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을 꿈꾸는 어른들의 동화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읽고)
홍 상 표
글에서 작가의 말에, “한 인간개체가 어떻게 자연의 한 분자로 태어나서 성장하는가를 반추해보려는 의도에서 씌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연을 상실하게 되는 중3에서 끝나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라고 범위를 설정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인 작가가 4.3항쟁과 6.25전쟁 전후의 격동기에 태어나 유아기적 부터 대략 중3까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고 보고 느끼고 하였던 기억을 모아 노년이 되어 귀향을 꿈꾸는 지금, 그 편린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잘근잘근 되씹어보는 자기반성적이자 이성적 성찰을 염두에 둔 글이라 하겠다.
가족, 친척, 친구, 학교 그리고 4.3항쟁의 역사적 유물이 된 관덕정과 성장기 대부분을 지내온 용두암, 용연 인근을 주 배경으로 제주도라는 한정된 틀 안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을 직접 겪고 목격하는 가운데 배고픔과 상처와 고통스런 날들의 연속 속에서 가족, 친척, 친구, 이웃 간 이성과 감성,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뒤섞여 어우러진다. 신비로운 대자연과 온갖 미물들 대한 이치를 따지는 것은 이성적(理性的)이지만 서정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표현을 미루어볼 때 대단히 감성적(感性的)인 글이라 하겠으며, 또한 하나하나 대자연에 몸을 부딪치면서 성장해가는 성장통을 이야기하는,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닌 역사의 한 격동기속에서 들꽃처럼 피어났던 평범한 민중들의 서사시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지난 3일 동안 나는 저 머나먼 고독한 섬, 해방 전 후 암울하고 음습했던 제주도의 4.3사태와 6.25전쟁 전후의 용두암 뒤안길을 한 바탕 지나가는 시원한 소나기줄기처럼 후드득 훑고 지나왔다. 무지개처럼 형형색색으로 등장하는 소제목의 찬란한 기억들을 읽다보면, 마음 깊은 속에 잠자고 있던 온갖 추억의 단상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한바탕 가슴을 후려치고 지나가기도 하고, 또한 내가 마치 주인공인양 시공을 초월하고 이성과 감성을 함부로 넘나들며 내 머릿속을 마구 흔들어대는 신비한 마력을 내뿜기도 한다. 그런 소재를 생각해내기도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묘사를 함에 있어서 너무나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럽다. 작가의 이러한 글솜씨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단련이 되었는지에 대한 단초는, 중1때 우상으로 받들게 된 공부벌레 ‘신석이형’인데 그의 죽음과 함께 ‘신석이형’의 책상과 방을 쓰게 되면서 접하게 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바로 그것이다.
적어도 작가의 눈에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기억마저 하나씩 나타날 무렵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성장해가는 작가의 기억 속으로, 결혼 10년에 열 달도 함께 살아보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넋두리처럼 신비하지만 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대해야 했던 아버지, 폭동과 학살과 전쟁 통에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결국은 전쟁 후 인천에서 딴살림 차린 아버지의 배신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단상들, 조부모와 외조부모, 사춘기적 이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겪는 성의 신비함, 이런저런 고통 속에서 외갓집으로 건너가 용케도 살아남았던 그 시절 대자연의 온갖 미물들 속에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눈처럼 녹아 스며들어 있다.
