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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키워드로 쓴 복음 (02) 용서 받음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일 2:12)
용서받음
내가 질문을 받는 주제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용서에 대한 것이다. “제가 정말 용서 받았을까요? 제가 죄를 범하고 회개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제가 믿다가 타락하면 어떻게 되지요?” 용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 모르는 분야(맹점)a blind spot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용서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건 너무 좋은 말이라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겠어요. 공짜로 오는 것은 없잖아요. 뭔가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그 대가를 예수께서 지불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많은 표현으로 나타나지만 용서는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용서를 놓친다면 당신은 은혜를 놓치는 셈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제쳐두는 한 가지 방법은 죄 용서를 선물이 아닌 어떤 것으로 취급하면 된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용서하시기 전에 자신들이 특별한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요한이 한 말 때문이다.
좋은 소식으로 전해지는 나쁜 소식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를 연계함으로써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는 나쁜 소식이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요 율법이다. 그것은 보상quid pro quo이자 보복tit for tat이다. 받으려면 무엇을 바쳐야 한다는 식이다.
왜 은혜의 주께서 율법을 선포하셨을까? 어떤 사람들은 은혜의 선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다가 율법이 정죄하는 일을 할 때 비로소 깨닫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쁜 소식을 들은 후에 비로소 좋은 소식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 일을 온전히 이루셨다. 세상의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신 그 행동으로 주님께서는 주님 앞에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셨다. 관계를 알겠는가? 산상수훈에서 하신 죄 용서에 대한 전제조건을 십자가 위에서 충족시킨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율법의 완성이시다(롬 10:4[1]).
여러분은 아마 예수께서는 여러분이 마음에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 여러분의 죄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그 말씀은 옳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언약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 우리가 용서를 받으려면 용서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갈보리에서 완성된 주님의 역사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분의 관심을 이끌어 용서는 조건적이라는 성경 구절을 들이댄다. 실은 그렇지 않다는 다른 구절들을 여러분이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전체 신학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은 모든 구절을 빠짐없이 읽은 후에 최선의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아플 때 약상자에 있는 모든 눈에 보이는 약을 다 삼키는 행동과 같은 것이다. 성경 전체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이란 기록된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라는 렌즈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읽는 모든 구절들을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통해서 보는 것을 의미한다.[2]
아래 그림을 보면 여러분은 십자가 이전에는 조건적인 용서가,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일관적인 양식으로 선포됨을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 이전에 예수께서는 용서는 하나의 율법으로 지켜져야 될 것으로 선포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 예수께서는 용서가 받아들이면 되는 선물로 말씀하셨다(행 26:18[3]). 십자가는 실로 모든 것을 바꾸었다.
레위기 4~6, 19:20~22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종 곧 아직 속량되거나 해방되지 못한 여인과 동침하여 설정하면 그것은 책망을 받을 일이니라 그러나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는 아니하리니 그 여인이 해방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라 그 남자는 그 속건제물 곧 속건제 숫양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고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범한 죄를 위하여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여호와 앞에 속죄할 것이요 그리하면 그가 범한 죄를 사함 받으리라
민수기 15:22~24 너희가 그릇 범죄하여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 모든 명령을 지키지 못하되 곧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여호와께서 명령한 날 이후부터 너희 대대에 지키지 못하여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신명기 29:19~20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마 6:14~15,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막 11:25~26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눅 24:46~47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행 5:31, 13:38, 26:18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롬 4: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고후 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 2:13, 3: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히 8:12, 9:26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새 언약의 명사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던 날, 예수께서는 즉시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전하셨던 율법에 근거한 설교와는 다른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하셨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조건적인 용서를 전하셨다. 즉,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용서하라.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여기서 당신의 성경에서 위 본문을 찾아 확인해 보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거기에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repentance for forgiveness라고 되어 있는가 아니면, 죄 사함과 회개repentance and forgiveness라고 되어 있는가? 그 차이는 막대하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는 세례 요한이 전한 것이다. 죄에서 돌이키는 조건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동사와 동사가 사용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여기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회개와 죄 용서에 관하여 동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명사를 사용하셨다. [4]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부터는, 용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루신 일이다”는 뜻이다.
