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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1974년, 화천공사)
음악: 이장희, 강근식
감독: 이장호
주연: 안인숙, 신성일
지금은 사라져 버린 1970년대 서울의 옛 풍경들을 본다. 잿빛 하늘, 낡은 육교, 사람들로 꽉 찬 시내버스, 거리에 서 있는 인간 군상,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그네를 타는 아빠와 딸, 갓 지어진 5층짜리 구 반포 주공 아파트. 그로부터 30년 넘은 시간이 흐른 지금 많은 것들이 바뀌고 사라져 버렸다. 옛날 서울을 추억하면서 <별들의 고향>을 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경아(안인숙)라는 젊은 여인, 비극적인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별들의 고향』은 최인호가 20대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서울고등학교 동기 동창이기도 한 이장호는 최인호를 찾아가 이 소설은 무조건 내가 영화화한다고 강짜를 부렸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해서 이장호는 감독으로 데뷔를 하게 된다. 1970년대 한국의 젊은 감독들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 중 하나였다
이장호와 최인호. 친구이기도 한 두 사람은 <별들의 고향>으로 인해
당대 최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별들의 고향>은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다. 경아라는 젊은 여주인공의 인생 유전이 줄거리를 이룬다. 사랑을 찾지만, 사랑했다고 믿었지만, 모든 남자들이 다 그녀에게서 떠나간다. 문호(신성일)만이 그녀가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봐 줄 뿐이다. 경아라는 한 평범한 여성이 남자로 인해 호스티스로 전락하고, 결국은 자살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 죽음은 한 여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냉담한 시선이 빚어낸 결과에 다름없다. 영화에는 여성에 대한 성적 불평등이라는 통념과 이데올로기가 담겨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아직 여성은 차별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문호(신성일)가 병원에서 나와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이장희의 목소리로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흐른다. 거리 풍경과 함께 슬픈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아의 존재를 경쾌한 포크 음악으로 연주한다. “한 소녀가 울고 있네. 가냘픈 어깨가 들먹이네, 싸늘한 달빛이 비춰주네. 긴 머리가 달빛에 흔들리네. 한 소녀가 울고 있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네.” 영화는 이렇게 가사와는 반대의 경쾌한 멜로디로 경아의 비극을 노래한다.
<별들의 고향>(1974)의 오리지널 포스터
테이블에 앉아 있는 문호에게 웨이터가 다가와 술을 따라 준다. 배경음악으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연주된다. 카메라가 혼자 바에 앉아 있는 경아를 비춘다. 문호는 그녀의 모습을 스케치해서 건네준다. 두 사람은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서 다시 바로 온다. 또다시 「나 그대에게」가 흐른다. 이 노래는 경아를 상징하는 노래이다.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을 남김없이 주는 여인, 그리고 결국 빈손으로 혼자가 되고 마는 여인. 색소폰의 구슬픈 음률이 그녀의 감정을 슬프게 표현한다. 경아는 첫 남자인 영석(하용수)을 떠올린다. 경아가 사무실에서 떨어뜨린 펜을 영석이 주워 건네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된다. 두 사람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카지노에 가서 잭팟을 터뜨리고, 유원지에 가서 키스를 나눈다. 영석은 같이 잘 것을 요구한다. 경아는 거부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여관으로 간다. 영원히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영석은 경아를 떠나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린다. 행복했던 시절, 경아가 영석과 함께 밴드가 연주하는 클럽에 갔을 때 누군가가 노래를 부른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그렇게 이 노래는 영화 전반에 걸쳐 경아의 테마처럼 흐른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경아는「나는 19살이에요」를 휘파람으로 분다. 그녀는 문호에게 “휘파람도 못 부는 아저씨가 있었어요.”라고 말하면서 만준(윤일봉)을 회상한다. 별장 같은 시골 대저택에 딸과 함께 살던 남자. 경아는 죽은 전처에 대해 아직까지도 집착하며 살고 있는 그와 결혼한다. 그의 의처증 때문에 부인이 자살했고, 부인과 많이 닮은 경아와 결혼한 것이다. 