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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1장 밥이 사랑이다
아버지 등에 업혀 배운 평화
나는 평생을 한 가지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평화로운 세상, 전쟁과 다툼없이 온 세계가 사랑을 나누며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아니, 어떻게 어려서부터 평화를 생각하며 살았단 말이오?" 하고 되묻습니다. 평화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이 과연 거창한 일인가요?
내가 태어난 1920년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6.25동란과 외환위기 등 힘겨운 혼란을 여러 차례 겪으며 이 땅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아픔과 혼란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등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미워하며 총을 겨누고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환란을 겪은 이들에게 평화란 꿈에서나 그려보는 허황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평화를 실현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공기, 자연환경, 그리고 사람에게서 우리는 쉽게 평화를 구할 수 있습니다.
들판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어린 시절, 나는 아침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뛰쳐나가 온종일 산으로 강으로 쏘다녔습니다. 온갖 새와 동물들이 살고 있는 숲 속을 누비며 풀과 열매를 따먹다보면 온종일 배가 고픈 줄도 몰랐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숲 속에만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산에서 뛰놀다 잠이 든 적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께서 숲으로 나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용명아! 용명아!"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면 자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게 반가웠습니다. 나의 어릴 적 이름은 용명(龍明)입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얼핏 잠이 깼지만 잠든 척하고 아버지 등에 덥석 업혀가던 그 기분, 아무 걱정도 없이 마음이 척 놓이는 기분, 그것이 바로 평화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등에 업혀 평화를 배웠습니다.
내가 숲을 사랑한 것도 그 안에 세상의 모든 평화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숲 속의 생명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물론 서로 잡아 먹고 잡아 먹히지만, 그것은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이지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새는 새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서로 미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미움이 없어야 평화가 옵니다. 같은 종끼리 서로 미워하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나라가 다르다고 미워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미워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또 미워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200개국에 가까운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공항에 내렸을 때 '이곳 참 평화롭고 푸근하구나' 하고 느낀 나라는 많지 않았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총검을 높이 든 군인들이 공항을 감시하며 도로를 폐쇄하고 밤낮없이 총소리가 들리는 곳도 많았습니다. 평화를 이야기하러 간 곳에서 총에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여전히 크고 작은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먹을 게 없어 굶주리는 사람이 수천만 명인데, 군사비로 쓰이는 돈은 수천조에 이릅니다. 총과 폭탄을 만드는 데 쓰는 돈만 아껴도 그 많은 사람이 배고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념과 종교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는 나라 사이에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화합하도록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이라크를 사이에 두고 대결하는 미국과 소련의 의견을 조율하고, 북한과 남한이 화해하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돈이나 명예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철이 들고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화두는 단 하나, 세계가 하나 되어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바란 적도 없습니다. 밤낮없이 평화를 위해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오로지 그 일을 할 때 행복했습니다.
냉전시대에 우리는 이념에 의해 세계가 둘로 나뉘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때는 공산주의만 사라지면 곧 평화가 이루어질 것 같았지만, 냉전이 끝난 지금 더 많은 다툼이 생겼습니다. 인종과 종교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국경을 맞댄 국가끼리 반목하는 것도 모자라 같은 나라 안에서도 인종끼리 나뉘고 종교로 갈라지고 태어난 지역으로 다시 쪼개집니다. 이렇게 분열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원수가 되어 도무지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돌아볼 때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인종간의 전쟁이었습니다. 그것도 종교를 앞세운 인종간의 전쟁이 가장 참혹합니다. 20세기 최악의 민족분규라고 불리는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이슬람교도의 씨를 말리기 위한 인종청소가 자행되어 어린이를 포함한 7천여 명의 이슬람교도들이 학살되었습니다. 뉴욕의 110층짜리 무역센터 건물을 비행기로 들이받아 두 동강냈던 9.11테러도 기억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민족과 종교간의 분쟁이 초래한 참담한 결과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에서는 이스라엘이 감행한 미사일 공격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추위와 배고픔, 죽음의 공포 속에 떨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것인지 표면적인 이유야 여러 가지이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종교가 버티고 있습니다. 석유를 둘러싸고 벌인 걸프전이 그렇고, 예루살렘을 차지하려는 이슬람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그렇습니다. 이처럼 인종주의가 종교라는 명분을 등에 업을 때,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중세시대에 끝났다고 생각했던 종교전쟁의 악령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종교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는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 종교간의 적대감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목적 앞에서 종교는 방향을 잃고 휘청거립니다. 종교가 가진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본래 평화를 위해 존재합니다. 모든 종교는 세계평화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종교가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니 개탄할 노릇입니다. 그 추악한 뒷면에는 권력과 자본을 쥔 검은 정치가 숨어있습니다. 지도자의 본분은 모름지기 평화를 지키는 것인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세계를 대립과 폭력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마음이 올바로 서지 않으면, 나라와 민족은 갈 곳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검은 야욕을 채우기 위해 종교와 민족주의를 이용합니다. 종교와 민족주의의 본질은 나쁘지 않지만, 세계 공동체에 이바지할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내 민족과 내 종교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민족과 다른 종교를 무시하고 헐뜯는다면 그 가치를 잃고 맙니다. 내 종교를 주장하느라 남을 짓밟고 남의 종교를 하찮게 여겨서 미움을 쌓고 분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민족, 내 나라만 옳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도우며 사는 것이 우주의 진리입니다. 하찮은 동물들도 그것을 압니다. 고양이와 개는 서로 앙숙이지만 한 집안에서 같이 키우다보면 서로의 새끼를 품고 보듬으며 친하게 지냅니다. 이는 식물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나무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칡넝쿨은 나무의 줄기에 기대어 자랍니다. 그래도 나무는 "너는 왜 나를 감고 올라가느냐"고 칡넝쿨을 탓하지 않습니다. 서로 위해주면서 같이 사는 것이 바로 우주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벗어나면 반드시 멸망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민족끼리, 종교끼리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일이 계속된다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끊임없는 테러와 전쟁으로 어느 날 먼지처럼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희망은 분명히 있습니다.