이는 킹제임스성경으로 읽으면 더 명확해진다:
회개forgiveness와 죄 사함remission of sins이 그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리라.(눅 24:47)
용서가 이루어진 것을 죄 사함remission이라고 부른다. 언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는가? 십자가 위에서. 최후의 만찬 동안에, 하나님의 어린양께는 자신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예수께서 어디서 피를 흘리셨는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어디에서 용서되었는가? 십자가 위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
새 언약에서 용서는 명사며 동사가 아니다. 선물이지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셨다.) 이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왜냐면 세상이 그런 식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죄를 범했을 때, 그 사람과 당신의 관계에는 긴장관계에 돌입한다. 여러분과 그의 둘 사이에는 무언가가 끼이게 된다. 화목하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끼인 것을 다룰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것을 해결하고 나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만약 형제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잘못을 빌면 용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셨다(눅 17:4).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알고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나 나와는 다른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주님 사이에 있는 문제를 우리가 먼저 행하기까지 기다린 후에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과 당신 사이에 있는 그 문제, 곧 당신의 죄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당신이 죄를 짓는 것을 기다리셨다가 보고 난 후에 죄를 용서하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용서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죄를 고백하기 전에 당신을 용서하셨으며 당신이 회개하기 전에 그리고 심지어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당신을 용서하셨다.
용서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발송하다send forth 또는 멀리 보낸다send away는 말이다. 여러분의 죄는 단지 간과되거나 덮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으로부터 제거되어 서가 동에서 먼 것처럼 옮겨졌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죄를 찾으려고 할지라도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멀리 가버렸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는 멀리 보내졌다. 이것은 바로 용서는 이미 처리된 일이지, 노력하여 얻을 은총이 아니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선포하신 이유다. 제자들은 틀림없이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놀랐으리라. 무엇보다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 계신 것에 놀랐으리라. 그리고 전에 산상수훈을 전하실 때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의 선포에 놀랐으리라.
구약 언약이 성취되고 새 언약이 이제 막 실현되는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신속하게 일깨우셔야 했다.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성경을 이해하도록 가르치셨다(눅 24:44~45).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의 말씀들이 어떻게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는지를 가르치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제자들은 구약의 언약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동물의 희생제사와 율법 준수에 대해서 그들이 깨달은 바는, 그것으로는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주는 것으로서만 가치가 있었다. 그들은 또한 이제 막 시작된 은혜의 시대를 예고해 준 이들이 바로 선지자들 즉 이사야나 예레미야 또는 급진적이고 은혜 중심적인 시편의 작가들인 다윗, 아삽, 고라의 자손들이었음을 알게 된다.[5]
십자가에서 율법은 성취되었으며 은혜는 계시되었고 동사는 명사가 되었다. 용서는 더 이상 우리가 이것 저것을 해야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용서는 어린 양의 피로 지불되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래에 나오는 바와 같이 무조건적인 죄 용서의 새로운 메시지를 들은 최초의 사람들이 바로 산헤드린의 사람들이었으며, 바로 그들이 죄 용서를 위해 지불된 그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정죄한 사람들이었음이 놀라운 일치가 아닌가: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
달리 말하면 회개함은 선물이다! 용서도 선물이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산헤드린의 장로들은 분노했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부활하신 구주를 모실만한 자리가 그들의 신학에는 없었다. 그들의 종교는 하나님을 위해 그들이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기초가 된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신 일에 기초를 둔 것은 아니었다.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는 신성모독적인 것이었다. 은혜는 신성모독과 같은 말 같았다.[6]
장로들은 사도들에게 매질을 하고 더 이상 예수를 전하지 못하게 명령했다. 물론 사도들은 이를 무시하였고 수년 후에 바울이 이들의 무리 가운데 합류하였다. 바울은 무조건적인 죄 용서의 새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7]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행 13:38)
어떤 올무도, 어떤 자격요건도, 너희 독사의 자식들아 죄에서 돌아서라 라는 외침도 없다. 단지 좋은 소식이 순수하고 바르게 전파되었다.