경아는 임신했다고 좋아하며 산부인과로 찾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 임신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만준은 의사를 통해서 경아가 낙태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된다. 만준은 통념상 그녀의 낙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만준도 경아의 곁을 떠나가 버린다. 짧은 결혼 생활에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 하나의 깊은 상처만 남았을 뿐이다. 이때 다시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흐른다. <별들의 고향>은 경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음악은 경아의 상황과 감정들을 표현해 준다. 여러 관점에서 순수한 한 여인에 대해 끊임없이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경아는 동혁(백일섭)으로부터 도망쳐 문호의 아파트로 들어온다. 경아는 문호에게서 위안을 얻지만 그녀의 삶은 점점 무너져 간다. 동혁은 경아의 몸에 담배로 지져 ‘혁’이라는 글자를 새긴다. 그는 경아를 사람이 아니라 소유한 물건처럼 대한다. 경아는 문호에게 “난 남자가 없으면 잠시도 살지 못해요.”라고 고백한다. 사랑을 두 번이나 잃은 그녀의 삶은 피폐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술에 빠져 든다. 경아는 회상한다. “한때 모든 사람들은 저를 통해 위안을 받았죠. 그렇지만 하나 둘 떠나가요. 결국은 우리가 혼자뿐이라는 걸, 난 알아요.” 그리고 립스틱으로 거울에 쓴다. ‘아저씨, 안녕!’이라고.
동혁이 배를 타고 멀리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문호는 경아를 찾아간다. 경아는 이제 25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얼굴이 많이 상하고 말았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한 해의 마지막 밤이다. 다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흐른다. 문호는 경아가 끓여 주겠다는 라면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피곤하다며 경아의 방에 눕는다. 경아와 문호의 대화가 이어진다. 경아는 말한다.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 주세요. 여자란 참 이상해요. 남자에 의해 잘잘못이 가려져요. 한땐 나도 결혼을 하고 행복하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어요. (…) 아름다운 꿈이에요.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 모든 사람들이 차라리 사랑스러워요. (…) 아저씨만 여기 계시는군요. (…)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뜨면 흔적도 없이 이별을 하곤 해요. 날이 밝으면 아저씨도 떠나가겠죠.” 경아는 자기가 만났던 남자들에게 자신의 순정을 주었지만, 그녀만 이렇게 홀로 버려진 것이다.
문호는 떠나고, 경아는 혼자 왕대포집으로 들어간다. 낯선 남자를 만난다. 「나는 19살이에요」가 윤시내의 목소리로 스크린에 가득 퍼진다. 경아는 그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하고, 또 다시 술집으로 돌아와 소주를 마신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선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왠지 겁이 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정말 몰라요. 들어보긴 했어요.
가슴이 떨려오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 걸요.
화장도 할 줄 몰라요. 사랑이란 처음이에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떨어져 얘기해요. 얼굴이 뜨거워지네요.
노래가 끝나면 끝없는 설원이 펼쳐진다. 경아는 혼자 눈밭 위를 걷는다. 수면제를 먹고, 물 대신 눈을 떠서 먹는다. 사랑의 테마가 흐른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환청으로 듣지만 대지에는 새하얀 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문호와의 행복했던 마지막 기억들을 떠올린다. “제 입술은 조그마한 술잔이에요.” “그래, 정말 예쁜 술잔이로군.” 하늘에서 종이학이 떨어진다. 경아는 눈 위에 쓰러져 완전히 잠이 든다.
<별들의 고향>은 실질적인 국내 최초의 OST 앨범이다.
영화음악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한 영화에서의 음악만 모아서 독립적인 음반으로 출시된 것은 처음이었다. 영화를 위한 영화음악이란 개념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녹음실에서 아무 음악이나 표절해서 사용하던 게 현실이었다.
최근에 만난 이장호 감독은 “당시 영화들은 음악이 다 망친다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말했다. 반면 <별들의 고향>은 당대의 최고 뮤지션 두 사람을 다 동원할 수 있었다. 이장희도 그렇지만, 당시 ‘동방의 빛’ 리더였던 강근식은 포크록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었다.