나는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평생을 평화를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나의 바람은 세상을 겹겹이 에워싼 담장과 울타리를 깨끗이 헐어버리고 하나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종교의 담장을 허물고, 인종의 울타리를 넘어서 부자와 빈자의 틈을 메운 뒤 태초에 하나님이 지으셨던 평화로운 세상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도 없고 눈물 흘리는 사람도 없는 세상 말입니다. 희망이 없는 세계, 사랑이 부족한 세상을 치유하려면 우리는 다시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에서 벗어나 인류의 아름다운 본성을 회복하는 길은 어린시절 아버지 등에 업혀서 배운 평화의 원리와 사랑의 숨결을 되살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는 기쁨
나는 눈이 아주 작습니다. 어찌나 작은지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 "우리 아기 눈이 있나 없나 ?" 하며 일부러 눈을 벌려 보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갓 태어난 내가 눈을 깜빡깜빡해서 "어머나, 우리 아가 눈이 있기는 있구나!"하며 기뻐하셨답니다. 그렇게 눈이 작았던 탓에 어려서는 '오산집 쪼끔눈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래도 눈이 작아 볼품없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관상을 좀 볼 줄 아는 이들은 내 작은 눈에 종교 지도자의 기질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카메라의 조리개도 구멍을 좁힐수록 더 멀리 볼 수 있는 것처럼 종교 지도자는 남보다 멀리 내다보는 선견이 있어야 하는 점에서 그런가 봅니다. 내 코는 별나기는 마찬가지여서 한눈에 봐도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게 생긴 고집불통 코입니다. 관상이 영 허튼소리만은 아닌 것이,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생겼나' 싶습니다.
나는 평안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아버지 남평 문씨 문경유文慶裕와 어머니 연안 김씨 김경계金慶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음력 1월 6일이 내가 태어난 날입니다. 상사리에는 증조할아버지 때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수천 석의 농사를 손수 지으시며 자수성가로 가문을 일으키신 증조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으시고 그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밥 한 끼라도 더 먹이는 것을 보람으로 아는 분이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팔도강산 사람에게 밥을 먹이면 팔도강산에서 축복이 몰려든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집 사랑방은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습니다. 우리 동네 너머 사람들까지도 '아무 동네 문씨 댁에 가면 밥을 거저 준다'는 것을 모두 알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고단한 수발을 척척 해내면서 불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시도 쉬는 법이 없을 만큼 부지런하셨던 증조할아버지는 틈틈이 짚신을 삼아 장에 내다 파셨고, 늙어서는 "후대에 우리 자손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하고 빌면서 오리를 여러 마리 사서는 놓아주시곤 했습니다. 또 사랑방에 한문 선생을 들여 동네 청년들에게 글을 무료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증조할아버지에게 선옥善玉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우리 집을 일컬어 '복 받을 집' 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자랄 적에는 그 많던 재산이 모두 날아가고 그저 밥술이나 먹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밥 먹이는 가풍만은 여전해서 식구들이 먹을 밥이 없어도 남을 먼저 먹였습니다. 그 덕분에 내가 걸음마를 떼자마자 배운 것이 바로 남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로 피난을 떠나던 이들이 지나던 길목이 평안북도 선천宣川이었는데, 우리집이 바로 선천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었습니다. 집도 땅도 모두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만주로 향하던 사람들이 우리집 앞을 지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집 앞을 지나가는 팔도 사람들에게 언제든 밥을 해서 먹이셨습니다. 거지가 밥을 달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냉큼 밥을 내가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먼저 당신 밥상을 번쩍 들고 나가셨습니다.
그런 집안에 태어나서인지 나도 평생 밥 먹이는 일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내게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내가 밥 먹을 때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목이 메어 숟가락질하던 손이 그냥 멈춰버립니다.
열한 살 때였습니다. 섣달 그믐날이 다가와 마을 전체가 떡을 하느라 분주한데, 형편이 어려워 밥을 굶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여 온종일 집안을 뱅뱅 돌며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쌀 한 말을 지고 뛰쳐나갔습니다. 식구들 몰래 쌀자루를 내가느라 자루에 새끼줄 하나 엮어 맬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깨에 쌀자루를 짊어진 채 힘든 줄도 모르고 가파른 산비탈 길을 이십 리나 겅중겅중 뛰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 가슴이 벌렁벌렁 풀무질을 해댔습니다.
우리 집 옆에는 연자방앗간이 있었습니다. 방앗간 안에 있는 불싸라기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끔 사방을 잘 둘러 막아 겨울에도 웃풍없이 꽤 훈훈했습니다. 어쩌다 집 안의 아궁이에서 숯불이라도 얻어다 피우면 온돌방보다 더 뜨뜻했습니다. 팔도를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는 거지들 중에는 우리 집 연자방앗간에 터를 잡고 겨울을 나는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나는 그 거지들이 들려주는 바깥세상 이야기가 재미나서 걸핏하면 연자방앗간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친구 삼은 거지의 밥까지 같이 차려서 방앗간으로밥상을 가져오셨습니다. 내 숟가락 네 숟가락도 없이 밥 한 그릇을 같이 떠먹고, 담요 한 장을 나눠 덮으며 함께 겨울을 보냈습니다. 한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그들이 멀리 떠나고 나면 그들이 돌아올 다음 겨울이 기다려지곤 했습니다. 몸이 헐벗었다고 해서 마음까지 헐벗은 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분명 따뜻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밥을 주었고 그들은 내게 사랑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이 가르쳐준 깊은 우정과 따뜻한 사랑은 오늘까지도 내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세계를 돌며 가난과 배고픔에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남들에게 밥을 먹이는 데 조금도 아낌이 없으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모든 이의 친구가 되어
나는 마음에 정한 것이 있으면 당장 실행에 옮겨야지, 그러지 못하면 잠을 못 잤습니다. 어쩔 수없이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되면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담벼락을 긁어댔습니다. 하도 긁어대 바람벽이 다 헐고 밤새 흙부스러기가 수북하게 쌓일 정도였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밤에 잠을 자다 말고 뛰쳐나가 그 애를 불러내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니, 이런 아들을 키우느라 우리 부모님도 마음고생깨나 하셨습니다.
특히 잘못된 행동을 보아넘기지 못해 마치 동네 해결사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들 싸우는 데는 모두 끼어들어 시시비비를 가려주고, 잘못한 아이에게 호통을 치곤 했습니다. 한번은 동네에서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아이의 할아버지를 찾아가 "할아버지, 댁의 손자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으니 단속 좀 해주세요" 라고 당차게 충고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행동은 거칠어보였지만, 실상 나는 정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늦게까지 할머니의 빈 젖을 만지며 잠들기를 좋아했는데 할머니도 나의 이런 어리광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시집간 누나네 집에 놀러가서 사돈 어른을 붙들고 떡 해달라 닭 잡아 달라고 졸랐는데도 미움을 받지 않은 것은 내 마음 속에 따뜻한 정이 있다는 것을 어른들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는 동물을 돌보는 일에 유별났습니다. 집 앞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이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웅덩이도 만들어주고, 곳간에서 좁쌀을 가져와 마당에 훌훌 뿌려주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접근하면 도망가던 새들도 밥 주는 사람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란 걸 알아봤는지 언젠가부터는 나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물고기를 길러볼 요량으로 고기를 잡아다 웅덩이에 넣어두었습니다. 먹이도 한 줌 넣어주었는데 이튿날 일어나보니 다 죽어있었습니다. 잘 키우고 싶었는데 힘없이 물에 떠오른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가 막힌지 온종일 운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양봉을 수백 통이나 하셨습니다. 커다란 벌통에 벌집의 기초가 되는 원판 소초를 촘촘히 박아놓으면 거기에 벌들이 밀을 물어다가 둥지를 틀고 꿀을 저장합니다. 호기심 많던 나는 벌들이 집 짓는 구경을 하려고 벌통 한가운데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벌들에 쏘여 얼굴이 맷방석만 하게 부풀어 오른 적도 있습니다.
