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던 하나님의 법궤가 드디어 다윗에 의해 다윗성으로 옮겨지게 된다.
왕권에 의해 사실상 강제이동이 단행된 것이다.
제일차 법궤 이동 사건은 웃사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일차 법궤 이동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길래 사람이 죽는 불상사까지 발생하게 되었을까?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보면 법궤이동의 안은 순전히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기인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므로서 명실상부한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다윗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나름대로는 정성스럽게 모든 준비를 진행한다.
다윗은 새 수레를 장만하여 한 번도 멍에를 지지 않았던 소로 하여금 끌도록 한다.
물론 가지가지의 악기를 동원하여 기쁨을 배가시키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웃사와 아효, 이 두사람은 하나님의 법궤 이동에 있어서 사실상의 관리책임자이다.
아효는 수레의 앞에서 몰이꾼의 역할을 감당하고
그리고 웃사는 수레의 뒤를 따르며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며 걸음을 옮겨놓는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소가 날뛰기 시작했고 이에 하나님의 법궤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칠 칠 위험에 직면한다.
순간 웃사는 손을 뻗어 하나님의 법궤를 잡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웃사를 충돌하사 즉사하고 말았다.
웃사의 안타까운 죽음에 다윗은 망연자실, 더 이상 법궤 이동을 주장하지 못하고 가드 사람인 오벳에돔의 집에 법궤를 옮겨놓는다. 그리고 다윗은 그 웃사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 자리를 "베레스 웃사"라 이름한다. 이렇게 일차 법궤이동사건은 불행으로 종결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분명 믿음으로 시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궤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지지 못한 채 이방인의 집으로 옮겨지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끝맺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차 법궤 이동은 무엇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그리고 그 실패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으며 웃사의 죽음에서 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법궤 이동의 실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아니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수 있는 방편은 내 방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편이란 점이다. 즉 아무리 내가 옮기고 싶은 방법이 좋아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유일의 방법은 제사장들을 통한 것이란 사실이다. 즉 제사장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가야 되는데 일차 법궤 이동의 사례에서는 제사장들이 아닌 소와 새 수레가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준비들을 편리성이나 혹은 이방세계의 예법에 따른 것으로 해석함이 지나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정성을 기울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어야 함은 다윗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둘째, 실패의 원인이 하나님 방법대로 하지 않은데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그 실패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냐라는 점이다. 즉 다윗에게 실패의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인지를 물어보자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고자 시도했을 때 과연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했을까? 그리고 설령 혼자서 결정하고 지시했다고 하더라도 옮기는 방법을 비롯한 모든 진행절차에 대해 다른 이들과 한번도 의논이 없었을까?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썩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다윗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
법궤 이동과 관련하여 가장 이해관계가 큰 세력은 제사장을 비롯한 레위지파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윗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들의 심리적 상태는 다윗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침묵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웅변하고 있다. 문제는 레위집단의 침묵을 다윗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레위 지파가 집단적으로 침묵의 항변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법궤 이동에 뒤이은 사회구조의 변동, 그리고 그 파장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사실은 이것이 오늘의 사건에서 숨겨진 행간에 해당되는 대목이다. 예루살렘 성으로의 이동은 불원간 성전건축이라는 과제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성막과 성전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집에 대한 변화가 레위지파에게 미칠 영향은 무엇인가?
잘 아는대로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하고는 달리 생존을 위한 지역배분이 주어지지 않았다. 성경은 거듭거듭 레위지파의 지분이 다름 아닌 야훼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엄히 명령하신 것이 십일조이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좁은 개념은 레위인들의 생존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달리 말하자면 십일조가 레위인들의 밥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십일조를 내면서 레위인들을 섬길까? 그것은 백성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막에서의 모든 사역을 레위인들이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제반 제사의 업무를 감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법궤의 이동이 중심이 된 성막 이동에서 모든 일들이 레위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레위인이 아니면 하나님의 법궤가 옮겨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법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은 더 이상 법궤가 옮겨질 까닭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성막이 아니라 성전으로 대체될 것이 필연이기 때문이다. 성막과 성전의 차이점을 날카롭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속에 레위인들의 일 함과 일하지 못함의 행간이 숨어 있는 것이다. 성막이건 성전이건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기능에는 변함이 없다.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예배는 여전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하는 것에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즉 성막의 경우는 이동성이 강조되고 따라서 이동과 함께 레위인들의 숨은 일들이 노출된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과 물건들을 바리바리 짐으로 싸서 몸으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 성막과 연관된 레위인들의 일이다. 그러나 성전이란 그 성격상 이동이 불가능하다. 무슨 말인가? 더 이상 옮겨질 까닭이 없는 성전에서 레위인들이 할 일이란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물론 제사장들과 그 제사와 연관된 소수의 일들은 여전히 가능하겠지만 이동과 직결된 모든 일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국 레위인들을 놀고먹는 사람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이런 레위인들을 보면서 언젠가 백성들 사이에서 "무노동 무임금"의 구호가 터져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대량실직사태를 예감하고 있는 레위인들의 이유있는 침묵을 다윗은 법궤 이동의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를 앞에 두고서 비로소 읽게 된 것이다. 다윗은 레위인들의 이런 고민들을 읽지 못한 채 그저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는 오직 한 가지만으로 자기만의 기쁨에 들떠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 우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이들의 슬픔을 읽지 못하고 있는 최고 통치권자 다윗의 가벼움을 본다. 하나님의 법궤 이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며 여기에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필수적 절차가 생략된 채 당연히 다윗 성으로 들어와야 된다고 하는 자기 나름의 독단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일차 법궤 이동의 실패, 그 전적인 책임은 다윗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