사도 요한이 전한 죄 용서에 대한 오해
요한일서 1:9을 보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은 조건적인 죄 용서처럼 들린다. 마치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 받으려면 먼저 우리의 죄를 돌아보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말씀도 십자가 이후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마치 구약 성경의 일부가 신약성경에 잘못 붙여진 것처럼 보인다. 요한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죄 용서는 이미 완성된 사실이라고 선포하실 때 그는 졸고 있었던가? 우리는 요한의 이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보통 요한을 읽을 때 은혜라고 하는 값없이 주는 선물에 작은 가격표를 붙이는 식으로 이해한다. 즉, 만약 여러분이 이 작은 일을 하면(너희 죄를 인정하면), 선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위대한 일을 하실 것이다 라고 이해하는 식이다. 그럴듯한 말 같지만 사실이 아니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 용서를 위해 지불하신 가격으로 그것을 드린다는 것은 실은 불쾌한 일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당신에게 내가 어떤 저택을 어떤 대가도 없이 준다 하자. 그러자 당신이 말하기를, “제가 그 대가로 배꼽의 떼 부스러기를 드리겠습니다. 이제 공평하죠?” 그러면 내가 얼마나 모욕을 받은 셈이 되는가? 그런데 당신이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폴 엘리스에게 너의 배꼽 떼를 주면 그는 저택을 줄 거야” 라고 한다면 나는 당혹감에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문 밖에서 배꼽 떼를 한 움큼씩 들고 오는 사람들을 막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도록 어떤 값을 지불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불쾌한 것인가? 그럼에도 많은 신실한 신자들은 그들의 배꼽을 조사하면서 아직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살핀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죄를 수집하여 은혜와 바꾸시는 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천상에서 들려오는 소란한 소리가 들리는가? 그 소리는 수천만 수백만의 천사들이 낯뜨거워 할 말을 잃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소리다!
창조주께서는 여러분이 공로나 돈으로 조작할 수 있는 꼭두각시와 같은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으로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시며, 높은 보좌에 앉으신 분이시다. 그의 지혜와 자비로 주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단번에 십자가에서 처리하셨다.
요한이 말하기를, 주님께서는 미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였다.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이상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다시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죄를 두 번 정죄하지 않으시며,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심판하셨다. 그 결과, 주님께서는 더 이상 인간의 죄를 헤아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요한이 은혜를 혼동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계속하여 설명하기를 우리의 죄가 그의 이름 때문에 용서되었다고 한다. 용서는 우리의 노력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하여 용서를 이미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것처럼 말하는가? 왜 그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듯 보이는가? 왜냐하면 그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요한은 신약성경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 구절을 바꾸어 말한다. 다음의 두 구절을 나란히 보고 서로 닮았는지 보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편 32:5)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요한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백해야 하는 구약의 율법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구약의 친숙한 언어를 사용하여 1세기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어떤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바울을 닮았다. 바울은 로마서 4:7~8에서 시편 32편을 인용하여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복을 받는 것을 설명한다. 요한은 시편 32편을 인용하여 우리가 믿음이 아니고서는 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백해야 한다는 요한의 말한 의미다. 헬라어로 고백한다는 말은 구약의 언약에서 하던 습관대로 우리의 죄를 되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의하다 또는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을 말하다(homologeo)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여부에 상관없이 여러분의 죄를 처리하셨다. 다만 만약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주님의 용서는 여러분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는 셈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매주마다 여러분의 죄인됨을 설교로 듣고 여러분의 죄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쌓여 간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더욱 믿기 어려울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죄, 비통함, 용서 받지 못함들을 점검하라는 말을 계속해서 듣는다면 여러분은 예수이름으로 여러분이 완전히 용서 되었음을 믿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여러분은 점차 공로 중심의 설교 또는 배꼽을 살피는 설교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받으려면 용서하라는 말들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용서는 이미 계산이 끝난 일이다. 죄에 대한 어떤 희생제사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보면 죄는 실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왜 여러분은 이미 용서 받았는데 죄 용서의 선물을 받아야 할까?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는데 그 은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것이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 선물이 여러분을 정죄와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죄의 속박으로부터 여러분을 해방시킬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도움이 되리라: 가령 내가 여러분에게 몹시 나쁘게 행했다고 하자. 아마 내가 여러분의 고양이를 차로 치었다고 하거나 여러분에 대한 나쁜 거짓말을 퍼트리고 다닌다고 하자.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선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나를 용서했다고 하자. 놀라운 은혜다. 나는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여러분의 용서라는 행위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자비로운 성품에 기인한 것이다. 이제 만약 제가 여러분을 향하여 계속 나쁜 일을 한다면, 여러분이 나를 용서해 준 그 용서는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여러분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용서했기 때문에 위법은 없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나는 여전히 늘 그랬던 것처럼 고양이를 죽이는 사람이요 거짓 소문을 퍼트리는 죄인이다.