벌통의 원판을 내 멋대로 빼돌려 크게 야단을 맞은 일도 있었습니다. 벌이 집을 다 지으면 아버지는 원판을 모아 켜켜이 쌓아두는데,그 원판에는 벌들이 만들어놓은 밀랍이 묻어 있어 기름 대신 불을 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비싼 원판을 웽가당 뎅가당 짓이겨서는 석유가 없어 불을 못 켜는 집에 촛불이라도 켜라며 나눠준 것입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인심을 쓰다가 아버지한테 정말 혼쭐이 났습니다.
열두 살 때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마땅히 놀이라 할 만한 게 없어 기껏해야 윷이나 장기 아니면 투전이 전부였습니다.
나는 여럿이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여 낮에는 윷놀이나 연날리기등을 하고 저녁에는 동네 투전판을 들락거렸습니다. 한 판에 120원을 따는 것이었는데 웬만하면 세 판이나 땄습니다. 섣달 그믐날이나 정월보름날은 투전판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런 날이면 순사가 와서 보고도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른들의 투전판이 벌어지는 곳에 가서 한숨 자고 새벽녘에 딱 세 판만 끼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딴 돈으로 조청을 독째 사다가 너도 먹고 물러가라, 너도 먹고 물러가라하면서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절대 그 돈을 나를 위해 쓰거나 나쁜 짓을 하는 데 쓰지 않았습니다. 매부들이 집에 오면 지갑에 든 돈을 마음대로 꺼내 썼습니다. 그래도 좋다고 미리 허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매부 돈을 꺼내 불쌍한 애들한테 말눈깔 사탕도 사주고 조청도 사주었습니다.
어느 동네든 잘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사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못사는 친구들이 도시락으로 조밥을 싸오는 것을 보면 차마 내 밥을 먹지 못하고 친구의 조밥과 바꿔 먹었습니다. 나는 잘살고 드센 집 아이들보다는 어렵게 살고 밥을 못 먹는 아이와 더 친했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아이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싶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사람의 친구, 아니 친구 이상으로 깊은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촌 중에 욕심 많은 이가 한 분 있었습니다. 동네 한복판에 삼촌네 참외밭이 있었는데 여름이면 달콤한 냄새때문에 밭을 지나던 동네 아이들이 안달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삼촌은 길가의 원두막을 지키고 앉아 참외를 한 개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내가 "삼촌, 내가 언제 한번 참외를 원 없이 가져다 먹어도 되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삼촌은 "그럼, 그렇고 말고" 하고 선선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참외 먹고 싶은 애들은 포댓자루 하나씩 들고 밤 열두 시에 우리집 앞으로 모두 모여라!" 하고는 아이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러고는 삼촌네 참외밭으로 몰려가서 " 너희들 마음대로 아무 걱정 말고 한 고랑씩 다 따라" 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참외밭으로 뛰어들어가 순식간에 참외 몇 고랑을 모조리 따버렸습니다. 그날 밤 배고픈 동네 아이들은 싸리밭에 앉아 참외를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
이튿날 삼촌네는 난리가 났습니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삼촌댁을 찾아갔더니, 삼촌은 나를 보자마자 "이놈, 네가 한 짓이냐? 참외농사를 헛수고로 만든 게 바로 네놈이란 말이냐?" 하며 펄펄 뛰셨습니다. 나는 삼촌이 뭐라고 야단을 쳐도 기죽지 않고, "삼촌, 원없이 먹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동네 아이들이 참외를 먹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에요. 먹고 싶어하는 아이들한테 참외 한 개씩 나눠줘야겠어요, 절대로 안 줘야겠어요?"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나서 펄펄 뛰던 삼촌도 "그래, 네가 옳다" 하며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내 인생의 분명한 나침반
우리 본관은 전라도 나주 옆에 있는 남평입니다. 문정흘文禎紇 증조할아버지는 문성학文成學 고조할아버지가 낳으신 3형제 중 셋째 아드님이셨습니다. 그 증조할아버지가 또 치국致國, 신국信國, 윤국潤國의 3형제를 낳으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맏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학교도 안 다니고 서당에도 가신 적이 없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듣기만 하고도 삼국지를 모두 외울 정도로 집중력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삼국지만이 아닙니다. 누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면 그것을 외워서 줄줄 읊으셨습니다. 무엇이든 한 번만 들으면 다 기억하셨습니다. 할아버지를 닮아 아버지도 4백 쪽이 넘는 찬송가를 모두 외워서 부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베풀며 살라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언을 잘 따르셨습니다만, 재산을 지키지는 못하셨습니다. 셋째인 윤국 작은할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저당 잡혀 몽땅 날리셨기 때문입니다. 그후 집안 식구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한번도 윤국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노름하느라 재산을 없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저당을 잡혀가며 빌린 돈은 모두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7만 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는데 윤국 할아버지는 그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털어넣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영어와 한학에 능한 인텔리였습니다. 덕언면의 덕흥교회를 비롯해서 세 군데 교회의 담임목사를 지낸 윤국 할아버지는 최남선 선생 등과 더불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안했지만, 기독교 대표 16인 중에 덕흥교회 사람이 셋이나 되자 민족 대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러자 오산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윤국 할아버지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만약의 경우 거사에 실패하면 후사를 맡아 달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국 할아버지는 만세를 부르러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 수만 장을 인쇄하여 나눠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3월 8일에 정주군 오산학교 교장과 교원, 학생 2천여 명, 각 교회 신도 3천여 명, 주민 4천여 명과 회합하여 아이포 면사무소 뒷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2년형을 선고받고 의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특사로 출감했지만, 일본경찰들의 박해가 심하여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피신을 다녔습니다. 일본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할아버지의 몸에는 죽창으로 찔려 움푹 팬 큰 흉터가 있었습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죽창으로 두 다리와 옆구리를 찔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윤국 할아버지는 끝끝내 굽히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모진 고문에도 도통 말을 안 들으니 독립운동만 안 하면 군수 자리라도 주겠다는 회유도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 내가 너희 도둑놈들 밑에서 벼슬할 줄 알았느냐?"하며 서슬 퍼렇게 호통을 치셨다고 합니다.
