원에서 아래 동영상은 나에게 무척 큰 도전이 되었고
흥분이 되는 대답을 주었습니다.
함께 진리를 찾아봅시다...
위 강의는 좀 길지만 대략 아래와 같이 요약됩니다.
이 책을 기록하게 된 동기 중의 하나는 공적인 삶 속에서 종교가 갖는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타종교와의 갈등 구도 속에서도 의미를 갖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신앙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우리는 공공 장소에서 어떻게 신앙적 행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가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스스로 정립해야 하는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나 미디어에서는 기독교에 관한 정당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정당한 대답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질문: 오늘날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좀 더 광범위한 사회적, 문화적 공동체와 소통이 가능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과 행하심을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좋지만 반격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좀 더 완곡한 방법으로 예수님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대답으로부터 시작해 봅시다. 그것은 신의 존재론적 증명을 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신은 우리가 설명하는 그 준거틀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처럼 오늘날은 포스트모던 시대가 아닙니까?
외치는 자의 메아리… 모든 사람이 공히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 목소리는 정의, 영성, 관계, 아름다움입니다.
정의를 모든 인간은 원하지만 그 정의를 이루지는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아이들도 추구하는 것이지만 공적 영역이나 개인의 영역에서 그렇게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혼돈입니다.
둘째는 영성입니다. 세속주의자들은 60~70년대에 영성을 제거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 사람들은 영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영성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이 영성에 대한 갈망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관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관계 속에 살아가지만 그 관계를 온전히 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임을 압니다. 국가나 개인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얼마나 어려워졌는지 날마다 나오는 슬프고 잔인한 소식들이 말합니다.
넷째는 미입니다. 아름다움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것 같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사람이 모짜르트의 피아노 악보를 발견해서 연주하니 멋지지만 완전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합주곡의 피아노 파트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사는 세상은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미완성의 아름다움입니다. 더 큰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움을 잡을 수 없습니다. 곧 시드는 꽃을 십시요. 인간에게는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어떻게 잡아내느냐 하는 것이 큰 수수께끼입니다. 이 수수께끼에 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는 것입니다. 태양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은 어렵습니다.
신에 관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1)이신론의 신입니다. 그들은 신은 이 세상을 지었지만 관계하지는 않습니다. (2)범신론의 신은 모든 것에 신성이 있습니다. 피조 세계가 곧 신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일어나는 악의 문제에 직면할 때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으므로 즉 초월적인 존재가 없으므로 그들의 마지막 선택은 자살입니다. 범신론이 늘어나면 자살률이 늘어나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3)기독교와 유대교가 말하는 신은 다릅니다. 초월과 내재가 동시에 있는 신입니다. 신은 내재하시므로 사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당연히 영성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말씀은 내재하시는 하나님이 개입하는 방법이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나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빛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통해 세상에 전파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네 가지 메아리를 듣습니다. 영성, 관계, 초월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것들을 우리는 유대인들의 법과 성경에서, 성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예언자들이 그리는 세상은 완벽한 아름다움입니다.
그 예언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심입니다. 기독교도 교훈이나 윤리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나 닮아가는 것만이 우리의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수준에 이를 수는 없다. 또한 죽은 뒤에 천국에 가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있는 종교도 아닙니다. 최종 목적지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계 21, 롬 8장을 보십시요. 주의 나라에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셨습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엡1장에서도 이를 말합니다. 천국이 세상의 종국이 아닙니다. 바울이 갈망하며 말하듯이 우리는 죽은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 나라에 참여하십시다.
기독교는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구를 떠나 천국에 가느냐를 시연해 보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지금 그 나라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을 주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마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관한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일까요?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의 약속의 완성이나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행하셨고, 우리를 찾으셨고, 구원하셨으며,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우주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렸고, 그 문은 결코 닫히지 않습니다. 그 문이란 우리가 묶여 있던 감옥의 문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자유입니다. 이제 우리는 열린 문으로 나아가 새로운 세계를 누비게 됩니다. 그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를 따름으로써 이 새로운 세계가 정의와 영성, 관계와 아름다움이 넘치는 곳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자체를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그것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가운데, 우리는 그간 모든 인류의 마음과 정신 속에 메이리 치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
수백만의 사람의 마음 속에서 정의를 부르짖고 영성을 갈망하며 관계를 바라고 아름다움을 찾던 목소리가 이 고독한 최후의 외침 속으로 다 이끌려 들어갔습니다. 유대인의 왕, 이스라엘의 운명을 짊어진 자,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옛 약속의 성취인 나사렛 예수의 죽음은 세상이 지금껏 보아온 것 중에서 가장 어리석고 무의미한 낭비이자 오해이거나, 아니면 세계 역사가 다 그 주위를 도는 지렛대의 받침점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분의 죽음이 후자였으며 지금도 그렇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인간 역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이라는 이해뿐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의 시발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부활절 설교에서 우리는 부활의 의미에 관하여 '죽음 이후의 생명이 있습니다. 또는 천국에 갑니다다, 우리도 새로운 삶을 여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고 주로 듣습니다.
