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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지 스윈녹(George Swinnock)은 “경건(godliness)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라 마음과 삶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행동이 곧 예배이고,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예배의 범위는 마음과 삶 전체이고,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에게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곧 진정한 경건이요 예배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무신론이며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내면적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경외와 존경, 외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봉사는 하나입니다.
진정한 예배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바로 이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거의 모든 것들을 다 받은 우리에게 바로 이 예배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에는 진정한 예배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십 여 년 전, 죠오지 에반스(George Evans)는 이미 “최근 예배라는 주제에 대하여 교회 안에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너무나 많은 관심이 예배에 있어서 외적인 사항들이나 형식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예배에 있어서 성령의 문제는 논의에서 부차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의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교회의 영적인 영향력이 쇠락(衰落)할 때 예배의 형식과 의식은 증가했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영적인 능력과 권세가 흥왕(興旺)할수록 예배는 단순해지고 자유로워졌습니다. 과감하게 인위적인 형식을 벗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교회 건축과 예식과 상징, 또 예배의 본질적인 것들보다는 부수적인 것들에 대한 연구가 피를 튀기듯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영향력을 상실한 교회 안에서 내면적인 실재(internal reality)를 외적인 꾸밈으로 대체하고, 영적으로 굶주린 영혼들을 상징적인 형상이나 지극히 인위적인 연출을 통해 만족시켜 보려는 헛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정말로 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예배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휘튼 대학(Wheaton College)의 존경받는 학장이었던 레이몬드 에드먼(V. Raymon Edman)에게는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건강이 썩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갖추어야할 경외감에 대해서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병든 몸을 이끌고 학생들 앞에 선 그는 자신이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를 방문했을 때를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황제 앞에 나가기 전에 주어지는 지시 사항들을 설명했습니다.
따라야 할 외교적 의례, 존경을 표하기 위한 인사 방법까지 설명한 그는 모든 인생들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진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 사건을 통해 하늘과 땅 사이를 구분하는 선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더 이상 교과서와 씨름하며 다음 시간에 치를 시험과 주말에 가질 데이트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섰습니다. 학생들은 진정한 예배자였던 그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소중하고 진지한 행위인지 충분히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한다”(시26:8b),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었다”(시122:1)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친히 영광 중에 임하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그곳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 자체를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성전에 대한 사랑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와 봉사를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날들을 주일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아무리 큰 소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귀가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난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곳에 나온다.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기를 원한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 동안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경 본문에서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가르쳐 주신다. 또 이곳에 오면 나는 가장 좋은 회중들과 함께 있게 되고, 또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나는 혼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또한 특권이기도 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고백은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서도 예배에 늦게 참석하는 자들과 예배에 참석조차 하지 않는 자들에게 엄숙한 경고와 책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b)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통회”(다카 : dakkaw')는 “부숴뜨린, 죄를 깊이 뉘우치는, 파괴” 등의 뜻으로, 깨지고 부서지고 잘게 쪼개어진 물건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무익한 존재인지 철저하게 깨달은 자를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인류의 참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영적 교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행위 뿐 아니라 악한 생각도 우리를 고통스러운 회오(悔悟)와 회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단지 “악한 생각” 만으로도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임재의 느낌, 하나님으로 충만한 느낌을 상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희의 생각 안에 거한다. 너희의 생각이 내가 거할 수 있는 성소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예배한 청년들은, 예배가 끝난 후에도 좀처럼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던 중 충만하게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임재 가운데 더 오래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주일, 한 대형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던 수만 명의 성도들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마치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썰물처럼 예배당을 빠져나갔습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끝냄과 동시에 순식간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빠져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좀 더 머무르려고 할 것입니다. 서둘러 하나님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황급히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지극히 짧은 순간만 머물러도 우리의 삶은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쏟아 부은 진지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기를 소원하십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생각을 깨끗하게 유지하십시오. 생각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성소가 되게 하십시오. 거룩하지 못한 것은 생각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생각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생각 속에 “거룩, 거룩, 거룩”이라는 소리가, 아침공기를 가르며 청명하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각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십시오. 한순간도 하나님을 만나는 일보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환경과 장애물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만큼은 방해할 수 없도록 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만큼은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을 통해 뜨거운 감격과 기쁨이 넘칠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 길을 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하는, 지키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절대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부모 공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7),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20:9)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저주하다”(카랄 : kawlal')는 “가볍다, 감하다, 멸시하다, 저주하다, 가볍게 평가하다” 등의 뜻으로, 부모를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은 그 속성상,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행위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창조의 위계 질서를 파괴하고 모독하는 패륜 행위인 동시에 생명의 근원에 대한 반역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반드시 공동체로부터 분리할 뿐 아니라,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30:17) 곧 자식이 전혀 없는 황량한 곳에서 무덤도 없이 죽고 말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와 함께 저주하셨습니다. 사실 오늘날은 “아비를 저주하고 어미를 축복하지 않는 시대”(잠30:11)입니다. 부모를 모욕하고, 경솔하게 대하고, 존경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다른 하나는 안식일 준수입니다.