아니면 내가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나쁘게 생각하지만 나 자신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자. 내가 그런 짓을 하다니! 해결책은 무엇인가? 여러분에게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여러분은 이미 용서했기 때문이다. 상 위에 이미 여러분이 차려놓은 은혜를 받으면 된다. 여러분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용서되었지만, 나는 여러분의 용서를 원하지 않거나 이미 용서 받은 것을 모르고 있을 수 있다. 여러분의 용서는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아시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져야 한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한 분 구세주가 부족하게 된다. 만약 세상의 죄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처리되었음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여기서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요한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 여러분은 죄 용서 될 것이라는 것인데, 이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의미가 잘 통한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일을 믿는 순간 그의 용서는 여러분에게 실제가 된다. 하지만 그 용서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았다(엡 1:7).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죄 용서를 못 받는다는 것은 여러분이 태평양에 있으면서 젖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우리가 실수한 것
용서에 관하여 두 가지의 잘못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라고 부르며 은혜를 죽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죄인들에게 그들이 구원 받았으므로 그들도 죄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구원이라고 부르며 믿음을 죽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한쪽에서 뛰쳐나와 다른 쪽으로 돌진한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용서는 구원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셨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은혜의 나타남이며 은혜는 주어졌다. 은혜가 상 위에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지는 않는다. 구원은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8]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만약 이미 끝난 일로서 용서를 설교한다면 잃어진 사람들에게 대한 무감각이나 무관심을 유발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를 설교하지 않는다면 더 큰 위험에 빠진다.
용서나 죄 사함의 반대는 죄의 존속이다(요 20:23). 비록 세상의 죄가 십자가에서 치워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상처와 용서하지 않음으로 죄의 굴레에 매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용서를 불어버린 곳에 진을 쳤고 그들의 마음의 앨범에는 과거의 상처로 가득 차 있다. 죄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위로를 얻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지만, 은혜 없는 종교는 단지 악화시킬 따름이다.
오늘 아침 나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은 친구를 가진 젊은이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죄를 정죄하는 종교의 정죄를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비극이지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어떤 규칙의 종교도 궁극적으로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죽음을 줄 것이라고 보여준다.[9] 은혜 없는 종교는 사람들을 죽인다.
죄의 지배력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필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집중하고 그의 사도들의 예를 좇아 죄 용서의 값없는 선물을 선포해야 할 이유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삶과 죽음의 문제다. 그들은 용서의 결핍으로 죽어간다. 복음은 용서가 강력하다는 사실이다. 용서는 고치고 회복시키고 자유케하고 화목을 일구어낸다. 용서는 생명을 살린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강단 뒤에서 정죄하는 또 하나의 허풍쟁이가 아니다. 사람들이 절실하게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은 복음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을 들어야 하며 그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책임이다. 참으로, 이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이의 특권이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은 사람들에게 화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회개의 꽃다발과 고백의 쵸코렛 상자를 들고 와 화난 자아를 누그러뜨려주기를 기다리는 분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쁘고 즐거운 소식을 선포하는 신나는 일이다. 그 기쁜 소식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얼굴은 그들을 향하시며 주님은 그들에게 해로운 어떤 것도 갖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요한일서 1장 9절에는 두 개의 거치는 돌이 있다. 첫째는 고백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오해한 데서 온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요한이 남용한 우리라는 말이다. 요한은 우리는 고백할 필요가 있고 우리는 모든 불의에서 깨끗해질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가? 우리를 가리키는가? 그들인가? 우리 모두인가? 누군가?