내가 일고여덟 살쯤의 일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잠시 우리 집에 머물러 계신 것을 알고 독립군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독립자금이 부족해 도움을 요청하려고 눈이 쏟아지는 밤길을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잠든 우리 형제들이 깰세라 우리 얼굴을 이불로 덮으셨습니다. 이미 잠이 달아나 버린 나는 이불 속에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누워 어른들이 나누는 소리에 귀를 귀울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밤중에 닭을 잡고 국수를 삶아 독립군들을 대접했습니다.
아버지가 덮어씌운 이불 밑에서 숨을 죽인 채 듣던 윤국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귓전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죽어도 나라를 위해 죽으면 복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암흑이지만,반드시 광명한 아침이 온다" 라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늘 몸이 불편하셨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하셨지요.
'저렇게 훌륭한 할아버지가 왜 감옥에 가야 하나? 일본보다 우리가 더 힘이 세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하며 안타까워 하던 심정도 잊히지 않습니다.
일본 경찰의 괴롭힘을 피해 객지를 떠돌다 연락이 끊어졌던 윤국 할아버지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1966년 서울에서였습니다.
사촌동생의 꿈에 나타나셔서는 "내가 강원도 정선 땅에 묻혀 있노라" 라고 하셨답니다. 꿈속에서 받은 주소를 찾아가보니 할아버지는 이미 9년 전에 작고하시고, 그 자리엔 잡초가 무성한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윤국 할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경기도 파주로 이장해 모셨습니다.
광복 이후 공산당이 목사들과 독립 운동가들을 가리지 않고 마구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윤국 할아버지는 행여 식구들에게 폐가 될세라 공산당을 피해 38선을 넘어 정선으로 향하셨는데, 우리 식구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첩첩산골인 정선에서 붓을 팔아 연명하시다가 나중에는 서당을 세우고 한문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윤국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던 제자들 말에 의하면 평소에 즉흥적으로 한시를 즐겨 쓰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쓰신 시를 제자들이 모아놓은 것이 130여 수나 되었습니다.
남북평화 南北平和
십 년 전에 북쪽 고향을 떠나 월남했노라 在前十載越南州
유수 같은 세월이 나의 흰 머리를 재촉하네 流水光陰催白頭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려 해도 어찌 갈 수 있으랴 故園欲去安能去
타향에 잠시 머물고자 한 것이 오래 머물게 되었노라 別界薄遊爲久游
고향 갈포 홑옷을 길게 입으니 여름 된 줄 알겠고 袗長着知當夏
비단 부채 흔들면서 이내 가을 닥칠 일을 걱정하네 紈扇動搖畏及秋
남북 사이에 평화가 올 날이 이제 멀지 않았으니 南北平和今不遠
처마 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아 너무 근심말아라 候兒女莫深愁
식구들을 잃어버리고 산 설고 물 선 정선 땅에 살면서도 윤국 할아버지의 마음은 나라 걱정에 매여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또 '애당초 뜻을 세움에 스스로 높은 것을 기약하고, 사욕일랑 터럭 끝만치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한문)'는 시구도 남기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신 행적은 뒤늦게 정부당국의 인정을 받아 1977년과 1990년에 대통령표창과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숱한 시련 속에서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일념으로 삼았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는 시구를 지금도 종종 읊조립니다.
요즘 나이가 들어갈수록 윤국 할아버지의 생각이 점점 더 납니다. 나라 걱정하시던 그분의 마음이 절절이 내 마음을 파고듭니다. 나는 윤국 할아버지가 직접 가사를 붙여 지으신 '대한지리가'를 우리 식구들한테 모두 가르쳐 주었습니다.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한 곡조로 부르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해지는 맛에 요즘도 우리 식구들하고 즐겨 부르곤 합니다.
=== 대한지리가 ===
동반구에 돌출한 대한반도는 동양삼국 요지에 자리를 잡고
북으로는 광활한 만주평야요 동으로는 깊고 푸른 동해로다
남으로는 다도해 대한 바다요 서로는 깊고 누런 황해로다
삼면 바다 수중에 쌓인 해산물 어류 조개 수만종 우리 보배일세
북극단에 종립한 주종 백두산 압록 두만 이대강의 수원이 되고
동서 분류 양해의 주입을 하여 지나 소련 경계가 완연하도다
반도중앙 강원도에 빛난 금강산 세계 공헌 그 이름은 대한의 자랑
남방창해 우뚝 솟은 제주 한라산 왕래하는 고깃배의 목표 아닌가
대동 한강 금강 전주 사대 평야는 삼천만민 동포의 의식보고요
운산 순안 개천 재령 사대 광산은 우리 대한 광채 있는 지중보물일세
경성 평양 대구 개성 사대 도시는 우리 대한 광채 있는 지중 도시일세
부산 원산 목포 인천 사대 항구는 내외국 무역선의 집중지일세
대경성을 심중으로 뻗친 철도선 경의 경부 이대 간선 연락이 되고
경원 호남 양지선 남북에 뻗쳐 삼천리강산 주유 넉넉하도다
역조의 변천을 말하는 고적 단군기자 이천년의 건도지 평양
고려시조 태조 왕건 송도 개성과 이조조선 오백년의 시왕지 경성
이천년의 문명을 빛내인 신라 박혁거세 시조천 명읍지 경주
산수풍경 절승한 충청 부여는 백제 초왕 온조의 창조 고적지
미래를 개척하는 대한 남아야 문명의 파도는 삼 해를 친다
한촌산읍 평민의 머리를 씻어 미래의 세계로 맹진을 하세
한다면 하는 하루울이 고집쟁이
아버지는 돈을 빌려주고 떼일 줄은 알아도 받아올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빚을 얻어 쓰고서 갚기로 한 약속은 소를 팔고 집안 기둥을 뽑아 팔아서라도 반드시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작은 꾀로 진리를 움직이지 못한다. 참이란 작은 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꾀로 이룬 것은 몇 년 못 가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채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볏섬을 지고 층계를 성큼성큼 올라가실 만큼 힘이 장사였습니다. 내가 아흔 살이 되도록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체력 덕분입니다.
찬송가 중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즐겨 부르시던 어머니도 대단한 여장부셨습니다. 이마랑 머리가 두리두리하셨던 모습만이 아니라 곧고 괄괄한 성격도 그대로 닮아 나 또한 고집이 대단하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셈입니다.