성경은 이 안식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安息)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2-3)고 말씀합니다. 안식일은 창조 사역을 마치신 하나님께서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구별하신 거룩한 날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안식일 제도를 제정하신 목적은 단순히 육체적인 휴식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피조물인 인간이 당신과 깊이 교제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보다 궁극적인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엇보다 당신만이 유일하게 허락하실 수 있는 영혼의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안식일을 제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 질서에 근거해서 제정된 안식일 개념은 이후 보다 뚜렷하게 성문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출애굽기에는 무려 네 번씩이나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먼저 하나님께서는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출16: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킬 수 있도록 여섯 번째 날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일 째 되는 날 평소와 똑같은 양의 양식을 거두어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되어보면 배나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출16:24)는 말씀과 같이, 평소에는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까지 나던 양식이 안식일에는 전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명령을 준수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양식으로 인해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도록 특별한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온전히 안식하며 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안식일”(솨바트 : shabbawth')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어떤 특정한 안식의 날 곧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바로 그날”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기억하여”(자카르 : zawkar')는 명령형으로 쓰여 단순히 기억한다는 차원을 넘어 “상기시키다, 기억을 되살리다, 알아보기 위해 표시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날을 단순히 기억하는 차원을 넘어, 반드시 지키기 위하여 마음에 새겨 두라고 강조해서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이 날에는 남종이나 여종이나 짐승들도 일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안식일은 철저히 사람의 행복을 위한 날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③ 하나님은 또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출31:13b-17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 제사 드리기 위한 성막을 건축하는 일보다, 당신이 친히 제정하신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할례와 함께 당신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계속적으로 확인하는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을 뚜렷하게 구별하는 중요한 표(sign)로 삼으셨습니다. ④ 마지막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신 후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출35:2-3) 곧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안식일 준수를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여기셨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더 이상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출16:27)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여섯 번째 날에는 거둔 것이 평소의 두 배나 되게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통해 안식일에는 어디에서도 양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이 되자 광야로 나가 양식을 구하는 탐욕적인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탐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바 : awvaw')는 “.....을 바라다, 사모하다, 몹시 원하다” 등을 뜻합니다.
또 헬라어(플레오넥시아 : plehonexee'ah)는 “사기, 강탈, 욕심, 더 가지려는 마음” 등을 뜻합니다. 두 단어 모두 “.....싶어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욕은 과도하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입니다. 이기적이고 나쁜 욕심입니다. 더 갖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지극히 이기적인 이 탐욕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분야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사회는 이 탐욕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10)고 경고합니다. 탐욕은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a)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죄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우상숭배”(골3:5b)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합니다. 안식일에도 일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에 눈이 어두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황량한 광야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날을 범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합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탐욕을 부추기는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합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과 관련하여 성경은 또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신5:15)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과 관련하여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고 있는 출애굽기와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역사적 구속 사건에 근거하여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통해서 살펴본 안식일의 창조적 의미에, 안식일의 구속사적 의미를 더하여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안식일 개념의 대립이나 변질이 아닙니다. 계시(啓示)의 심화 발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 사역의 완수와 함께 당신의 구속 사역의 완수라는 이중적 근거로, 안식일 성수(聖守)를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중적 근거가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승화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에는 반드시 실체가 있기 마련입니다. 실체가 나타날 때 그림자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도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8a),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림자인 안식일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살아생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외치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고통 당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린 채 돌아가셨습니다. 죄와 저주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인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임하시고, 교회가 탄생한 날이 안식일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죄와 저주와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주일을 구별하여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을 지킴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아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행2:46a)는 말씀에 따르면, 그들에게는 주일이 따로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을 기념하고 예배하는 주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주일을 지키는 이면에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구속 사역의 완수라는 이중적 근거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안식일 준수의 근거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안식에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또 하나의 창조인 인간의 구원 사역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곧 오늘의 주일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연관지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사건 모두 죄악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이나 신약의 주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수라는 측면에서 같은 의미를 가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승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켰던 것처럼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는 주일을 십일조와 함께 구원과 복을 받을 수 있는 방편 가운데 하나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절기를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본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9-11)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절기를 지키고, 안식일 또는 주일을 지키고, 세례를 받고, 십일조를 내고, 죽을 만큼 봉사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진정한 복의 출처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세상에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참된 안식은 시간이 아니라 존재 상태입니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안식입니다. 