“그래 맞아, 내가 자라던 시절에도 그랬었지.”하며 맞장구를 치고,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치자면 너무나 길게 느껴지지만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혀를 끌끌 차며 입맛을 다시기도하고, 그러다가 절묘한 상황설명이 나오면 무릅을 탁치며 “이햐, 어쩌면 그렇게 내 생각이랑 똑같았을까."하기도 하고, 또 ”야물딱진 방귀소리에 보리밥알이 총알처럼 튀어 나오는 줄 알았는다.“는 보릿고개 넘어가는 개구쟁이 시절의 방귀놀이 대목에서는 정말이지 내 웃음보가 툭 터지면서 점심에 먹은 콩자반이 목구멍으로 총알처럼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야기가 유아기에서 사춘기로 접어들자 분위기가 상당히 멋쩍어지며 쑥스럽고 감각적인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춘기에는 날아가는 새만 봐도 까르르 웃는다고 했나? 여기서는 벌만 봐도 와르르 웃음판이 되는 사춘기적 경험을 통하여 남자아이들은 여성의 성적상징을 가지고 이리 꽈배기를 틀고 저리 뻥튀기고 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또한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며 성장해가는 아이들은 대자연속에서 이성을 깨우치고 삶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해 나간다. 학교와 집, 또는 어머니가 농사를 짓는 함박이 굴의 밭을 오갈 때마다 용연과 용바위로 빠져나가 깅이(게)잡이, 파도타기, 잠수하기 등을 하며 새까맣고 단단한, 이빨만 하얗게 드러나는 전형적인 바닷가 아이로 성장해가는 싱싱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서로 간의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남자들끼리의 낄낄거리는 비장의 소통언어와 여학생들끼리 물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하며 풍기는 계집 내음이 솔솔 봄바람에 꽃향기 묻어나듯 한다. 누구에게나 어찌 그런 시절이 없었으랴.
그런 사춘기의 기억들을 어쩌면 그렇게 솔직하고 깔끔한 표현으로 자신을 이야기 할 수 있는지, 특히 우연히 여자의 알몸을 보게 되면서 눈뜨기 시작한 그 시절의 이야기는 아직도 내게 있어서 커다란 미스테리로 남는다. 물론 나에게도 그와 같은 수많은 사춘기적 기억이 있다. 중학교 시절 아이들과 어울려 주간신문을 팔고 오는 길에 동네 어귀에 위치한 목욕탕 여자탈의실을 창틈으로 훔쳐보다 뒷덜미 잡혀 남탕에 끌려들어가 죽도록 얻어터졌던 기억이 있는데, 이 글에 나오는 여자목욕탕 편을 읽을 때에는 그 시절 여자목욕탕의 분주했던 움직임을 떠올리게 하며 나를 키득키득 웃게 만든다. 하지만 작가의 사춘기를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나도 사춘기를 지나며 겪었던 추억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 시절의 쑥스러운 비밀들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글로 표현할 재주도 없거니와 용기도 물론 나지 않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성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참여한 연극 ‘맥베스’에서 비록 단역을 맡았지만 사촌형수의 비로드치마와 형수친구의 베레모를 빌려 입고 분필가루로 분장한 얼굴이 여자처럼 예쁘장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르시시즘으로서의 자기도취적 환상에 젖어들고, 이에 시스터보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여성편력에 잠시 빠진다. 여성편력과 아버지에 대한 본격적인 반항이 시작된 고등학교 이후의 기억은 “자연아로서의 본능과 순진성을 잃고 부정한 세속적인 삶에의 입문”이라며 중3을 이 글의 종점으로 단정한다. 고등학교 이후부터는 순수함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전반적으로 격동기에 거의 해마다 수반되었던 흉년, 거친 비바람을 동반하며 무시로 찾아와 온갖 열매를 싹쓸이해갔던 태풍, 그런 기근에 밥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했던 쓰라린 기억, 그리고 항쟁인지 폭동인지 모를 제주사람들의 시위와 이를 막다 못해 결국은 토벌을 결정한 미 군정하의 서북청년단과 경찰토벌대가 벌이는 살육전의 끔찍한 광경들, 너무나 많은 가족, 친척, 이웃어른들의 죽음, 관덕정 뜰 앞에 목이 뎅겅 잘린 채 꼬챙이에 꼬여 있던 소위 토벌된 주민들의 머리통들, 물에 빠져 죽은 여자친구의 동생과 젊은 여인의 단상, 하루 두 끼 그마저 밀기울밥에 섞여있는 노란좁쌀을 황금 캐듯하던 어두운 장면들에서는 정말이지 삶에 대한 희망이 눈꼽만큼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배고픔과 무언지 모를 두려움들이 시시때때 엄습해 와도 자연 속에 몸을 던져 자신을 이겨나가는 과정의 표현이 너무나 태연하고 담담하다.
