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자료[858]이태백청평조사(淸平調詞) 3수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淸平調
양귀비를 노래함
雲想衣裳花想容(운상의상화상용)
구름 같은 치맛자락, 꽃 같은 얼굴
春風拂檻露華濃(춘풍불함로화농)
난간을 스치듯, 영롱한 이슬일레라.
若非群玉山頭見(약비군옥산두견)
군옥산 마루서 못 볼 양이면
會向瑤臺月下逢(회향요대월하봉)
요대의 달 아래에서 만날 선녀여.
一枝濃艶露凝香(일지농염로응향)
한 떨기 농염한 꽃, 이슬도 향기 머금어
雲雨巫山枉斷腸(운우무산왕단장)
무산녀의 애절함은 견줄 수 없네.
借問漢宮誰得似(차문한궁수득사)
묻노니, 한나라 궁궐에 비길 이 있을까
可憐飛燕倚新粧(가련비연의신장)
비연이 새 단장하면 혹 모르리.
名花傾國兩相歡(명화경국량상환)
꽃도 미인도 서로 즐거움에 취한 듯
常得君王帶笑看(상득군왕대소간)
바라보는 황제도 웃음이 가시질 않네.
解釋春風無限恨(해석춘풍무한한)
살랑이는 봄바람에 온갖 근심 날리며
沈香亭北倚欄干(침향정배의난간)
침향정 북쪽 난간에 흐뭇이 기대섰네.
<註> *拂(불)-떨 불
*檻(함)-우리 함(짐승우리) ※拂檻(불함)-난간을 스치다
※群玉山(군옥산)-崑崙山 서쪽 西王母가 산다는,
산마루가 옥(玉)으로 이루어진 상상 속의 산
※瑤臺(요대)-瑤池(요지)의 樓臺(누대)
※瑤池(요지)-군옥산 가운데 있는 옥으로 둘러싸인 연못
※巫山(무산)-楚의 懷王과 밀회를 즐겼다는 아름다운 선녀인
巫山神女(무산신녀)의 고사<巫山之夢>
※君王(군왕)-唐 太宗
※沈香亭(침향정)-태종의 궁궐 興慶宮(흥경궁) 안에 있던 정자각
◇飛燕(비연)-漢나라 成帝의 총애를 받던 황후 趙飛燕(조비연)을 말함.
너무 날씬하여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춘다는 의미의
作掌中舞(작장중무)라는 말을 만들어낸 미인이다.
조비연은 동생 합덕(趙合德)까지 데려와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성종이 죽은 후 자매는 비참하게 살다가 둘 다 자살한다.
양귀비는 약간 뚱뚱하여 富貴牡丹(부귀모란-복스러운 모란꽃),
조비연은 臨風楊柳(임풍양류-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들) 형 미인이라고 했다.
◇이 詩는 당 현종의 요청으로 이백이 양귀비를 위하여 지어 올린 시인데
술에 만취한 이백이 불려와 무소불위(無所不爲) 정권을 휘두르던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겨달라고 한 것이 고력사의 원한을 샀다.
훗날 詩에서 양귀비를 비운의 결말을 맞은 조비연과 비교하였다고
트집을 잡아 이백이 벼슬자리에서 내 쫓기게 된다.
술 한 잔에 백 편의 시를 짓다
618년에 건국되어 약 290여 년간 지속됐던 당 왕조는 중국 내륙 왕조 중 한 왕조 이래 두 번째 대제국이었다. 한나라가 한족의 순수한 정체성을 확립했다면, 당나라는 그 정체성의 세계화를 이루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당나라는 사상적으로 대단히 관대하고 방임적이어서 세계문화적 성격을 띠는 국제적이고 종합적인 문화를 이룩했다. 특히 당 대의 문학은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했다.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이백은 그에 따라 시 세계 또한 복합적이고 다양한 양상을 띠는데, 그는 근체시, 고체시, 악부시 등을 고루 잘 지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잘 맞는 악부시에 특히 뛰어났다. 이백은 또한 서정시의 새 국면을 열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이백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으로 출생과 본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그가 촉(蜀) 태생으로, 모친이 꿈에서 태백성(太白星, 금성)을 보고
출산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왔다는 설로,
이는 아버지 이광(李廣)이 서역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태어났다는 설과
부친이 서역의 부유한 상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백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단 젊은 시절 촉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백은 스물다섯 살 무렵 촉을 떠나 양양, 형주, 무창, 금릉(金陵), 양주 등
장강 연안 지역을 유람하며 시 창작의 제재를 얻었다.
그는 안릉(安陵)에서 10년 정도 머물러 살 때
맹호연(孟浩然,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긴 시인)과 교류했다. 이백은 서른다섯 살 무렵 안릉을 떠나
북쪽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산동 연주(兗州)의 조래산(徂徠山)에서
도사 공소부(孔巢父), 배정(裵政) 등 네 사람과 함께 머물며 술로 나날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6명을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고 불렀다.
