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의된 경위.
쌍효자의 선조는 남원도호부 지사방 주암촌(舟巖村)에서 살았다.
1800년 무렵 증조부가 순천도호부 소안면(蘇安面)으로 이사하였는데, 1840년(헌종 6) 아버지가 돌아가시므로 최창호는 15세, 최창민은 6세에 불과한 소년가장이 되고 말았다.
순천도호부 여수면 학동(鶴洞)에는 창원정씨 가문으로 시집간 누님이 살고 있었으므로, 누님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학동으로 이사하였다.
쌍효자의 효행은 학동에서 살면서 실천되었는데, 행실을 보고 칭찬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주변에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는 외로운 처지이었으므로 관청에 품신하여 효자로서 표창을 받는다거나 할 수는 없는 처지 이었다.
이러한 쌍효자의 처지를 알게 된 남원에서 살고 있는 일가들이 나서게 되었는데, 남원에는 400년 이상 이른바 양반 가문을 자처하며 세거해 온 전주최씨 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자기 가문에서 효자가 출현한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남원의 전주최씨들은 자신들이 순천도호부에 직접 품신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일단 종중(宗中)에서 여수면 주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주민들이 쌍효자를 추천하도록 만드는 한편, 남원 향교에서 순천 향교로 통문을 보내어 여수면 주민들이 쌍효자를 추천하면 호응하여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하게 된 이유는, 여수면 주민이 품신하면 설득력은 높겠지만 여수면은 순천도호부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진 곳으로, 주민들의 영향력이 미미할 것이고, 순천 향교에서 품신하면 순천도호부 안에서 영향력은 있겠지만 여수면 주민이 품신하는 것에 비하여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종중에서 보낸 통문에 연명으로 서명한 사람을 분석해보면, 항렬(行列), 종가(宗家) 순으로 서명했는데, 21세에서 일부 예외가 있다.
뒤늦게 참여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19세
최락(崔洛) 참의공파. 자 중현(仲賢). 초휘 발(浡)
최명(崔溟) 동명이인이 있어서 검증 불가.
최일(崔溢) 동명이인이 있어서 검증 불가.
20세
최성태(崔成泰) 봉사공파. 자 노첨(魯瞻)
최성학(崔成學) 참의공파. 자 덕명(德明)
최성한(崔成漢) 감찰공파. 자 여장(汝章). 호 금산(琴山)
21세
최광보(崔光輔) 봉사공파.
최광일(崔光一) 참의공파.
최광달(崔光達) 감찰공파. 자 덕흥(德興)
최광문(崔光門) 참의공파. 자 사홍(士弘)
최광규(崔光奎) 동명이인이 있어서 검증 불가.
최광삼(崔光三) 봉사공파. 자 치중(致中)
22세
최한중(崔翰中) 인물정보를 찾을 수 없음.
최한영(崔翰英) 봉사공파. 자 화경(和慶)최한정(崔翰正) 참의공파. 휘 경열(京烈). 자 사길(士吉)
초휘 한정(翰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