어릴 적 내 별명은 '하루울이'입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온종일 울어야 끝이 나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무슨 일이나 난 것처럼 크게 울어 잠자던 사람들이 다 깨어 나와봐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운 것도 아닙니다. 방 안을 훌떡훌떡 뛰면서 난리를 쳐대 온 몸에 상처가 나고 살이 터져 방 안을 피투성이로 만들 정도로 울어댔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성질이 지독한 데가 있었습니다.
한번 맘을 정하면 절대 양보를 안 했습니다. 뼈가 부러져도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철이 들기 전의 일입니다. 내가 뻔히 잘못했는데도 어머니가 뭐라 하시면 "아니야! 절대 아니야! 하고 맞섰습니다. 잘못했다고 한마디하면 될 걸 죽어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 성격도 대단하셨습니다. "어디 부모가 대답하라는데 안 하는 거냐?"며 들이패셨지요. 한번은 얼마나 맞았는지 기절을 해서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내 앞에서 엉엉 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나는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집이 센 만큼 승부욕도 강해 어떤 일이든 지고는 못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오산집 쪼끔눈이. 그놈, 한번 한다면 하는 놈이다"라고 동네 어른들이 다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몇 살 때이던가, 내 코피를 터뜨리고 도망간 아이의 집 앞에 한 달을 죽치고 기다린 끝에 그 부모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떡까지 한 시루 얻어오는 것을 보고어른들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렇다고 생떼로만 이기려 든 건 아닙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힘도 장사여서 동네에서 팔씨름으로 나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나보다 세 살 더 많은 녀석한테 씨름에서 진 적이 있었는데 도통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산에 올라가 아카시아 나무 껍질을 벗기며 힘을 길러서는 여섯 달 만에 그 녀석을 이겨버렸습니다.
우리 집안에는 아이를 많이 낳는 내력이 있습니다. 내게는 위로 형님이 한 분과 누나 셋, 여동생이 셋이나 있었습니다. 어릴 적엔 형제가 많아 참 좋았습니다. 형제들에 사촌들, 육촌들 모두 불러모으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온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기분입니다.
1991년 말 북한에 잠시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떠나온 지 48년만에 고향에 가보니 그 많던 형제와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누님과 여동생 한 사람만 살아있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처럼 나를 위해주던 누님은 칠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있었고, 그토록 귀엽던 여동생도 이미 육십이 넘어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습니다. 어릴 적에 그 여동생을 참 많이 놀려댔습니다. "효선아, 네 신랑감은 한쪽 눈이 째보다!"하고 달아나면 "뭐라구!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며 쫓아와선 조그만 주먹으로 내 등을 콩콩 때리곤 했습니다. 열여덟 되던 해 효선이는 이모뻘 되는 아주머니의 중매로 선을 보았습니다.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곱게 빗고 분단장을 예쁘게 한 효선이는 집 안팎을 청소하며 신랑감 될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효선아, 너 그렇게 시집이 가고 싶냐?" 하고 놀리자 분 바른 얼굴이 발갛게 물들던 모습이 참 고왔습니다. 북한을 다녀온 지 1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은 나를 보고 그렇게나 섪게 우시던 누님도 돌아가시고 여동생 혼자 남아있다고 하니 어찌나 애달픈지 내 마음이 다 녹아버리는 듯 합니다.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양말이나 옷 같은 걸 내 손으로 직접 짜 입었습니다. 추워지면 모자도 쓱쓱쓱 떠서 썼고요. 여자들보다도 솜씨가 좋아 우리 누나들한테도 뜨개질을 가르쳐주고 효선이 목도리도 내가 짜주었습니다. 곰발바닥처럼 크고 두터운 손으로 바느질하기도 좋아해서 속옷도 내가 만들어 입었습니다. 통광목을 갖다놓고 반을 척 접어 본을 뜨고 마름질을 한 다음 바느질하면 나한테 딱 맞게 만들어졌습니다. 어머니 버선도 그렇게 만들어 드렸더니 어머니가 "야,야, 우리 둘째가 장난삼아 하는 줄 알았더니 엄마 발에 딱 맞는구나" 하고 좋아하셨습니다.
효선이 말고도 그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더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열세 명의 형제를 낳으셨지만 다섯 자식을 먼저 보내셨습니다.그러니 어머니의 속이 시커멓게 타버리셨을 겁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자식이 그렇게 많으니 어머니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자식을 시집장가 보내려면 무명을 짜야 했습니다. 목화에서 빼낸 솜을 물레에 넣어 실을 뽑는 것이지요. 그걸 평안도 말로 '토깽이'라고 합니다. 스무 올을 한 세로 잡고 열두 무명사, 열세 무명사…. 자식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할 때마다 광목같이 보드랍고 예쁜 무명이 어머니의 투박스런 손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어찌나 손이 빠른지 남들이 하루에 서너 장 짜는 토깽이를 어머니는 열 장, 스무 장씩도 짜 내셨습니다. 누나를 시집보내느라 정 바쁠 때에는 하루에 한 필도 너끈히 짜곤 하셨습니다. 맘만 먹으면 어떤 일이든 후다닥 해버리는 어머니의 급한 성격을 꼭 닮아 나도 무슨 일이든 후다닥 잘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는 아무 음식이나 잘 먹었습니다. 옥수수도 잘 먹고 생오이도 잘 먹고 생감자, 날콩도 잘 먹었습니다. 이십 리 밖에 있는 외갓집 밭에 덩굴이 뻗어나가는 것이 있어서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지과'라고 했습니다. 그 동네에서는 고구마를 지과라고 불렀습니다. 캐서 쪄주기에 먹어보니 얼마나 감칠 맛이 나던지 고구마를 소쿠리째 가져다놓고 혼자서 다 먹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고구마 철만 되면 사흘이 멀다 하고 외갓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엄마,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하고는 이십 리 길을 단숨에 달려가 고구마를 먹고 오곤 했습니다.
고향에는 5월에 감자고개가 있었습니다. 겨우내 감자만 먹다가 봄이 되어 보리 추수를 하는 때가 바로 감자고개입니다. 요즘같이 먹기 좋은 납작보리가 아니고 통보리쌀이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통보리를 이틀 정도 물에 불렸다가 밥을 하면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떠도 밥알이 모래알처럼 흩어졌습니다. 그걸 벌건 고추장에 비벼 한입 집어넣으면 보리가 이 사이로 자꾸 삐져나왔습니다. 그래서 입을 꼭 다물고 우물우물 먹던 기억이 납니다.