이백의 유람 생활은 두 가지로 읽힌다. 단순한 유람 생활이었다는 설과
출사를 위해 명사들과 교류했다는 설이다. 이백은 당시 자유분방하고 거
침없는 문장력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어도 왕족이나 제후 등 권세가들에게
청탁하지 않고는 출사하기가 힘들었던 때로,
천성이 청렴했던 이백에게 출사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742년 이백이 회계에서 머물며 교류했던 도사 오균(吳筠)이 현종의 부름을 받고
궁에 들어갔다. 오균은 현종에게 이백의 재능을 칭찬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이에 이백은 장안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마흔두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망하던 출사를 하게 된 것이다.
장안에 도착한 이백은 오균의 소개로 고관 하지장(賀知章)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하지장은 이제야 이백과 만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이백을 ‘적선인(謫仙人)’이라고 칭했다.
이백은 현종을 알현하고 다시 한 번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 천자의 조칙을 기초화하는 일을 하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조정에 나간 이백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관직은 유명무실한 직책으로 현종은 그가 관리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펼쳐 주길 바랐다.
이백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노령의 현종은 애첩 양귀비와의 환락에 빠져 있었고,
조정은 온통 비열한 소인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에 당 조정에 실망한 이백은 맘껏 술을 마시고,
미친 듯 행동하며, 장안의 술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어느 날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침향정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흥을 돋우기 위해 이백을 찾았고,
이미 고주망태가 된 이백이 사람들에게 억지로 끌려왔다.
현종은 친히 이백의 술기운을 깨우고, 양귀비에게 손수 먹을 갈게 했다.
그는 취기를 빌어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를 지었다.
구름 같은 치맛자락, 꽃 같은 얼굴(雲想衣裳花想容)
살랑이는 봄바람, 영롱한 이슬일레라(春風拂檻露華濃).
군옥산 마루서 못 볼 양이면(若非群玉山頭見)
요대의 달 아래에서 만날 선녀여(會向瑤臺月下逢).
한 떨기 농염한 꽃, 이슬도 향기 머금어(一枝濃艶露凝香)
무산의 애절함은 견줄 수 없고(雲雨巫山枉斷腸).
묻노니, 한나라 궁궐에 비길 이 있을까(借問漢宮誰得似).
조비연이 새 단장하면 혹 모르리(可憐飛燕倚新粧).
꽃도 미인도 서로 즐거움에 취한 듯(名花傾國兩相歡)
바라보는 임금님 웃음도 가시질 않네(常得君王帶笑看).
살랑이는 봄바람에 온갖 근심 날리며(解釋春風無限恨)
침향정 북쪽 난간에 흐뭇이 기대섰네(沈香亭北倚欄干).
이백이 단숨에 아름다운 시를 짓자 크게 기뻐한 현종은
이백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이백은 당대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환관 고력사가 자신의 신을 벗기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일로 이백은 고력사의 원한을 샀으며, 양귀비 또한 자신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조비연(趙飛燕, 한나라 성황제의 황후로
중국의 전통적인 미인으로 여겨진다)에 빗댄 것 때문에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
양귀비나 환관 고력사 등 권세가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킨 이백은
결국 현종에게 중용되지 못했다. 이백은 주색에 빠진 현종에게 환멸을 느껴
744년 장안을 떠났다. 이 시기 이백은 두보(杜甫)를 알게 되어
그와 우정을 나누며 시를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안을 떠난 후 이백은 10여 년간 산동에 거처하면서 유람 생활을 했다.
이백의 친필로 기록된 《상양태첩》
755년 이백이 명승 노산(盧山)에 머무를 때 안사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현종의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이 난을 제압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겠다며 강남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백은 이린의 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태자 이형이 이린을 견제하고자
먼저 왕위에 올라 숙종에 올랐다. 후에 숙종의 명령으로 곽자의(郭子儀)가
안사의 난을 평정하자, 이린을 도왔던 이백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백은 곽자의와의 친분으로 사형을 간신히 면하고, 귀주(貴州) 야랑(夜郞)으로
유배를 떠났다. 야랑을 향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이백은 도중에
사면 통지를 받고 풀려났다. 그 후 이백은 금릉(金陵), 선성(宣城) 등
장강 중하류 지역을 유람했다. 그는 만년에 친족인 이양빙(李陽氷)에게 의탁했고,
762년 임종을 맞을 때 시문이 적힌 초고를 이양빙에게 맡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백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달빛이 은은한 저녁에 취해 우저기(牛渚磯)에서 홀로
뱃놀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백이 하늘을 보니 거울 같은 얼음이요,
몸을 숙이니 강물에는 밝은 달만 있는 것이 아닌가.
이백이 흥에 겨워 강물 속의 달을 건지려다 그만 배에서 떨어져 익사했다는 것이다.
술과 시를 사랑했던 이백다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