주일 하루만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모든 날에 안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엿새 동안은 지극히 인간적으로 아무렇게나 살다가 주일에는 좋은 옷을 입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모순(矛盾)을 범하는 이유는, 이러한 안식에 대한 개념이 근본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불과 열 다섯의 나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후 한순간도 우선 순위의 첫 번째 자리에서 주님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1924년에 파리 올림픽 100m 국가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출전할 100m 경기는 주일에 열렸습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결국 주일을 지키기 위해 참으로 오랫동안 준비하고 꿈꿔왔던 경기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국가 경기 위원회와 각종 매스컴과 국민들로부터 나라를 욕되게 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아야했습니다. 총감독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주일에는 달릴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금메달 후보로서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당당하게 올림픽에 출전한 그는 어느 경기에도 출전할 수 없는 대표팀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에게 주일이 아닌 다른 날에 열리는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의 끈질긴 설득에 감동한 감독은 이제까지의 관례를 깨고 400m 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경기에 출전한 그는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고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결승전이 열리기 전 마사지 담당자는 그에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삼상2:30b)라는 말씀을 적은 쪽지를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생사 화복과 빈부 귀천의 유일한 근거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높이 들어주십니다.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은 끌어내리십니다.
만인의 웃음거리로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마사지 담당자는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니 하나님을 의지해서 달리라고 그를 격려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말씀에 의지하여 트랙을 돌았습니다. 그때 그에게 불만을 가졌던 한 경기 위원은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그의 생애의 유일한 목표일 것이라고 비꼬았습니다. 절대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그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깨뜨려버렸습니다.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일기 조건 가운데서도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당당하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는 당시의 상황을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출전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었던 100미터 경기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 일로 인해,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의 원칙에 대해서 비난했다. 그러나 그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400미터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그 나라는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육상선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가 끼친 영향력이나, 그가 보인 모범이나, 그의 능력 등 모든 면에 있어서 그는 스코틀랜드가 배출한 최고의 선수다”라고 말했습니다. 선수 생활을 마친 그는 누나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나를 만드셨어. 중국말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중국 선교의 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에 점령당함과 동시에 그는 포로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음식과 옷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화장실 시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포로들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습니다. 누구도 그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할 때나, 수용소에서 생활할 때나 그의 모습은 언제나 한결 같았습니다. 상처받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모두가 꺼리는 석탄 나르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낡은 커튼으로 만든 초라한 색깔의 셔츠를 입고 생활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금장 시계를 팔았습니다. 하키용 스틱을 감싸기 위해 자기의 홑이불을 찢었습니다. 한 러시아 매춘부는 그가 자신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엇인가를 해 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포로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말하는 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그가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점호 시간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수용소 간수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옆에 있던 동료는 그가 몇 시간 전에 죽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와 한번도 대화해본 일은 없었지만,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간수는 포로들에게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지요. 그렇죠?”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기 전 자신의 간호사에게 “완전한 복종인 거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한 조국의 신문들은 “스코틀랜드는 평생을 걸쳐 나라의 자존심을 세워준 아들을 잃었다.”고 대서특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가장 탁월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성품을 삶 속에 나타낸 사람이었다고 칭찬했습니다. 선교사 아놀드 브리슨(Arnold Bryson)은 장례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 그의 헌신과 큰 영향력의 비밀이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삶이었고, 한번도 시들지 않은 헌신과 모든 사람들이 볼 수밖에 없는 뜨거운 열정으로 자기 주인이신 주님을 따르는 삶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불의 전차”라는 영화의 실제 모델인 에릭 리델(Eric Liddell), 그는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스코틀랜드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얼마나 존중하고, 소중히 생각했었는지 주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락이나 스포츠를 삼가 했습니다. 성실하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긴급한 일이 아니면 대중교통 수단도 운행을 중단했습니다. 그들은 주일을 주님을 예배하며 섬기기 위해 특별한 날로 구별해 놓았습니다. 만약 누군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일도 사랑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철저히 주일을 지키는 환경 속에 자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실제 임상을 통한 결과에 의하면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쉰 당나귀는 짐을 지고 하루에 약 50km 이상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도 쉬지 않은 당나귀는 그 반인 25km정도 밖에 가지 못합니다. 스위스의 해글러 박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은 평소 밤에 휴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산소보다 더 많은 양을 낮의 활동을 통해 소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주일 하루의 쉼을 통해 6일 동안 소비하는 양보다 더 많은 산소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일을 쉬는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일하는 사람보다 더 말쑥하고, 활력과 생기가 넘칩니다.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약 2,000여 년 동안 성경의 가르침대로 엿새는 일하고 하루는 쉬었습니다.