청개구리도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홍역을 앓거나 병에 걸려 얼굴이 홀쭉해지면 청개구리를 먹였습니다. 넓적다리에 살이 피둥피둥 오른 커다란 청개구리를 서너 마리 잡아다 호박잎에 싸서 구우면 시루에 찐 것처럼 말랑말랑하면서 참 맛이 있습니다. 맛으로 치면 참새고기, 꿩고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뜸북뜸북하며 벌판을 날아다니던 뜸북새는 물론이고 알록달록 어여쁜 산새알도 많이 구워 먹었습니다. 이렇게 자연에는 하나님이 주신 먹을거리가 지천이라는 걸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알아갔습니다.
소를 사랑하면 소가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알고 넘어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탓에 뭐라도 대충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저 산은 이름이 무엇일까, 저 산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기면 반드시 가봐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동네방네 이십 리 안팎에 있는 산꼭대기란 산꼭대기는 모두 올라가 봤습니다. 그 너머까지도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래야 아침 햇빛 비치는 저곳에 무엇이 있다는 것이 머릿속에 그려져 맘 편히 바라보지, 모르는 곳은 바라보기도 싫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을 모두 알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산에 다니면서 안 만져본 꽃이며 나무가 없습니다. 눈으로만 보는 건 성에 차지 않아 꽃이건 나무건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입에 넣어 씹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향기와 촉감,맛이 너무 좋아서 온종일 수풀에 코를 박고 있으라고 해도 싫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연이 좋으니 밖에만 나가면 집에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산과 들을 쏘다녔습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둑어둑해져도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누나들이 산나물을 캐러 갈 때면 내가 앞장서서 산에 올라 산나물을 뜯었습니다. 덕분에 맛좋고 영양가 있는 나물도 종류별로 줄줄 꿰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씀바귀를 좋아했는데 양념장에 무쳐서 고추장 비빔밥에 넣어 먹으면 맛이 일품입니다. 씀바귀를 먹을 때는 입에 넣고 숨을 딱 멈춰야 합니다. 그렇게 한 박자 뜸을 들이는 사이에 씀바귀의 쓴 맛이 날아가고 달콤한 맛이 우러나는데 그 박자를 잘 맞춰야만 아주 맛있게 씀바귀를 먹을 수 있습니다.
나무타기도 좋아해서 우리 집에 있던 2백 년 된 커다란 밤나무를 주로 오르내렸습니다. 멀리 동구 밖까지 시원하게 탁 트인 전망이 얼마나 좋았는지 꼭대기에 올라가면 내려올 줄을 몰랐습니다. 때로 는 한밤중까지 올라가 있으면 바로 손위의 누나가 잠도 자지 않고 쫓아나와 위험하다며 난리를 쳤습니다.
"용명아, 제발 내려와라. 밤 늦었는데 이제 들어와서 자야지."
"졸리면 여기서 자면 되지."
누나가 뭐라 해도 나는 밤나무 가지에 앉아 꿈쩍도 안 했습니다. 그러면 나를 지키다 화가 난 누나가 "야, 원숭이! 빨리 내려와!" 하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마 내가 원숭이 띠여서 그렇게 나무타기를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밤나무에 밤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리면 부러진 나뭇가지로 밤송이를 툭툭 건드리며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면 밤송이가 후드득 땅 위로 떨어져 내리는데, 이 놀이도 정말 신이 났습니다. 시골에서 자라지 않은 요즘 아이들은 이런 재미를 모르니 참 안되었습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도 나의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어쩌다 예쁘장한 새가 날아오면 수놈은 어떻게 생겼고 암놈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요리조리 살펴보고 연구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나무나 풀, 새의 종류를 알려주는 책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자세히 살펴보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철새가 가는 곳을 따라 산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니느라 밥을 굶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한번은 까치가 어떻게 알을 낳는지가 하도 궁금하여 아침저녁으로 까치집이 있는 나무를 오르내렸습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나무에 오르내리니 정말로 알을 낳는 것도 보게 되고 까치와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깍깍깍깍!" 까치도 처음에는 나만 보면 죽겠다고 깍깍거리며 야단을 치더니 나중엔 가만히 있었습니다.
주변의 풀벌레도 내 친구였습니다. 해마다 늦여름이면 내 방 앞의 감나무 꼭대기에서 쓰르라미가 울었습니다. 여름 내내 맴맴거리며 귀 따갑게 울어대던 매미소리가 뚝 끊기고 쓰르라미가 울기 시작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제 곧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시원한 가을이 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울음이기 때문입니다.
"쓰르 쓰르르르..."그렇게 쓰르라미가 울 때마다 나는 감나무를 올려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아암,기왕에 울 거면 그렇게 높은 데서 울어야 동네 사람들이 다 듣고 좋아하지. 구덩이에 들어가 울면 누가 알게 뭐람.' 그런데 알고 보니 매미도 쓰르라미도 모두 사랑을 하기 위해 우는 것이었습니다. "맴맴맴...쓰룩쓰룩..." 이 모든 소리가 모두 짝을 부르는 신호라는 것을 알고나니 벌레소리가 들릴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오냐, 사랑이 그립단 말이지? 열심히 울어서 좋은 짝을 찾아보아라." 이렇게 세상 만물과 친구가 되어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법을 조금씩 깨우쳐갔습니다.
고향집에서 십 리만 나가면 황해였습니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도 바다가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바다로 가는 길목에 물웅덩이들이 연달아 있고 그 가운데로 개울물이 흘렀습니다. 나는 구정물 냄새가 나는 물웅덩이를 뒤져 뱀장어와 참게를 잘도 잡았습니다. 별의별 데를 다 쑤셔서 고기를 잡다보니 어디에 어떤 고기가 사는지 훤히 알았습니다.
뱀장어는 본디 엎디어 있는 걸 싫어해서 구멍으로 숨어듭니다. 머리를 구멍에 처박고 몸뚱이를 미처 다 넣지 못해 꼬리가 살짝 삐져나와 있기 일쑤입니다. 꼬리처럼 보이는 걸 쑤욱 잡아 빼면 영락없습니다. 게 구멍 같은 곳에 꼬리를 뺀 채 뱀장어가 길게 숨은 것입니다. 집에 손님이 오셔서 뱀장어찜이 먹고 싶다 하면 십오 리 길을 내처 달려가 뱀장어 댓마리씩 잡아오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여름방학이 되면 하루에 뱀장어 40마리 이상씩은 만날 잡아왔으니까요.
내가 유일하게 싫어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소를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소를 먹이라고 하시면 건너 동네 들판에 소를 매어놓고는 달아나버렸습니다. 한참을 달아나다 걱정이 되어 돌아보면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 매여있습니다. 반나절이 지나도 자기를 먹여줄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소는 '음매~' 하고 울었습니다.