작곡을 한 이장희는 최인호 작가와 친분이 있었고, 편곡을 담당하고 기타를 연주한 강근식의 누나와는 개인적으로 알던 사이였으니, 당시의 문화계도 무척이나 좁았던 셈이다. 지금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음악 스튜디오가 있어서 녹음을 다시 하면서 보강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이전까지 한국 영화 제작 과정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영화를 찍는 동안 이장희는 계속해서 작곡한 노래들을 들려주었고, 1970년대 신세대들의 공동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별들의 고향>앨범에서도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윤시내가 부른 「나는 19살이에요」는 빅히트를 했고, 이로 인해 OST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장호 감독의 차기작 <어제 내린 비>,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김호선 감독의 <겨울 여자> 등 OST 앨범이 연속해서 히트하는 결과를 낳았다.
1970년대는 새로운 가치관과 청년 문화가 형성되던 시기다.
이 시기는 청바지와 장발, 통기타와 포크 음악으로 상징된다. 이장희, 조동진, 양희은, 송창식, 윤형주 같은 가수들이 새롭게 등장해서 직접 곡을 쓰고 노래를 불렀다. 젊은 층들은 포크 음악을 자신들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현실은 암울했다. 자유는 구속되어 있었고, 많은 것들은 다가가지 못하는 금단의 영역 속에 있었다. 젊은 층들은 자신들을 표현할 방법을 찾았다. 현실에서 그들의 이상은 꺾였고,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옛것과 새것 사이에서 가치관은 혼란스러웠다.
세대 간의 충돌과 경제 발전, 급격한 사회적 변화 속에 경아라는 여인이 존재한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그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살이었다. 그것은 정신적인 순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별들의 고향>은 그런 시대적 상황을 통속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영화와 포크 음악은 내용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울렸다. 둘 다 같은 젊음을 노래하고 있었다.
[Tip 1] 2010년 3월 10일 때늦은 눈이 아름답게 쌓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이장호 감독을 오랜만에 만났다. 1945년생 ‘해방둥이’지만 여전히 청년 같다. 호탕하고 시원스러운 성격, 개인적으로 이장호 감독과 오랫동안 알아 왔다는 것은 우리 영화의 역사를 만나 왔다는 기분을 들게 한다.
[Tip 2] <별들의 고향>은 원래 <별들의 무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 연재소설이 무덤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면 썰렁하지 않겠느냐는 편집 회의 결과 <별들의 고향>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Tip 3] <별들의 고향> OST 앨범은 16만 장이나 팔려 나가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다시 OST 음반 판매 기록을 갈아 치운 영화도 이장호 감독의 <외인구단>이었다. 1986년 < 외인구단>은 영화의 성공과 함께 정수라의 「난 너에게」를 대표곡으로 2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다.
[Tip 4] <별들의 고향>은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105일 동안 상영되면서 46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전에 처음 30만 명을 넘긴 영화가 <미워도 다시 한 번>이었다. 이장호 감독은 당시의 기분을 이렇게 회고한다. “10만이 넘으니까, ‘야, 인호가 소설 참 잘 썼구나.’ 했지. 20만이 되어갈 때는 ‘이장희 음악도 효과가 참 컸구나.’ 했는데 30만이 넘으니까 ‘영화도 잘 만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다가 40만이 넘으니까 슬퍼져요. 뭔가 배신당한 느낌이 들었어. 누구 것도 아니고 혼자 달리는 말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출처 : 조르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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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70년대 한국 극장가의 추억
[사진 : 69년 단성사극장 네이버카페 그때를 아십니까]
[사진 : 90년대 단성사극장]
[사진 : 멀티플렉스 단성사]
21세기 극장은 멀티플렉스, 예매, 여름 블록버스터, 1000만 관객 등으로 대변되지만, 예전 극장은 단관개봉관, 매표, 명절특선영화, 10만 관객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보고 싶은 영화를 인터넷에서 예매하고 시간에 맞춰 멀티플렉스에 가서 팝콘과 콜라를 사들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상영관에 들어서면 편안한 의자에 앉아 최고의 화질을 자랑하는 디지털화면과 음향으로 엄청난 물량을 쏟아 부은 블록버스터영화를 2시간 동안 즐기고 나올 수 있는 요즘 극장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예전 극장의 모습이 한해가 저물어가면서 먹어가는 나이만큼이나 더욱 그리워진다.