노랗게 영글어 가는 콩깍지 속의 콩처럼 튼실한 내용이지만, 제주도 토속어가 조금 낯설다고나 할까? 대화체로 등장하는 제주도 방언들이 ‘낯설게하기’라는 형식주의적 분위기를 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저 먼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에 나오는 낯선 이름과 지명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매미를 잡다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에 말발굽 같은 흉터가 생겨 평생 그 흉터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야했던 눈물샘이 마를 날이 없던 땜통머리 똥깅이의 태를 묻은 고향 함박이 굴은 1948년 토벌대에 불살라졌고, “이미 남의 보리밭이 되어버린 집터 한쪽에 서있는 시누대숲과 저 홀로피어 부질없이 화사한 배롱나무 붉은 꽃무더기가 초토화된 4.3항쟁의 역사를 쓸쓸히 말해 주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바깥세상과 내 자아 속에 살아있는 내면의 세계를 넘나들며 성장해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항쟁의 상처가 자연스레 녹아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아름다운 정서가 함께 서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에 숟가락 하나’ 라는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팥벌레는 옥황상제의 큰딸아기의 변신인데, 배고픈 인간백성이 밥 빌러오면 쉰밥에 썩은 장을 주며 푸대접한 죄로 이승의 콩밭에 떨어져 벌레가 되었단다.” 숟가락 하나만 달랑 들고 천상에서 쫓겨나 이승의 콩밭에서 푸른 옷 입고 숟가락 꽂은 슬픈 몸으로 평생 그 밭을 벗어나지 못하고 귀양살이하는 그 아기씨, 그것이 혹시 나 자신의 운명이 될까봐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니면 관덕정 뜰 앞에 예수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유격대장 ‘이덕구’의 윗주머니에 누군가가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의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래보나 저래보나 역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는 뜻과 다름없다는 것이리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으로 태어나 밥숟가락 하나로 자신을 보존하다가 결국 죽어서도 제사상 좌측상단에 수저 한 벌 놓이게 되니, 밥숟가락과 인생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70년대 말인가 ‘순이 삼촌’이라는 작품으로 비록 호된 필화를 겪었지만 4.3사태의 재조명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었던 작가로서는, 그때 다하지 못한 제주도의 온갖 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작품을 통하여 다시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삼라만상의 온갖 이성적인 미물이 밀기울로 등장하여 가마솥에 들어가 감성으로 익혀지고 제주도 토속어로 뜸들여진 밀기울밥이다. 이 밥을 먹으며 노란좁쌀을 황금 캐내듯 귀중한 추억의 단상이 하나하나 꺼내어지고 또한 그 이치를 구구절절이 밝혀 독자들이 읽게 함으로써, 안식의 귀향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귀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한 개인의 역사와 시간을 육갑 따지듯 한 바퀴 빙 돌려놓고, 원래 출발한 그 위치와 지금 돌아와 서있는 지점 사이에는 나사처럼 이미 지나간 ‘과거라는 시간의 공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만든다. 알래스카 베링해협까지의 고통스러운 길을 떠났다가 오랜 세월을 거쳐 동해안으로 돌아와 산란을 하고 생을 마감하는 회귀본능의 연어처럼…
이 책을 읽으며 돌아가신 부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내가 태어나 자란 부산에서의 어린 시절, 5.16혁명과 함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충청도로 보내져 초등학교를 다닌 4년여의 기억과 다시 부산으로 가 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의 잊고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이 되살아나 어느새 내 마음속의 커다란 감성적 자산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도 내 숟가락 하나의 의미를 찾아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그리고 이 소설보다 더욱 값진 나의 추억을 기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