멀리서 소 울음소리가 들리면 내 마음이 짠해 '저놈의 소, 저거, 저거...' 하고 애가 탔습니다. 배고프다며 나를 찾는 울음소리를 모른척 하려니 내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래도 저녁 늦게 찾아가면 화를 내며 자기 뿔로 나를 받아넘기지 않고 반가워했습니다. 그런 소를 볼 때마다 사람도 큰 뜻 앞에서는 소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직하게 때를 기다리면 좋은 일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는 내가 참 사랑하던 개가 있었습니다. 어찌나 영리한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집 밖 멀리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면 늘 오른손으로 만져줬더니 내 왼편으로 왔다가도 쓱 돌아서 오른편으로 와서 얼굴을 비벼댔습니다. 그러면 나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쓱쓱 만져주고 등을 쓸어주었습니다. 안 그러면 낑낑거리며 따라와 내 주변을 빙빙 돌았습니다. '요 녀석아, 사랑이 무엇인지 너도 아는구나. 그리 사랑이 좋으냐?'
동물들도 사랑을 다 압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까기 위해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알을 품은 암탉은 눈을 심각하게 뜨고 누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제 발을 구르면서 온종일 앉아있습니다. 암탉이 싫어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닭장을 수시로 들락거렸습니다. 내가 닭장에 들어가면 암탉은 성이 나서 목을 꼿꼿이 세우고 노려봅니다. 그럼 나도 물러서지 않고 암탉을 노려봅니다. 하지만 하도 닭장을 드나들자 나중에는 암탉도 나를 아예 못 본 척했습니다. 하지만 알을 지키느라 발톱을 길게 내밀고 신경을 곤두세웠지요.
한번쯤 휭하니 날아서 나를 쪼아버릴 법도 한데 알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애만 태웠습니다. 일부러 암탉 가까이 가서 깃털을 건드려도 꿈쩍도 안 합니다. 배의 털이 다 빠지도록 지키고 앉아 병아리를 탄생시킵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단단히 뭉쳐있으니 알을 품은 암탉의 권위는 수탉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천하의 누구라도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둔다' 하는 천하의 대왕지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암탉이 알을 품고 지키는 게 사랑이듯 돼지가 새끼를 낳는 것도 사랑입니다. 돼지가 새끼를 낳는 것도 따라다니며 지켜보았습니다. 어미 돼지가 '꿍!' 하고 힘을 주면 새끼 돼지가 '미끌' 떨어지고, 또 '꿍!' 하고 힘을 주면 또 한 마리가 '미끌' 하고 나왔습니다. 고양이도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도 못 뜬 새끼들이 '응!' 하고 세상에 나오면 얼마나 기쁜지 웃음이 절로 났습니다. 그렇지만 동물들의 죽음을 보는 일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살장이 있었습니다. 소가 도살장으로 들어서면 어느 틈에 백정이 나와서 소를 팔뚝만한 쇠망치로 쾅 내려칩니다. 그 큰 소가 벌러덩 쓰러지면 다음 순간 가죽을 벗겨내고 다리를 떼어냅니다. 생명이 참 모진 것이, 다리를 떼어낸 뒤에도 잘린 그 자리가 계속해서 벌렁대는 겁니다. 그걸 보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좀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신통력이 있는 것처럼 남들이 알지 못하는 걸 곧잘 알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내가 비가 온다고 하면 영락없이 비가 왔습니다. 집 안에 앉아서는 '오늘 저 윗동네 아무개 할아버지 편치 않겠는 걸' 하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여덟 살 때부터 동네방네 선봐주는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신랑 각시 사진 두 장만 갖다주면 다 알았습니다. '이 결혼은 나빠'라고 내가 말했는데도 결혼을 하면 전부 깨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연분을 맺어주는 일을 아흔이 되도록 했으니 이젠 그 사람이 앉는 것,웃는 것만 쓱 봐도 다 알게 되었지요.
지금 누나가 무얼 하는지도 골똘히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었습니다. 정신을 모으고 집중해보면 다 보였습니다. 그래서 누나들은 나를 좋아하면서도 무서워했습니다. 내가 자기들 비밀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대단한 신통력 같지만 사실 이건 별로 놀랄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개미도 장마가 질 걸 알고 미리 피하지 않습니까? 사람도 자기 갈 길을 미리 알아야 합니다.그걸 아는 게 그리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까치둥지를 자세히 보면 바람이 어디서 불어올지 알 수 있습니다.바람이 어디서 불어오겠다 싶으면 까치는 그 반대편에 입구를 척 만들어놓습니다. 나뭇가지를 물어다 얼기설기 역은 다음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진흙을 물어다 둥지 아래위로 바릅니다. 그러고는 나뭇가지의 끄트머리를 모조리 한 방향으로 몰아놓습니다. 마치 처마처럼 빗물이 한 군데로만 흐르게 하는 겁니다. 까치도 그렇게 자기를 살리는 지혜가 있는데 사람한테 왜 그런 재주가 없겠습니까?
아버지랑 소시장에 가서 "아버지, 저 소는 나쁘니 사지 마세요. 좋은 소는 목덜미가 잘 생기고 앞발이 튼튼하고 뒤와 허리가 튼실해야 하는데, 저 소는 영 아니에요"라고 하면 반드시 그 소는 안 팔렸습니다. 아버지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시기에 "나는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배워 나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냥 한 소리였습니다.
소를 사랑하면 소가 보이는 법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센 건 사랑이고, 제일 무서운 건 정신통일입니다.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면 마음 깊은 곳에 마음이 가라앉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까지 내 마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마음이 거기에 들어가서 자고 깰 때에는 정신이 아주 예민해집니다. 바로 그때 잡다한 생각들을 물리치고 정신을 집중하면 모든 것이 통합니다. 의심이 나면 지금이라도 당장 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을 가장 사랑하는 데에 속하려 합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은 가짜이므로 언젠가는 토해내고 맙니다.