[사진 : 옛날 극장표, 네이버카페 그때를 아십니까]
한곳에서 개봉영화를 취향대로 골라볼 수 있는 요즘과는 달리, 예전 극장은 단관개봉관이었기 때문에 미리 신문을 통해 개봉영화를 살펴두고 먼 거리라도 상영극장을 찾아 나서야 했음은 물론, 길게 줄을 서며 표를 끊는 불편함까지 감수해야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었지만, 극장 간판에 그려진 스타들의 모습과 극장입구에 붙어있는 영화 스틸사진을 보는 재미로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불편함 정도는 충분히 감내 할 수 있었던 낭만이 있었다.
[사진 : 스카라극장]
그렇지만 주머니사정이 추웠던 예전 학창시절,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사실이 오히려 더 나를 슬프게 했다.
그래서 명절이 오기만 기다렸던 기억이 새롭다. 설날(구정), 추석이면 친척들에게 받는 용돈으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으니까 그때 그 시절 학생들에겐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명절이 즐거웠다.
[사진 : 대한극장]
삼매의 블로그에서는 70년대 한국극장가 추석특선영화에 이어 설날(구정) 특선영화도 연도별로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이번 포스트는 결산차원에서 먼저 1971년부터 1975년까지 70년대초 명절 극장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서울 개봉관 기준으로 설날(구정), 추석특선영화로 어떤 영화들이 상영하였는지, 그 해 주요사건, 흥행성적과 함께 연도별로 알아본다.
1971년
[사진 : 동시상영관]
‘대종상’이 부활하였고, ‘한국영화진흥조합’이 발족하였던 1971년 설날(1월27일) 서울 10개 개봉관에서는 4편의 한국영화와 6편의 외국영화를 상영하였다.
한국 최초 70mm 영화인 이성구 감독, 신성일, 문희 주연의 <춘향전>이 개봉하여 107,489명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고, 빅히트작 <팔도강산> 시리즈의 3번째 영화인 <내일의 팔도강산>은 159,972명을 기록하며 후랑코 네로 주연의 마카로니 웨스턴 <황야는 통곡한다>,
007시리즈 번외 편인 데이빗 니븐 주연의<007 카지노 로얄>, 알랑 드롱 주연의 <대결> 등을 제치고 설날 흥행에서 1위를 차지했다.
70년대 최고 흥행시즌으로 꼽히는 추석(10월3일)에는 이규웅 감독, 김진규 주연의 <성웅 이순신>이 147,654명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면서 10만명을 넘기면 성공작으로 보았던 당시 상황임을 감안하면 흥행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집 한채 값이 겨우 400만원이던 시절, 무려 1억5천만원 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쏟아 부은 것에 비하면 턱도 없이 모자란 관객수였다.
71년 개봉관 입장료가 약 200원 정도였으니 계산을 해보지 않아도 <성웅 이순신>의 적자폭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 추석시즌 승자는 록 허드슨, 줄리 앤드류스 주연의 <밀애>(204,00명)였다.
1971년 한국영화 중 흥행 1위작은 213,567명을 기록한 김기영 감독, 윤여정, 남궁원 주연의 <화녀>이며, 외국영화 중 최고흥행작은 268,000명을 불러 모은 안소니 퀸 주연의 56년작 <노틀담의 꼽추>이다.
71년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무려 202편에 달했지만 이 중 10만명이상 동원한 영화는 겨우 8편에 불과했으며, 외국영화 수입편수는 82편이었지만 20만명을 넘긴 영화가 2편이었고, 10만명을 넘긴 영화는 10편이 넘었다.
1972년
[사진 : 피카디리극장]
1972년 영화계는 제18회 아시아영화제가 서울 시민회관에서 5월 17일부터 5월 22일까지 열렸으며, 태창영화사가 70년 7월 <무녀도>의 모화역에 김지미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면서 60만원에 계약하였으나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자 김지미가 영화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및 위자료창구소송에서 법원이 100만원의 위자료만 지급하라는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내린 해였다.