요한일서 1장 9절을 문맥 가운데서 읽으면 요한이 아직 진리를 그 안에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어둠에 거하는 자들이요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의미에 있어서 진리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요, 빛 가운데로 행하는 사람이며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은 자들로 요한이 지칭하고 있으므로 우리라는 이 말은 불신자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믿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이중으로 알 수 있다. 먼저 그는 그의 편지를 쓰는 동기를 너희가 우리와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희들은 우리가 아니다. 너희들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며,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이다.[10]
그러나 여기에는 특정한 불신자들에게 문제가 있다: 그들은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기 의의 가장자리에 있는 자들로서 구원자를 필요로 할 정도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한이 이 사람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가 이야기 하나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술주정꾼과 죄인들을 향한 거친 사랑 tough love
브레난 매닝은 알코올중독 치유센터에 있는 어떤 새로운 환자 하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환자는 맥스였는데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건강하고 존경 받을 시민으로 보였다. 자신의 음주습관과 관련하여 상담가로부터 질문을 받자 맥스는 자신의 행동이 알코올과 관련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상담가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맥스가 거짓말쟁이라고 다그쳤고 또한 돼지처럼 술을 폭음한다고 지적했다. 맥스는 미소를 보이며 부인했다. 그는 자신의 음주가 적당하다고 여겼다. 그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상담가는 전화를 집어 맥스의 바텐더에게 물었다. 그 결과 맥스는 그의 주량을 넘어 상당히 많은 술을 마시는 것으로 드러났다. 맥스는 분을 발했다. 그는 바텐더를 저주하며 다시 평정을 찾을 때까지 양탄자에 침을 뱉었다. 그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맥스는 주장하면서 예수님도 분을 발하신 적이 있지 않냐고 했다.
상담가는 계속하여 당신이 당신의 아이들에게도 잘 대해주지 않았지 않느냐고 채근했다. 맥스는 자신의 아홉 살 난 딸과 일어난 일이 기억났지만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상담가는 맥스의 아내에게 전화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맥스는 자신의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주기 위해 함께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을 마시러 선술집에 들렀다. 그는 딸을 차에 둔 채 문을 잠그고 곧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날은 추운 날이라 자동차 시동은 끄지 않았다. 자정쯤 되어 맥스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자동차 시동은 이미 꺼졌고 자동차 창문은 얼어붙은 채로 닫혀 있었다. 그의 딸은 끔찍한 동상에 걸려 손가락 두 개를 잘라야 했다. 의사들은 그 아이가 평생을 귀머거리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추악한 죄에 직면하자 맥스의 가면은 깨어지고 바닥에 뒹굴면서 흐느꼈다. 상담가는 맥스의 옆구리를 발로 차면서 그를 넘어뜨렸다. 너는 두말할 것도 없는 인간쓰레기야! 일어나서 당장 여기서 나가! 나는 거짓말쟁이를 위해 치유센터를 운영하지는 않아! 라고 그 상담가는 소리쳤다.[11]
매닝이 해 준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거짓말하는 알코올 중독자를 다룰 때는 우리가 거친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포로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포로 상태를 인정해야 한다. 그가 도움을 받기 전에 맥스는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동일한 원리가 죄인에게도 적용된다. 만약 여러분이 죄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모를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용서에 무관심할 것이고, 은혜를 죄에 대한 면허증으로 여길 것이다. 교회 안에서 고상한 죄인들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은 맥스처럼 들어와서 경건을 가장한 가면을 쓰고 선행의 쇼를 한다. 그들은 구역과 같은 소그룹을 이끌면서 봉사하는 일에는 일벌처럼 나선다. 그들은 좋은 이야기를 하여 선한 인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가 가득하다.
상담가 요한은 외모에 미혹되지 않았다. 그의 편지가 널리 읽힐 것을 알았기에 그는 세상의 맥스와 같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이야기 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6, 8)
달리 말하면, 너희 죄인들아 너희는 뛰어난 자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겠지만, 그래서 구원의 필요가 있는 죄인임을 믿지 않겠지만 너희들은 말할 것도 없는 인간 쓰레기들이다. 일어나 당장 여기서 나가라. 나는 거짓말쟁이들을 위해 교회를 운영하지 않는다! 하는 식이다.[12]
다시 반복하여 말하자면,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어조는 다음 장에서 완전히 변하여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부른다. 이 본문에서 요한은 은혜 없고 십자가 없는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극우파들wingnuts 같은 이들을 대하여 쓰는 것이다. 이런 사기꾼과 협잡꾼들에게 요한이 전할 메시지는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부르지 말고 그분께 맞추어 당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의로우시니 당신이 오늘 범한 죄뿐 아니라 어제 지은 죄와 내일 지을 죄까지도 모두 용서해 주실 것이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불의에서 당신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요한이 어떻게 이것을 그렇게 명확하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일을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런 어조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정죄로부터의 치유
아마 여러분은 죄와 씨름하고 있을 것이며 죄책의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여러분은 외투와 같은 수치를 옷 입고 있는 것 아닐까? 여러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과거 2,000년 전에 한 언덕에 서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온 세상의 죄에 대한 화목제물이 되셨다(요일 2:2[13]). 화목제물 propitiation은 긴 단어지만 간단한 의미로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나와 여러분의 죄로부터 돌리셨다는 말이다.