그러나 유불선(儒佛仙)의 영향을 받은 동양 사람들은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왔습니다. 그 결과 시간상으로 따지면 약 280년 이상을 더 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서양에 비해 뒤떨어져 있습니다. 한때는 서구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 나무꾼은 점심시간 약 20분을 쉰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무꾼은 점심시간 외에도 서너 차례 더 쉬면서 나무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더 많이 쉰 나무꾼의 나무가 훨씬 많았습니다. 충분한 휴식을 통해 힘을 비축하고, 또 그 때를 이용해 도끼 날을 다듬고 세웠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잊은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주님의 날을 잊은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칼날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하신 은혜를 망각한 채 주일을 범한 영국은 히틀러의 군화 발에 철저히 짓밟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죄와 죽음과 저주에서 구속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아니 지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모델인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하루하루를 주일처럼 살고 있습니까? 모든 날들을 주일처럼 구별하여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사58:13-14a)고 약속하셨습니다. 속사도 시대의 거장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한 주일의 첫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외쳤습니다. 안식일 곧 주일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인간은 물론 모든 짐승들에게까지도 반드시 필요한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한 주일의 첫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나무가 거대한 폭풍과 가뭄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뿌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뿌리가 깊어야합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뿌리는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만들고, 일시적이고 저속한 세상 것들에 빠뜨리는 폭풍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강하고 튼튼한 뿌리 조직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의 뿌리가 되는 이 예배가 얕다면, 예배를 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강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삶의 분주함과 마음을 빼앗는 무수히 많은 일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깨어진 언약을 갱신하시면서 당신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순종할 뿐 아니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하여 수많은 세월을 방황하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은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평안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 토마스 켐피스(Thomas a Kempis)는 주님만이 모든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겔20:12, 20a)는 하나님의 선포하심대로,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할 거룩한 날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참된 안식의 주인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로 승화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 안에서 매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일처럼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약의 교회는 매일 매일을 주일처럼 지켰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매일을 주일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고 있습니까?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범브란트(Richard Wurmbrand) 목사는, 루마니아가 공산화된 후 지하 교회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1948년 부인과 함께 체포된 이후 무려 14년 동안이나 도무지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풀려난 후 열 여덟 군데의 상처를 보여주며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기에 기뻐했고, 나를 고문하는 공산당원들은 나에게 고통을 주면서 기뻐하여 우리는 다같이 기뻐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모진 고통 속에서도 매일을 주일처럼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입니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 곧바로 전방으로 투입될 군인들을 위한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 연회가 끝날 즈음, 단에 올라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젊은 장교는 계속해서 “머지않아 우리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라도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될지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 연회에 참석한 한 가수가 멘델스존의 “엘리야”에 나오는 “오 주님 안에 안식이 있나니, 그 분을 향해 인내하며 기다릴지라. 그 분께서는 당신 마음의 소원들을 주시리라. 당신의 길을 그 분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라!...오 주님 안에 안식이 있나니. 그 분을 향해 인내하며 기다릴지라. 그분께서는 당신 마음의 소원들을 주시리라.”는 내용의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인생의 위협들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하고, 충분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전이십니다. 위로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그분을 예배하는 가운데 그 무엇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탐욕을 내려놓으십시오. 힘써 일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 속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루하루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배드리는 삶을 사십시오.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것과 하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살아 계심을 증거 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참된 안식 곧 모든 환난과 시험을 이기고도 남을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