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불교는 굴종 아닌 자기 수행”
“어느 날 한 한국인 스님이
숭산 스님에게
‘얼마나 많은 숭산의 제자가 해외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숭산 스님은 ‘한 명도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한국스님이 물은 제자는
절에 가서 공양 올리는
한국불교에서와 같은 제자였기에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숭산 스님은
굴종의 신앙이 아닌 가르침을
수행을 통해 스스로 체화한 제자를 강조했습니다.
한국불교는 이를 잘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바른불교재가모임(상임대표 우희종)은
23일 첫 사찰순례지로 계룡사 무상사를 찾았다.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은
바른불교 재가자들에게 이 같이 말했다.
스님은
“숭산의 제자는 30년 간
5만명에 달하지만
이들의 문제의식은 생사극복에 있다.
각자 자기 수행을 통해
생사문제 해결을 위해
능동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들은 한국식 신도가 아니다.
절에 찾아와서
기도를 올리고 시주하거나 하지 않는다.
때문에 무상사는 돈이 없다.
그래도 이게 좋은 것이다”라고 했다.
숭산 문하 해외센터들 선농일치 구현
스님은
“숭산 문하의 해외 모든 센터는
선농일치처럼
스스로 만들고 가꿔가고 있다”고 했다.
1970~1980년대부터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장소를 빌렸다.
숙소를 두고 매일 아침‧저녁 수행을 했다.
선센터에 스님은 따로 없었다.
모두 재가자였다.
스님은 이를 ‘주거형 선센터’라고 이름 했다.
스님은 “1970년대 선 센터
한 달 거주비용이 일인당 275불이었다.
1980년대 물가가 올라가면서
더 큰 돈을 필요로 하게 됐다.
이 시점 제자들이
결혼하면서 직장도 필요해졌고,
선센터를 나가서 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숭산 스님은
선센터가 재가자 공동체처럼 자리잡기를 바랐다.
선센터에서 출산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 아이가 자라서
최근 부모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가정을 갖게 되면서
선센터 밖에서 생활을 선호케 됐다.
수행공동체 유지가 어려워졌다.
1980년대 미국에서 출가한 사람이 늘었다.
재가자가 비운 자리를 다시 출가자가 지켰다.
지금은 출가자가 선센터 주지로
수행‧포교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시주문화 없는 선센터, 수행자 직접 만들어 가
스님은 “한국처럼 시주하는 문화가
선센터에는 없다.
그렇다보니 건물 유지도 어려웠다”고 했다.
이어 “선센터도 변화했다.
적은 비용으로도 관리가 가능한
소규모로 바뀌었다.
보스턴, 켄사스, LA 등지에
주거형 선센터가 남아 있다.
선센터는 작은 공간을 빌리는 것에서 시작하고,
돈이 모이면 건물을 매입했다”고 했다.
스님은 “유럽에서도 선센터가 생겼지만 1980~1990년대 일이다.
물가가 많이 올라 이젠
아파트 한 채 구입하기도 힘들다.
재가수행자들이
직접 공간을 만들고 있다.
불사를 재가불자들이 스스로 해결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숭산 스님 제자 가운데
나무로 보트를 만들던 이가,
스님을 도와 선센터를 직접 지은 이야기를 했다.
“보트를 뒤집으면 집과 똑같이 않느냐”는
우스개도 했다.
선센터는 ‘자기가 주인되라’는 가르침 실천 공간
스님은 “오일쇼크 때 선센터의 난방을
기름 대신 나무로 대체했다.
땔감도 재가자들 스스로 해결했다.
당시 내 소임은
새벽 1시에 일어나 불 때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센터는
각자 수행하는 공동체이지만
스스로 참여해서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는 ‘자기가 주인되라’는
선의 가르침과도 부합된다”고 했다.
스님은 구산 스님의 본보기를 들었다.
구산 스님은
국내 처음으로 서양인 제자를 뒀다.
그러나 스님 열반 후에는
비구니스님 한 분만이 남았다.
무상 스님은
“숭산 스님은 항상 사부대중이
함께 공부하는 것을 강조했다.
선센터에서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모두 같았다.
잠자는 공간만 달랐다.
승속에 따른 차별은 없었다”고 했다.
이어 “숭산 스님 열반 후에도
각자가 수행하던 대로
선센터의 전통은 이어졌다”고 했다.