죄는 마치 피뢰침과 같다. 그것은 진노를 빨아들인다. 구약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심판의 번개는 때때로 어떤 개인이나 민족의 죄가 무시하기에는 너무 커졌을 때 그들을 증발시켜버렸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강력한 심판의 진노 가운데서 그 죄를 없애버리셨다. 예수께서 최종적인 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는 온전한 용서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여러분의 죄는 없어졌다. 그 죄들은 완전히 지워졌고 도말(塗抹)되었고 취소되었고 사라졌다. 그 죄들은 번개에 모두 타버렸다. 이는 여러분에게 기쁨이 아닌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7~8)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정죄에 찌들어 있으며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의 피뢰침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예수님의 희생이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해결이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분노하시고 계신 분으로 믿도록 인도되었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계수하고 계시며 진노를 축적하고 계시다고 믿는다. 그들은 가짜 상표를 샀으며 그 상표는 갈보리에서 나온 진짜 죄 용서를 주는 것이 아닌 시내산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이라면 그의 용서도 무조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그의 용서는 회개와 고백의 행동에 비례해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따라 우리에게 넘친다(엡 1:7[14]). 여러분은 이것이 사실임을 알기 위해서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이 땅에서의 사역을 하는 동안에 예수께서는 두루 다니시며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용서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거기에 자신을 매단 사람들을 용서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참으로 이 모든 일을 하심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죄 용서가 무엇임을 그림으로 나타내셨다. 그것은 사랑과 같은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용서를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선물이다. 여러분은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자신을 학대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단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
“그러나 저는 계속 죄를 짓는다면 용서를 잃게 되지 않을까요? 오늘 아침에 지은 죄는 어떻게 됩니까?” 당신의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이 죄도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되었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 곁에 검은 글씨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계산하는 사업을 하는 분이 아니시다.[15] 점수를 기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 하나님의 성품은 아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아침에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는다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무슨 죄? 나는 그런 기록 같은 거 없다. 그것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렴.”
여러분이 죄책과 정죄감과 씨름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시라. 그리고 여러분을 위한 주님의 용서를 선포하시라.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임을 고백하라: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 받았어요. 나는 죄에서 구원 받았죠 나는 내가 누군지 알아요. 내 모든 죄는 치워졌어요. 주님을 찬양합니다![16]
그리고 나서 그런 죄책과 정죄감을 가져오는 생각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시고 영원한 용서를 사 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 앞에 그런 생각들을 복종시켜라.
죄 용서의 복음
예수님의 말씀과 요한의 말씀은 상황 가운데서 나온 것으로, 본말이 전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혼동과 불확실의 씨를 뿌리는 데 사용되었다. 거저 주시는 선물을 얻으려는 무익한 노력을 하는 가운데, 육신의 능력으로 우리는 서로의 죄를 다루느라고 허송세월 했다. 은혜의 좋은 소식을 들고 고속도로나 버스길로 나가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고 우리의 배꼽을 살피느라 외진 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놀랍도록 성공적인 방해작전이었다.
죄 용서를 추구하는 것은 공기를 구매하려는 것과 같다. 공기는 공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모두를 위해 공기를 언제까지나 풍성하게 주셨다. 우리는 단지 입을 열어 숨을 들이마시면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와 같은 것이다. 용서는 추구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영혼을 찾고 허물을 찾아내는 일을 하라고 부르는 초대가 아니다. 복음은 여러분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어린 양의 피로 용서되었다고 하는 강력한 선언이다.