불황에 처해 있는 한국영화계가 불황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영화계 불황대책위원회>를 발족하기도 했을 정도로 한국영화계암흑기의 정점이었던 1972년 설날(2월 15일) 극장가에는 71년 <성웅 이순신>의 실패를 딛고 재기에 안간힘을 쓴 ‘한국영화계의 신사’ 김진규 주연, 주동진 감독의 <의사 안중근>이 극장 간판에 내걸리며 영화팬들의 심판을 받았지만 30,070명을 동원하는데 그쳐 큰 실망감만 안겨주고 말았다. 대신 제11회 대종상영화제 작품상을 거머쥐며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이성구 감독, 윤정희 주연의 홈드라마 <딸만 셋이요>와 곽정환 감독, 최무룡, 윤정희 주연의 멜로영화 <약한자여>도 개봉하였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72년 설날 극장가를 평정한 영화는 71년 12월 15일 크리스마스-신정 특선영화로 개봉한 라이언 오닐, 알리 맥그로우 주연의<러브 스토리>였는데, 이 영화는 설날까지 2개월 동안 장기상영하면서 영화팬들의 발길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했다. 또한 4월 7일과 12월 23일 두 번에 걸쳐 앵콜 상영을 하면서 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영화에 대한 극장가의 홀대는 추석(9월 22일)시즌까지 이어져 임권택 감독의 <삼국대협>, 김수용 감독의 <작은 꿈이 꽃필 때> 등 단 2편만이 2개 개봉관에서 개봉했다.
이 같은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반면 <벤허>, <언제나 마음은 태양>, <더티 해리> 등 외국영화가 8개 개봉관을 모두 장악했다. 개봉관을 잡는 행운(?)의 한국영화 2편이 5만명도 넘기지 못하는 사이, 62년에 이어 재개봉한 <벤허>는 이해에만 무려 46만 6천명이라는 엄청난 관객몰이에 성공해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커보였다. 결국 72년에 10만명을 넘긴 한국영화는 단 1편에 불과했다.
1972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김기영 감독, 윤여정 주연의 <충녀>(162,024명)였다. 이해에는 외국영화도 신작 개봉보다는 재개봉에 열을 올렸는데, 외국영화 흥행 1위작 <벤허>를 비롯하여 엘리아 카잔 감독, 워렌 비티, 나탈리 우드 주연의 61년작 <초원의 빛>도 재개봉하여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72년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122편이었으며, 외국영화 수입편수는 63편이었다.
1973년
[사진 : 대구 한일극장, 네이버카페 그때를 아십니까]
1973년은 ‘한국영화진흥조합’을 해체하고 4월 3일 ‘영화진흥공사’를 창립한 해이며, ‘영화진흥공사’는 1,100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우수 시나리오를 공모하였다.
또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지역에 2편의 영화(전쟁과 인간, 신풍대협객)를 수출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제작 실적에 따라서 외국영화 수입쿼터 배정책으로 대부분의 한국영화가 졸속 제작되는 심각한 문제점이 대두된 해이기도 했다.
73년 설날(2월 3일) 극장가에는 이성구 감독, 신영균 주연의 <해벽>, 정진우 감독, 안인숙, 김희갑 주연의 <황소타고 시집왔네> 등이 개봉하였지만 흥행에 실패했고, 각 20만명을 넘긴 재개봉 외국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쿼바디스>, 144,597명을 동원한 알랑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 등 외국영화가 설날 극장가를 장악했다.
73년 추석(9월11일)시즌에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말론 브란도 주연의 <대부>, 이소룡의 <정무문>,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 <섬머타임 킬러> 등이 각 30만명을 넘기면서 여전히 외국영화들이 흥행을 주도했다.
다만 신상옥 감독, 신성일, 김지미 주연의 <이별>이 145,967명을 동원하며 73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이 되었고, 이소룡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스승으로 알려진 재미교포 이준구를 기용하여 완성한 권격 영화 <흑권>도 107,563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해,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다.