‘본래면목’ 바로 보는 공부 원하면 무상사로
스님은 “젊은 비구와 비구니의
수행공간을 구분할 필요는 있다”면서도
“승속과 남녀를 차별해
공간을 구분해 수행케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기 혼자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 문제에는
둔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스님은
“스님들은 1년이면
석 달씩 동안거 하안거를 한다.
재가자들은 1주일, 한 달씩
자기 형편에 맞춰 수행을 하면 된다.
원한다면 자기 시간에 맞춰서
무상사에서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무상사에서 묵언하면서
승속이 함께 공부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부처님 말씀은
결국 본래면목을 바로 보라는 것이다.
본래면목을 볼 때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모든 문제의 해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불성을 명확히 바라보고 있지 않다보니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방법을 못찾아 내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법? 각자 맞는 것 찾되 자기부터 바로 봐야
스님은
“한국인은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식사를 한다.
일본인은 젓가락만으로,
서양인은 포크와 나이프로,
인도인은 손만 쓴다.
음식을 먹는 것이 중요하지
무엇으로 먹는가 하는 방법은 중요치 않다.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누가 듣고 누가 보는지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숭산 스님의 스타일이라 해서
가르침에 따로 이름 붙일 만한 것이 없다.
간화선은 자기를 향한 한 방법이다.
자기를 향한 수행에는
염불 등 여러 방법이 있다.
모두 본래면목을 밝히는 것이다.
숭산 스님 문하에서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형태로 수행을 한다”고 했다.
스님은
“1000년 전인 당송시대에는 무문관을 만들었다.
선에 집착하는 병폐도 있었다.
육조로부터 임제까지
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픈 사람마다 치료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픈 사람을 두고 치료법(지도법)이 있는 것이지,
치료법(지도법)을 두고
아픈 사람에게 맞추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스님은
“간화선을 통해 선사가 배출될 수 있다.
(간화선 종주국이라는) 한국사회에서는
위빠사나 등이 주목 받고 있지 않느냐?
무엇이 최상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안다는 것 생업에 도움 될 뿐, 생사문제 해결 못해
스님은 “한 아이가 8살 때
108세 노파를 보고는
‘나도 곧 저렇게 되느냐’는 말을 했다.
그 아이가 10대에 불교를 알게 됐고,
티벳에 가서 불교를 배웠다.
그리고 20대에
숭산 스님 문하에서 출가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죽을 때가 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루, 한 순간이라고 느낄 수 있다.
서양에서 불자가 되는 사람들은
서양종교가
이런 시간의 개념과 체험들을
다뤄주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스님은 “우리는
어떤 때는 살고 싶어 하고
어떤 때는 죽고 싶어 하지만
이것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이런 생사의 문제에 답을 준다”고 했다.
스님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과 죽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어 경허 선사를 본보기로 들었다.
젊어서 경전을 두루 달통한
경허 스님은
나고 죽는 것에 대한 답이
머리에는 있었지만
전염병이 도는 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때 경허 선사는
머리로는 알아도
삶에서 체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설명이다.
대봉 스님은
“우리가 많은 것을 안다고 하지만
생업에는 도움 되도
생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수행이 중요하다”고 했다.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은
1950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5년간 병원에서 카운슬러로 근무했다.
큰 조선소에서 접기 용접공 일을 하기도 했다.
스님이 숭산 스님(1927~2004)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뉴 헤이븐 선원법회에서다.
숭산 스님에게
“미쳤다는 것이 무엇이며,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숭산 스님은
“만일 당신이 무엇인가에
많이 집착하면 많이 미친것이다.
만일 당신이 조금 집착하면 약간 미친것이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미치지 않은 것이다”라고 답했다.
대봉 스님은
숭산 스님의 한마디는
명문대학에서
수년간 심리학을 공부한 것보다 나았고
선사님이야말로
자신의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스님은 숭산 대선사님과 같이
전 세계의 선원을 누비며 함께 수행했다.
스님은 프랑스 파리,
미국의 버클리와 캠브리지 선원
지도법사를 지내셨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지역에서 수행을 지도했다.
1999년부터
계룡산 국제선원의 조실로 상주하고 있다.
스님은 1984년 출가해
1992년 숭산 큰스님으로 부터 인가를 받고
1999년 전법게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