[2] 이것은 특히 구약성경을 읽을 때 필요한 태도다. 구약을 Hebrew Bible이라고 하지 않고 Christian Bibl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유대인들과 같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읽을 때 유대교적 율법주의적 관점으로 읽는다. 또한 문자적 접근을 해서 스스로 올무에 걸리는 일이 많다. [역자 주]
[4]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여기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세례를 받으라고 한다. 베드로는 동사를 사용하여 회개를 촉구한다. 죄 사함을 얻으려면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한다. 엘리스의 강조점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주님이 행하신 일에 있다.
[5]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오래 전에, 두 사람의 위대한 선지자인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의 죄를 지워버리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실 때가 올 것을 바라보았다(사 43:25, 44:22, 렘 31:33~34 참조). 히브리서 8장~10장에서(특히 8:10~12, 10:16~17에서) 이 예언들이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급진적인 은혜 중심의 시편들은 시23, 36, 85, 103, 117, 121, 144편을 보라.
[6]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는 신성모독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알려주는 성령의 증거를 믿기를 거부하는 자기 의에 빠진 자들이 가장 신성모독적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하는 사실이 얼마나 모순된 생각인가(막 3:29).
[7]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행 26:20)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이렇게 회개하라고 선포했음을 고백한다. 예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거슬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한 것이지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죄 용서를 받는다고 한 것은 아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엘리스가 여기서 계속해서 무조건적이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해서 우리의 어떤 공로로 죄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든지, 어떤 제물을 바치거나, 어떤 고행을 해서 죄 용서가 얻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돌아와 선물을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물은 예수께서 주시며 이름은 죄 용서 곧 구원이다.[역자 주]
[8]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것이나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눅 13:23~24).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선별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선택적이기 때문이다.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모든 사람이 은혜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9] 바울은 율법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이라고 언급했다(고후 3:7). 그러나 주목할 점은 율법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죽인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들어오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율법은 늘 거기 있던 죄를 활성화시킨다.
[10] 요한일서 1장에서 요한은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즉, 우리는 죄에서 정결하게 되어야 하며,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한다 등등. 그래서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여기서 사용되는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것이 그런 경우라면, 요한의 신학은 다른 서신서 기자들과 조화되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과 교제를 이미 하고 있는 사람(고전 1:9)은 그 교제 속으로 초대될 필요가 없다(요일 1:3). 그 메시지를 이미 들어 믿은 사람들도(롬 10:17) 요한이 들은 메시지를 들을 필요가 없다(요일 1:5).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들었고 빛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요 8:12, 요이 1:4). 그러나 진리 안에서 살지 않고 어둠 가운데서 행하는 자들이라고 요한이 언급한 사람들은 아니다(요일 1:6). 요한의 신학에 문제가 없으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장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죄에서 깨끗함을 입을 필요가 있다(요일 1:9)고 그가 기록한 것을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일치가 된 사람들이다(롬 10:9~13). 그러나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요한이 언급한 사람들은 아니다(요일 1:10).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지만(살전 2:13) 그들 안에는 거하지 않는다(요일1:10). 고백 신학을 한 작은 단어 위에 세우지 말라. 요한이 “우리”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목회적 감각으로서 아직 구원 받지 않은 그의 청중들과 동일시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고,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 나아와야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벌써 나아왔다. 요한은 온 세상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다. 1장에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직접적으로 향해 기록했고(“너희는 그와 사귐을 가질 필요가 있다”), 2장은 예수님을 아는 자들을 대상으로 기록했다(“내 사랑하는 자들아…”). 때때로 장별로 나누어 읽어야 더 이해가 잘 되는 때가 있다.
[11] Brennan Manning, The Ragamuffin Gospel, Multnomah, 1990/2000, pp.123-129. 이것은 매닝의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편 중에 하나다.
[12] 너무 강하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러나 라오디게아의 가면을 쓴 맥스들을 다루실 때 예수께서는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셨다(계 3:16
[13]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15] 롬 4:8, 고후 5:18~19를 참조하라.
[16] 고전적인 이 청소년 찬양은 에베소서 1:7에 기초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306fFvtHdws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열 개의 키워드로 쓴 복음(02) 용서 받음(B4).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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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타락한 인간 본성을 가진 자를 타락한 본성을 가진 자의 교묘한 화술로 주님의 은혜의 선물인 용서를 은혜로, 복음으로 들리지 못하게 방해자 였음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