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반추하다
-서명숙의 ‘영초언니’를 읽다
시골출신의 얼뜨기가 입학한 대학은 무척 추웠다. 항상 권력의 양지에서 독재정권과 보조를 맞췄던 신학대학이었지만, 선배들은 1979년 말 ‘서울의 봄’을 맞아 독재의 주구 재단이사장과 어용목사들을 축출하기 위해 학내민주화투쟁을 전개했다. 서울과 광주에서 그랬듯이 투쟁의 결과는 분열과 좌절뿐이었다.
준이 형은 기숙사 선배였다. 인천 만석동의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형은 가난 속에서도 늘 기쁨과 감사를 주었던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며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그의 신심은 돈독했고 신앙은 독실했다. 그런 그에게도 부도덕한 보수교단과 불합리한 학내 상황은 수용하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그런 괴로움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어서였을까 형은 보수교단의 울타리를 벗어나 진보교단과 기독교 노동운동에 눈을 돌렸다. 내가 형을 만난 건 그 때쯤, 형은 3학년이었고 나는 신입생이었다.
정착할 교회를 찾아 헤맬 때 형이 영등포에 좋은 교회가 있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교회의 분위기는 내가 지금껏 경험한 것과 판이했다. 공기부터 달랐고, 단순한 가사라고 생각했던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부르면서도 흐느껴 우는 모습이 생경했다. 예배 후 교회 마당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배를 피우며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충격이었다. 그 교회가 ‘영등포 도시산업산교회’였다. 일요일에 설교했던 목사님이 신문과 뉴스에서만 봤던 조화순, 인명진, 조승혁 목사였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모든 것이 섬뜩했다. 빨갱이 소굴에 들어온 느낌은 더운 여름에도 후들후들 떨게 했다. 하지만 관계를 단절하기에는 형과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그렇게 끌려 다니는 기분으로 좌경용공분자였던 이영희선생님 강의도 들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노학연대투쟁이었다는 원풍모방(주)과 콘트롤데이타(주) 투쟁에도 참가했다.
형은 전두환독재정권의 감시와 탄압으로 엄혹했던 1982년, 과거 학내민주화투쟁을 주도했던 선배들과 서울대나 이대에서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던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새로운 투쟁전선을 구축하려 애썼다. 4명이 정원이었던 기숙사 우리 방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선후배 몇몇이서 강원도 원주의 외딴집(속칭 지옥산장)에서 처음으로 엠티도 했다. 1학년을 마치고 서둘러 입대를 했다. 하지만 형은 휴가를 나온 나를 챙겨주며 관계를 지속했고,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후배들을 소개해주면서 가까이에 두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형은 민중투쟁을 하고 싶다며 강원도 태백으로 떠났다. 하지만 학내에는 형이 뿌려 놓은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태백에 내려간 형은 뛰어난 친화력과 진실성으로 탄광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의식화하며 연착륙에 성공했다. 탄광노동자들과 함께 펴낸 ‘막장의 빛’이라는 신문도 종종 보내왔다.
대학졸업 뒤 교사 자리가 났다는 소식에 서둘러 평택으로 내려왔다. 평택에 내려와서도 매주 서울 명동으로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종종 형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진보교단으로 바꿔 탄 형은 1,2년에 한 두 번씩 교회에 들러 설교도 하고 상호협력관계를 협의한 뒤 내려가곤 했다. 그러다가 내가 결혼을 하고 교회까지 평택으로 옮기면서 서로 소식이 뜸해졌다. 간간히 태백 일대의 폐광문제 해결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닌다거나, 탄광촌 재생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강원랜드’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먼 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대학민주동문회 송년회 자리에서 형을 다시 만났다. 형은 강원도의 일들을 정리하고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인연을 발판삼아 참여연대 사회복지분야와 사랑의 연탄나눔운동본부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한다고 했다.
2018년 평택시한책읽기선정 예비도서 중에 ‘영초언니’가 있었다. 사실 잘 모르는 책이었고 딱히 읽고 싶지도 않았는데 장선생님이 ‘좋은 책’이라며 뽑아 주었다. 겉장이 노리끼리 한 것이 소년소설 같았고, 앞서 백창화씨 부부의 ‘유럽아날로그 책 공간’이라는 기행서를 휘리릭 읽었던 터라 대충 맥락이나 잡자고 집어 들었다. 헌데 서문을 읽으며 나의 다짐은 산산이 부서졌다. 얼마 전 내가 읽으려고 점찍어두었던 책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영초언니’는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씨의 1970, 80년대 자서(自敘)이다. 1970년대 후반은 나에게 낯설다. 저자와 5년 터울에 불과하지만 중학생과 대학생은 엄연히 다른 세계였고, 1970년대는 정치와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죄악시 되었던 엄혹한 세상이었을 뿐 아니라 변화무쌍한 격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내 자각이 닿는 시대는 아무래도 1980년대다. 고3 때 맞이했던 광주민주항쟁은 짱돌과 최루탄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던 텅 빈 광주시가지의 풍경으로라도 남아 있고, 신군부가 내세운 ‘정의사회 구현’, ‘복지사회 건설’이라는 구호도 낮 익은 기억으로 살아 있다. 그래서일까 ‘영초언니’의 내용도 1970년대 후반은 낯설고, 1980년대의 일들은 영화 ‘1987’을 보는 것처럼 아주 선명하게 다가왔다.
1980년대에는 ‘영초’같은 대학생이 무척 많았다. 사상적으로도 1970년대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70년대만 해도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사회, 미국 수준의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를 꿈꾸었지만, 민주화의 봄과 광주민주항쟁이 좌절되고 신군부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자본주의와 독재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운동가들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준이 형도 그런 사람이었고 서명숙이나 천영초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영초 언니’를 읽으며 며칠 전 CGV영화관에서 봤던 영화 ‘1987’이 오버랩되었다. 영화가 아니라 다큐같은 느낌, 과거가 아니라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착각. 지금도 우리사회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거나, 또는 죽거나, 나이를 먹어 사회 한 켠으로 밀려난 1970, 80년대 세대가 살아가는 모습들이 하나하나 투영되었다. 정문호, 엄주웅, 이혜자, 천영초... 준이 형, 미화누나, 닭(별명), 까치(별명), 성우, 영운이, 명동성당, 5가(종로5가 기독교회관), 도시산업선교회... 한 인물, 한 장소가 떠오를 때마다 기억날 때마다 인터넷을 뒤진다. 그 인물의 현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탄식과 환호, 좌절도 한다. 그들이 주역으로 사는 오늘의 우리사회는 얼마나 진보했는지, 투쟁의 현장에 섰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되묻기를 수차례. 그 질문은 나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깨달음이 깊어지고, 세상 풍파에 치이다 보면 삶의 모습도 달라지고 때론 왜곡되겠지만 젊고 푸르렀던 이상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영초언니’를 통해 반추하는 세상보다, 준이 형으로 기억하는 세상보다, 그 시대를 아파하며 열정적으로 건넜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오늘이 더 나은 세상이어야 하는데. (2018.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