그러나 사복음서 저자들이 말하는 바는, “예수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사셨다. 그로써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고, 우리에게 할 일이 생겼다.” 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절 설교에서 종종 듣는 일종의 도피주의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입니다. 부활은 죽음 후의 삶을 증명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사건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원형이 되는 사건이자 새 세상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신약 성경의 관점에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새로운 일에 관한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과거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 하늘의 천국뿐 아니라 온 땅에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주님의 영광이 가득찰 때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그분의 약속이었다. 따라서 부활과 그 약속의 성취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수동적인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수혜자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 세계의 수혜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 세계의 대리인(agents)이기도 합니다. 그 점을 이해할 때 기독교는 진정으로 성경적이 될 수 있고 가장 큰 역동성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예수를 좇는 이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불어넣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정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또 자유로운 인간에게 주어진 풍요로운 영성을 계발하고 탐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사적인 관계들뿐 아니라, 온 세상과의 관계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변화시키는 아름다움, 하나님의 영광을 엿볼 수 있도록 사람들을 끄는 아름다움의 대리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예수를 통해 우리가 마음속으로부터 듣고 있는 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 목소리를 좇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목소리가 구성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장과 마지막 장에는 그분의 형상대로 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피조물이자 온전히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부차적이고 반만 인간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로부터 잘못 배워서 협소하게 줄어든 삶을 사는 것이 스스로의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금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인 좀더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와 기도의 삶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배는 모든 것의 중심으로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면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세상 속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식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세계에 비추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통해 우리는 그 형상을 반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이유는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비추라고 보여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 이를 이룹니다.
성경에 관하여는….
위대한 인물들의 위대한 이야기로 가득 찬 위대한 책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국한된 것보다 더 높은 이상을 가지며,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 책은 신에 관한 책이며, 탐욕과 은혜에 관한 책이며, 생명과 정욕, 웃음과 고독에 관한 책입니다. 그 책은 탄생과 시작, 배신에 관한 책이며, 형제자매와 하찮은 언쟁과 섹스에 관한 책이며, 권력과 기도, 감옥과 열정에 관한 책입니다. 그 책이 창세깁니다.
성경은 교리를 논하는 것보다 그 자체를 읽는 것이 더 귀합니다. 성경은 그 어떤 고대 문서보다도 놀라운 것입니다. 귀하게 여십다… 성경의 권위라는 말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준 권위가 성경을 통해 매개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거지? 그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를 대속하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새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 적용하시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전하고 건강하며 착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음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대리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는 성경을 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때 실질적으로 구현됩니다.
존 칼뱅: 하나님이 만일 우리의 아버지라면,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와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 가족의 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의 여정을 도와줄만한 사람이 교회에 있으므로 때때로 교회에 나가 도움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소속감은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하고자 하시는 일에 있어 실제로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혼자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고립된 교파로서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교회 통합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대단히 어렵고 고된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 우리가 직면해 온 도전은 바로 하나님이 그 새 창조의 프로젝트를 이미 시작하셨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정의와 영성, 관계와 아름다움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선하신 창조주임을 알려야 합니다. 또한 세상을 향해 세상의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시지 카이사르가 아님을 선언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세상을 향해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세상 가운데 운행하고 계심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진리의 빛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말할 것도 없고 진리에 관한 우리의 어설프고 초등학문 같은 모든 주의와 주장을 재조명하고 재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성령의 권능으로 새 창조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일어나는 데 사용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가슴 깊숙이 내재된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새 창조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류의 삼분의 이가 나머지 삼분의 일에게 빌린 빚을 갚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지구 온난화나 다른 재앙적인 비극이 벌어지는 곳에서 새 창조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민이 되어야 하고, 지금 이순간에는 이 목표를 위한 대리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윤리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을 지키라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하게 행동하여 낭만주의적 실존주의적 철학에 맞춰 사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니 우리가 그 안에서 무엇을 찾든 다 좋은 것이라는 사고는 그릇된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그저 찾은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살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세계의 선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실현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세상을 오염시킨 극단적인 악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예수와 성령, 그리고 새 창조의 탄생을 통해 그 악에 대응할 때 진정한 기독교 윤리가 확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 세상 가운데 깊이 뿌리 박힌 잘못된 생각들에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직관에 완전히 반하는 듯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도 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고뇌와 지혜, 투쟁 그리고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과의 유대가 필요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유대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계속 실행할 때 우리는 그 네 가지의 메아리가 우리 자신이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에 점점 더 진정으로 와 닿는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 세상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정의를 향한 외침에 귀를 막아버려야 한다면 조심하십시요. 여러분이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과 아우르며 존재하는 영성을 알아차리는 데 실패한다면, 영성이란 것이 그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릴 때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조심하십시요.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를 과소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분이 개인적인 차원이든 공동체 차원이든 전 지구적인 차원이든 어떤 관계라도 무성의하게 대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조심하십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일에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 요청을 조롱하고 경멸한다면, 마치 그런 요청은 보기에 그럴듯한 것일뿐 우리와 상관없고, 우리는 그저 현실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야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깨어나십시요. 여기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그저 전체 작품의 피아노 파트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온전한 오중주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단락은 다음과 같이 끝이 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라는 이유로 내면을 성찰한다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립니다.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라며 우리는 쾌락을 추구합니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존재라며 복수를 하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관계를 맺고 살기를 바라면서도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을 고집합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존재라면서 감상에 젖는 데 만족합니다.
그러나 새 창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망가지고 깨지고 불완전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 남겨두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지금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입니다. 새 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령으로서, 청지기로서,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방식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새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앞에 그 세계를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여기까지가 동영상에 대한 요약과 받아 적음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에 제 자신의 소감을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지금, 기대와 흥미를 갖고 읽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톰 라이트와 함께 하는 기독교 여행이라고 번역되었네요...
http://wordspirit.tistory.com/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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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준이높아서이해는부족하지만정의영성관계아름다움에관해많은것을생각하는말
ㅅ
잘 들었군요... 진리를 추구하는 데는 용기도 필요하겠죠?!!!
"부활은 하나님의 새창조가 시작되었다." 핵심 구절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