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는 관광지는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가보려 하지만
가까운 곳일수록 잘 안 가지는 법이다.
일요일 낮 시간을 이용하여 부산역 앞의 ‘이바구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큰동생과 부산역 앞에서 만나 요즘 부산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예전 백제병원을 개조해서 만든 ‘브라운핸즈백제’란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아직 안내판이 잘 갖춰지지 않아 입구에서 조금의 방황을 거쳐
이바구길 초입 골목에 다다르니 이 지역을 빛낸 사람들의 얼굴들,
예전 추억의 사진들, 기록들...
이곳 출신의 익숙한 연예인 이름도 있다. 나훈아 이경규 박칼린...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할머니가 물동이에 담아 식혜를 파시는데
싼 가격에 대야에 놓고 소일삼아 파시는 듯하여
“내려오는 길에 살게요.” 하고는 올라갔는데 약속을 못 지켰다.
나중에 보니 내려오는 길이 다른 길이었다.
구름이 짙고 약간의 비가 흩뿌렸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로 변했다.
높다란 계단 하나를 오르니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168계단.
까마득한 계단 옆에는 모노레일을 탈수 있는 시설이 있다.
8명까지 탑승가능하고 무료이다.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기다리다 도착한 모노레일을 타고
계단을 오른다. 너무 경사가 심해 조금 불안하기도 했으나
별 일없이 계단위에 우리를 내려주고 다시 제 할 일을 한다.
모노레일 탑승장의 옥상에서 바라보는 부산항 경관,
영도의 봉래산 꼭대기가 구름에 걸려있다. 부산항대교.
바다, 배들... 항구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 ‘이바구공작소’란 곳에 도착을 한다.
이바구란 말은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우리의 어릴 때까지의
사진이며 사투리 옛날교복이며 교과서등이 전시되어있다.
물론 사전에 알고 간 것 보다는 살짝 못 미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더운 날씨에 잠시 쉴 곳을 제공해 준 자체로도
고마운 곳이었다.(시설 이용료 없음)
골목을 빠져나와 산복도로 길을 걷다 마주한 카페.
늘 가보고 싶었던 ‘초량1941’
일제 강점기 적산가옥을 카페로 꾸며 놓은 곳이었는데
특이하게 우유카페다.
우리가 간 날은 밖에서 대기하는 손님까지 해서
사람이 너무 많아 하는 수 없이 그냥 시설만 보고 나왔다.
내려오는 길 카페 바로 옆에 있는 금수사 절집에 들러
발소리 죽여 절을 휘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왔다.
절집에 행사가 있기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가자! 유치환을 만나러...
백석에게 자야가 있었다면
유치환에게는 이영도시인이 있었다.
청마가 수천통의 편지를 보낸 여인.
그녀로 인하여 청마의 글이 더 빛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잠시 유치환 기념관이 있는 전망대에 머물며 통영의 시인 유치환의
부산시절을 되돌아본다.
이곳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청마의 마지막 삶터에서
학교 다닐 때 교과서로 접했던 청마의 ‘깃발’이란 시 보다
더 유명한 ‘행복’이란 글을 읊조려본다.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로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아비구길을 돌아내리는 길.
가파르고 힘든 산비탈이란 뜻을 내포한 경상도 사투리 ‘까꼬막’.
까꼬막이란 카페에서 찬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케 하는 오늘 걸음들을
되짚어본다.
걸어 내려오며 김민부전망대를 못보고 온 게 아쉬웠지만
어쩔수 없었다.
초량불백거리를 지나 돼지갈비골목 옆
초량시장에서 오징어무침이랑 소주 두병으로 동생과의
오늘 이바구길 탐방을 마무리 했다.
땀도 많이 흘렸고 반 술에 입에 맴도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나의 모습에서 예전 아버지를 본다.
피곤 했지만 참 괜찮은 하루였다 되뇌며.
적어야 할 얘기 거리가 많았지만 길어질 것 같고
또한 기행문을 적어야 하는데
이런 곳이 있다고 알리는 안내문 같은 글이 되었다.
허나 이리 마무리 해두고 틈날 때 마다 첨삭을 더하면
두고두고 볼 수 있는 글도 되고 추억이 더 오래일 것 같아
시간을 쪼갠 초고를 올린다.
산책하는 느낌으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니 한번 둘러 보시길...
물론 쉬는 정도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지만 ^^
매양 좋은 날.
남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