73년 한국영화 중 10만명을 넘긴 영화는 <이별>, <흑권>을 비롯하여 변장호 감독의 <눈물의 웨딩드레스> 등 3편이었고, 외국영화 흥행 1위작은 약 36만명을 기록한 <대부>였으며, <대부>를 비롯 30만명을 넘긴 영화가 3편이나 나왔고, 20만명을 넘긴 영화도 3편이나 나왔다. 73년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125편, 외국영화 수입편수는 60편이다.
1974년
[사진 : 국도극장, 영화도서관 청춘극장]
1974년은 암울한 한국영화계에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났던 해였다. 다름 아닌 68년 370,005명을 기록하며 한국영화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갖고 있던 정소영 감독, 신영균 주연의 <미워도 다시한번>의 흥행기록을 이장호 감독, 신성일, 안인숙 주연의 <별들의 고향>이 464,308명을 동원하면서 6년만에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별들의 고향>은 3월 25일 개봉하여 105일간 상영하여 한국영화 최초로 40만명을 넘기며 신기록을 수립했다. <별들의 고향>이 세운 기록은 외국영화까지 통틀어 65년 4월17일 개봉하여 538,598명이라는 경이적인 흥행기록을 세운 <007 위기일발>과 72년 <벤허>가 세운 466,000명에 이어 역대 세 번째에 해당하는 대기록이었다.
74년 설날(1월 23일) 특선영화로 상영하였던 한국영화는 스펙타클 한 전쟁영화 임권택 감독의 <증언>, 한국 홍콩 합작영화 <여감방> 단 2편뿐이었지만 <증언>이 학생들의 관람유도 등으로 232,762명을 동원했으며, <여감방>도 125,144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외국영화로는 찰스 브론슨 주연의 <신디케이트>, 이소룡의 <용쟁호투>, 알랑 드롱 주연의 <빅건>등이 20만명을 넘겼고, <007 죽느냐 사느냐>도 설날 극장가를 장악했다.
74년 추석(9월 30일) 극장가에는 임권택 감독의 <울지 않으리>와 이원세 감독의 <만나야 할 사람>, 김기덕 감독의 <꽃상여>가 상영하였지만 외국영화 흥행의 들러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 해 추석 극장가의 승자는 40만명을 넘긴 스티브 멕퀸,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명작 <빠삐용>이었다.
74년 한국영화 흥행순위는 <별들의 고향>, <증언>, 이장호 감독의 <어제 내린 비>(147,823명), <여감방>, 김수용 감독의 <토지>(120,830명)순이고, 외국영화는 <빠삐용>, 그리스영화 <나타샤>(321,483명), <용쟁호투>(228,928명) 순이다. 이해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141편이었으며, 외국영화 수입편수는 39편에 불과했다.
1975년
[사진 : 국제극장, 네이버카페 그때를 아십니까]
1975년은 곽정환 감독, 박근형 주연의 <이중섭>이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제28회 칸영화제에 출품하였고, 이만희 감독과 배우 허장강이 간경화와 심장마비로 세상과 등졌던 해이다.
75년 설날(2월 11일) 극장가에는 한국영화로는 김호선 감독, 염복순, 송재호 주연의 <영자의 전성시대> 단 1편만이 극장 간판에 내걸렸는데, 이 영화는 87일간 장기상영 끝에 361,213명이라는 엄청난 관객들을 불러 모으며 기염을 토했다.
<벤허>가 또다시 재개봉하였고, 최초로 수입된 인도영화 <신상>은 20만명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으며, 홍콩영화 <소녀>는 무기한 상영금지 처분을 받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20만명을 넘기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75년 추석(9월 20일) 극장가에서는 변장호 감독의 <청춘극장>, 이두용 감독의 <감격시대>가 개봉하였지만 이렇다 할 흥행성적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남아공영화 <마이웨이>, 조지 로이 힐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폴 뉴먼 주연의 <스팅>이 각 30만명을 넘기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75년 한국영화는 <영자의 전성시대>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53,780명)만이 화제속에 상영하였을 뿐 대부분의 영화들이 흥행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였고, 외국영화 흥행 1위는 공포영화 <엑소시스트>가 차지했다.
75년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94편으로 대폭 줄어들었으며, 외국영화 수입편수는 35편이었지만 10만명을 넘긴 영화가 무려 20편이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