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삼밭재에서 기원을 드리다
소태산대종사가 11세 되던 시월 보름날,
영광군 군서면 마읍리 선산 종중(宗中) 시향제(時享祭)에 부친을 따라 참석했다.
이때 소태산대종사는 산신에게 먼저 제사를 올리고 난 다음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장 학식이 많다는 분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오늘 이 시향제는 분명히 우리 선조들에게 올리는 제사인데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기 전에 산신에게 제사를 먼저 올린 것은 무슨 까닭이에요."
"산신은 이 산의 주인이요 수호신이란다.
이 산에서 가장 큰 위력을 가졌기 때문에
반드시 산신제를 먼저 올리고 난 다음에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는 법이다."
"산신은 어떠한 큰 능력을 가졌어요?"
"산신은 한없이 신령스러워서 그 조화와 능력을 말로써는 다 형용할 수 없단다.
풍운조화를 마음대로 부리고, 풍년들고 흉년드는 일도 마음대로 한단다.
만약 사람이 산신에게 노여움을 사면 큰 벌을 받게 된다고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산신을 만나면 자신의 의문을 풀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시향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산신령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생각하다가
동네 어른들이 기도 올리며 영험이 있다는 정자나무 샘터에서 기도를 올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자나무 샘터는 숲이 우거지고 후미져
산신령이 기도하는 자신을 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방이 트여 산신령이 나를 볼 수 있는 삼밭재 마당바위가 기도하기에 적합한 장소라 여겨져
그곳으로 결정했다.
소태산대종사는 초겨울부터 기도를 시작했다.
산신령을 만나기 위한 기도에 나름대로 제물을 장만했다.
아침밥만 먹으면 산중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산과를 따 제수로 올리며 기도드렸다.
집에 있는 홍시를 기도 때 쓰기 위해 무명베에 싸서 산에 올라가다
으깨어져 옷이 온통 감물로 얼룩져 버리기도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부모님에게 기도하러 산에 다닌다고 말할 수 없어
서당에 다닌다는 핑계를 대고 다녔다.
그러나 동네 아이들이
"진섭(소태산대종사)이, 또 삼밭재 간다."
"어라, 또 공부 안하고 산에 간다!"고 손가락질하여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그 정성에 감동하여
남편 모르게 조그만 시루에 쪄 만든 흰떡을 장만하여 주었다.
또한 아버지도 차차 소태산대종사의 정성에 감동하여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당바위에서 기도하는 방식은
과일이나 떡 등의 간단한 제물을 바위 위에 차려놓고
산신령을 만나게 해주십사하고 사방을 향하여 절을 하는 것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예배할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밤을 지새울 때도 있었고
기도하다가 마당바위에서 잠들기도 하였다.
소태산대종사는 한동안 다니던 서당도 그만 두고,
비가 오고 눈이 와도 하루도 빠짐없이 험한 길을 오르내리며
15세 봄에 결혼을 한 그해 말까지 만 4년간 기도를 올렸다.
소태산 대종사가 기도하고 내려오던 어느 날,
소태산대종사의 두 번째 훈장이었던 김화천은 신비한 현상을 보았다고 전한다.
'오후 4시 무렵이었다.
삼밭재에서 회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두른 스님들이 열을 지어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앞에 큰 스님이 열을 안내하여 가고 그 뒤에는 수천수백 스님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구호동으로 내려와 돌 자갈 밭을 지나
돛드레미 옆 산 가시밭(현 영산원)으로 들어가 한 곳에 모이더니
풍악을 울리며 춤을 추고 노래 부르며 법석을 떨다가 한참 뒤 사라졌다.'
삼밭재 마당바위와 움막터

소태산 대종사의 선산(영광군 군서면 마읍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