풀벌레와 나누는 우주 이야기
숲속에 있으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바람이 갈대를 흔드는 소리, 웅덩이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같은 자연의 소리만 들리고 아무런 잡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마음을 텅 비우고 자연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 자연 따로 나 따로가 아닙니다. 자연이 내 안에 들어와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과 나 사이에 경계가 없어지는 순간, 오묘한 기쁨이 느껴집니다. 자연이 내가 되고 내가 자연이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런 경험들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상태가 됩니다. 누군가는 무아의 상태라고도 하지만 나를 완전히 비운 곳에 자연이 들어와 앉으니 사실은 무아를 넘어선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자연이 건네는 소리를 듣습니다. 소나무가 하는 소리, 풀벌레가 하는 소리….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됩니다. 나는 그 마을에 어떤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지 만나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을 들판에 나가서 하룻밤을 지내며 논밭에서 자라는 곡식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곡식들이 탄식하는지 즐거워하는지 보면 그 마을 사람들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 심지어 북한에서 여러 차례 감옥을 드나들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외롭거나 힘들지 않았던 이유도 모두 그 안에서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함께 사는 벌레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벌레들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그만 모래알 한 알에도 세상의 이치가 들어 있고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 하나에도 무궁무진한 우주의 조화가 들어있습니다. 우리 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복합적인 힘이 결합해 탄생한 것입니다. 또 그 힘들은 서로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대우주의 모든 존재물은 무엇 하나 하나님의 심정 밖에서 잉태된 것이 없습니다. 나뭇잎 하나가 흔들리는 것에도 우주의 숨결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자연의 소리와 교감하는 귀중한 능력을 선물 받았습니다. 자연은 모두가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어 위대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누구 하나 튀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절정의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자연은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를 위로해 주고 절망해 넘어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대도시에 사는 요즘 아이들은 자연과 친해질 기회조차 없지만, 감성을 일깨우는 일은 지식을 기르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자연을 느낄 가슴이 없고 감성이 메마른 아이들에게 대학교육을 시킨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기껏해야 여기저기 널린 지식을 쌓아 개인주의자가 될 뿐이며, 물질을 숭배하는 물신로자들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봄비는 소곤소곤 내리고 가을비는 후드득후드득 내리는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과의 교감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올바른 인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길가에 핀 민들레 한 포기가 천하의 황금보다 귀합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또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연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그분을 나타내는 상징적 존재이고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실체적 존재입니다. 만물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어서 일본으로 돌아가시오
그렇다고 내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형님을 도와 농사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농촌엔 계절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논갈이도 하고 밭갈이도 하고 모도 내고 김도 매야 합니다. 김매기 중에 가장 힘든 일은 조밭매기입니다. 씨를 뿌린 후에 세 번은 고랑을 매줘야 하는데 어찌나 힘이 드는지 한번 맬 때마다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고구마는 진흙에 심어 키우면 맛이 없고 진흙을 3분의 1 정도 섞은 모래밭에 심어야 달디단 고구마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옥수수를 키우는 데는 인분 퇴비가 가장 좋기 때문에 손으로 똥을 주물러 가루를 만드는 일도 했습니다. 농사일을 돕다보니 어떻게 해야 콩이 잘 되는지 옥수수가 잘 되는지, 어느 흙에 콩을 심어야 하고 팥을 심어야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농사꾼 중의 농사꾼입니다.
평안도는 기독교 문물이 먼저 들어온 곳이라 1930년대, 1940년대에 이미 농지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모를 심을 때는 한 장대에 열두 칸씩 사이를 둬 표시를 하고 두 사람이 여섯줄씩 옮기면서 심었습니다. 나중에 남한에 와보니까 줄을 쳐놓고 한 줄에 수십명씩 들어가 첨벙첨벙 왔다갔다하며 모를 심는데, 참 답답해 보였습니다. 발을 두뼘 너비로 벌리고 서서 재빨리 모를 심는 것이 내가 농사철에 모만 심어주고도 학비 정도는 너끈히 벌어쓸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열 살이 되자 아버지가 나를 동네 글방에 보내셨습니다. 글방에서는 하루에 책 한 장만 떼면 됐습니다. 집중하여 30분 만에 외우고는 훈장님 앞에 서서 조잘조잘 읊으면 그날 공부는 끝입니다. 점심나절 늙은 훈장님이 낮잠에 빠지면 글방을 나와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습니다. 산에 가는 날이 늘어날수록 뜯어먹을 게 어디 있는지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그럴수록 점점 더 먹을 게 많아져 그걸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니 점심이 뭐 필요하고 저녁이 뭐 필요합니까? 그때부터 나는 집에서 점심을 따로 안 먹고 살았습니다.
글방에 다니면서 논어, 맹자를 읽으며 한자를 배웠는데 내가 글씨를 곧잘 썼습니다. 덕분에 열두 살 때부터 글방에서 훈장님을 대신해 아이들이 보고 배울 체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난 사실 글방보다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습니다. 남들은 비행기를 만들고 있는데 공자왈 맹자왈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4월인데 아버지는 벌써 일 년치 수업료를 다 내신 뒤였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글방을 그만두려고 마음먹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할아버지를 설득하고 삼촌까지도 설득했습니다. 당시 소학교로 옮겨가려면 편입시험을 봐야 했는데, 그러려면 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나는 사촌동생까지 충동질해서 원봉학원에 들어가 소학교에 편입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열네 살이 되던 이듬해, 편입시험을 치고 오산학교 3학년에 들어갔습니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공부를 잘해서 5학년으로 월반도 했습니다. 오산학교는 집에서 이십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확한 시간에 맞춰 걸어다녔습니다. 고개를 넘어갈 때마다 다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차차차차 걸음법으로 빠르게 걸어가면 동무들은 내 뒤를 따라 오기도 바빴습니다. 평안도 호랑이가 나오는 무서운 산길을 그렇게 걸어다녔습니다.
오산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이승훈 선생이 세운 민족학교라 일본말을 가르치지도 않을 뿐더러 일본말을 아예 못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적을 알아야만 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시 편입시험을 쳐서 정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으로 들어갔습니다. 공립학교는 전부 일본말로 수업을 했기 때문에 등교 전날 밤 가타가나 히라가나만 겨우 외운 채로 등교했습니다. 일본말을 전혀 몰라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교과서를 보름 만에 몽땅 외워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귀가 틔었습니다.
덕분에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습니다. 졸업식날, 자원해서 정주읍의 유지들이 모두 모인 앞에 나가 연설을 했습니다. 감사하다는 축사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어떻고 저 선생님은 어떻고, 학교제도에 이런 문제가 있으며, 그리고 이 시대의 책임자는 이런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등 비판적인 연설을 일본말로 줄줄 해댔습니다. "일본인들은 하루 빨리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돌아가라. 이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조상의 유업이다!" 그런 말을 경찰서장, 군수, 면장 다 모인 앞에서 해댔습니다. 윤국 할아버지의 혼을 이어받아 감히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해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단상을 내려올 때 보니 다들 얼굴이 허옇게 질려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일본경찰은 그날부터 나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해서 별걸 다 감시하고 귀찮게 굴더니 나중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할 때 경찰서장이 도장을 찍어주지 않아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일본에 보낼 수 없는 요주의 청년이라며 거절했던 것입니다. 결국 경찰서장과 크게 싸우고 담판을 지은 다음에야 간신히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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